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태도
2. 사람들의 태도
예수는 사람들의 지성을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가 알았고, 그의 가르침이 그가 제시한 그대로 간직되었더라면, 그에 대한 유일한 주석(註釋)이 땅에서 사신 생애를 영감을 받아 해석한 것이니까, 세상의 모든 민족과 종교가 빨리 하늘나라 복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초기 추종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특정한 민족, 종족, 종교가 더욱 받아들이게 만들려고 기울인 노력은, 의도는 좋았지만, 다만 그러한 가르침을 모든 다른 민족, 종족, 종교가 더욱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사도 바울은 당대에 예수의 가르침을 특정한 집단들이 호감을 가지고 주목하도록 만들려는 노력으로, 교육하고 훈계하는 편지를 많이 썼다. 예수의 복음을 가르치는 다른 선생들도 똑같이 그랬지만, 아무도 이 기록들 중에 더러를 예수의 가르침을 구체화한 것으로서 진술하려는 자들이 후일에 한데 모으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이른바 그리스도교가 다른 어떤 종교보다 주의 복음을 더 담고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또한 예수가 가르치지 않은 것이 허다하다. 페르시아의 신비교로부터 온 많은 가르침과 그리스 철학의 많은 것을 그리스도교로 끌어들인 것을 제쳐 놓고도, 두 가지 큰 잘못을 저질렀다:
1. 그리스도교의 속죄(贖罪) 교리―예수가 아버지의 엄격한 정의(正義)를 만족시키고 신의 진노를 달래려고 하는, 희생된 아들이라는 가르침―이 보여 주다시피, 복음의 가르침을 유대인 신학(神學)과 바로 연결하려는 노력. 이 가르침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하늘나라 복음을 받아들이기 더 쉽게 만들려 하는 칭찬할 만한 노력에서 생겼다. 유대인들을 설득하는 데 관련된 한, 이 노력은 실패했어도, 모든 이후 세대에서 많은 정직한 혼을 헛갈리게 하고 떠나게 만드는 데 실패하지 않았다.
2. 주의 초기 추종자들이 저지른 둘째로 큰 잘못, 모든 후일의 세대가 영구하게 지속한 큰 잘못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아주 온통 예수라는 인물에 관하여 체계화한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예수의 인격을 이렇게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그의 가르침을 가리도록 작용했고, 이 모두가 유대인·모하메트교인·힌두교인, 기타 동방(東方)의 종교인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더욱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예수의 이름을 지닐까 싶은 종교에서 예수 본인이 차지하는 자리를 깎아내리고 싶지 않지만, 우리는 그러한 고려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생애가 빛을 잃게 만들거나 유익한 메시지―하나님이 아버지요 사람이 형제임―을 대신하도록 버려 두고 싶지 않다.
예수의 종교를 가르치는 선생들은, 공통으로 지니는 진리를 인정하고서 (이 중에 많은 것이 직접, 간접으로 예수의 메시지로부터 오는데) 다른 종교들에 접근해
야 하고, 한편 지나치게 차이를 강조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바로 그 시절에, 예수의 이름은 주로 치유자로서 얻은 평판(評判)에 달려 있었지만, 계속 그랬다고 할 수는 없다. 시간이 지나자, 갈수록 더 사람들이 영적 도움을 받으려고 찾았다. 그러나 서민들에게 아주 직접, 즉시 호소한 것은 육체의 치유였다. 도덕적 종살이와 정신적 고통의 희생자들이 예수를 더욱 찾았고, 그는 변함없이 구원의 길을 가르쳤다. 아버지들은 아들을 다루는 것에 관하여 조언(助言)을 구했고, 어머니들은 딸을 안내하는 데 도움을 얻으려고 왔다. 어둠 속에 앉았던 자들이 찾아 왔고, 그는 생명의 빛을 드러냈다. 귀는 언제라도 인류의 슬픔을 들으려고 열려 있었고, 언제나 보살핌을 찾는 사람들을 도와 주었다.
