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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머므르며 가르치다

뉴징검다리 2010. 2. 9. 18:59

제 151 편

바닷가에서 머무르며 가르치다

3월 10일이 되기까지, 전도하고 가르치는 모든 집단이 벳세다에 모여들었다. 목요일 밤과 금요일에, 그들 중에 여럿이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고, 한편 안식일에 다마스커스의 어느 나이 든 유대인이 조상 아브라함의 영광에 대하여 강연하는 것을 들으러 회당에 참석했다. 예수는 이 안식일의 대부분을 혼자서 산에서 지냈다. 그 토요일 밤에 주는 모여든 무리에게 “역경의 사명과 실망의 영적 가치”에 대하여 한 시간이 넘도록 이야기했다. 이것은 기억할 만한 행사였고, 말씀을 들은 자들은 나누어 준 교훈을 결코 잊지 않았다.

예수나사렛에서 최근에 거절당한 슬픔에서 온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사도들은 여느 때처럼 즐거운 태도에 섞인 특이한 슬픔을 알아차렸다. 야고보요한은 상당히 오랫동안 함께 있었고, 베드로는 새 전도단의 복지와 지도에 관계되는 여러 책임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내려고 떠나기 전에 이 기다리는 동안에, 여자들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가버나움과 그 주위의 여러 도시와 마을에 아픈 사람들을 돌보면서 보냈다.

1.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이 무렵에 예수는 주위에 무척 자주 모여든 군중을 가르치는 비유 방법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사도 및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밤이 늦도록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 일요일 아침에 거의 아무도 아침을 먹으려고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바닷가로 나가서, 안드레베드로의 옛 고기잡이 배, 언제나 예수가 뜻대로 쓰도록 둔 배 안에서 혼자 앉아 있었고, 하늘나라를 펼치는 일에서 취해야 할 다음 행동에 관하여 명상했다. 그러나 주는 오래도록 혼자 있게 되지 않았다. 금방 사람들이 가버나움과 이웃의 여러 마을에서 도착하기 시작했고, 아침 10시가 되어서는, 거의 1천 명이 물가에, 예수의 배 가까이 모여들었고, 주의를 끌려고 아우성쳤다. 베드로는 이제 일어나서, 배 있는 데로 가면서, 말했다. “주여, 내가 저희에게 이야기하리이까?” 그러나 예수가 대답했다, “아니라, 베드로야, 내가 저희에게 이야기를 해 주리라.” 그리고 나서 예수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비로소 이야기했고, 이것은 따라다닌 군중에게 가르친 긴 시리즈의 그런 첫 비유 중에 하나였다. 이 배는 높이 세워진 자리가 있었고, 물가에 모인 군중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가르칠 때 앉는 것이 버릇이었으니까) 예수는 거기에 앉았다. 베드로가 몇 마디 한 뒤에, 예수는 입을 열었다:

“어느 씨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갔다가 씨를 뿌리자, 더러는 길가에 떨어져 발에 짓밟히고 하늘의 새들이 삼켰는지라. 다른 씨는 흙이 거의 없는 돌밭에 떨어졌

