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수요일. 쉬는날

뉴징검다리 2010. 2. 9. 11:16

제 177 편

수요일, 쉬는 날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로 시달리지 않을 때, 예수와 사도들은 수요일마다 수고하던 일을 그만두고 쉬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들은 특별한 이 번 수요일에 여느 때보다 얼마큼 늦게 아침을 먹었고, 캠프는 불길한 고요함으로 가득 찼다. 이 아침 식사의 처음 절반 동안 거의 아무 말이 없었다. 마침내 예수가 말했다: “너희가 오늘 쉬기를 내가 원하노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온 뒤에 일어난 모든 일을 천천히 생각해 보고, 바로 앞에 놓여 있는 것을 명상해 보라, 그것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일렀노라. 진리가 너희 생활에 거하고 너희가 은총 속에 나날이 자라도록 하여라.”

아침을 먹은 뒤에, 주는 그 날 하루 자리를 비울 생각이 있다고 안드레에게 알렸고, 어떤 경우에도 그들이 예루살렘 문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빼고, 사도들이 각자가 택하는 대로 시간을 보내도록 허락하라고 제안했다.

예수가 산으로 혼자 가려고 준비했을 때, 다윗 세베대는 그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주여, 바리새인과 통치자들이 당신을 죽이려 하는 줄 당신이 잘 아시며, 그래도 당신은 산으로 혼자 가려고 준비하시나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그러하니 아무런 해가 당신에게 닥치지 않도록 처리하려고 잘 준비된 세 사람을 당신과 함께 보내리이다.” 예수는 잘 무장(武裝)하고 튼튼한 세 갈릴리 사람을 훑어보고 다윗에게 말했다: “너는 좋은 뜻을 가졌으나, 사람의 아들은 자기를 방어할 사람이 하나도 필요하지 않음을 이해하지 못하니, 네가 잘못하는도다. 내 아버지의 뜻에 순응하여 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될 그 때까지, 아무도 내게 손대지 아니하리라. 이 사람들이 나를 따라와서는 안 되느니라. 아버지와 교통할 수 있도록 나는 혼자 가기를 바라노라.”

이 말씀을 듣자, 다윗과 무장한 파수(把守)들은 물러났다. 그러나 예수가 혼자서 떠나자, 요한 마가가 먹을 것과 물을 담은 작은 바구니를 가지고 앞으로 나섰고, 그가 하루 종일 떠나 있을 생각이라면, 배가 고프게 될지 모른다고 넌지시 비추었다. 주는 요한에게 빙그레 웃으며, 바구니를 쥐려고 손을 뻗었다.

1. 하루를 혼자 하나님과

예수요한의 손에서 점심 바구니를 쥐려 하자, 그 젊은이는 나서서 말했다. “그러나 주여, 몸을 돌이켜 기도하고 바구니 없이 계속하시는 동안, 당신은 바구니를 내려놓아도 되나이다. 게다가, 점심을 들고 내가 따라간다면, 당신은 예배하기에 더욱 홀가분할 터이고, 분명히 나는 조용하겠나이다. 당신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당신 혼자서 기도하러 따로 가실 때, 바구니 옆에 머무르리이다.”

그 깜찍함은 가까이서 듣던 자들 가운데 더러를 놀라게 했는데, 이렇게 말하는 동안 요한은 대담하게 그 바구니를 붙들고 있었다. 요한예수 둘이서 그 바구니를 붙들고 거기에 서 있었다. 당장에 주는 손을 놓고, 소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마음을 다하여 나와 함께 몹시 가고 싶어하니, 너에게 거절하지 못하리라. 우리끼리 떠나가서, 잘 다녀오리라.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질문이라도 내게 물어도 좋고, 우리는 서로 위로하고 위안할 것이라. 너는 점심을 가지고 떠나도 좋으니라. 그리고 네가 지칠 때, 내가 너를 도우리라. 나를 계속 따라오라.”

