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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어린시절 후기

뉴징검다리 2010. 2. 10. 08:55

제 124 편

예수의 어린 시절 후기

갈릴리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예수가 학교에 다니는 더 좋은 기회를 누렸을지 모르지만, 거기서는 최소의 교육 안내를 받고 자신의 생활 문제를 풀어 나가고, 동시에 문명 세계의 모든 구석으로부터 그렇게 온갖 등급의 많은 남녀와 항상 접촉하는 큰 이점(利點)을 누리는 그러한 빛나는 환경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 남았더라면, 그의 교육은 유대인들이, 순전히 유대인 방식으로 지도했을 것이다. 나사렛에서 그는 이방인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를 좀더 적절하게 준비시키는 교육을 확보하고 훈련을 받았으며, 이것은 그에게 히브리 신학의 동부(東部), 즉 바빌로니아 관점과, 서부(西部), 즉 헬라 관점의 비교적 장점에 대하여 더 낫고 균형된 생각을 주었다.

1. 예수가 아홉 살 되던 해 (서기 3년)

예수가 언제라도 몹시 아팠다고 도저히 말할 수 없어도, 남동생들과 아기 여동생과 함께, 이 해에 그는 어린 시절의 하찮은 병을 얼마큼 앓았다.

학교는 계속되었고 그는 아직도 총애를 받는 학생이었으며, 달마다 한 주 동안 자유로웠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이웃 여러 도시에 여행하는 데, 그리고 나사렛 남쪽에 삼촌의 농장에서 머무르고 막달라로부터 고기잡이하는 나들이에, 시간을 계속 똑같이 나누어 썼다.

학교에서 여태까지 닥친 가운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늦겨울에 일어났는데, 이 때 모든 형상·그림·펜화가 우상 숭배의 성질이 있다는 가르침에 대하여 예수는 하잔에게 감히 대들었다. 예수는 도공(陶工)의 진흙으로 아주 다채로운 대상을 빚는 것 뿐 아니라 풍경화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런 종류는 모두 유대인의 율법에 엄격히 금지되었지만, 이 때까지 이 활동을 계속하도록 부모가 놓아 둘 정도로, 예수는 부모의 반대를 적당히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소동이 다시 일고 있었는데, 이 때 뒤에 처진 생도들 가운데 하나가, 교실 마루 바닥에 예수가 목탄(木炭)으로 선생의 그림을 그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낮과 같이 명백하게, 그 그림이 있었다. 여러 장로가 보았고, 그리고 나서 그 위원회가 요셉을 호출하고 율법을 무시하는 맏아들의 성향을 억제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요셉마리아의 다능하고 적극적인 아이가 하는 일에 대하여 불평(不平)이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것은 지금까지 그에 대하여 취해진 모든 고발 가운데 가장 심각했다. 예수는 바로 뒷문 바깥에 큰 바위에 앉아서, 그의 예술적 노력에 대한 고발에 얼마 동안 귀를 기울였다. 잘못이라 주장되는 행동 때문에 그들이 아버지를 탓하는 것을 그는 분개했다. 그래서 그는 씩씩하게 들어가서, 고발하는 자들과 겁 없이 맞섰다. 장로들은 혼란에 빠졌

다. 더러는 그 에피소드를 익살스럽게 보려는 경향이 있었지만, 한편 하나나 둘은 그 소년이 신성을 모독하지는 않더라도 거룩한 것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요셉은 어찌할 바를 몰랐고 마리아는 분개했지만, 예수는 말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을 했고, 용감히 그의 관점을 변호했다. 지극한 자제력을 가지고, 논쟁이 되는 모든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그는 이 문제에서 아버지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장로(長老) 위원회는 말없이 떠났다.

마리아예수가 이 의심스러운 활동 가운데 어느 것도 학교에서 행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는 조건으로, 예수가 집에서 진흙 빚기를 허락하도록 요셉에게 영향을 미치려 애썼지만, 요셉은 둘째 계명에 관한 랍비의 해석이 지배해야 한다고 판정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그 날부터 아버지 집에서 사는 동안, 어떤 것의 모습도 더 이상 그리거나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가 한 일이 잘못이라고 확신하지 않았고, 아주 좋아하는 그러한 오락을 포기하는 것은 어린 시절에 큰 시련의 하나였다.

6월 후반에, 예수는 아버지를 동반하여, 처음으로 타볼 산 꼭대기에 올랐다. 이 날은 맑았고, 경치는 훌륭했다. 아홉 살 먹은 이 소년에게는 그가 인도·아프리카·로마를 빼고, 온 세계를 정말로 바라본 듯했다.

예수의 둘째 여동생 마르다가 9월 13일 목요일 밤에 태어났다. 마르다가 태어나고 3주가 지나서, 집에 한동안 있던 요셉은 집에 덧붙인 건물을 짓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통틀어서 작업장이자 침실이었다. 예수를 위해서 작은 작업 벤치가 만들어졌고,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연장을 소유했다. 여러 해 동안, 남는 시간에, 그는 이 벤치에서 일했고, 멍에를 만드는 데 상당히 솜씨가 좋아졌다.