고, 흙이 깊지 않으므로 즉시 싹이 났으나, 해가 비치자마자, 물기를 빨아들일 뿌리가 없어 말라 버렸더라. 다른 씨는 가시나무 사이에 떨어져서 가시나무가 자라자 그 씨가 숨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였더라. 또 다른 씨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자라서 30배, 60배, 100배 정도 결실하였더라.” 이 비유 말씀을 마치고 나서, 군중에게 말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사도들, 그리고 함께 있던 자들은, 예수가 이 방법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을 듣고서 크게 어리둥절하였다: 자기들끼리 많이 이야기를 나눈 뒤에, 그 날 저녁 세베대의 집 뜰에서 마태가 말했다: “주여, 군중에게 당신이 제시하는 아리송한 말씀의 뜻이 무엇이나이까? 진리를 찾는 자들에게 어찌하여 당신은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내가 참고서 이제까지 너희를 가르쳤노라.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깨닫지 못하는 군중과 우리의 멸망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이제부터, 하늘나라의 신비를 비유로 제시하리라. 우리가 이렇게 하리니, 정말로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자들은 그 가르침의 뜻을 헤아리고, 따라서 구원을 얻으며, 한편 오직 우리를 옭아매려고 우리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까닭에 저희가 더욱 어리둥절하게 될까 함이라. 아이들아, 너희는 영의 법칙을 깨닫지 못하느냐. 가진 자는 풍부하게 가지도록 받겠거니와 없는 자는 그가 가진 것조차도 빼앗기리라, 그 법칙이 선포하느니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많은 것을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리니, 우리의 친구들과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자들은 찾는 것을 발견하려니와 우리의 적들과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 이 사람들 가운데 여럿이 진리의 길을 따르지 않느니라. 선지자가 ‘이 민족의 마음은 살졌고 귀는 어두워 듣지 못하며, 진리를 헤아리고 마음 속에서 이해할까 두려워 눈을 가렸음이라’ 하였을 때, 정말로 그렇게 깨닫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묘사하였느니라.”

사도들은 주의 말씀의 중요성을 넉넉히 알아듣지 못했다. 안드레토마스예수와 함께 더 이야기하는 동안,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뜰의 다른 구석으로 물러가서, 거기서 진지하게 길어진 토론에 들어갔다.

2. 비유의 풀이

베드로와 그 주위에 있던 무리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우화(寓話)이다, 각 모습에 어떤 감추어진 의미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래서 예수에게 가서 설명해 달라고 청하려고 작정하였다. 따라서 베드로는 주께 다가가서 말했다. “우리는 이 비유의 뜻을 깨우칠 수 없고, 하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허락되었다고 말씀하시니, 우리에게 풀이해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이 말을 듣고, 예수베드로에게 말했다: “이 사람아, 나는 너희에게 주지 않고 보류하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지만, 먼저 너희가 무엇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는가 내게 이르면 어떠하겠느냐, 그 비유를 너는 어떻게 풀이하느냐?”

한 순간 침묵이 흐른 뒤에 베드로는 말했다: “주여, 우리는 그 비유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했고, 이것이 내가 결정한 풀이이나이다. 씨 뿌리는 자는 복음을 전도

하는 자요,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이나이다. 길 옆에 떨어진 씨앗은 복음의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을 가리키나이다. 굳은 땅에 떨어진 씨앗을 빼앗아 간 새들은 사탄, 즉 악마를 대표하고, 이 무지(無知)한 사람들의 가슴 속에 뿌려진 것을 훔쳐 가나이다. 돌밭에 떨어졌다가 아주 갑자기 튀어나온 씨앗은 겉치레하고 생각이 모자라는 자들을 대표하니, 저희가 기쁜 소식을 들었을 때 기쁨으로 메시지를 받아들이지만, 깊이 이해하기까지 진리가 아무런 진짜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 때문에 저희의 헌신은 시련(試鍊)과 박해에 부딪쳐서 잠시 있다 없어지나이다. 시련이 닥쳐올 때 이 신자들은 넘어지고, 유혹받을 때 저버리나이다. 가시나무 사이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세상의 걱정거리와 속이는 재산으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에 숨통을 막아서 열매 맺지 못하도록 버려 두는 자를 가리키나이다. 자, 좋은 땅에 떨어지고 싹이 나서, 30배, 60배, 100배 정도 열매 맺은 씨앗은, 진리를 들었을 때―저희의 다른 지적(知的) 자질 때문에―다른 정도로 이해하며 진리를 받아들이고, 따라서 다른 정도의 이 종교적 체험을 나타내는 자들을 대표하나이다.”