예수는 해가 진 뒤까지 그 날 저녁에 캠프로 돌아오지 않았다. 진리에 갈급한 이 젊은이와 이야기하고, 파라다이스 아버지와 이야기하면서 주는 땅에서 마지막으로 조용한 이 날을 지냈다. 이 사건은 하늘에서 “한 젊은이가 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낸 날”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경우는 언제까지나 창조자가 피조물과 기꺼이 친교하는 태도를 본보기로 보여 준다. 소년조차도, 마음의 소망이 정말로 지극할 때, 한 우주의 하나님의 눈길을 끌고 사랑으로 동반하심을 누리며, 산에서 하나님과 혼자 지내는 잊을 수 없는 환희를, 하루 종일, 실제로 누릴 수 있다. 이 수요일에 유대 땅의 산에서 요한 마가가 겪은 독특한 체험이 그러했다.

예수요한과 많이 이야기를 나누고 이 세상과 다음 세상의 일에 대하여 거리낌없이 이야기했다. 요한은 그가 사도들 가운데 하나가 될 만큼 나이 먹지 않아서 얼마나 서운했는가 예수에게 말했고, 페니키아로 간 여행을 제외하고, 예리고 가까이 요단 강 여울에서 그들이 처음 전도할 때부터 줄곧 따라다니도록 허락받은 것을 그가 대단히 감사하게 여긴다는 뜻을 표현했다. 예수는 소년이 다가오는 사건들에 낙심하지 말라는 경고(警告)를 주고, 그가 살아서 하늘나라의 막강한 사자가 되리라고 그에게 확신을 주었다.

요한 마가는 산에서 이 날 예수와 함께 지냈던 기억으로 기쁨에 떨었지만, 마가는 그들이 겟세마네 캠프로 막 돌아오려 할 때 주가 말씀한 마지막 훈계를 결코 잊지 않았다. 이 때 주는 말했다: “자, 요한아, 정말로 쉬는 날에, 우리는 구경을 잘했구나. 그러나 내가 너에게 이른 것들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도록 하여라.” 요한 마가는 그가 산에서 예수와 함께 지낸 이 날 벌어진 어떤 일도 결코 밝히지 않았다.

예수가 땅에서 보낸 생애의 남은 몇 시간을 통해서, 요한 마가는 주가 눈앞에서 오래 사라지도록 버려 두지 않았다. 언제나 가까이서 그 소년은 숨어 있었고, 예수가 잘 때만 눈을 붙였다.

2. 어릴 때 가정 생활

요한 마가와 이 날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예수는 그들의 어린 시절과 나중의 소년기 체험을 비교하느라고 어지간히 시간을 보냈다. 요한의 부모가 예수의 부모보다 이 세상의 재물을 더 많이 소유했어도, 그들의 소년기에서 아주 비슷한 체험이 많이 있었다. 예수요한으로 하여금 부모와 다른 식구(食口)들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도운 여러 가지를 말씀했다. 그가 “하늘나라의 막강한 사자”가 결국 되리라는 것을 주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소년이 물었을 때, 예수는 말했다:

“네가 하늘나라 복음에 충성함이 입증될 것을 내가 아노니, 너의 현재 믿음과 사랑이 집에서 네 몫대로 받은 것과 같은 초기 훈련에 바탕을 두었을 때, 내가 그러한 성품에 의존할 수 있기 때문이라. 너는 부모가 서로 진지한 애정을 품는 집에서 생긴 소산이며, 따라서 자신을 중요시하는 개념을 해롭게 높일 정도로 지나치게 사랑을 받지 않았느니라. 너의 자신감과 충성이 서로 충돌하도록 너희 부모가 애정이 없이 조종한 결과로서 네 성격이 비뚤어지지도 않았느니라. 칭찬할 만한 자신감을 보장하고 정상적 안전감을 촉진하는 부모의 사랑을 네가 누려 왔느니라. 그러나