이 해와 이듬해 겨울은 나사렛에서 몇십 년 만에 가장 추웠다. 예수는 산에서 눈을 보았고, 이전에 몇 번이나 나사렛에 눈이 왔는데, 잠시 동안만 땅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번 겨울까지 얼음을 본 적이 없었다. 물이 고체·액체·증기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물 끓는 냄비에서 달아나는 수증기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해 보았는데―물리적 세계와 그 구성에 대하여 소년으로 하여금 많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자라는 이 소년 속에 담겨진 인격(人格)은 여태까지, 방대한 한 우주에 두루, 이 모든 것을 실제로 창조하고 조직한 분이었다.

나사렛의 기후는 혹독하지 않았다. 1월이 가장 추운 달이었고, 기온은 평균 화씨 약 50도였다. 7월과 8월이 가장 더운 달이었고, 그 때 기온은 화씨 75도에서 90도까지 변하곤 했다. 산맥에서부터 요단 강과 사해(死海) 계곡까지, 팔레스타인의 기후는 몹시 추운 날씨로부터 바짝 타는 기후에 이른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유대인들은 세계의 변화하는 기후 지대에 어디서나 살도록 준비가 되었다.

가장 더운 여름 몇 달 동안에도, 시원한 바닷바람이 보통 아침 10시부터 저녁 10시쯤까지 서쪽으로부터 불었다. 그러나 이따금 무서운 더운 바람이 동쪽 사막으로부터, 온 팔레스타인에 불어닥치곤 했다. 이 뜨거운 강풍은 보통 2월과 3월, 비오는 철 끝 가까이에 닥쳤다. 그 시절에는 11월부터 4월까지 비는 시원한 소나기로 왔지만, 비가 꾸준히 오지는 않았다. 팔레스타인에는 오직 두 계절, 여름과 겨울, 즉 건조한 철과 비오는 철밖에 없었다. 1월에 꽃이 피기 시작했고, 4월말이 되어서는 온 땅이 하나의 광대한 꽃밭이었다.

이 해 5월에, 예수는 삼촌의 농장에서, 처음으로 곡식 추수하는 일을 도왔다. 열세 살이 되기 전에, 그는 대장장이 일 외에는 나사렛 근방에서 남녀들이 일하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해서 그럭저럭 무엇인가 발견했고, 나이가 더 들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대장간에서 몇 달 지냈다.

일과 카라반 여행이 뜸할 때, 예수는 아버지와 함께 근처의 가나·엔도르·나인으로 구경 삼아, 또는 일 때문에 여러 번 여행했다. 소년일 때도 세포리스를 자주 찾아보았고, 이곳은 나사렛으로부터 북서쪽으로 겨우 4.8킬로미터 조금 넘어서 있었는데, 기원전 4년부터 서기 약 25년까지, 갈릴리의 서울이요 헤롯 안티파스의 거처 중의 하나였다.

예수는 계속 몸과 머리가 자라고 사회적·영적으로 성장하였다. 집을 떠나는 여행은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그가 더 낫게, 더 너그럽게 이해심을 가지는 데 도움이 되었고, 이 때가 되어서는 부모조차도 그를 가르칠 뿐 아니라 그에게서 배우기 시작했다. 예수는 소년이었을 때도, 독창성 있게 생각하는 사람이요 솜씨 있는 선생이었다. 그는 이른바 “구전(口傳) 율법”과 항상 부딪쳤지만, 언제나 집안 풍습에 적응하려고 애썼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꽤 잘 어울렸지만, 그들의 머리가 더디게 돌아가는 것에 가끔 실망했다. 그는 열 살이 되기 전에―신체적·지적·영적으로―어른 자격 갖추기를 권장하는 사회를 만든 일곱 소년의 무리에서 지도자가 되었다. 이 소년들 가운데서 예수는 여러 가지 새로운 놀이와 개량된 신체적 오락 방법을 소개하는 데 성공했다.

2. 열 살 되던 해 (서기 4년)

7월 5일, 그 달의 첫 안식일에 아버지와 함께 시골길을 걷는 동안에, 예수는 일생의 사명의 특별한 성질을 자각하게 되고 있음을 가리키는 느낌과 생각을 처음으로 표현했다. 요셉은 아들의 중대한 말을 주의 깊게 들었지만. 거의 아무 논평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 정보도 자진해서 주지 않았다. 이튿날 예수는 어머니와 함께, 비슷하지만 더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리아도 마찬가지로 소년의 선언(宣言)을 들었지만, 아무 정보도 자청해서 주지 않았다. 그의 성격과 땅에서 그의 사명의 특징에 관하여 자신의 의식 안에서 커지는 이 계시(啓示)에 대하여, 부모에게 예수가 다시 말을 꺼내기까지는 거의 두 해가 흘렀다.

8월에 그는 회당의 상급 학교에 들어갔다. 학교에서 끈질기게 묻는 물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말썽을 일으켰다. 갈수록 더 그는 온 나사렛을 얼마큼 시끄럽게 만들었다. 부모는 찬물 끼얹는 이 여러 질문을 그만두라고 하기 싫었고, 그의 주요 선생은 소년이 보인 호기심·통찰력·지식 욕구 때문에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예수의 놀이 친구들은 그의 행동에서 아무런 초자연적인 것을 보지 못했고, 대부분의 면에서 그는 그들과 아주 비슷하였다. 공부에 대한 관심은 평균이 넘었지만, 온통 특별하지는 않았다. 반에서 다른 학생들보다 그는 더 많이 질문을 던지기는 했다.