베드로가 비유를 풀이한 것을 들은 뒤에, 예수는 다른 사도들에게 제안이 없는가 물었다. 이 초청에 오직 나다니엘이 응답하여 말했다: “주여, 시몬 베드로가 그 비유를 풀이한 것에 많은 좋은 것을 인정하지만, 그와 의견이 완전히 같지는 않나이다. 이 비유에 대하여 내가 가진 생각은 이러하나이다: 씨앗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대표하며, 씨 뿌리는 자는 하늘나라의 사자들을 나타내나이다. 길가에 굳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그 메시지에 관심 없는 자와 마음이 굳어진 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조금만 들은 자를 대표하나이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을 채어 간 하늘의 새들은 사람의 생활 버릇, 악의 유혹, 육체의 욕구를 나타내나이다. 돌 틈에 떨어진 씨앗은 새로운 가르침을 재빨리 받고, 이 진리에 부끄럽지 않게 사는 데 생기는 어려움과 현실에 부딪쳤을 때, 진리를 마찬가지로 재빨리 포기하는 감정적인 혼들을 나타내고, 저희는 영적 이해가 모자라나이다. 가시나무 사이에 떨어진 씨앗은 복음의 진리에 마음이 끌리는 자를 대표하는데, 가르침을 따를 생각이 있어도, 인생의 자부심, 질투, 시샘, 그리고 인간 존재에서 생기는 걱정으로 방해를 받나이다. 좋은 땅에 떨어지고, 싹이 나서, 30배, 60배, 100배 정도 열매 맺는 씨앗은 다른 자질의 영적 빛을 소유한 남녀들이 진리를 알아듣고 그 영적 가르침에 반응하는 능력, 자연스럽고 정도가 다른 능력을 대표하나이다.”

나다니엘이 말을 마치자, 사도들과 그 동료들은 심각한 토론에 빠졌고 진지하게 논쟁에 들어갔는데, 더러는 베드로의 해석이 옳다고 우기고, 한편 거의 같은 수는 나다니엘의 해석을 변호하려 했다. 그 동안에 베드로나다니엘은 집으로 물러갔고, 거기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확신시키고 생각을 바꾸게 하려고 힘차고 굳세게 노력했다.

주는 이 혼란에서 가장 맹렬한 표현이 튀어나오는 때가 지나도록 버려 두었고, 그리고 나서 손바닥을 치고 그들을 주위에 불렀다. 모두 다시 한 번 주위에 모이자 말했다: “내가 이 비유에 대하여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누구라도 할 말이 있느냐?” 한 순간 침묵이 흐른 뒤에, 토마스가 입을 열었다: “예, 주여, 내가 몇 마디 하고자 하나이다. 한 번 당신이 바로 이것을 조심하라고 우리에게 이르신 것을 나는 기억하나이다. 우리가 설교하려고 예를 들 때, 우리는 우화(寓話)가 아니라, 참

이야기를 써야 하며,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바라는 핵심적이고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진리를 보여 주기에 가장 적당한 이야기를 골라야 한다는 것, 그 이야기를 그렇게 이용하고 나서, 그 이야기에 들어간 모든 자질구레한 세부를 영적으로 적용하려고 애써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나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 비유를 풀이하려는 시도에서 베드로나다니엘은 모두 틀렸나이다. 이렇게 하는 저희의 능력을 내가 칭찬하지만, 자연 비유가 그 모든 세부(細部)에서 영적으로 비슷한 것을 낳게 하려는 모든 그러한 시도는, 혼란을 일으키고 그런 비유의 참 목적을 심각하게 오해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이라고 나는 똑같이 확신하나이다. 한 시간 전에 우리 모두가 한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따로 두 집단으로 나누어진 사실이 내가 옳음을 넉넉히 증명하나이다. 두 집단이 이 비유에 관하여 다른 의견을 가졌고, 너무나 열심히 그런 의견을 가져서, 그것이 내 생각에는, 당신이 이 비유를 군중에게 발표할 때, 또 나중에 우리에게 논평하라고 요청했을 때, 당신이 의도했던 큰 진리를 우리가 충분히 깨닫는 능력에 방해가 되나이다.”