네 부모가 사랑 뿐 아니라 지혜를 가졌으므로 너는 또한 운이 좋았구나. 돈으로 살 수 있는 대부분의 형태의 방종(放縱)과 많은 사치품을 허락하지 않도록 지혜가 부모를 인도하였고, 한편 네 부모는 이웃 놀이 친구들과 함께 너를 회당 학교로 보냈으며, 또한 네가 고유한 체험을 가지도록 허락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가 배우라고 너를 북돋았느니라. 너는 요단 강으로 왔고, 거기서 젊은 네 친구 아모스와 함께, 우리는 전도하고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를 주었느니라. 너희 둘이 우리와 함께 가기를 바랐는데, 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때, 네 부모는 찬성하고 아모스의 부모는 반대하였느니라. 저희는 아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네가 가졌던 복된 체험을, 아니 오늘 네가 맛보는 그런 체험조차 그가 못 가지게 하였느니라. 집에서 도망치면 아모스는 우리와 함께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했다면 그는 애정에 상처를 입히고 충성심을 희생하였으리라. 그러한 과정이 지혜롭다 하더라도, 체험과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끔찍한 값을 치르는 것이었으리라. 너희 부모처럼 지혜로운 부모는 아이들이 네 나이까지 자랐을 때 독립심을 기르고 기운 차리게 하는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애정에 상처를 입거나 충성심을 억압할 필요가 없도록 처리하느니라.

요한아, 전적으로 지혜로운 존재가 사랑을 주었을 때 그 사랑은 우주에서 최상의 실체이지만, 필사 부모들의 체험에서 나타나다시피, 사랑은 위험하고 때때로 반(半)이기심이라. 네가 장가들고 네 아이들을 기를 때, 너의 사랑이 지혜의 훈계를 받고 지성의 안내를 받도록 하여라.

“젊은 네 친구 아모스는 꼭 너만큼 이 하늘나라 복음을 믿지만, 나는 그에게 완전히 의지할 수 없고, 앞날에 그가 무슨 일을 할지 나는 확신이 없노라. 어릴 때 그의 가정 생활은 온전히 믿을 만한 사람을 낳을 만한 것이 아니었느니라. 아모스는 사도들 가운데 정상적으로, 사랑으로, 지혜롭게 가정 훈련을 받지 못한 한 사도와 많이 비슷하니라. 네가 처음 8년을 정상이고 규율이 잘 선 집에서 보냈으므로, 너의 여생(餘生) 전체는 더욱 행복하고 믿을 만하리라. 사랑이 우선하고 지혜가 다스리는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너는 튼튼하고 건전한 인품을 가졌느니라. 그러한 소년기 훈련이 낳는 충성심은, 네가 시작한 과정을 마칠 것이라고 내게 확신을 주느니라.”

한 시간이 넘도록 예수요한은 가정 생활에 대하여 이 토론을 계속하였다. 어떻게 어린아이가 모든 지적·사회적·도덕적인 것, 심지어 영적인 것에 대해서도 모든 초기의 개념을 부모에게, 그리고 관련된 가정 생활에 의존하는가, 주는 계속 요한에게 설명했다. 이것은 가족이 인간이나 신의 관계에 대하여 처음에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어린아이에게 대표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어머니의 보살핌으로부터 우주에 대하여 첫 인상(印象)을 얻어야 한다. 아이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그의 첫 아이디어를 땅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 뒤에 어린아이의 생활은, 가정의 이 사회 및 영적 관계에 조건을 받고, 어릴 때 정신 및 감정 생활에 따라서, 행복하거나 불행하게, 쉽거나 어렵게 된다. 한 인간의 여생 전부가 처음 몇 년 존재하는 동안에 일어나는 것에 엄청나게 영향을 받는다.

아버지-아이 관계에 바탕을 둔, 예수가 가르친 복음은, 현대의 문명화된 민족들의 가정 생활이 사랑과 지혜를 더 품을 때까지, 도저히 세계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우리는 진지하게 믿는다. 20세기의 부모는 가정을 개선하고 가정 생활을 고상(高尙)하게 만들기 위하여 많은 지식과 늘어난 진리를 소유하는데도, 갈릴리에서 예수의 가정과 유대에서 요한 마가의 집만큼, 소년과 소녀를 기르기에 좋

은 장소인 현대 가정이 극히 드물다는 것이 아직도 사실이다. 하지만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즉시 가정 생활의 개선을 가져올 것이다. 지혜로운 가정의 애정 생활, 그리고 참된 종교에 충성으로 헌신하는 것은 서로, 심오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한 가정 생활은 종교를 높이고, 진정한 종교는 반드시 가정을 영화롭게 한다.

