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물고가를 들어올림

뉴징검다리 2010. 2. 10. 05:56

1. 물고기를 들어올림

바로 이 주, 금요일 아침에, 예수가 바닷가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사람들이 물가에 너무 가까이 그를 밀어붙여서, 가까이 있는 배에 타고 있던 어떤 어부들에게 구조(救助)하러 오라고 손짓했다. 배에 들어서서, 모인 군중에게 두 시간이 넘도록 줄곧 가르쳤다. 이 배는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시몬 베드로가 예전에 고기잡이하던 배였고, 예수가 손수 만들었다. 이 특별한 날 아침에 다윗 세베대와 두 동료가 그 배를 쓰고 있었고, 호수에서 고기잡이하느라고 헛되이 밤을 새다가, 물가 가까이로 막 들어왔다. 예수가 도움을 청했을 때, 그들은 그물을 청소하고 수선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마친 뒤에 예수다윗에게 말했다: “나를 도우려고 와서 너희가 지체되었으니, 내가 너희와 함께 일할까. 고기를 잡으러 가자. 저쪽 깊은 데로 배를 띄워, 그물을 내려서 한 번 끌어당기라.” 그러나 다윗의 조수들 중의 한 사람, 시몬이 대답했다: “주여, 소용 없나이다.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했고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나이다. 그러나 당신이 명령하시니, 우리가 배를 띄워 그물을 내

리리이다.” 시몬은 주인 다윗이 손짓했기 때문에 예수의 지시를 따랐다. 예수가 가리킨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렸고, 물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서 그물이 찢어질까 두려웠다. 하도 많아서 물가에 있는 동료들에게 도와 달라고 손짓했다. 배 세 척 모두를 거의 가라앉도록, 물고기로 채웠을 때, 이 시몬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서 말했다. “나를 떠나소서, 주여, 내가 죄 많은 사람인 까닭이니이다.” 시몬과 이 에피소드에 관계된 모든 사람이, 얼마나 많이 물고기를 잡았는가 놀랐다. 그 날부터 다윗 세베대와 이 시몬과 그 동료들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기적으로 물고기를 들어올린 것이 아니다. 예수는 자연을 자세히 보는 연구자였다. 노련한 어부였고, 갈릴리 바다 물고기의 습성을 알았다. 이 경우에 다만 하루 중 이 때에 물고기가 보통 발견되는 곳으로 이 사람들에게 가라고 지시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언제나 이것을 기적으로 여겼다.

2. 오후에 회당에서

다음 안식일, 회당에서 오후 예배 때, 예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관하여 설교했다. 아침에 시몬 베드로는 “하늘나라”에 대하여 설교했다. 그 전에 회당의 목요일 저녁 모임에서 안드레가 가르쳤고, 그의 주제는 “새 길”이었다. 이 특별한 시기에, 땅에서 다른 어느 도시보다 가버나움에서 더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

이 안식일 오후에 회당에서 가르치면서, 예수는 관습을 따라서 처음 구절을 율법에서 골라, 출국기(出國記)로부터 읽었다: “너는 주 너희 하나님을 섬기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의 빵과 물에 복을 내리겠고, 모든 병이 너희에게서 제거되리라.” 예언서에서 둘째 구절을 골라서, 이사야에서부터 읽었다: “일어나서 빛을 내라, 이는 네 빛이 다가왔고, 주의 영광이 네 위에 올라왔음이라. 어둠이 땅을 덮고 큰 어둠이 사람들을 덮을지 모르나, 주의 영이 네 위에 올라오겠고, 신의 영광이 너와 함께 계심이 보이리라. 이방인들조차 이 빛으로 다가오고, 많은 위대한 사람이 이 빛의 밝음에 항복할지니라.”

이 설교는 예수 편에서 종교가 개인적 체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려는 노력이었다. 다른 여러 가지 가운데 주는 말씀했다:

“너희가 잘 알다시피, 친절한 마음을 가진 아버지는 가족 전체를 사랑하지만, 그 가족의 개별 구성원을 깊이 사랑하는 까닭에, 그들을 한 무리로서 그렇게 여기시느니라. 너희는 이제 더 이스라엘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접근해야 하느니라. 한 무리로서, 너희는 정말로 이스라엘의 자손이지만, 개인으로서 너희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자식이라. 아버지이스라엘의 자손에게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과 그의 사랑과 자비의 계시를 진정한 개인 체험으로서 개별 신자에게 가져오려고 내가 왔노라. 야웨가 그의 민족을 보살피고, 하나님이스라엘을 사랑한다고 선지자들이 다 너희를 가르쳤느니라. 그러나 더욱 큰 진리를 선포하려고 내가 너희 가운데 왔노니, 하나님를―너희 하나하나를―개인으로서 사랑한다는 이 진리를 많은 후기 선지자가 또한 깨달았느니라. 이 모든 세대에 걸쳐 너희는 민족이나 종족의 종교가 있었으나, 이제 너희에게 개인의 종교를 주려고 내가 왔노라.