아마도 가장 특별하고 뛰어난 특성은 그의 권리를 위해서 싸우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이로 보아서 아주 잘 발육된 소년이었기 때문에, 불공평이나 개인적 모욕을 받을 때에도 자신을 방어하기 싫어한 것이 놀이 친구들에게 이상하게 보였다. 우연하게도, 이 특성 때문에 크게 괴롭힘을 받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한 살 더 먹은 이웃 소년 야곱과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요셉의 사업 동료인 석공(石工)의 아들이었다. 야곱예수를 크게 찬미하는 사람이었고, 예수가 몸으로 싸우기 싫어한다는 이유로 아무도 예수에게 함부로 굴지 않도록 처리하는 것을 자기의 일로 삼

았다. 여러 번, 더 나이 많고 촌스러운 소년들이 소문난 온순함을 믿고 예수를 공격했지만, 이들은 그의 보호자로 자처하고 늘 준비되어 있는 방어자, 석공의 아들 야곱의 손에 재빠르고 확실한 징벌을 반드시 받았다.

예수는 그 시절과 세대의 드높은 이상을 대표하는 나사렛 소년들에게 널리 인정받는 지도자였다. 정말로 그는 어린 친구들한테서 사랑을 받았는데, 이는 그가 공평했을 뿐 아니라, 드물고 형편을 이해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었고, 이것은 사랑을 가리키며 분별 있는 동정심에 가까웠다.

이 해에 그는 더 나이 든 사람들과 사귀기를 뚜렷이 좋아하는 성향을 비로소 보였다. 나이 든 사람들과 문화·교육·사회·경제·정치·종교적인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기뻐했고, 그의 깊은 논리와 날카로운 관찰이 어른 친구들을 매혹했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그와 함께 이야기 나누기를 무척 좋아하였다. 집을 부양할 책임을 지기까지, 예수는 나이 들고 지식 많은 사람들을 좋아하는 성향을 보였는데, 부모는 이들이 아니라, 그 또래나 거의 그 또래의 아이들과 사귀도록 영향을 미치려고 항상 애썼다.

이 해에 늦게, 갈릴리 바다에서 삼촌(三寸)과 함께 그는 두 달 동안 고기잡이 경험을 가졌는데,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어른이 되기 전에, 솜씨 좋은 어부가 되었다.

신체의 성장은 계속되었고, 그는 학교에서 상급에 있고 특권을 가진 생도였다. 그는 집에서 다른 아이들 가운데 가장 위인 아이보다 3년 반 더 나이 먹은 이점을 가졌기 때문에, 어린 남동생과 여동생들과 함께 썩 잘 어울렸다. 예수나사렛에서 평판이 좋았다. 다만 좀 둔한 어떤 아이들의 부모는 예수가 너무 톡 쏘며, 적절한 겸손과 어린이답게 삼가는 태도가 모자란다고 자주 말했다. 예수는 어린 친구들의 놀이 활동을 더욱 심각하고 생각 깊은 길로 이끄는 경향을 차츰 나타냈다. 그는 타고난 선생(先生)이었고, 놀이에 빠져 있다고 생각된 때조차, 단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자제할 수 없었다.

요셉은 일찍부터 예수에게 생계를 잇는 다채로운 수단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그는 공업·상업보다 농업(農業)의 이점을 설명했다. 갈릴리유대보다도 더 아름답고 번영하는 지역이었고, 거기서 사는 것은 예루살렘유대에서 사는 것의 겨우 4분의 1쯤 비용이 들었다. 갈릴리는 농사 짓는 마을과 번성하는 산업 도시들이 있는 지방이었고, 인구가 5천이 넘는 마을이 2백 개 넘고, 1만 5천이 넘는 도시를 30개 포함했다.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 산업을 살펴보려고 아버지와 처음 여행을 갔을 때, 예수는 어부가 되려고 거의 마음먹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아버지의 직업과 가까운 관계가 그에게 목수(木手)가 되도록 영향을 미쳤고, 더 나중에는 여러 영향이 섞여 새로운 체제의 종교 스승이 되는 마지막 선택으로 그를 이끌었다.

3. 열한 살 되던 해 (서기 5년)

이 한 해 동안 내내, 소년은 아버지와 함께 집을 떠나는 여행을 계속했지만, 또한 삼촌의 농장을 자주 찾아보았고, 이따금 막달라로 가서 그 도시에 본부를 둔 삼촌과 함께 고기잡이에 들어갔다.

요셉마리아예수에게 어떤 특별한 편애를 보이거나, 아니면 그가 약속의 아이, 운명의 아들이라는 것을 안다고 털어놓고 싶은 유혹을 가끔 받았다. 그러나

부모는 이 모든 문제에서 특별히 지혜롭고 현명했다. 어떤 방법으로 그에게 조금이라도 어떤 편애를 보인 몇 번 안 되는 경우에, 소년은 모든 그러한 특별한 배려를 재빨리 물리쳤다.