이 옛 유대인 가정에서 발육을 저해(沮害)하는 불쾌한 영향과 다른 속박하는 특징이 좀더 낫게 규율이 선 많은 현대 가정에서 거의 없어진 것이 참말이다. 저절로 생기는 자유가 있고 훨씬 더 많은 개인적 자유가 정말로 있지만, 이 자유는 사랑으로 억제되거나 충성심에 동기를 받지 않고, 지혜의 총명한 훈련에 지도를 받지도 않는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어린아이에게 기도하기를 가르치는 한, 아버지라는 낱말이 성장하는 모든 어린아이의 머리와 가슴 속에서 값지게 간직되도록, 살고 집을 관리할 엄청난 책임이 땅에 있는 모든 아버지에게 지워진다.

3. 캠프에서 하루

사도들은 올리브 산에서 이리저리 걷고, 같이 야영한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날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오후에 일찍 예수가 돌아오는 것을 무척 보고 싶어졌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더욱 그의 안전을 걱정하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가 계시지 않아서 말할 수 없이 외롭게 느꼈다. 주가 산에서, 심부름하는 소년 하나만 데리고, 혼자 훌쩍 떠나게 버려 두었어야 하는가, 하루 내내 많은 논란이 있었다. 비록 아무도 솔직하게 제 생각을 표현하지 않았어도, 가룟 유다를 빼고, 자기가 요한 마가의 처지에 있었으면 하고 바라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거의 오후 중반에 나다니엘은 “최고의 소망”에 대하여 여섯 명쯤 되는 사도들과 그만큼 되는 제자들에게 연설했는데, 그 연설의 끝은 이러했다: “우리 대부분에게 잘못된 점은 우리가 건성일 뿐이라는 것이라. 주가 우리를 사랑하는 것 같이 우리는 주를 사랑하지 않느니라. 요한 마가가 한 것만큼 우리 모두가 함께 가기를 바랐더라면, 주는 분명히 우리 모두를 데리고 갔으리라. 우리가 구경하는 동안, 그 소년은 주께 다가가서 광주리를 내밀었지만, 주가 쥐었을 때 그 소년은 놓으려 하지 않았는지라. 그래서 주는 우리를 여기 두고, 바구니랑 소년이랑, 모두 함께 산으로 훌쩍 떠나가셨느니라.”

4시쯤에, 주자(走者)들이 다윗 세베대에게, 벳세다에 있는 그의 어머니로부터, 또 예수의 어머니로부터 소식을 가지고 왔다. 며칠 전에 다윗은, 대사제와 통치자들이 예수를 죽이려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이 주를 죽이기로 작정한 것을 다윗은 알았고, 예수가 자신을 구하려고 신성한 힘을 쓰거나 추종자들이 그를 방어하려고 무력(武力)을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리라고 거의 확신했다. 이 결론에 이르고 나서, 그는 때를 놓치지 않고 사자 하나를 어머니에게 보내서, 어머니가 당장에 예루살렘으로 오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 집안의 모든 식구를 데려오라고 재촉했다.

다윗의 어머니는 아들이 요청한 대로 했고, 이제 달리는 사람들이 그의 어머니와 예수의 가족 전부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있으며, 이튿날 언젠가 늦게, 아니면 그 다음 날 아침 아주 일찍 도착하리라는 말을 가지고 다윗에게 돌아왔다. 다윗이 자진해서 이렇게 했기 때문에, 그는 그 문제를 혼자 비밀에 붙이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의 가족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정오가 조금 지난 뒤에, 아리마대 요셉의 집에서 예수와 열두 사도와 만난 적이 있는 그리스인들이 스무 명 넘게 캠프에 도착했고, 베드로요한은 몇 시간을 그들과 회담하느라고 보냈다. 이 그리스인들, 적어도 그들 가운데 더러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단에게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지식에 상당히 진보되어 있었다.

