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태도
2. 주의 태도
체포되었을 때, 예수는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땅에서 할 일이 끝났음을 알았다. 자기가 어떻게 죽을 줄 충분히 알았고, 이른바 재판의 세부에 관하여 거의 아랑곳하지 않았다.
산헤드린 의원의 법정 앞에서, 그는 거짓 증인들의 증언에 대답하기를 거절했다. 친구가 묻든, 적이 묻든, 반드시 대답을 끌어 낼 오직 한 가지 물음이 있었는데, 즉 땅에서 그의 사명의 성질과 신성(神性)에 관한 물음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인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어김없이 대답했다. 호기심 있고 사악한 헤롯 앞에 있을 때, 완강하게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빌라도 앞에서, 그가 말한 것 때문에 빌라도나 어떤 다른 진지한 사람이 진리를 더 잘 아는 데 도움이 될까 생각했을 때에야 입을 열었다. 예수는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는 것이 쓸데없음을 사도들에게 가르쳤고, 그가 가르쳤던 것을 이제 감히 실천했다. 이 때 그의 행위는, 신다운 성품의 품위 있는 침묵과 엄숙한 기품과 함께, 인간 성품을 참을성 있게 복종시키는 것을 본보기로 보여 주었다. 그가 고발당한 정치적 죄목에 관계된 어떤 질문이라도―총독의 관할에 속한다고 인식한 어떤 문제라도―그는 빌라도와 함께 아주 기꺼이 토론했다.
모든 다른 필사 인간이 해야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인간사의 자연스럽고 평범한 과정에 복종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예수는 확신했고, 따라서 사회적으로 근시안이고 영적으로 눈먼 동료 필사자들이 모략한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고, 순전히 인간다운 능력, 설득하는 웅변 능력조차 그는 쓰기를 물리쳤다. 비록 예수가 유란시아에서 살다가 죽었어도, 그의 인생 전부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가 창조하고 끊임없이 떠받드는 우주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우주 전체를 가르치려고 고안된 구경거리였다.
근시안인 이 유대인들은 보기 사납게 주를 죽이라고 아우성을 쳤고, 한편 그는 끔찍한 침묵 속에서 한 나라가―땅에서 아버지의 민족이―사멸(死滅)하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거기에 서 있었다.
예수는 계속되고 필요 없는 모욕에 부닥쳐서 차분함을 유지하고 위엄을 주장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인격을 얻었다. 그는 위협에 끄떡하지 않았다. 안나스의 하인에게 처음에 공격받았을 때, 그에게 불리하게 정식으로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을 요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제안했을 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빌라도 앞에서 그가 이른바 재판을 받을 때, 구경하는 하늘의 무리들은 “예수 앞에서 빌라도가 심판받는” 장면의 그림을 우주에 방송하기를 자제할 수 없었다.
가야바 앞에 있을 때, 또 모든 거짓 증언이 밝혀지고 나서, 예수는 대사제의 물음에 서슴지 않고 대답했고, 이로서 그를 신성 모독으로 정죄하기 위한 근거로서 자신의 증언 속에서 그들이 원하던 것을 마련해 주었다.
의도는 좋아도 그를 석방하려고 건성으로 기울인 노력을 주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정말로 빌라도를 불쌍히 여겼고, 그의 어두워진 지성을 일깨워 주려고 진지하게 애썼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고발한 범죄의 죄목(罪目)을 취소하라고 로마인 총독이 유대인들에게 한 모든 호소에 그는 온통 수동적이었다. 슬픈 그 시련 전체를 통하여 내내, 소박한 품위와 허세부리지 않는 위엄을 가지고 처신했다. 그를 죽
이려 하는 자들이 그가 “유대인의 임금”인가 물었을 때 불성실을 비난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그를 거절하기를 택했어도, 제한하는 설명을 조금만 덧붙이고 그 칭호를 받아들였는데, 이는 그가 영적 의미에서도 그들에게 민족의 진정한 지도력을 마지막으로 제공한 사람이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재판 동안에 예수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지만, 하나님과 협동 관계에서 어떤 종류의 인품을 사람이 완성할 수 있는 가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기에 충분히 말씀하였고, 그러한 피조물이 참으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를 택하고 이렇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활동적인 아들이 될 때, 하나님이 그 피조물의 생애에서 어떤 방법으로 명백히 나타날 수 있는가 온 우주에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무지한 필사자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거친 군인과 지각없는 하인들의 놀림과 강타(强打)와 주먹질을 당하고서 그가 보인 참을성과 큰 침착함에서 넉넉히 드러난다. 그들이 그의 눈을 가리고, 놀리면서 “너를 친 자가 누군가 우리에게 예언하라” 외치며 얼굴을 쳤을 때, 그는 성을 내지도 않았다.