“그러나 이것조차도 새로운 생각이 아니라. 선지자들 중에 더러가 그렇게 너희에게 가르쳤은즉, 너희 사이에 영적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이 이 진리를 알았느니라. 성서에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읽지 아니하였느냐? ‘그 시절에 저희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되 아이들의 이가 시다 하고 사람들이 더 말하지 않으리라. 사람마다 자신의 불의(不義) 때문에 죽으리라.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이가 시리라. 보라, 내가 에집트 땅으로부터 그 조상을 데리고 나올 때 저희와 한 약속에 따라서가 아니라, 새 방법으로, 내가 내 민족과 새 언약을 맺는 날이 이르리라. 나는 내 율법을 저희의 가슴 속에 쓰기까지 하리라. 나는 저희의 하나님이 되겠고 저희는 내 민족이 될지니라. 그 날에 한 사람이 이웃에게, 네가 주를 아느냐? 말하지 않으리라. 아니라! 이는 가장 작은 자로부터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저희가 모두 나를 개인적으로 알게 될 것임이라.’

“이 약속을 너희가 읽지 아니하였더냐? 너희는 성서(聖書)를 믿지 아니하느냐? 선지자의 말씀이 바로 오늘날 너희가 바라보는 것에서 이루어짐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종교를 마음의 일로 만들고, 너희 자신이 하나님께 개인으로서 이야기하라고 예레미야가 너희에게 훈계하지 않더냐? 하늘의 하나님은 너희 개인의 가슴을 훑어보리라고 그 선지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더냐? 자연스러운 인간의 마음은 무엇보다도 속이는 성향이 있고, 때로는 절망적으로 사악하다고 너희가 경고를 받지 아니하였느냐?

“종교가 너희 개인의 체험에서 현실이 되어야 한다고 에스겔이 바로 너희 조상에게 가르친 곳을 또한 읽지 아니하였느냐?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더니 아이들의 이가 시더라’하는 속담을 너희가 이제 더 쓰지 아니하리라. 주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확실히, 보라 모든 혼이 내 것이로다, 아버지의 혼처럼 아들의 혼도 마찬가지라. 오로지 죄짓는 혼이 죽을지니라.’ 그리고 나서 에스겔은 오늘날까지도 미리 보았으니, 그가 하나님을 지지하여 말했더라: ‘내가 또한 새로운 마음을 너희에게 줄 것이요, 새 영을 너희 안에 두리라.’

“한 개인이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이 한 민족을 벌하리라고 두려워해서는 안 되느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한 민족이 지은 죄 때문에 믿는 자녀들 가운데 하나를 벌하지도 아니하리라. 하지만 어떤 가족의 개별 구성원도 가족의 잘못과 집단의 위반(違反)에서 생기는 물질적 결과를 흔히 겪느니라. 더 좋은 나라―즉 더 좋은 세계―의 희망이 개인의 진보와 각성과 분리할 수 없음을 깨닫지 못하느냐?”

다음에, 주는 사람이 이 영적 자유를 헤아린 뒤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땅에 있는 자녀들이 파라다이스 생애에서 영원한 상승을 시작하기를 뜻하시며, 그 생애는 창조자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알고, 그와 같이 되려고 애쓰라는 재촉, 깃드는 영의 신성한 재촉에 생물이 의식하여 반응하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사도들에게 이 설교는 크게 도움이 되었다. 모두가 하늘나라의 복음이 민족이 아니라 개인을 향한 메시지임을 아주 충분히 깨달았다.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익숙하기는 했어도, 이 안식일에 하신 설교를 듣고 놀라워했다. 그는 정말로, 서기관이 아니라, 권한을 가진 자로서 가르쳤다.