예수는 카라반에게 공급하는 상점(商店)에서 어지간히 시간을 보냈고, 세상의 모든 지방으로부터 온 여행자들과 함께 이야기함으로, 그의 나이로 보아서 놀랍게, 국제 사무에 관하여 정보를 쌓았다. 이 해는 그가 자유롭게 놀고 어린이다운 즐거움을 많이 누린 마지막 해였다. 이 때부터 계속, 이 소년의 생활에서 어려움과 책임이 빨리 늘어났다.

서기 5년, 6월 24일, 수요일 저녁에 유다가 태어났다. 이 일곱째 아이의 출생에 연결된 병들이 뒤따랐다. 마리아가 몇 주 동안 몹시 아파서, 요셉이 집에 남아 있었다. 예수는 아버지를 위한 심부름과, 어머니의 심각한 병 때문에 일어난 여러 가지 의무로 아주 바빴다. 이 소년은 다시 어린 시절의 아이 같은 자세로 돌아가기가 불가능함을 발견했다. 어머니가 아플 때부터―그가 열한 살이 막 되기 전에―그는 맏아들의 책임을 졌고, 이 짐이 그의 어깨에 정상으로 지워졌어야 하는 것보다 만 1년이나 2년 앞서, 이 모든 일을 해낼 수밖에 없었다.

하잔은 예수와 함께 한 주에 하루 저녁을 보내고, 히브리 성서를 통달하도록 도왔다. 그는 싹이 보이는 생도(生徒)의 진보에 크게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예수를 여러 면에서 기꺼이 도왔다. 이 유대인 훈장은 성장하는 이 지성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지만, 학식 있는 랍비들 밑에서 공부를 계속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전망에 대하여 내민 온갖 제안에, 어째서 예수가 그토록 무관심했는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5월 중순경에, 소년은 스키토폴리스까지 사업 여행에 아버지를 따라갔는데, 이곳은 데카폴리스의 주요한 그리스 도시이며, 또한 베스쉬안의 고대 히브리인 도시였다. 가는 길에 요셉사울 왕과 블레셋인들의 오랜 역사의 상당한 부분, 그 뒤에 이스라엘의 시끄러운 역사의 사건들을 일러 주었다. 예수는 이른바 이 이방인 도시의 깨끗한 모습, 가지런히 정돈된 배열에 엄청나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노천 극장을 보고 감탄하고, “이교도”의 신들을 예배하는 데 바쳐진 아름다운 대리석 성전을 찬미했다. 요셉은 그 소년이 열심을 내는 것에 상당히 마음이 흔들렸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성전(聖殿)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찬양하여 이 좋은 인상을 상쇄하려고 애썼다. 예수는 가끔 나사렛의 언덕으로부터 이 웅장한 그리스 도시를 호기심 있게 바라보았고, 대규모의 공공(公共) 사업과 화려한 건물들에 관하여 여러 번 물은 적이 있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이 물음에 대답을 피하려 했다. 이제 그들은 이 이방인 도시의 아름다움과 얼굴을 마주했고, 요셉예수가 묻는 것을 점잖게 못 들은 척할 수 없었다.

마침, 이 때 데카폴리스그리스 도시들 사이에 해마다 있는 경기와 신체의 우수함을 자랑하는 대중 전시가 스키토폴리스의 원형(圓形) 극장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예수는 아버지에게 경기를 보려고 데려가 달라고 졸랐고, 너무 졸라서 요셉은 부탁을 물리치기를 망설였다. 소년은 여러 경기(競技)를 보고 흥분했고, 신체의 발육과 운동 기술을 보여 주는 정신에 아주 흠뻑 젖었다. 예수가 이 “이방” 허영의 전시를 보는 동안, 아들의 열심을 지켜보고 요셉은 말할 수 없이 충격을 받았다.

경기가 끝난 뒤에, 예수가 이 여러 경기(競技)가 좋다고 인정하고, 나사렛의 젊은이들이 건전한 야외의 신체 활동으로부터 이렇게 이득을 얻을 수 있다면 그들에게 좋겠다고 제안하는 것을 들었을 때, 요셉은 일생에 최대의 충격을 받았다. 요셉은 그러한 관습의 나쁜 성질에 관하여 예수와 함께 열심히 오랫동안 이야기했지만, 소년이 납득하지 않았음을 잘 알았다.

아버지가 그에게 성난 것을 예수가 꼭 한 번 본 것은, 그 날 밤 여인숙(旅人宿) 에 그들의 방에서 토론하던 과정에서, 소년이 유대인 사상(思想)의 경향을 아주 까마득하게 잊고, 집으로 돌아가서 나사렛에서 원형 극장을 짓기 위해 일할 것을 제안했을 때였다. 이 맏아들이 유대인답지 않은 그런 감정을 나타내는 것을 들었을 때, 요셉은 평상시의 차분함을 잊어버리고, 예수의 어깨를 잡고, 성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아들아, 네가 살아 있는 동안, 그런 나쁜 생각을 입밖에 내는 것을 다시는 듣고 싶지 않구나.” 예수는 아버지가 역정(逆情)을 내시는 데 깜짝 놀랐다. 결코 전에는 아버지가 분개하면서 몸소 따끔하게 쏘는 것을 느끼게 된 적이 없었고, 그는 말할 수 없이 놀라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다만 대답했다, “좋아요, 아버지, 그렇게 하지요.” 아버지가 살아 계신 동안, 그리스인들의 경기와 기타 체육 활동을 소년은 조금도 다시 비치지 않았다.