예수가 채찍질을 받은 뒤에, 빌라도가 군중 앞에 예수를 내세우고 “이 사람을 보라!” 외쳤을 때, 빌라도는 그가 생각한 것보다 더 참되게 말했다. 정말로, 두려움에 질린 로마인 총독은, 바로 그 순간에 우주가 귀를 기울이고 멈춰서, 그 우주의 사랑하는 군주가 눈이 멀고 타락한 필사 백성들의 놀림과 주먹질을 받으며 이렇게 굴욕을 당하는 이 독특한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꿈꾸지 못했다. 빌라도가 말하자, “하나님과 사람을 보라!”하는 소리가 온 네바돈에 두루 메아리쳤다. 한 우주에 두루,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그 이후로, 그 사람을 계속 보았고, 한편 하보나의 하나님, 온 우주의 최고 통치자는 시공에서 이 지역 우주의 필사 인간의 이상(理想)을 성취한 것으로서 그 나사렛 사람을 받아들인다. 비할 데 없는 일생에서 그는 하나님을 사람에게 드러내지 못한 적이 없다. 이제, 필사 생애의 이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또 나중에 죽을 때, 그는 새롭게 감동적으로 사람을 하나님께 드러냈다.
3. 믿음직스러운 다윗 세베대
빌라도 앞에서 청문회가 끝나고 예수가 로마 군인들에게 넘겨진 뒤에 얼마 있다가, 성전 경비병들의 파견대가 주의 추종자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거나 체포하려고 겟세마네로 서둘러 갔다. 그러나 이들이 도착하기 오래 전에 이 추종자들은 흩어졌다. 사도들은 지정된 숨는 장소로 물러갔고, 그리스인들은 따로 갈라져 예루살렘에 있는 여러 집으로 가 버렸으며,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졌다. 다윗 세베대는 예수의 적들이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주가 무척 자주 기도하고 예배하려고 은거했던 곳 가까이, 골짜기 위로 대여섯 텐트를 일찍부터 이동하였다. 여기에 숨고, 동시에 사자(使者) 서비스를 위하여 한 중심, 조정하는 근거지를 유지하려고 생각했다. 다윗이 캠프를 떠나기가 무섭게 성전 경비병들이 도착했다. 거기서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고 그들은 캠프를 불사르는 데 만족했고, 그리고 나서 성전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그들의 보고를 받고 나서, 산헤드린은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렇게 철저히 놀라고 정복되어서, 폭동이 일어날 위험이나 또는 예수를 집행자들의 손에서 구하려는 어떤 시도도 없으리라는 것에 만족했다. 그들은 마침내 숨을 편히 쉴 수 있었고, 그래서 폐회(閉會)하고, 저마다 유월절을 위하여 준비하려고 제 갈 길을 갔다.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빌라도가 예수를 로마 군인들에게 넘기자마자, 한 사자가 다윗에게 알리려고 겟세마네로 서둘러 갔고, 5분 안에 주자(走者)들이 벳세다·펠라·필라델피아·시돈·세켐·헤브론·다마스커스·알렉산드리아로 달려갔다. 이 사자들
은 유대인 통치자들의 끈질긴 요청을 받고서 로마인들이 막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려 한다는 소식을 가져갔다.
이 비극의 날 내내, 주가 무덤에 안치되었다는 소식이 마침내 나갈 때까지, 다윗은 사도와 그리스인들, 또 베다니에서 나사로의 집에 모여 있던, 예수의 세상 식구들에게, 사자들을 통해서 보고를 거의 반시간마다 보냈다. 예수가 무덤에 묻혔다는 소식을 가지고 사자들이 떠났을 때, 유월절 축하를 위하여, 또 다가오는 안식일의 휴식을 위하여, 다윗은 지역 주자들의 무리를 해산하고 그들에게 니고데모의 집에서 일요일 아침에 그에게 조용히 보고하라고 지시했는데, 거기서 그는 안드레와 시몬 베드로와 함께 며칠 동안 숨을 생각이었다.