예수가 말씀을 막 마쳤을 때, 회중 가운데 말씀에 아주 흥분한 어느 젊은이가 사나운 간질의 발작에 빠져서 크게 소리쳤다. 발작이 끝났을 때, 정신을 차리면서, 꿈 같은 상태에서 말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요, 당신은 우리를 죽이러 왔나이까?” 예수는 사람들에

게 조용히 하라 명하고, 젊은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 “거기서 나오라”―그는 즉시 깨어났다.

이 젊은이는 더러운 영이나 악마에 들려 있지 않았다. 평범한 간질로 고생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기의 질병이 악한 귀신에 들렸기 때문이라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이 가르침을 믿었고, 자기 병에 관하여 생각하고 말한 모든 면에서 그에 따라서 행동하였다. 사람들은 그런 현상의 직접 원인은 더러운 영들의 존재라고 모두 믿었다. 따라서 예수가 이 사람한테서 악마를 내쫓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때 예수는 그 간질을 고치지 않았다. 그 날 더 있다가 해가 지기까지, 이 사람은 정말로 고침을 받지 않았다. 오순절(五旬節) 날이 오래 지난 뒤에, 예수의 행적을 마지막으로 기록한 사도 요한은 이른 바 “악마를 내쫓는” 이 행위에 대한 언급을 모두 피했고, 악마에 들린 그런 경우가 오순절 뒤에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사실에 비추어 그렇게 했다.

이 평범한 사건의 결과로, 예수가 한 사람에게서 악마를 쫓아냈고 오후 설교를 마칠 때 회당에서 기적으로 그 사람을 고쳤다는 보고(報告)가 가버나움을 통해서 빨리 퍼졌다. 안식일은 깜짝 놀랄 그런 헛소문이 빠르고 효과적으로 퍼지기에 꼭 맞는 때였다. 이 보고는 또한 가버나움 둘레의 모든 작은 촌락까지 전해졌고, 많은 사람이 믿었다.

세베대의 큰 집에서 예수와 열두 사도가 본부를 차렸는데, 거기서 요리와 집안 일은 대체로 시몬 베드로의 아내와 장모가 맡았다. 베드로의 집은 세베대의 집 가까이 있었고, 예수와 친구들은 회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거기에 들렸는데, 베드로의 장모가 몸이 떨리고 열이 나서 며칠 동안 아팠기 때문이었다. 예수가 서서 이 아픈 여인을 내려다보고, 손을 만지고 이마를 쓰다듬으며, 위로하고 힘주는 말씀을 할 무렵에, 어쩌다가 그 열이 떠났다. 예수는 아무 기적(奇蹟)이 회당에서 일어나지 않았다고 사도들에게 설명할 겨를이 아직 없었다. 이 사건이 머리 속에 아주 새롭고 눈에 선하였고, 가나에서 있었던 물과 포도주를 상기하면서, 그들은 이 우연을 또 하나의 기적이라고 잡아챘고, 더러는 달려나가서 도시 전역에서 널리 그 소식을 퍼뜨렸다.

베드로의 장모 아마타는 말라리아 열병을 앓고 있었다. 이 때 기적으로 예수에게 치유받지 않았다. 세베대의 집 앞뜰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과 연결하여, 그 여자가 치유된 것은 해가 진 뒤, 몇 시간 더 지난 뒤였다.

이 사례(事例)들은, 이적(異蹟)을 찾는 세대와 기적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모든 그런 우연의 일치를 예수가 또 하나의 기적을 행했다고 선포하는 핑계로서 어김없이 이용하는 전형적 방식이다.

3. 해 질 때 병 고침

예수와 사도들이 사건이 많았던 이 안식일이 저물 무렵에, 저녁을 먹으려고 준비할 때가 되자, 온 가버나움과 그 주위는 병을 고친 이 소문난 기적에 시끌벅적했다. 해가 지자마자, 아프거나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 예수에게 가거나, 친구들에게 몸을 실어 나르게 하려고 준비를 시작했다. 유대인의 가르침에 따르면, 안식일의 거룩한 시간에는 병의 치유을 추구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따라서 해가 지평선 밑으로 가라앉자마자, 병든 남녀와 아이들 수십 명이 벳세다세베대 집을 향하여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해가 이웃 집 뒤로 지자마자, 중풍이 든 딸과 함께 길을 떠났다.