창조자 자신이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육신화하여 땅에 계실 때,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너희는 결코 이른바 이 기적이 일어난 것을 통해서 예수를 접근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통해서 기적(奇蹟)에 접근하기를 배우고, 기적을 통해서 예수한테 다가가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나사렛 예수가 땅에서 초물질 행위를 연출한, 유일한 종교 창시자인데도, 이 훈계는 틀림없다.
땅에서 미가엘의 사명에서 가장 놀랍고 혁신적인 특징은 여자들에 대한 태도였다. 공공(公共) 장소에서 남자가 자기 아내에게조차 인사하지 않기로 되어 있던 시절과 세대에, 예수는 셋째 갈릴리 여행과 관련하여, 감히 여자들을 복음 선생으로서 거느리고 갔다. “율법의 말씀을 여자에게 전하는 것보다 불에 태우는 것이 더 낫다”하고 선포했던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을 당면하여 이렇게 하는 최고의 용기를 가졌다.
오랜 세월에 걸쳐 무시되어 잊혀지고 노예 같이 지겨운 일을 하는 상태로부터, 한 세대 안에 예수는 여자들을 구조했다. 후일에 여자에 대한 태도에서 이 고귀한 모범을 따를 도덕적 용기가 모자란 것은 예수의 이름을 주제넘게 가져간 종교에 한 가지 부끄러운 일이다.
예수가 사람들과 섞이는 동안, 사람들은 예수가 도무지 그 시절의 미신에 매어 있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는 종교적 편견이 조금도 없었고, 결코 관대함이 모자라지 않았다. 사회적 적대감과 비슷한 아무 것도 마음 속에 지니지 않았다. 조상의 종교에서 좋은 것에 순응했지만, 미신과 속박과 같은, 사람이 만든 전통을 서슴지 않고 무시했다. 자연의 재난, 뜻밖의 사고, 기타 재앙은 신의 심판이 찾아오거나 섭리의 신비로운 작용이 아니라고 감히 가르쳤다. 의미 없는 예식에 노예처럼 헌신하는 것을 비난했고, 물질적 예배의 오류를 파헤쳤다. 대담하게 사람의 영적 자유를 선포했고, 육체를 가진 필사자들이 정말로, 진실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감히 가르쳤다.
깨끗한 손 대신에 깨끗한 마음을 참된 종교의 표시(表示)로 갈아치웠을 때, 예수는 조상의 모든 가르침을 초월했다. 전통의 자리에 현실을 두었고, 허영과 위선의 모든 허식을 쓸어 버렸다. 그래도 두려움 없는 이 하나님의 사람은 파괴적인 비난을 퍼붓거나, 그 시대의 종교·사회·경제·정치 관습을 모조리 무시(無視)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싸우기 좋아하는 혁명가는 아니었다. 점진적 진화론자였
다. 있어야 할 우수한 것을 동시에 제공할 때에야 이미 있는 것을 없애는 일에 들어갔다.
예수는 추종자들로부터 강요하지 않고서 복종을 얻었다. 그가 친히 부른 자들 중에서 세 사람만 제자가 되라는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마음을 끄는 힘을 행사했지만, 독재자가 아니었다. 자신(自信)에 넘쳐 있었고, 아무도 명령에 분개하지 않았다. 제자들에 대하여 절대 권한을 가졌지만, 결코 아무도 항의하지 않았다. 추종자들이 주라고 부르도록 허락했다.
뿌리 깊은 종교적 편견을 품은 자나 그의 가르침에서 정치적으로 위험한 낌새를 차렸다고 생각한 자들을 제쳐 놓고, 그를 만난 모든 사람이 주를 찬미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의 독창성과 권위에 놀랐다. 처지고 성가시게 구는 질문자들을 다루면서 보인 참을성에 사람들은 감탄했다. 그의 봉사 밑에 들어온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희망과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오직 그를 만나 본 적이 없는 자들이 그를 두려워했고,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마음 속에서 붙들고 있으려고 결심했던 악과 잘못을 뒤집어엎을 운명을 가진 진리를 예수가 옹호한다고 간주한 자들만 그를 미워했다.