그 날 저녁에, 캠프로 돌아온 뒤에, 예수그리스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러한 과정이 사도들과 많은 주요 제자를 크게 어지럽게 했으리라는 사실이 아니었다면, 칠십인을 세운 것처럼, 이 그리스인 스무 명을 임명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캠프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 예루살렘에서 대사제(大司祭)와 장로들은 예수가 군중에게 연설하려고 돌아오지 않은 것에 놀랐다. 그 전날, 그가 성전을 떠날 때, “내가 너희 집을 황폐한 채로 버려 두노라” 말한 것이 참말이었다. 그러나 군중의 우호적인 태도에서 그가 쌓아 왔던 크게 유리한 위치를 어째서 기꺼이 버리는가 그들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소동(騷動)을 일으킬까 두려웠는데, 군중에게 주가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모든 타당한 방법으로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의 권한에 순응하라는 훈계였다. 그러나 그들이 유월절을 준비하고 동시에 예수를 죽이려는 계획을 완성하는 동안, 그 도시에서는 바쁜 날이었다.

많은 사람이 캠프로 오지 않았는데, 그 캠프를 세운 것은, 밤마다 베다니로 나가는 대신에 거기서 예수가 머물기를 기대한다는 것을 안 사람들이 모두 잘 지킨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4. 유다와 대사제들

예수요한 마가가 캠프를 떠난 뒤에 얼마 있다가, 가룟 유다는 형제들 사이에서 사라졌고, 오후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혼란에 빠지고 불평을 품은 이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를 삼가라고 주가 특별히 요청했는데도, 대사제 가야바의 집에서 예수의 적들과 약속을 지키려고 서둘러 갔다. 이것은 산헤드린의 비공식 회의였고, 그 날 아침에 10시 조금 지나서 시간이 지정되었다. 예수를 고발하는 데 쓰일 죄목들의 성질을 의논하고, 그들이 예수에게 이미 내린 사형 선고에 필요한 민사(民事) 확인을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로마 당국 앞에 예수를 끌고 오는 데 어떤 과정을 이용할 것인가 결정하려고 이 회의가 소집되었다.

전날에 유다는 친척들 중 몇 사람에게, 그리고 아버지 가족에서 어떤 사두개인 친구들에게, 예수가 좋은 의도를 가진 몽상가(夢想家)요 이상주이자이기는 해도, 이스라엘이 기대하던 구원자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털어놓았다. 유다는 그가 그 운동 전체에서 품위 있게 물러나는 어떤 길을 찾아내기를 몹시 바란다고 진술했다. 친구들은 그의 사퇴가 큰 사건으로서 유대 통치자들의 갈채를 받으리라, 그에게 아무 보상도 지나치지 않으리라고 알랑거리며 확신을 주었다. 그가 산헤드린으로부터 당장에 큰 영예를 받으리라, 마침내, 그가 뜻은 좋았어도, “배우지 못한 갈릴리 사람들과 불행하게 관계”를 가졌던 낙인(烙印)을 지워 버릴 처지에 있으리라고 그가 믿게끔 만들었다.

유다는 주의 막강한 일들이 악마의 왕의 힘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진실로 믿을 수 없었지만, 이제 예수가 자신의 지위를 확대하려고 권능을 쓰지 않으리라고 충분

히 확신했다. 예수가 자신이 유대 통치자들에게 죽음을 당하도록 버려 두리라고 마침내 확신하였고, 실패한 운동과 동일시된다는 창피스러운 생각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외관상 실패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주의 튼튼한 인격과 당당하고 자비로운 그 지성의 날카로움을 속속들이 이해하였다. 그래도 예수가 좋은 뜻을 가진 광신자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정말로 멀쩡한 정신이 아니다, 언제나 이상하고 오해받은 사람으로 보였다고, 친척들 가운데 한 사람이 제안한 것을 얼마큼 생각해 보면서 유다는 마음이 기뻤다.