나중에, 예수예루살렘에서 그리스인의 원형 극장을 보았고, 유대인의 관점에서 그런 것들이 얼마나 싫은 것인가 알았다. 그런데도, 일생을 통해서 내내, 그의 개인 계획에, 그리고 유대인의 풍습이 허락하는 한, 열두 사도를 위하여 후일의 정규 활동 계획에, 건전한 오락(娛樂) 관념을 도입하려고 애썼다.

열한 살 되던 이 해 끝에, 예수는 활기에 넘쳐 있고 잘 자랐으며, 적당히 익살이 있고 썩 명랑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이 해부터 계속, 깊이 생각에 잠기고 골똘히 생각하는 특이한 시간을 보내는 데 자꾸 빠졌다. 어떻게 가족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고, 동시에 세상에 대한 사명(使命)의 요청에 복종할 것인가에 관하여 많은 생각에 빠졌다. 그가 베푸는 봉사가 유대 민족을 개선하는 데 한정될 것이 아님을 이미 깨달았다.

4. 열두 살 되던 해 (서기 6년)

이 해는 예수의 일생에서 사건이 많은 해였다. 그는 학교에서 계속 진전이 있었고, 자연을 공부하는 데 지칠 줄 몰랐으며, 한편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 생계를 잇는가 공부를 점점 더 해 나갔다. 그는 집에 있는 목수 작업장에서 정규적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자신이 번 돈을 관리하라고 허락되었는데, 이 조치는 유대인 가정에서 아주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 해에 또한 그런 일을 가족에게 비밀로 하는 지혜를 배웠다. 그는 마을에서 어떤 방법으로 문제(問題)를 일으켰는가 의식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동료들과 다르게 여기도록 만들까 싶은 것을 모두 감추는 데 갈수록 더 신중하게 되었다.

이 해 내내 그의 사명의 성질에 관해서, 실제로 의심하지는 않더라도, 불확실한 기간을 여러 번 겪었다.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그의 인간 지성은 2중 성품의 실체를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그가 단일(單一) 성격을 가졌다는 사실이 바로 그 성격과 결합된 성품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2중 기원이 있다는 것을 그의 의식이 깨닫기 힘들게 만들었다.

이 때부터 계속, 그는 동생들과 어울리는 데 더 나아졌다. 갈수록 더 재치 있게 행동하였고, 늘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의 복지와 행복을 배려했으며, 대중 봉사를

시작할 때까지 그들과 좋은 관계를 가졌다. 좀더 분명히 말하자면, 야고보·미리암과 사이가 좋았고, 더 어린 (아직 태어나지 않은) 두 동생, 아모스과 사이가 아주 뛰어나게 좋았다. 언제나 마르다와 사이가 썩 좋았다. 그가 집에서 가졌던 어려움은 대체로, 요셉유다, 특히 유다와 가진 마찰에서 생겨났다.

전례 없는 이 신성(神性)·인성(人性)의 조합을 기르는 일을 떠맡은 것은 요셉마리아에게 벅찬 체험이었고, 그들은 부모 책임을 아주 충실하고 성공적으로 이행한 공로를 크게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예수의 부모는 이 맏아들 안에 초인간적인 무엇이 거한다는 것을 갈수록 더 깨달았지만, 이 약속의 아들이 정말로, 진실로, 사물과 존재들이 가득한 이 지역 우주를 실제로 창조한 분이라고는 결코 털끝만큼도 눈치채지 못했다. 요셉마리아는, 아들 예수가 정말로, 필사의 몸으로 육신화한 우주 창조자인 것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죽었다.

이 해에 예수는 여느 때보다 음악에 주의를 더 기울였고, 동생들을 위해서 집에서 공부를 줄곧 가르쳤다. 그의 사명의 성질에 관하여 요셉마리아의 관점이 차이가 있음을 소년이 날카롭게 의식하게 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는 부모의 다른 의견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고, 그가 깊이 잠들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가끔 부모가 의논하는 것을 들었다. 갈수록 더 그는 아버지의 관점(觀點)으로 기울었다. 그래서 그의 생애와 상관 있는 문제에서 어머니는 차츰 아들이 자기의 안내를 물리침을 깨닫고 마음이 아프게 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해가 지남에 따라서, 이 이해의 차이가 벌어졌다. 예수의 사명의 중요성에 대하여 마리아가 이해하는 것은 점점 줄어들었고, 가장 아끼는 아들이 자기가 기쁘게 기대하는 것을 채워 주지 못해서, 이 착한 어머니는 갈수록 더 마음을 상했다.

요셉예수의 사명이 영적 성질을 가졌다는 것을 차츰 더 믿게 되었다. 다른 더 중요한 이유가 아니었다면, 예수가 땅에서 자신을 수여한 데 대한 그의 개념이 실현되는 것을 그가 살아서 볼 수 없었다는 것은 유감(有感)인 듯하다.