토마스가 한 말은 모두에게 찬물 끼얹는 효과를 가졌다. 예수가 이전에 여러 번 가르친 것을 생각나게 했고, 예수가 다시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안드레가 일어나서 말했다: “내 생각에는 토마스가 옳다고 보나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그가 무슨 의미를 붙이는지 그가 일러 주기를 바라나이다.” 예수토마스에게 말하라고 손짓한 뒤에, 그는 말했다: “형제들아, 나는 이 토론을 길게 끌기를 바라지 않지만, 너희가 바란다면 말하리니, 내 생각에는 한 가지 큰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주가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지라. 우리가 아무리 충실하고 효과적으로 신성한 임무를 집행한다고 해도, 하늘나라 복음을 가르치는 데에는 다른 정도의 성공이 따르리라는 것, 모든 그런 결과의 차이는 직접적으로, 베푸는 봉사의 상황에 본래부터 있는 조건 때문이요, 그러한 조건을 거의 또는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느니라.”

토마스가 말을 마치고 나서, 동료 설교자들의 대다수는 쉽게 동의하려 했고, 베드로나다니엘조차도 그와 말하려고 가고 있었는데, 그 때 예수가 일어나서 말했다: “잘했도다, 토마스야, 너는 비유의 참 의미를 헤아렸도다. 그러나 베드로나다니엘이 내 비유로부터 우화를 만들려고 시도하는 위험을 아주 넉넉히 보여 주었으니, 저희는 똑같이 잘했느니라. 마음 속에서 때때로 너희가 그렇게 추측하는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 것이 유익할까 하지만, 대중을 가르치는 일의 일부로서 그런 결론을 제공하려고 애쓸 때 너희는 잘못하느니라.”

긴장이 풀렸기 때문에, 베드로나다니엘은 서로의 해석을 축하했고, 알패오 쌍둥이를 빼고, 사도들은 각자 그 날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과감하게 풀이해 보려고 했다. 가룟 유다조차도 매우 그럴듯한 해석을 내놓았다. 열둘은 때때로, 자기들끼리, 우화를 풀이하듯, 주가 말씀하신 여러 비유를 이해하려고 애쓰곤 했지만, 다시는 결코 그런 추측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것은 사도들과 그 동료들에게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고, 이 때부터 계속 대중을 가르치는 것과 연결하여, 예수가 비유를 점점 더 이용했기 때문에 더군다나 그랬다.

3. 비유에 대하여 더 말씀하심

사도들의 머리는 비유에 파묻혀 있었고, 너무 그래서 다음 날 저녁 전부가 비유를 더 토론하는 데 쓰였다. 예수는 저녁 회의를 이 말씀으로 서두(序頭)를 꺼냈다:

“사랑하는 자들아, 진리를 발표하는 것은 너희 앞에 있는 지성과 마음에 맞도록 반드시 가르침을 다르게 만들어야 하느니라. 다른 지능과 성질을 가진 대중 앞에 설 때, 각 등급의 듣는 사람들을 위하여 다른 말씀을 할 수 없지만, 가르침을 전하는 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느니라. 각 무리, 아니 각 개인조차, 자신의 지적·영적 자질에 따라서 너희의 비유를 제 나름대로 풀이할 수 있느니라. 너희의 빛이 빛나게 해야 하지만 지혜롭고 신중하게 그렇게 하여라. 아무도 등불을 켤 때, 그릇으로 덮거나 침대 밑에 두지 않고 등불을 받침 위에 두나니, 거기서 모두가 그 빛을 볼 수 있느니라.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나라에서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아야 할 것은 하나도 감춰지지 않았고, 궁극에 알려져서는 안 될 비밀이 하나도 없느니라. 궁극에는 이 모든 것이 빛에 드러나리라. 군중, 그리고 군중이 어떻게 진리를 듣는가 하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또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자신에게 눈을 돌리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했음을 기억하라: 가진 자는 더욱 받겠고, 가지지 않은 자는 그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마저 빼앗기리라.”

비유에 대한 이어진 토론, 그 해석에 관한 계속된 가르침은 현대의 말투로 다음과 같이 간추리고 표현해도 좋다:

1. 예수는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는 데 꾸며낸 이야기나 우화(寓話)를 쓰지 말라고 조언하였다. 그는 비유, 특히 자연 비유를, 아낌없이 쓰기를 추천했다. 진리를 가르치는 수단으로서, 자연 세계와 영적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이용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강조했다. 자연스러운 것이 “영 실체들의 비현실적이고 휙 지나가는 그림자”라고 자주 언급했다.