이제, 전과 달리, 유다예수가 그에게 더 큰 명예로운 자리를 한 번도 배정해 준 적이 없음을 이상하게 자신이 분개하게 되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태까지 사도들의 회계(會計)라는 명예를 고맙게 여겼지만, 이제 그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능력을 인정받지 않았다고 비로소 느꼈다. 베드로·야고보·요한예수와 가까운 관계를 가지는 영예를 받은 것에 갑자기 분개심으로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이 때 대사제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수를 배반하려는 어떤 생각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베드로·야고보·요한에게 앙갚음을 하려고 단단히 결심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로 그 때, 새로운 압도하는 생각이, 의식하는 그의 머리 속에서 앞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명예를 얻는 데 착수했고, 이것이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실망에 기여했던 자들에게 복수(復讐)하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다면, 더군다나 좋다. 그는 혼란과 자만심과 절망과 결심이 끔찍하게 한데 싸인 곳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때 유다예수를 배반하는 것을 주선하려고 가야바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이는 돈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가야바의 집으로 다가가면서, 유다예수와 동료 사도들을 저버리겠다는 마지막 결정에 이르렀다. 이렇게 하늘나라 운동을 저버리기로 작정하고 나서, 그가 처음에 예수와 하늘나라의 새 복음의 편을 들었을 때, 언젠가 자기가 누리리라고 생각했던 명예와 영광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자신을 위하여 확보하려고 굳게 결심했다. 사도들이 모두 한때 유다와 함께 이 포부를 가졌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진리를 찬미하고, 적어도 유다보다 더, 예수를 사랑하기를 배웠다.

그의 사촌이 배반자를 가야바유대 통치자들에게 인사시켰고, 사촌은 유다예수의 미묘한 가르침에 스스로 미혹된 잘못을 발견했으므로, 그가 그 갈릴리 사람과 가졌던 관계를 대중 앞에서 정식으로 부인(否認)하기를 바라고, 동시에 유대 형제들의 신뢰와 친교가 회복되기를 요청하려고 그 장소에 도착했다고 설명했다. 유다의 이 대변인은 이어서 설명했다: 예수가 감금된다면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하여 최선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릇된 운동에 참여해 온 것을 후회한다는 증거로서, 또 이제 모세의 가르침으로 진지하게 돌아오려 한다는 증명으로서, 예수를 조용히 감금하고, 그래서 민중을 소란하게 만드는 어떤 위험이나, 또는 유월절이 지나기까지 그의 체포를 연기할 필요성이 없도록, 예수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은 지휘관과 주선할 수 있는 자로서, 산헤드린으로 그가 자청하려고 왔다.

사촌(四寸)이 말을 마치자, 그는 유다를 인사시켰고, 유다는 앞으로 대사제 가까이 걸어가서 말했다: “내 사촌이 약속한 모든 것을 내가 하겠나이다. 그러나 이 서비스의 대가로 나에게 무엇을 기꺼이 주시겠나이까?” 유다는 마음이 굳어지고 자만심이 대단한 가야바의 얼굴에 비쳤던, 경멸하고, 심지어 메스꺼워하는 그 얼굴

빛을 헤아리지 못하는 듯했다. 그의 마음은 자기 영광에, 또 자찬(自讚)의 만족감을 몹시 바라는 생각에, 너무나 굳어졌다.

그러자 가야바는 배반자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유다야, 너는 경비대의 지휘관에게 가서, 네 주를 우리에게 오늘 밤이나 내일 밤에 데려오도록 그 장교와 주선하여라. 네가 그를 우리 손에 넘기고 나서, 너는 이 서비스에 대하여 보상을 받을지니라.” 이 말을 듣자, 유다는 대사제와 통치자들이 있는 앞에서 나가서, 예수를 체포할 방법에 관하여 성전 경비병의 지휘관과 의논했다. 유다예수가 그 때 캠프에서 자리를 비웠음을 알았고 그 날 저녁에 언제 그가 돌아올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 날 (목요일) 저녁에, 예루살렘의 사람들과 방문하는 순례자들이 모두 밤 동안에 물러간 뒤에 예수를 체포하자고 자기들끼리 협의했다.