학교에서 보낸 마지막 해 동안에, 12살이 되었을 때, 집으로 들어가고 나갈 때마다 문설주에 박혀 있는 양피지 조각을 만지고, 다음에 그 양피지 만진 손가락에 입맞춤하는 유대인의 관습에 대하여 예수는 아버지에게 이의(異議)를 제기하였다. 이 절차의 일부로서, “우리가 들어가고 나감을 지금 이후에, 아니 영원까지도 주가 보호하실지라”하고 말하는 것이 풍습이었다. 요셉마리아는 형상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리지 말라는 이유에 대해서, 그러한 작품들이 우상(偶像) 숭배의 목적으로 쓰일까 한다고 설명하며, 거듭하여 가르쳤다. 그들이 형상이나 그림을 금지한 까닭을 예수는 완전히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는 높은 일관성 개념을 가졌고, 따라서 문설주의 양피지에 버릇으로 이렇게 복종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우상 숭배의 성질이 있다고 아버지에게 지적했다. 예수가 이렇게 아버지한테 항의한 뒤에, 요셉은 그 양피지를 없애 버렸다.

시간이 지나자, 예수는 가족 기도(祈禱)와 기타 관례와 같은 그들의 종교 형식의 관습을 고치는 데 많이 이바지했다. 나사렛에서는 그러한 일을 많이 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이름난 나사렛 선생 요세가 예를 보이다시피, 그 회당이 자유로운 랍비 학파의 영향 밑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해와 다음 두 해 동안 내내, 종교 관습과 사회 예절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부모의 확립된 신앙 체계에 적응하려고 꾸준히 노력한 결과로서, 예수는 크게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자신의 확신에 충성하려는 욕구와 부모에게 의무로 복종하라는

양심의 훈계 사이에 생긴 갈등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최고의 갈등은 그의 어린 머리 속에 가장 중요했던 두 가지 큰 계명(誡命) 사이에서 생겼다. 하나는, “진리와 올바름에 대한 너의 가장 높은 확신이 명령하는 데 충실하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네 부모를 존경할지니, 저희가 너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길렀음이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개인적 확신, 가족에 대한 의무(義務)에 충성하는 이 분야들 사이에 하루하루 필요한 대로 적응하는 책임을 그는 결코 피하지 않았고, 개인의 확신과 가족에 대한 의무를 갈수록 조화되게 섞어서, 충성, 공정, 관용, 사랑에 기초를 둔, 훌륭한 집단 단결성의 개념으로 만드는 만족감을 얻었다.

5. 그가 열세 살 되던 해 (서기 7년)

이 해에 나사렛 소년은 어린 시절을 지나서 청년기(靑年期)의 시초로 넘어갔다. 목소리가 비로소 바뀌었고, 지성과 몸의 다른 모습이 다가오는 어른 신분의 증거를 보여 주었다.

서기 7년, 1월 9일, 일요일 밤에, 아기 남동생 아모스가 태어났다. 유다는 채 두 살이 안 되었고, 아기 여동생 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다음 해에 사고(事故)로 죽게 되었을 때, 예수는 어린아이들로 이루어진 큰 가족을 보호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땅에서 사람을 깨우치고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하여 사명을 행할 운명을 가졌음을 예수가 인간으로서 확신하게 된 것은 2월 중순 무렵이었다. 멀리 미치는 계획과 함께, 중대한 결정이 이 소년의 머리 속에서 모습을 갖추고 있었고, 그는 겉으로 보아서 나사렛의 보통 유대인 소년이었다. 이 모든 것이 이제 청년기(靑年期)에 접어든 목수의 아들의 생각과 행동에서 비로소 펼쳐지자, 온 네바돈의 지적 생명이 황홀하고 놀란 가운데 바라보았다.

서기 7년, 3월 20일, 그 주 첫 날, 나사렛 회당과 연결된 지역 학교에서 예수는 훈련 과정을 졸업했다. 이것은 꿈이 큰 어떤 유대인 가족의 생활에서도 중요한 날, 첫아들이 “계명의 아들,”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 되찾은 첫아들, “최고자의 아이,” 온 땅의 주의 종이라고 선포되는 날이었다.

요셉세포리스에서 새 공공(公共) 건물의 작업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그 전 주 금요일에 이 기쁜 계제에 참석하려고 거기서 왔다. 예수의 선생은 재빠르고 부지런한 생도가 어떤 뛰어난 생애, 어떤 탁월한 사명에 예정되어 있다고 굳게 믿었다. 전통을 따르지 않는 예수의 성향 때문에 온갖 어려움을 겪었는데도, 장로들은 소년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고, 이름난 히브리 학교에서 교육을 계속하도록 그를 예루살렘에 보낼 계획을 이미 세우기 시작했다.

이따금 이 계획이 거론되는 것을 듣는 동안, 예수는 결코 랍비들과 어울려 공부하려고 예루살렘에는 가지 않겠다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일어날 비극(悲劇)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이것은 그로 하여금 당장에 어머니와 자신은 물론, 다섯 남동생과 세 여동생으로 구성될 큰 가족을 부양하고 지도하는 책임을 지게 만들었고, 그래서 모든 그런 계획을 단념하도록 보장할 것이었다. 예수는 아버지 요셉에게 주어진 것보다 더 크고 긴 체험, 이 가족을 양육하는 체험을 겪었고 나중에 자신에게 부과한 기준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것은 너무 갑자기

슬픔에 휩쓸리고, 너무 뜻밖에 아버지를 잃은 이 가족―그의 가족―에게 현명하고 참을성과 이해심이 있고 유능한 선생이자 큰형이 되는 것이었다.