하루 전체의 사건들이 이 놀라운 해질녘 장면을 위하여 무대를 준비했다. 오후설교를 위하여 예수가 이용한 구절조차 질병(疾病)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했다. 그는 그러한 전례 없는 힘과 권한을 가지고 말씀했다! 그의 말씀은 사람을 꼭 붙들었다! 인간의 권한에 아무런 호소를 하지 않았어도, 사람들의 양심과 혼에 직접 말했다. 논리나 율법의 말씨름이나 재치 있는 말에 의존하지 않았어도, 청중의 마음 속에 힘차게 직접, 뚜렷하게, 개인적으로 호소했다.

그 안식일은 예수가 땅에서 산 생애에서, 옳거니, 한 우주의 생애에서, 큰 날이었다. 모든 지역 우주의 의도(意圖)와 목적에서 볼 때, 작은 유대 도시 가버나움네바돈의 참 서울이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손으로 꼽을 몇 유대인만 “미움은 두려움의 그림자요, 복수는 비겁의 가면이라”는 말씀, 예수의 설교에서 중대한 끝맺는 말씀을 듣는 존재는 아니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악마의 자녀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복된 말씀을 청중이 잊을 수도 없었다.

해가 진 뒤에 곧, 예수와 사도들이 아직 저녁상 근처에 남아 있는데, 베드로의 아내가 앞뜰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를 들었고, 문으로 가면서 큰 무리의 아픈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 가버나움으로부터 도로(道路)가 예수의 손에서 병 고침을 받으려고 오는 있는 자들로 가득 찼음을 보았다. 이 광경을 보고 나서, 그 여자는 대번에 남편에게 가서 일렀고, 그는 예수에게 알렸다.

세베대의 집 앞문에서 한 발 내디디었을 때, 주는 줄지어 선 인류, 병들고 고통받는 인류를 보았다. 아프고 앓는 인간, 거의 1천 명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그만큼 사람들이 앞에 모여들었다. 거기 있던 자들이 모두 아프지는 않았다. 더러는 병 고침을 받으려는 노력으로, 사랑하는 자를 돕느라고 왔다.

대체로, 자신이 신뢰했던, 우주 행정을 맡은 아들들의 잘못과 그릇된 행동의 결과로서 고통받는 이 사람들, 어른과 아이들의 모습은, 특별히 예수의 인간 마음을 움직였고, 이 인자한 아들 창조자의 신다운 자비로움에 도전했다. 하지만 예수는 순전히 물질적 기적(奇蹟)의 기초 위에 오래 가는 영적 운동을 결코 세울 수 없음을 잘 알았다. 창조자 특권의 전시(展示)를 삼가는 것이 그의 일관적인 정책이었다. 가나 이후에 초자연이나 기적 같은 것이 그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 그래도 고통받는 이 군중은 그의 동정심을 움직였고, 이해심을 가진 그의 사랑에 힘차게 호소했다.

앞뜰에서 한 사람이 외쳤다: “주여, 말씀을 하시고, 우리의 건강을 회복하소서, 우리 병을 고치고, 우리의 혼을 구원하소서!”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육신이 된 이 우주 창조자를 항상 따라다니던 세라핌, 물리 통제자, 생명 운반자, 중도자들로 이루어진 광대한 수행원이, 군주가 신호(信號)를 내릴 경우에 창조 권능을 가지고 행동하려고 준비했다. 예수의 지상 생애에서, 신의 지혜와 인간의 동정심이 사람의 아들의 판단 속에서 서로 얽혀서, 아버지의 뜻에 호소함으로 피난처를 찾은 순간이었다.

도와 달라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베드로가 주께 애원했을 때, 예수는 병든 무리를 내려다보고 대답했다. “나는 아버지를 드러내고 그의 나라를 세우려고

세상에 왔고, 이 목적을 위하여 내가 이 시간까지 생애를 살았느니라. 그러므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이라면,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는 데 헌신하는 것과 어긋나지 않는다면, 내 아이들이 온전하게 된 것을 보고 싶노라― 그리고―” 그러나 더 하신 말씀은 떠들썩한 가운데 파묻혔다.