유다는 여러 날 동안 가져보지 못한 위풍과 영광을 받을 생각에 황홀해져서 캠프에 있는 동료들에게 돌아왔다. 그는 언젠가 새 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예수 편에 뛰어들었다. 그는 예상했던 것과 같은 새 왕국이 없으리라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새 나라에서 영광을 얻지 못한 실망을 옛 체제에서 명예와 보상을 즉시 얻는 것과 대체하도록 그렇게 현명했던 것이 기뻤다. 그는 이제 이 옛 체제가 살아남으리라고 믿었고, 이것이 예수와 그가 대표하는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의식(意識)하면서 의도한 마지막 동기를 볼 때, 유다예수를 저버린 것은 이기적인 도망자의 비겁한 행위였고, 그가 오로지 생각한 것은, 그의 행위가 주와 옛 동료들에게 무슨 결과를 가져오든 상관 없이, 자신의 안전과 영광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항상 바로 그런 식이었다. 유다는 머리 속에서 점진적으로 쌓이는, 고의적이고 끈질기고, 이기적이고, 복수심에 불타는 이 의식에 오랫동안 빠져 있었고, 가슴 속에 복수하고 불충하려는, 증오에 차고 악한 이 욕망을 품고 있었다. 다른 사도들을 사랑하고 믿은 것 같이, 예수유다를 사랑하고 믿었다. 그러나 유다는 그에 보답하여 충성스러운 신뢰를 기르고 마음을 다한 사랑을 체험하지 못했다. 그리고 포부가 일단 자아(自我) 추구에 온통 집착하고, 무뚝뚝하고 오랫동안 억눌렸던 복수심에 극도로 자극받았을 때, 포부는 얼마나 위험하게 될 수 있는가! 어리석은 사람들의 생활에서 실망은 얼마나 사람을 짓밟는 것인가! 이들은 시간 속에서 그림자 같고 덧없는 유혹물에 눈독을 들이면서, 신성한 가치와 참된 영적 실체들이 있는 영원한 세계들에서 영구한 업적을 얻는, 더 높고 참다운 성취를 눈이 멀어 보지 못한다. 유다는 머리 속에서 세상의 영예를 몹시 바랐고, 진심으로 이 욕구를 사랑하게 되었다. 다른 사도들도 머리 속에서 마찬가지로 바로 이 세상의 명예를 몹시 바랐지만, 마음으로 예수를 사랑했고, 그가 그들에게 가르친 진리를 사랑하기를 배우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 때 유다는 깨닫지 못했지만, 헤롯세례자 요한의 목을 벤 뒤로 늘, 그는 잠재 의식에서 예수를 비평하는 사람이 되었다. 가슴 속 깊숙이, 유다예수요한을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늘 분하게 여겼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되기 전에 유다요한의 제자(弟子)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미움의 옷을 입혀서 자기 혼 속에 유다가 간직했던 인간적 분개심과 가슴 아픈 실망이 쌓이고 쌓여서, 이제 잠재 의식의 지성 속에서 자리를 잘 잡았으며, 이것은 그가 형제들의 지지하는 영향을 일단 감히 벗어나고, 또한 동시에 예수의 적들이 영리하게 빗대어 하는 말과 미묘한 비웃음에 노출되었을 때, 솟아 나와서 그를 삼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유다가 하늘 높이 희망을 띄우고 예수가 그것을 산산조각 내는 무슨 일을 하

거나 말을 할 때마다, 유다의 마음 속에는 쓰라리게 분개하는 상처가 언제나 남아 있었다. 이 상처들이 늘어나자, 너무나 뻔질나게 상처 입은 그 마음은, 좋은 뜻을 가졌어도 비겁하고 자기 중심인 성격에게 이 씁쓸한 체험을 안겨 준 사람에 대하여 모든 참 애정을 금방 잃어 버렸다. 유다는 깨닫지 못했어도, 그는 비겁한 자였다. 따라서, 권력이나 영광이 쉽게 손 닿는 곳에 있는 듯 보였을 때, 비겁함이 아주 흔히 그것을 붙잡기를 물리치게 만든 동기였다고 유다는 언제나 예수를 탓하고 싶어했다. 한때는 진정했던 사랑조차, 실망과 질투와 오래 계속된 분개심을 통해서, 어떻게 결국 실제의 미움으로 바뀌는가 모든 사람이 잘 안다.

마침내 대사제와 장로들은 몇 시간 동안 편안히 숨을 쉴 수 있었다. 예수를 대중 앞에서 잡아들여야 하지 않았고, 배신한 연합군으로 유다를 확보한 것은 과거에 아주 여러 번 했던 것처럼 예수가 그들의 관할 구역에서 달아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장했다.