6.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행

이제 청년기의 문턱에 이르렀고 정식으로 회당 학교를 졸업했으니까, 예수는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서, 같이 그의 첫 유월절(逾越節)을 축하하는 데 참석할 자격이 있었다. 이 해의 유월절 축제는 서기 7년, 4월 9일, 토요일에 있었다. 상당히 큰 무리가 (103 명) 4월 4일 월요일 아침 일찍,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려고 준비했다. 그들은 남쪽으로 사마리아를 향하여 길을 떠났지만, 예즈릴에 다다르자, 사마리아를 지나는 것을 피하려고 동쪽으로 향했고, 길보아 산을 돌아서 요단 강 유역으로 갔다. 요셉과 그 가족은 야곱의 우물과 베델의 길을 거쳐 사마리아를 통해서 내려가는 것을 좋아했겠지만,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관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웃들과 함께 요단 강 유역의 길을 거쳐서 가기로 작정하였다.

무척 두려워했던 아켈라우스는 폐위되었고, 그들은 예수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기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첫째 헤롯베들레헴의 아기를 죽이려고 한 지 12년이 지났고, 아무도 이제는 그 사건을 이름 없는 이 나사렛 소년과 연관지으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었다.

예즈릴 교차점에 이르기 전에, 계속 여행하자, 오래지 않아서, 그들은 왼편에 오래 된 슈넴 마을을 지났는데, 예수는 거기서 한때 살았던, 온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소녀와 또한 엘리사가 거기서 행한 놀라운 이적(異蹟)에 관하여 다시 이야기를 들었다. 예즈릴을 지나치면서, 예수의 부모는 아합예세벨이 한 일과 예후의 공적을 이야기했다. 길보아 산 둘레를 지나면서, 그들은 이 산의 비탈에서 자살한 사울, 다윗 왕, 그리고 이 역사적인 장소의 관계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길보아 산 밑동을 돌면서, 순례자들은 바른쪽에 그리스 도시 스키토폴리스를 볼 수 있었다. 멀리서 대리석 구조를 바라보았지만, 스스로를 더럽혀서, 예루살렘에서 다가오는 유월절의 엄숙하고 신성한 예식에 참석할 수 없게 될까 두려워, 그들은 이방 도시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 마리아는 어째서 요셉이나 예수스키토폴리스에 대해서 입을 열려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리아는 그 전 해에 그들이 논쟁한 것을 몰랐고, 그들이 이 에피소드를 마리아에게 털어놓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길은 이제 열대인 요단 강 유역 밑으로 바로 이끌었고, 사해(死海)를 향하여 흘러 내려가면서, 반짝이며 물결이 찰랑거리고, 구부러지고 늘 굽이치는 요단 강이 예수의 놀라워하는 눈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 열대(熱帶)의 골짜기에서 남쪽으로 여행하면서, 그들은 겉옷을 벗어 제치고, 화려한 곡식 밭과 분홍 꽃이 잔뜩 핀 아름다운 올리앤더를 보고 즐겼다. 한편 꼭대기에 눈이 덮인 거대한 헤르몬 산이 북쪽에 멀리 서서, 웅장한 모습으로 이 역사적인 골짜기를 내려다보았다. 스키토폴리스의 맞은 편으로부터 세 시간 남짓 여행하자, 그들은 부글부글 솟아오르는 샘물에 다다랐고, 여기서 그들은 밤 동안,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서, 텐트를 쳤다.

여행하던 이틀째, 그들은 얍복 강이 동쪽으로부터 요단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곳을 지났고, 이 강 유역(流域)을 동쪽으로 보면서, 기드온 시절의 이야기를 했는데, 이 때 미디안인들은 그 땅에 퍼지려고 이 지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틀째 여행하던 끝에, 그들은 요단 강 유역을 내려다보는 가장 높은 산, 사르타바 산 밑

가까이에서 텐트를 쳤다. 이 산 꼭대기는 알렉산드리아의 요새가 차지했고, 거기서 헤롯은 아내들 가운데 하나를 감옥에 가두었고, 목 졸려 죽은 두 아들을 땅에 묻었다.

셋째 날에 그들은 헤롯이 최근에 지은 두 마을을 지났고, 그 우수한 건축과 아름다운 야자나무 동산을 눈여겨보았다. 밤이 되기까지 예리고에 이르렀고, 거기서 아침까지 머물렀다. 그 날 저녁에 요셉마리아예수는 2.4킬로미터 걸어서 고대의 예리고 터로 갔는데,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거기서 요수아가 소문난 공훈을 세웠고, 예수의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넷째 날이며 여행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는, 도로가 이어진 순례자들로 줄을 이루었다. 그들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이끄는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꼭대기에 가까워 오자, 요단 강을 건너 그 뒤의 여러 산까지, 또 남쪽으로 사해(死海)의 느릿한 물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예루살렘까지 이르는 길의 중간쯤에서, 예수올리브 산을 (그 뒤에 무척 그의 일생의 일부가 될 지역) 처음 구경했고, 요셉거룩한 도시가 이 산마루 바로 건너에 있다고 그에게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었다. 그 도시와 하늘 아버지의 집을 곧 보게 된다는 즐거운 기대에 소년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올리브 산 동쪽 비탈에서 그들은 베다니라고 부르는 작은 마을의 경계에서 쉬려고 멈추었다. 친절한 마을 사람들은 순례자(巡禮者)들을 보살피려고 쏟아져 나왔고, 마침 요셉과 그의 가족은 어느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 가까이서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는 예수와 같은 또래의 아이들 셋―마리아·마르다·나사로―가 있었다. 그들은 마실 것을 들자고 나사렛 가족을 안으로 초청(招請)하였고, 그 두 가족 사이에는 일생 동안의 우정이 생겼다. 그 뒤에 여러 번, 파란 많은 생애에서 예수는 이 집에 머물렀다.