예수는 병 고치는 이 결정의 책임을 아버지의 판결에 넘겼다. 분명하건대, 아버지의 뜻은 아무런 반대를 내세우지 않았으니, 주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예수성격화된 생각 조절자의 지휘 밑에 일하는 하늘 성격자들의 집합이 힘차게 술렁거렸기 때문이다. 병자들이 뒤섞인 이 무리 한가운데로 광대한 수행원들이 내려왔고, 어른과 아이들 683명이 한 순간에 온전하게 되었으며, 모든 육체의 병과 기타 물질적 질환(疾患)을 완전히 고침받았다. 그 날 이전이나 이후에, 결코 그런 장면을 땅에서 구경하지 못했다. 병 고치는 이 창조적 물결을 구경하려고 거기에 있던 우리에게, 이것은 정말로 가슴 떨리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고 기대하지 않던 초자연적 치유가 이렇게 일어난 데 놀란 모든 존재 가운데, 예수가 가장 놀랐다. 인간적 관심과 동정심이 앞에 펼쳐진 고통과 질병의 장면에 집중되었을 때, 어떤 조건과 어떤 상황 아래서, 아들 창조자가 가진 창조 특권의 시간 요소를 제한하기가 불가능함에 대하여, 성격화된 조절자가 타이르던 경고를 인간 지성은 미처 기억하지 못했다. 예수아버지의 뜻을 이로서 어기지 않는다면, 이 고통받는 사람들이 온전히 되는 것을 보고 싶었다. 예수성격화된 조절자는 그런 창조 에너지 행위는 그 때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을 어기지 않으리라고 순식간에 판결했고, 그런 결정에 따라서―병 고치려는 소망을 예수가 앞서 표현한 데 비추어―그 창조 행위는 이미 지난 일이었다. 아들 창조자가 바라고 아버지뜻하시는 것은 존재한다. 그 뒤에 예수가 땅에서 산 여생 전체에서 그렇게 집단으로 사람들의 육체를 치유한 일은 다시 있지 않았다.

너희가 혹시 기대할까 싶은데, 가버나움벳세다에서 해 질 때 사람들을 고쳤다는 이 소문은 온 갈릴리유대에 두루, 또 그 지역을 지나서 퍼졌다. 다시 한 번 헤롯은 두려워졌고,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을 보고하고 그가 이전의 나사렛 목수인가, 아니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세례자 요한인가 확인하라고 감시자들을 보냈다.

육체의 치유를 뜻하지 않게 이렇게 나타내 보였기 때문에 주로, 이 때부터 땅에서 여생 동안 내내, 예수는 설교자일 뿐 아니라 의사가 되었다. 계속 가르친 것이 참말이지만, 몸소 한 일은 대체로 병자와 괴로운 자를 보살피는 것이었고, 한편 사도들은 대중에게 설교하고 신자들에게 세례 주는 일을 했다.

그러나 해질녘에 신의 에너지가 전시되었을 때 초자연적으로, 또는 창조적으로 육체의 병을 치유받은 자들의 대다수는, 이 특별한 자비의 명시(明示)에 영구하게 영적 소득을 얻지 않았다.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은 이 육체적 보살핌으로부터 참으로 훈육을 받았지만, 시간 들이지 않고 창조적인 치유가 이렇게 놀랍게 일어난 것 때문에, 영적인 나라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진전되지는 않았다.

땅에서 예수의 사명에 이따금 따랐던 병 고치는 이적(異蹟)들은 하늘나라를 선포하려는 계획의 일부가 아니었다. 이 이적들은 신의 자비와 인간의 동정심을 전례 없이 합치는 것과 관련하여, 거의 한없는 창조자 특권을 가진 신다운 존재를 땅에 계시게 하는 데 본래부터 우연히 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편견을 갖게 하는 명성

을 안겨주고 찾지 않던 나쁜 평판을 많이 주었다는 점에서, 이른바 그러한 기적들은 예수에게 많은 문제를 안겨 주었다.

4. 그 뒤 저녁

병의 치유가 이렇게 크게 터지고 나서 저녁 내내, 기뻐하고 행복한 군중은 세베대의 집에 밀어닥쳤고, 예수의 사도들은 감정의 흥분이 절정에 이르렀다. 인간의 관점에서, 이 날은 아마도 예수와 관련을 가졌던 모든 큰 날 중에서도 가장 큰 날이었다. 그 이전이나 이후 어느 때에도 사도들의 희망은 자신 있게 기대하는 그런 경지(境地)까지 솟아오르지 않았다. 바로 며칠 전에, 아직 사마리아 경계 안에 있을 때, 하늘나라가 권능으로 선포될 때가 다가왔다고 예수가 그들에게 일렀고, 그들의 생각에 그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이제 눈으로 보았다. 치유하는 힘이 이렇게 놀랍게 나타나는 것이 시작에 불과하다면, 앞으로 무엇이 다가올 것인가 하는 환상으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예수의 신성에 대하여 남았던 의심은 사라졌다. 어리둥절 황홀한 기쁨에 글자 그대로 취했다.