5. 마지막 친교 시간

수요일이었으니까 캠프에서 이 날 저녁은 친교 시간이었다. 주는 풀이 죽은 사도들을 북돋아 주려고 애썼지만, 거의 불가능했다. 모두가 뒤숭숭하고 압도하는 사건들이 다가오고 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주가 그들의 파란 많고 사랑으로 결속한 여러 해를 열거했을 때에도 명랑해질 수 없었다. 예수는 모든 사도의 가족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물었고, 다윗 세베대를 향하여 둘러보며, 누가 자기 어머니나 막내 누이나 또는 자기 집안의 다른 식구로부터 요즈음에 소식을 들었는가 물었다. 다윗은 고개를 떨구고 자기 발을 내려다보았다. 대답하기가 두려웠다.

이 때는 예수가 추종자들에게 군중의 지지(支持)를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계제였다. 여러 번 큰 무리의 사람들이 열심히 그들을 따라다니다가, 다음에 똑같이 열심히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자기들이 예전에 믿고 생활하던 길로 돌아갔을 때 갈릴리에서 겪었던 체험을 주는 다시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서 말했다: “그래서 너희는 성전에서 우리의 말을 듣고 우리의 가르침을 믿는 듯이 보이던 큰 군중에게 너희가 속도록 버려 두어서는 안 되느니라. 이 군중은 진리를 듣고 머리로 얄팍하게 믿지만, 거의 아무도 진리의 말씀이 살아 있는 뿌리로 가슴 속에 파고들게 하지 않느니라. 오직 머리로만 복음을 알고, 마음 속에서 복음을 맛보지 않은 자들은 정말 어려움이 닥칠 때 지지하리라 의존할 수 없느니라. 유대인 통치자들이 사람의 아들을 죽이려고 합의를 보았을 때, 그들이 한 마음으로 공격할 때, 너희는 군중이 절망에 빠져 달아나든지, 아니면 미치고 눈먼 이 통치자들이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동안 말없이 놀라서 구경만 하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그리고 나서 역경과 박해(迫害)가 너희에게 덮칠 때, 진리를 사랑한다고 너희가 생각하는 또 다른 사람들은 흩어지고, 더러는 복음을 부인하고 너희를 저버릴 것이라. 우리와 아주 가까웠던 어떤 사람들은 이미 저버리기로 작정하였느니라. 우리에게 이제 닥친 시절을 위한 준비로 너희는 오늘 쉬었느니라. 그러므로 바로 앞에 닥친 시절을 위하여 너희가 힘을 얻도록 내일은 경계하고 기도하라.”

캠프의 분위기는 설명할 수 없는 긴장의 빛이 가득했다. 조용한 사자들이 오고갔고, 오직 다윗 세베대와 의사(意思)를 소통했다. 그 날 저녁이 지나기 전에, 더러는 나사로가 황급히 베다니에서 자리를 뜬 것을 알았다. 캠프로 돌아온 뒤에, 주의 곁에서 하루 종일 보냈는데도, 요한 마가는 불길하게 말이 없었다. 그가 말하게

끔 설득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 것은 예수가 그에게 입을 다물라고 일렀다는 것을 분명히 가리켰다.

명랑하고 보기 드물게 친근한 주의 태도도 그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끔찍한 고립이 분명히 다가오고 있음을 모두가 느꼈고, 이것이 갑자기 와르르하며 피할 수 없이 무섭게 쏟아지려 하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인가 다가옴을 어렴풋이 느꼈지만, 아무도 그 시험에 부닥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지 않았다. 주는 하루 내내 떠나 있었고, 그들은 주가 계시지 않아 엄청나게 서운했다.

이 수요일 저녁은 주가 돌아가시는 바로 그 실제 시간까지 그들의 영적 지위에서 밑바닥을 기록했다. 비록 이튿날은 비극의 금요일에 하루가 더 가깝기는 했어도, 그래도 주는 그들과 함께 있었고, 그들은 가슴 졸이는 시간을 더 품위 있게 견디었다.

바로 한밤이 되기 전에, 땅에서 그가 택한 가족과 푹 잠잘 마지막 밤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밤 동안 그들을 해산하면서 그는 말했다: “형제들아, 잠자러 가라, 그리고 내일 우리가 일어날 때까지 평안할지어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우리가 아들인 것을 아는 기쁨을 맛볼 날이 하루 더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