그는 친구와 적, 모두에게 강하고 특이하게 환상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군중은 그저 품위 있는 말씀을 듣고 소박한 생활을 구경하려고 몇 주 동안 따라다니곤 하였다. 헌신하는 남녀들이 거의 초인간적 애정으로 예수를 사랑했다. 그를 잘 알면 알수록, 예수를 더욱 사랑했다. 이 모두가 아직도 참말이다. 오늘날도, 또 모든 미래 시대에, 하나님인 이 사람을 알면 알수록, 사람은 더욱 사랑하고 예수의 뒤를 따를 것이다.
3. 종교 지도자들의 적개심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서민들이 호의로 받아들였는데도,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더욱 놀라고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체계 있고 독단적인 신학을 형성하였다. 예수는 경우가 닿는 대로 가르친 선생이었다. 체계 있는 선생이 아니었다. 예수는 율법보다 생활에서, 비유를 들어 가르쳤다. (그의 메시지를 보여 주려고 비유를 썼을 때, 그 목적을 위하여 이야기의 꼭 한 모습을 이용하려고 고안하였다. 예수의 가르침에 관하여 많은 그릇된 아이디어가 그의 비유로부터 우화를 지어내려고 애씀으로 말미암아 생길까 싶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젊은 아브라함이 최근에 전향한 결과로서, 또 베드로에게 세례 받은 세 첩자가 버리고 도망한 것 때문에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는데, 이들은 이제 이 둘째 갈릴리 전도(傳道) 여행에서 전도사들과 함께 나다녔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두려움과 편견에 더욱 눈이 멀었고, 한편 하늘나라 복음의 매력 있는 진리를 계속 물리침으로 마음이 굳어졌다. 사람들이 깃드는 영의 호소에 귀를 막을 때, 그 태도를 고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예수가 벳세다 캠프에서 전도사들을 처음 만났을 때, 연설을 마치면서 말했다: “너희는 몸과 머리 속에서―감정으로―사람들이 개별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느니라. 사람들에게 한 가지 한결같은 것은 깃드는 그 영이라. 신다운 영들이 얼마큼 성질과 그 체험 범위가 다를지라도, 저희는 모든 영적 호소에 한결같이 반응하느니라. 오직 이 영을 통해서, 그 영에게 호소함으로, 인류는 언제라도 통일과 형제 정신을 이룩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유대인의 많은 지도자가 복음의 영적
호소에 마음 문을 닫았다. 이 날부터 계속, 주의 파멸을 계획하고 모의(謀議)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종교범으로서, 유대인의 신성한 율법의 으뜸 가는 가르침을 어긴 자로서, 예수를 잡아들이고 선고(宣告)하고 처형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4. 전도 여행의 진행
이 전도 여행에서 예수는 대중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어쩌다가 머무른 대부분의 도시와 마을에서, 신자들과 함께 저녁 수업을 많이 운영하였다. 이 저녁 시간 중 하나에서 새로 된 어느 전도사가 예수에게 성내는 것에 대하여 물었고, 주는 다른 말씀 중에도 이렇게 대답하였다:
“성내는 것은 무릇, 영적 성품이 지성과 육체의 두 성품을 제어하지 못한 척도를 가리키는 물질적 현상이라. 성내는 것은 너그러운 형제 사랑이 모자라고 자존심과 자제가 모자람을 가리키느니라. 성내는 것은 건강을 소모하고, 지성을 낮추며, 인간 혼을 가르치는 영 선생에게 장애가 되느니라. ‘진노(震怒)가 어리석은 사람을 죽이니라,’ 사람은 ‘성이 나서 스스로를 상하느니라’ 함을 너희가 성서에서 읽지 아니하였느냐? ‘성내는 데 더딘 자는 큰 이해심을 가졌고’ 한편 ‘급히 성내는 자는 어리석음을 찬양하느니라’ 하는 것을? ‘부드러운 대답이 진노를 거두느니라,’ 그리고 어떻게 ‘모진 말이 진노를 건드리는가,’ ‘신중함은 진노를 늦추며,’ 한편 ‘자신을 제어할 줄 모르는 자는 담이 없고 방어할 수 없는 도시와 같다’ 함을 너희가 아느니라. ‘진노는 잔인하며 성내는 것은 무례하니라.’ ‘성난 사람들은 싸움을 부채질하고, 격노한 자는 계율을 많이 어기느니라.’ ‘정신이 서둘지 말지니, 진노가 바보들의 가슴 속에서 쉬는 까닭이라.’” 말씀을 그치기 전에, 예수는 이어서 말했다: “신의 아들 지위와 어울리지 않게 동물처럼 진노를 터뜨리는 경향으로부터 영 안내자가 너희를 구원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도록, 사랑이 너희 마음을 지배하게 하여라.”