머리가 특이한 이 다윗 세베대는 예수의 주요 제자들 가운데서, 그가 죽고 “사흘째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주의 주장을 글자 그대로, 쉽게 사무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어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다윗은 한때 예수가 이렇게 예언하심을 들었고, 글자 그대로 믿는 성질을 가진 머리였기 때문에, 예수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날 경우에 그 소식을 퍼뜨리려고 가까이 있도록, 니고데모의 집에서 일요일 아침 일찍 사자들을 모으려고 이제 일을 꾸몄다. 다윗은 예수의 추종자들 가운데 아무도 예수가 그렇게 빨리 무덤에서 돌아오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믿음에 대하여 거의 입을 다물었고, 먼 도시와 신자 중심들로 금요일 아침에 파송된 주자들에게 일러 준 것을 빼고, 일요일 아침 일찍 그의 사자단(使者團)을 모두 동원하는 것에 대하여 아무 말도 비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던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 전역에 걸쳐, 또 그 둘레에 흩어져서, 그 날 밤 유월절을 지내고 이튿날을 숨어 있었다.
4. 십자가 처형을 위한 준비
빌라도는 단지 유대인 통치자들의 아우성에 저항하기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결백한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넘겨 준 죄책감을 이렇게 피하려 애쓰면서 군중 앞에서 손을 씻은 뒤에, 주를 로마 군인들에게 인도하라고 명령했고, 그들의 지휘관에게 주를 즉시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말했다. 예수를 떠맡은 뒤에, 군인들은 집정관 관저의 안뜰로 그를 도로 데려갔고, 헤롯이 그에게 입혔던 겉옷을 벗긴 뒤에 그들은 주를 자신의 옷으로 갈아 입혔다. 이 군인들은 그를 비웃고 조롱했지만, 더 이상 육체의 징벌을 가하지는 않았다. 예수는 이제 로마 군인들과 따로 있었다. 그의 친구들은 숨었고, 적들은 제 갈 길을 갔고, 요한 세베대조차 이제 더 옆에 있지 않았다.
빌라도가 예수를 군인들에게 넘긴 것은 8시가 조금 지난 뒤였고,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는 장소를 항하여 떠난 것은 9시 조금 전이었다. 반시간이 넘는 이 동안에, 예수는 입을 열지 않았다. 큰 우주의 집행 사무는 실지로 정지되었다. 가브리엘과 네바돈의 으뜸 통치자들은 여기 유란시아에 모여 있든지, 아니면 유란시아에서 사람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하여 정보를 받으려는 노력으로, 천사장들의 공간 보고서를 바짝 쫓고 있었다.
군인들이 예수와 함께 골고다를 향하여 떠날 준비가 되었을 무렵에, 그들은 보기 드문 그의 침착성과 특별한 품위에, 불평하지 않고 침묵(沈黙)을 지키는 데 비로소 감명을 받았다.
십자가에 처형하는 장소로 예수와 함께 떠나는 데 지체된 것은 대체로, 그 지휘관이 사형 선고를 받은 두 도둑을 함께 데리고 가려고 마지막 순간에 결정을 내렸
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 날 아침에 십자가에 못박히기로 되었으니까, 로마인 지휘관은 이 두 사람이 유월절 축제 행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기보다, 기왕이면 예수와 함께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도둑들은 준비되자마자 안뜰로 끌려 왔고, 거기서 예수를 바라보았다. 하나는 처음으로 보았지만, 다른 하나는 예수가 말씀하는 것을 성전에서, 또 펠라 캠프에서 여러 달 전에, 자주 들은 적이 있었다.
5. 예수의 죽음과 유월절의 관계
예수의 죽음과 유대인의 유월절 사이에는 아무런 직접 관계가 없다. 이 날, 유대인의 유월절 준비일에, 성전에서 유월절 양을 바칠 무렵에, 주가 육체를 입고서 목숨을 버린 것이 참말이다. 그러나 어쩌다 함께 일어난 이 사건은 어떤 면에서도 땅에서 사람의 아들의 죽음이 유대인의 희생 제도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예수는 유대인이었지만, 사람의 아들로서 그는 이 땅에서 한 필사자였다. 이미 열거한 사건과 얼마 있다가 주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이 시간까지 인도하는 사건들은, 이 무렵에 그의 죽음이 순전히 자연스럽고 사람이 처리한 사건이었음을 가리키기에 넉넉하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죽도록 계획하고 사형을 집행한 것은 사람이요, 하나님이 아니었다. 유란시아에서 인간사(人間事)의 진행에 아버지가 간섭하기를 마다하신 것은 참말이지만,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는 땅에서 행해진 그대로 아들의 죽음을 선포하거나 청구하거나 요구하지 않았다. 어떤 방법으로, 머지 않아, 예수가 필사의 몸을, 살을 입은 육신화를 벗어야 했으리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두 도둑 사이에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서, 셀 수 없이 많은 방법으로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이 모두가 사람이 한 일이요,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다.