2. 예수히브리 성서로부터 서너 가지 비유를 말씀했고, 이 교육 방법이 온통 새롭지는 않다는 사실에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때부터 이용한 바와 같이, 비유는 거의 새로운 교육 방법이 되었다.

3. 사도들에게 비유의 가치를 가르치면서, 예수는 다음 몇 가지에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비유는 광대하게 다른 수준의 지성과 영에게 동시에 호소하는 힘을 마련해 준다. 비유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분별에 도전하며, 비판하는 생각을 촉진한다. 비유는 적대 감정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동정심을 조장한다.

비유는 알려진 것으로부터 알려지지 않은 것을 깨우치는 곳까지 진행한다. 비유는 영적이고 초물질인 것을 소개하는 수단으로서, 물질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을 이용한다.

비유는 치우치지 않은 도덕적 결정을 쉽게 만든다. 비유는 많은 편견을 피하고 새로운 진리를 머리 속에 품위 있게 넣으며, 개인적 분개로 생기는 자기 방어를 최소로 자극하면서 이 모든 것을 이룬다.

비유의 유사성(類似性)에 담긴 진리를 물리치는 것은 의식하는 지적 활동을 요구하며, 사람의 정직한 판단과 정당한 결정을 직접 무시한다. 비유는 듣는 감각을 통해서, 생각을 강요하도록 기여한다.

비유 형태의 가르침을 쓰는 것은 그 선생으로 하여금 새로운, 아니 놀랍기도 한 진리를 내놓게 만들며, 한편 동시에 모든 논쟁을, 전통과 확립된 권한과 겉으로 부딪치는 일을 대체로 피한다.

비유는 또한 나중에 똑같은 익숙한 장면과 마주칠 때, 가르친 진리의 기억을 자극하는 이점을 가진다.

이 방법으로 예수는 대중을 가르칠 때, 따르는 사람들이 점점 더 그가 비유를 쓰는 버릇의 근본적 이유를 많이 알게 하려고 애썼다.

저녁 수업이 끝날 무렵에, 예수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하여 처음으로 논평했다. 그 비유가 두 가지를 언급한다고 했다: 첫째로, 그 때까지 자신이 봉사한 것의 평가였고, 땅에서 여생 동안에 자기 앞에 놓인 것의 예측이었다. 둘째로,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사도들과 다른 하늘나라 사자들이 대대로 봉사하면서 기대할까 싶은 것에 관한 힌트였다.

예수는 또한 그가 한 일이 모두 악령과 악마 임금의 도움을 얻어서 이루어졌다고 가르치는,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의 세심한 노력에 대하여 가능한 최선의 반박으로서, 비유를 쓰는 데 의존했다. 그 시절의 사람들이 모든 자연 현상을 영적 존재들과 초자연 물력이 직접 행위하여 생긴 산물이라고 보았으니까, 자연에 호소하는 것은 그러한 가르침에 대한 반박이었다. 또한 이 교육 방법을 택한 것은 그로 하여금 더 나은 길을 알고 싶어하는 자들에게 중대한 진리를 선포하게 하였고, 동시에 적들이 기분 상하고 그를 고발할 구실을 찾을 기회를 적게 주기 때문이었다.

밤 동안에 그 무리를 해산하기 전에, 예수는 말했다: “이제 내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의 마지막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너희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알려고 너희를 시험하고 싶노라: 하늘나라는 또한 땅에 좋은 씨앗을 던지는 사람과 같으니라. 밤에는 자고 낮에는 일에 몰두하는 동안, 그 씨가 싹트고 자랐고, 비록 어찌 그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으나, 그 식물이 열매를 맺게 되었더라. 처음에 잎이 나고, 다음에 이삭이, 다음에 이삭에서 제대로 알곡이 생겼더라. 그리고 나서 곡식이 익었을 때, 낫을 휘둘렀고 추수가 끝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여러 번 사도들은 머리 속에서 이 말씀을 숙고해 보았지만, 주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덧붙인 이 말씀을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4. 바닷가에서 말씀한 다른 여러 비유