그러나 예수를 찾았을 때, 그는 눈에 띄지 않았다. 주는 벌어진 일 때문에 마음이 많이 언짢았다. 여러 가지 병을 고침받은 이 어른과 아이들은 저녁까지 늦게 남아 있었고, 감사의 말씀을 드릴까 하여 예수가 돌아오기를 바랐다. 시간이 지나고 예수가 은둔해 있자, 사도들은 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계속 자리를 비우지만 않았다면 그들의 기쁨은 충만하고 완벽했으리라. 예수가 돌아왔을 때, 시간이 늦었고, 병 고치는 에피소드로 혜택받은 거의 모든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예수는 열두 사도와 그에게 인사하려고 남아 있던 다른 사람들의 축하와 찬미를 물리치고, 오직 말했다: “내 아버지가 육체를 고칠 힘이 있는 것보다 오히려 혼을 구원할 힘이 있음을 기뻐하여라. 쉬러 가자, 내일 우리는 아버지의 일을 보살펴야 함이라.”

또 다시, 실망하고 어리둥절하고 슬픈 열두 사람은 쉬러 갔다. 쌍둥이를 빼고, 거의 아무도 그 날 밤에 별로 눈을 붙이지 못했다. 주가 사도들의 기운을 북돋우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무슨 일을 하자마자, 즉시 희망을 박살내고 용기와 열심의 근거를 샅샅이 파괴하는 듯하였다. 어리둥절한 이 어부들이 서로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 오직 한 가지 생각 뿐이었다: “그를 이해할 수 없구나. 이 모두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5. 일요일 이른 아침에

예수도 그 토요일 밤에 잠을 많이 자지 못했다. 세상이 육체적 고통으로 가득 차 있고, 물질적 어려움으로 들끓음을 깨달았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영적 나라를 세우는 사명이, 육체적인 것을 보살피는 데 방해받거나, 아니면 적어도 예속되도록 병자와 고통받는 자를 돌보는 일에 시간을 아주 많이 할애하도록 강요(强要)되는 큰 위험을 숙고해 보았다. 그 날 밤에 예수의 필사 지성을 차지한 이 생각, 그리고 비슷한 생각들 때문에, 그는 날이 새기 오래 전,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아버지와 교통하는 데 가장 좋아하는 한 장소로 혼자서 갔다. 이 이른 아침에 예수가 기도한 주제(主題)는, 필사자의 고통을 직면하여, 영적인 것을 소홀히 하면서 육체적으로 봉사하는 일이 시간을 모두 차지하기까지 신다운 자비와 함께 인간적 동정심

에 그렇게 빠지지 않도록 하려고 지혜와 판단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비록 병자 돌보는 일을 완전히 피하기를 원하지 않았어도, 또한 영적 가르침과 종교 훈련과 같은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개인적으로 예배하기에 적당한 혼자 쓸 방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는 아주 여러 번 산으로 기도하러 갔다.

베드로는 그 날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가 기도하러 나간 뒤에 즉시, 야고보요한을 깨웠고, 세 사람은 주를 찾으러 갔다. 한 시간이 넘도록 찾다가 예수를 찾아냈고, 그가 이상하게 행동하는 까닭을 설명해 달라고 청하였다. 모든 사람이 기쁨에 넘쳐 있고 사도들이 대단히 기뻐하는데, 치유하는 영이 힘차게 퍼부어지는 것이 어째서 그를 불편하게 만든 듯이 보이는가 알고 싶어했다.

네 시간이 넘도록 예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세 사도에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가르치고 그렇게 전시하는 위험을 설명했다. 기도하러 나온 까닭을 털어놓았다. 어째서 아버지의 나라가 이적을 행하고 육체를 치유하는 위에 세워질 수 없는가 하는 참 이유를 개인 동료들에게 분명히 밝히려고 애썼다.