세례 받을 때, 주는 일곱째이자 마지막 우주 수여를 마치는 데 필요했던 체험, 땅에서 육체를 입고 맛보라고 요구된 체험의 기법을 이미 마쳤다. 바로 이 때, 땅에서 예수의 임무는 끝났다. 그 뒤에 산 모든 여생은, 그가 죽는 방법조차, 이 세상에서, 또 다른 세계들에서 필사 인간들의 복지와 향상을 위하여, 그의 편에서 순전히 개인적으로 베푼 봉사였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필사 인간이 신앙을 통해서 영적으로 의식할 수 있다는 좋은 소식을 알리는 복음은 예수의 죽음에 달려 있지 않다. 정말로, 이 하늘나라 복음 전체가 주의 죽음 때문에 엄청나게 빛을 받았다는 것이 참말이기는 하지만, 그의 생애로 말미암아 더욱 빛을 받았다.
땅에서 사람의 아들의 모든 언행(言行)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사람이 서로 형제라는 교리를 크게 치장했지만, 하나님과 사람의 이 기본 관계는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주는 사랑과 신다운 아들들의 선천적 자비, 이 우주 사실에 본래부터 있다. 이 세상에서, 또 온 우주에 두루, 모든 다른 세상에서, 사람과 조물주 사이에 감동적이고 신성하게 아름다운 이 관계는 영원부터 존재해 왔다. 그리고 이 관계는 어떤 면에서도, 하나님의 아들 창조자들이 정기적으로 이렇게 자신을 수여하는 행위에 의존하지 않으며, 이들은 각자의 지역 우주에 대한 무제한(無制限) 통치권을 마지막으로 얻기 위하여, 치러야 할 값의 일부로서 그들이 창조한 지성 존재들의 성품과 모습을 이렇게 입는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사람과 하나님이 함께 협동하는 관계를 이렇게 초월적으로 나타낸 뒤와 마찬가지로, 유란시아에서 예수의 삶과 죽음이 있기 전에도, 땅에 있는 필사 인간을 사랑하셨다. 유란시아에서 한 사람으로서 네바돈의 하나님이 육신화한 이 막대한 거래는 영원하고 무한하고 우주적인 아버지의 속성을 크게 만들
수 없지만, 네바돈 우주의 모든 다른 행정자와 피조물을 풍성하게 만들고 일깨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이렇게 미가엘이 수여되었다고 해서 우리를 더 사랑하지는 않아도, 모든 다른 하늘 지자(知者)는 그렇다. 이것은 예수가 하나님을 사람에게 드러냈을 뿐 아니라, 또한 마찬가지로 하나님들에게, 또 온 우주의 하늘 지자들에게, 사람을 새롭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예수는 죄에 대한 희생물로서 죽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류의 타고난 도덕적 죄를 대속(代贖)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류는 하나님 앞에 아무런 그러한 종족 죄책감이 없다. 죄책감은 순전히 개인적인 죄, 아버지의 뜻과 그 아들들의 행정에 대하여, 알면서 깊이 생각해서 반항하는 문제이다.
죄와 반란은 하나님의 파라다이스 아들들의 근본적 수여 계획과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구제하는 계획은 우리가 보기에 수여 계획의 일시적인 모습인 듯하다.
유란시아의 필사자들에게 베푸는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가 무지한 필사자들의 잔인한 손에 죽지 않았더라도, 똑같이 효과 있고 어김없이 확실했을 것이다. 땅의 필사자들이 주를 좋게 받아들이고, 주가 육체를 입은 목숨을 자진하여 버림으로 유란시아를 떠났더라면, 하나님의 사랑과 아들의 자비, 이 사실―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너희 필사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너의 개인 체험에서 그러한 진리를 사실로 만드는 데는 오직 한 가지가 요구되는데, 곧 영에게서 태어난 너의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