이튿날 예수는 다시 배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며 말했다: “하늘나라는 밭에 좋은 씨앗을 뿌린 사람과 같으니라. 그러나 그가 자는 동안, 적이 와서 밀 사이에 잡초를 뿌리고 서둘러 사라졌고, 그래서 어린 잎이 솟아나고 나중에 열매를 맺으려 했을 때 잡초들도 또한 생겼더라. 그러자 이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당신이 좋은 씨앗을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어디서부터 이 잡초들이 오나이까?’ 그가 종들에게 대답하되, ‘적이 이 일을 하였도다.’ 그러자 종들이 주인에게 묻되, ‘우리가 나가서 이 잡초들을 뽑아 버리기를 원하시나이까?’ 그러나 그가 대답하였더라. ‘아니라, 잡초들을 모으면서 너희가 밀까지 뿌리를 뽑을까 두려우니라. 차라리 거둘 때까지 모두 자라게 버려 두라. 그 때 거두는 자들에게 이르리니, 가서 먼저 잡초들을 모으고, 다발로 묶어 불태우고, 그리고 나서 밀을 거두어 내 창고에 저장하라.’”

사람들이 몇 마디 묻고 난 뒤에 예수는 또 다른 비유를 말했다: “하늘나라는 사람이 자기 밭에 뿌린 겨자 씨앗 같으니라. 자, 겨자씨는 씨들 가운데 가장 적으나,

제대로 자라면, 모든 풀 가운데 가장 크게 되고, 나무 같아서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서 쉴 수 있느니라.”

“하늘나라는 또한 누룩과 같으니, 한 여인이 누룩을 가져다가 가루로 세 그릇에 감추어 두었고, 이 방법으로 가루 전부가 부풀려졌느니라.”

“하늘나라는 또한 밭에 감추어진 보물과 같으니라. 한 사람이 보물을 발견하였더니, 기뻐하면서 밭 살 돈을 마련하려고 전 재산을 팔러 갔더라.”

“하늘나라는 또한 참한 진주를 찾고 있는 상인과 같으니, 큰 값어치가 있는 진주를 찾고 나서, 특별한 그 진주를 살 수 있도록 가진 것을 모두 팔려고 나갔더라.”

“또, 하늘나라는 바다 속에 던진 후릿그물 같으니, 온갖 종류의 물고기를 거두었더라. 이제, 그물이 찼을 때, 어부들이 바닷가에 당겨 놓고, 거기에 앉아서 물고기를 추려 내며, 좋은 것은 그릇에 모으고, 나쁜 것은 던져 버렸더라.”

예수는 많은 다른 비유를 군중에게 이야기하였다. 사실은, 이 때 이후로, 이 수단 외에 대중을 가르치는 일이 드물었다. 비유로 공석에서 청중에게 말씀한 뒤에, 저녁 수업 동안에, 사도와 전도사들에게 가르침을 더욱 자세하고 분명하게 풀이했다.

5. 케레사를 방문하다

군중이 그 주 내내 계속 불어났다. 안식일에 예수는 서둘러 산으로 갔지만, 일요일 아침이 다가왔을 때, 군중이 돌아왔다. 베드로가 설교한 뒤에, 예수는 오후에 일찍 말씀했고, 말씀을 마치자 사도들에게 말했다: “내가 군중에 지쳤으니, 우리가 하루를 쉬도록 저편으로 건너가자.”

호수를 건너가는 길에 사납고 갑작스러운 폭풍을 하나 만났는데, 이것은 특히 해마다 이 계절에 갈릴리 바다의 특징이었다. 이 수역(水域)은 해면 밑으로 거의 210미터이고, 특히 서쪽에 높은 둑으로 둘러싸여 있다. 호수로부터 산으로 이끄는 가파른 골짜기들이 있었고, 낮 동안에 호수 위에서 수직(垂直) 기류로 뜨거워진 공기가 올라옴에 따라서, 해가 진 뒤에 골짜기의 식는 공기가 호수로 급히 쏟아져 내려오는 경향이 있다. 이 강풍은 재빨리 오고, 때로는 똑같이 갑자기 사라진다.