그들은 길을 재촉하여, 곧 올리브 산 가장자리에 섰고, 예수는 (그가 기억하건대) 처음으로 거룩한 도시, 허세 부리는 여러 궁전, 영감을 주는 아버지의 성전을 보았다. 예루살렘의 처음 광경을 맛보면서 4월 이 날 오후에 거기 서 있는 동안, 이 때 그렇게 발끝까지 황홀하게 한 것처럼 그러한 순전히 인간적 흥분을 예수는 생애에서 어느 때도 겪은 적이 없었다. 후일에, 바로 이 자리에 서서, 또 하나의 선지자, 하늘의 선생들 가운데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사람을 물리치려 한 그 도시 때문에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들은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갔다. 때는 이제 목요일 오후였다. 도시에 이르자, 그들은 성전을 지나쳤고, 예수는 그렇게 많은 인간 무리를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유대인들이 문명 세계의 가장 먼 구석으로부터 와서 여기에 모였는가 깊이 생각했다.

그들은 유월절 주간에 숙박하기 위해서 미리 마련된 장소에 곧 이르렀다. 이곳은 마리아의 어느 부유한 친척이 사는 큰 집이었고, 그는 사가리아를 통해서 요한예수의 초기 내력에 관하여 얼마큼 아는 사람이었다. 이튿날, 즉 준비일에, 그들은 유월절 안식일을 적절하게 축하하기 위하여 준비했다.

유월절을 위한 준비로 온 예루살렘이 떠들썩한 동안에, 요셉은 아들을 데리고 어느 학원을 방문할 틈을 냈고, 거기에는 예수가 요구된 나이, 열 다섯이 되자마자, 2년 뒤에 교육을 다시 시작하도록 주선이 되어 있었다. 세심하게 짜놓은 이 계획에 예수가 거의 흥미를 나타내지 않는 것을 지켜보고서 요셉은 참으로 어리둥절했다.

예수는 성전과 그에 관계된 모든 예배(禮拜)와 기타 활동에 깊이 감명을 받았다. 네 살이 되고 난 뒤에 처음으로, 자신의 명상에 너무 빠져서, 많이 묻지 않았다. 그러나 (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에게, 어째서 하늘 아버지가 죄 없고 무력한 동물의 도살(屠殺)을 그토록 많이 요구하는가, 몇 가지 난처한 질문을 던졌다.

소년의 얼굴 표정으로부터, 그의 대답과 설명하려는 노력이 깊이 생각하고 날카롭게 따지는 아들에게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것을 아버지는 잘 알았다.

유월절 안식일 전 날에, 영적 빛의 큰 물결이 예수의 필사 지성을 휩쓸었고, 고대의 유월절 기념 행사를 축하하려고 모인, 영적으로 눈멀고 도덕적으로 무지한 군중에 대하여 사랑으로 불쌍히 여기는 느낌이 그의 인간 가슴을 넘치도록 채웠다. 이 날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를 입고 보낸 가장 특별한 날 중의 하나였다. 그 날 밤에, 땅에서 살던 생애에 처음으로, 이마누엘에게 임명받고서, 구원자별로부터 배치된 사자(使者)가 그에게 나타났다. 그 사자는 말했다. “때가 왔나이다. 당신의 아버지의 일을 비로소 할 때가 되었나이다.”

그래서 나사렛 가족의 무거운 책임이 어린 그의 어깨에 떨어지기도 전에, 아직 열세 살이 채 안 된 이 소년에게, 한 우주(宇宙)의 책임을 비로소 다시 질 때가 왔다고 상기시키려고 이제 하늘의 사자가 도착한 것이다. 이것은 유란시아에서 아들의 자신 수여를 마침내 완수하고, “인간이자 신(神)인 그의 어깨 위에 한 우주의 정부”를 되돌려 놓은, 길게 뒤이은 사건들 가운데 첫 행위였다.

시간이 지나자, 육신화의 신비는 우리 모두에게, 갈수록 깊이를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이 나사렛 소년이 온 네바돈의 창조자인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오늘날 어떻게 바로 이 아들 창조자의 영과,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영이 인류의 혼들과 결합되는가 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가 육체를 입고 인생을 살지만, 정신적으로 그의 어깨 위에 한 우주의 책임이 놓여 있음을 그의 인간 지성이 점점 더 깨닫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나사렛 소년의 경력이 끝나고, 청년기에 들어간 그 젊은이―점점 더 자의식하는 신다운 인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확대되는 생애의 목적을 부모가 바라는 것, 가족과 그가 사는 시대의 사회에 대한 의무와 통합하려고 애쓰면서, 이제 그의 세계적 생애를 비로소 깊이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