그 동안, 일요일 아침 일찍, 병을 앓는 다른 사람들의 무리와 호기심으로 찾아오는 많은 사람이 세베대의 집 근처에 모여 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수를 만나려고 떠들썩했다. 안드레와 사도들은 너무 당황해서, 열심당원 시몬이 모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안드레는 몇몇 동료와 함께, 예수를 찾으러 갔다. 세 사람과 함께 있는 예수를 찾아냈을 때, 안드레는 말했다: “주여, 당신은 어째서 우리만 군중과 함께 버려 두시나이까? 보소서, 모든 사람이 당신을 찾나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당신의 가르침을 찾은 적이 전에는 없나이다. 지금도 당신이 하신 막강한 일 때문에, 가까이서 멀리서 온 사람들로 집이 둘러싸였나이다. 우리와 함께 저희를 보살피러 돌아가지 않겠나이까?”

이 말을 듣자 예수는 대답했다: “안드레야, 땅에서 내 사명은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이요, 내 메시지는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너와 이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가르치지 않더냐? 그렇다면, 호기심 있는 자를 충족시키려고, 또 징조(徵兆)와 이적 찾는 자들을 만족시키려고 네가 나로 하여금 내 일을 제쳐 놓게 하고 싶어하다니 어인 일이냐? 여태까지 이 사람들 사이에 우리가 있지 않았더냐,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을 들으려고 저희가 무리를 지어 모였느냐? 어찌하여 저희가 와서 지금 우리를 둘러쌌느냐? 저희가 혼의 구원을 받으려고 영적 진리를 받아들인 결과라기보다, 육체의 치유 때문이 아니냐? 특별한 전시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에게 끌릴 때, 저희 가운데 많은 사람은 진리와 구원을 찾으러 오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육체의 병을 고침받고 물질적 문제로부터 구원을 얻어내려고 오는 것이라.

“여태까지 내가 가버나움에 있었고, 회당에서, 바닷가에서, 들을 귀가 있고 진리 받을 마음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였노라. 호기심 있는 이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영적인 것을 제쳐 놓고 육체적인 일을 보살피는 데 바빠지려고 너와 함께 돌아가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복음을 전도하고 아픈 자를 보살피라고 내가 너희를 세웠으나, 내 가르침을 제쳐 놓고 병 고치는 일에 내가 파묻혀서는 안 되느니라. 안드레야, 아니라, 나는 너와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라. 사람들에게 가서, 우리가 저희에게 가르친 것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자유를 기뻐하라고 이르라. 갈릴리의 다른 여러 도시를 향하여 우리가 떠날 준비를 하여라. 거기에는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길이 준비되어

있느니라. 이 목적을 위하여 내가 아버지로부터 왔노라. 그러면 가서, 네가 돌아오기를 내가 여기서 기다리는 동안, 즉시 떠날 준비를 하여라.”

예수가 말씀하시고 나자, 안드레와 동료 사도들은 슬픔에 잠겨 세베대의 집으로 돌아가서 모인 군중을 해산(解散)하였고, 예수가 지시한 대로 여행을 위하여 재빨리 준비했다. 그래서, 서기 28년 1월 18일, 일요일 오후에, 예수와 사도들은 갈릴리의 여러 도시에서 처음으로 정말로 공개적인 대중 전도 여행을 떠났다. 이 첫째 여행에서 여러 도시에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도했지만, 나사렛에 들리지는 않았다.

그 일요일 오후에, 예수와 사도들이 림몬을 향하여 떠난 뒤에 조금 있다가, 아우 야고보유다가 그를 만나러 와서, 세베대의 집에 들렸다. 그 날 한낮 무렵에 유다는 형 야고보를 찾아다녔고, 둘이 예수한테로 가자고 고집했다. 야고보유다와 함께 가기로 찬성했을 때가 되어서, 예수는 이미 떠나 버렸다.

사도들은 가버나움에서 크게 관심을 휘저어 놓고 떠나기가 싫었다. 베드로는 1천 명 이상의 신자들이 세례를 받아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계산했다. 예수는 참을성 있게 말에 귀를 기울였지만, 돌아가는 데 찬성하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고, 그리고 나서 토마스가 동료 사도들에게 말했다. “가자! 주가 말씀하셨느니라. 하늘나라의 신비(神秘)를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없어도 상관 없으니, 우리가 한 가지는 확실하니라.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아무 영광을 찾지 않는 선생을 따르노라.” 마지못해서 그들은 갈릴리의 여러 도시에서 좋은 소식을 전도하려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