바로 그러한 저녁 강풍이 이 일요일 저녁에 예수를 맞은편으로 실어 나르는 배를 낚아채었다. 새로 된 전도사들을 더러 실은 다른 배 세 척이 뒤에서 쫓아오고 있었다. 서쪽 물가에는 폭풍의 증거가 도무지 없었고, 호수의 이 지역에 국한되었는데도 이 폭풍우는 심했다. 바람이 너무 세서 물결이 배 위를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사도들이 돛을 말 수 있기 전에, 센 바람이 돛을 찢어 버렸고, 2.4킬로미터가 조금 넘게 떨어진 해안으로 힘들여 저어 가는 동안, 이제 노에만 전적으로 매달렸다.

그 동안에 예수는 머리 위의 작은 해 가리개 밑에서, 배의 고물에서 잠이 들었다. 벳세다를 떠났을 때 주는 지쳐 있었고, 휴식을 얻으려고 그들에게 배를 띄워 건너편으로 그를 싣고 가라고 지시하였다. 이 왕년의 어부들은 힘세고 노를 젓는 데 노련했지만, 이것은 그들이 일찍이 만난 가장 사나운 강풍의 하나였다. 바람과

물결이 배를 마치 장난감 배처럼 이리저리 던졌어도, 예수는 꼼짝 않고 계속 자고 있었다. 베드로는 고물 가까이 바른편 노를 저었다. 배가 비로소 물로 차자, 베드로는 노를 놓고 예수에게 달려가서, 깨우려고 사납게 흔들었고, 깨어나자 베드로가 말했다: “주여, 우리가 사나운 폭풍 속에 있는 줄 모르시나이까? 우리를 구하지 않으면, 우리가 모두 죽으리이다.”

비오는 속으로 나왔을 때, 예수는 먼저 베드로를 보았고, 다음에 애써서 노 젓는 사람들을 어둠 속으로 들여다보면서, 달아올라서 아직 자기 노로 돌아가지 않은 시몬 베드로를 얼른 돌아보고 예수는 말했다: “어찌하여 모두가 두려움에 가득 차 있느냐? 너희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조용히. 조용히 하라.”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예수의 이 꾸지람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베드로에게 어수선한 혼을 가라앉히려고 평안을 찾으라고 명령하자마자, 그 때 휘저어진 공기가 균형을 찾았으므로, 가라앉아서 크게 고요해졌다. 성난 물결은 거의 즉시 가라앉았고, 검은 구름은 짧은 소나기에 힘을 썼으므로 사라졌으며, 하늘의 별들이 머리 위로 빛났다.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한, 이 모두가 순전히 우연히 일어났다. 그러나 사도들, 더군다나 베드로는, 결코 이 사건을 자연의 기적으로 여기기를 그치지 않았다. 모든 자연 현상이 영 세력과 초자연 존재들에게 직접 지배받는다고 그 시절의 사람들이 굳게 믿었으니까, 자연의 기적을 믿기가 특별히 쉬웠다.

예수는 그들의 불안한 정신을 향하여 말했고, 두려움에 질린 정신에게 이야기했다, 자연에게 말에 복종하라 명하지 않았다고 열두 사도에게 분명히 설명했지만, 아무 쓸모가 없었다. 주를 따르는 자들은 모든 그러한 우연한 일에 자기 해석을 붙이기를 언제나 고집했다. 이 날부터 계속, 고집하여 주가 자연력에 대하여 절대 권력을 가졌다고 간주하였다. 베드로는 어떻게 “바람과 물결조차 그에게 복종하는가” 이야기를 늘어놓는 데 결코 지치지 않았다.

예수와 동료들이 해안에 닿았을 때는 저녁이 늦은 때였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밤이었기 때문에, 모두 배에서 쉬었고, 이튿날 아침 해가 뜨고 조금 있을 때까지 해안으로 가지 않았다. 함께, 거의 40명이 모였을 때, 예수는 말했다: “아버지 나라의 문제들을 우리가 숙고하는 동안, 저쪽 산으로 올라가서, 며칠 동안 머무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