바로 이 기회에 주는 그 무리에게 잘 균형된 인격을 소유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에 대하여 말씀하였다. 대부분의 사람은 어떤 직업을 통달하는 데 헌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예수는 인정했다. 하지만 지나친 전문화를 향하고, 인생의 활동에서 편협하고 제한되는 쪽으로 가는 모든 경향을 한탄했다. 어떤 미덕(美德)도 실천이 지나치면, 악덕(惡德)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예수는 늘 절제를 외치고 일관성―생활 문제를 균형 있게 조정하는 것―을 가르쳤다. 지나친 동정심과 불쌍히 여기는 태도는 심각한 감정의 불안정으로 퇴화할 수 있다, 열심은 계속하여 광신(狂信)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예수는 옛 동료들 중 하나에 관하여 논의했는데, 그의 상상력은 환상적이고 쓸모 없는 사업으로 이끌었다. 동시에 예수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평범(平凡)의 단조로움이 주는 위험을 경고하였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용기와 믿음의 위험에 대하여, 어떻게 때때로 이것들이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들을 무모(無謀)하고 주제넘게 만드는가 강론하였다. 또한 어떻게 조심과 신중(愼重)이 너무 지나치면 비겁과 실패로 이끄는가 보여 주었다. 말씀 듣는 자들에게 비정상으로 가는 모든 성향을 피하면서, 독창성을 얻으려 애쓰라고 훈계하였다. 감상적이 되지 않고 동정심을 보이며, 신성한 체하지 않으면서 경건하라고 타일렀다. 두려움과 미신에 매이지 않는 경외(敬畏)를 가르쳤다.
동료들에게 감명을 준 것은 예수가 균형된 인격에 대하여 가르친 것이라기보다 자신의 일생이 가르침을 웅변으로 말하는 본보기였다는 사실이었다. 긴장과 폭풍 한가운데서 살았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적들은 계속 덫을 놓았지만, 결코 그를 옭아매지 못했다. 지혜롭고 학식 있는 자들이 그를 걸려 넘어지게 하려고 애썼지만, 넘어지지 않았다. 그를 토론에 말려들게 하려 했지만, 그의 대답은 언제나 사람을 깨우치고, 위엄이 있고 단호하였다. 강론하다가 가지가지의 물음으로 중단되었을 때, 그의 대답은 언제나 의미가 깊었고 최종이었다. 적들의 계속된 압력에 맞서면서, 한 번도 비열한 술수에 기대지 않았고, 그들은 서슴지 않고 온갖 종류의 거짓되고 부당하고 옳지 않은 형태로 공격을 퍼부었다.
많은 남녀가 생계를 잇는 직업, 어떤 분명한 업무에 부지런히 힘쓰는 것이 참말이지만, 그런데도 땅에서 사는 대로, 인생에 대하여 두루 문화적 지식을 개발하는 것이 온통 바람직하다. 참으로 교육받은 사람들은 동료의 생활과 행적에 무지한 채로 있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