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 대한 교훈
7. 가족에 대한 교훈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주간에 가르치고 개인적으로 일하던 바쁜 기간이 지난 뒤에, 예수는 다음 수요일을 베다니에서 사도들과 함께 쉬면서 지냈다. 그 날 오후에 토마스는 한 말씀을 물었고, 이것은 길고도 교육적인 대답을 유도했다. 토마스가 말했다: “주여, 우리가 하늘나라의 대사로서 따로 세움받은 날에, 당신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르시고, 우리의 개인 생활 형태에 관하여 가르쳤나이다. 그러나 우리가 군중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리이까? 하늘나라가 더 충만히 온 뒤에 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이까? 당신의 제자들은 노예를 가져야 하리이까? 당신을 믿는 자들이 가난과 벗하고 재산을 피해야 하리이까? 우리에게 아무 율법과 응보가 없도록 자비만 있어야 하리이까?” 예수와 열두 사도는 토마스의 질문을 논의하면서 오후 내내, 또 식사가 있은 뒤에 그 날 저녁을 전부 보냈다. 여기에 기록할 목적으로 우리는 주의 가르침의 다음 요약(要約)을 제시한다:
예수는 사도들에게 먼저 다음을 분명히 일러 주려고 애썼다. 자신은 땅에서 육체를 입고 독특한 생명을 살고 있다, 열두 사람은 사람의 아들의 수여 체험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았다, 그렇게 같이 일하는 사람으로 그들도 수여 체험 전체에서 많은 특별 제한과 의무를 분담해야 한다고.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깊은 중심과 사람의 혼의 가장 깊은 곳을 동시에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 땅에서 일찍이 산 유일한 사람이라고 어렴풋이 비치는 말씀이 있었다.
예수는 하늘나라가 여기 땅에서 시작하여, 연달아 생명 정거장을 거쳐 파라다이스까지 나아가는 진화적 체험이라고 아주 뚜렷이 설명했다. 저녁이 지나는 과정에서, 하늘나라가 발전하는 어떤 미래 단계에, 그가 영적 권력과 신다운 영광을 입고서 이 세계를 다시 찾아보리라고 분명히 말했다.
다음에 “하늘나라 관념”은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보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런 비유법을 쓴 것은 유대 민족이 하늘나라를 기대했고, 요한이 다가오는 나라라는 표현으로 전도(傳道)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수는 말했다: “또 다른 시대의 사람들은 하늘나라 복음이 가족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제시되었을 때―종교는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사람들이 형제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가르침이라고 사람이 이해할 때―그 복음을 더욱 잘 알아들으리라.” 다음에 주는 땅의 가족에 관하여, 하늘 가족을 보여 주는 예로서 얼마큼 길게 강론(講論)했으며, 두 가지 근본 생활 법칙을 다시 표현하였다: 아버지, 곧 집안의 우두머리를 사랑하는 첫째 계명, 그리고 아이들끼리 서로 사랑하라, 형제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이다.
이 뒤에, 가족 생활의 근본적 특징,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에 이것을 적용하는 데 대하여, 잊지 못할 토론이 뒤따랐다. 예수는 참된 가족이 다음
일곱 가지 사실에 바탕을 둔다고 말했다:
1. 존재의 사실. 성품의 관계, 사람이 서로 비슷한 현상은 가족 안에 단단히 묶여 있다: 아이들은 부모의 어떤 특성을 물려받는다. 아이들은 부모 안에서 뿌리를 가진다. 성격 존재는 부모의 행위에 달려 있다. 아버지와 아이의 관계는 모든 자연에 본래부터 있고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 퍼져 있다.
2. 안전과 쾌락. 참된 아버지는 아이들이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기를 크게 기뻐한다. 숱한 아버지가 아이들의 단순한 필요만 충족시키는 데 만족하지 않으며, 쾌락도 즐겁게 마련해 준다.
3. 교육과 훈련. 지혜로운 아버지는 아들딸의 교육과 적당한 훈련을 주의 깊게 계획한다. 어릴 때 아이들은 후일의 생애에 더 큰 책임을 받으려고 준비된다.
4. 규율과 자제. 멀리 내다보는 아버지는 또한 어리고 미숙한 자식의 필요한 징계, 안내, 교정, 때로는 자제를 위하여 준비한다.
5. 교제와 충성. 애정 있는 아버지는 아이들과 가깝고 사랑하는 관계를 유지한다. 언제나 귀는 간청을 들으려고 열려 있으며, 그들의 어려움을 나누고 어려운 문제에서 늘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아버지는 자식의 진보하는 복지에 더할 나위 없이 흥미를 가진다.
6. 사랑과 자비. 동정심 있는 아버지는 아낌없이 용서하며,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복수하려는 기억을 간직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재판관이나 적이나 채권자와 같지 않다. 진정한 가족은 너그러움·참을성·용서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
7. 미래를 위한 준비. 현세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유산(遺産) 남겨 주기를 좋아한다. 가족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죽음은 오직 한 세대를 끝내고 다른 세대가 시작됨을 표시한다. 죽음은 개인의 생명을 그치게 하지만, 반드시 가족도 그렇게 만들지는 않는다.
몇 시간 동안 주는 가족 생활의 이 모습이 지상의 아이인 사람과 파라다이스 아버지인 하나님의 관계에 적용되는 것을 논의했다. 이것이 결론이었다: “아들이 아버지와 가지는 모든 관계를 내가 완벽하게 아노니, 영원한 미래에 너희가 아들로서 도달해야 하는 모든 것을 내가 지금 이미 도달하였음이라. 사람의 아들은 아버지의 바른 편으로 올라갈 준비가 되어 있고, 그래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가 완전하게 되는 영화로운 진보를 마치기 전에, 너희 모두가 하나님을 보라고 내 안에 길이 더욱 활짝 열려 있느니라.”
이 놀라운 말씀을 들었을 때, 사도들은 예수가 세례 받을 때 요한이 한 선언을 상기했고, 또한 주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뒤에 그들이 전도하고 가르친 것과 연관하여, 이 체험을 또한 눈에 선하게 기억했다.
예수는 신다운 아들, 우주의 아버지가 완전히 신뢰하는 분이다. 아버지와 함께 계셨고 아버지를 완전히 이해한다. 이제 아버지의 마음에 흡족하기까지 땅에서 일생을 살았고, 육체를 입은 이 육신화는 사람을 충분히 이해하게 만들었다. 예수는 완전한 사람이었다. 모든 참 신자가 그 안에서, 그를 통하여, 달성할 운명을 가진 바로 그러한 완전을 이룩했다.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을 사람에게 계시하였고, 자신의 몸 속에 이 땅에서 완전하게 된 아들을 하나님께 내놓았다.
예수는 몇 시간 동안 말씀했지만, 토마스는 아직 만족해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여,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우리를 언제나 친절하고 자비롭게 다루심을 발견하지 못하나이다. 여러 번 우리는 땅에서 가혹하게 고생하고,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받지는 못하나이다. 당신의 가르침의 뜻을 어느 부분에서 우리가 깨닫지 못하나이까?”
예수는 대답하였다: “토마스야, 토마스야, 얼마나 있어야 네가 영의 귀로 듣는 능력을 얻겠느냐? 이 나라는 영적인 나라요, 내 아버지 또한 영적 존재인 것을 헤아리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리겠느냐? 하늘의 영 가족 안에서 너희를 영적 자식으로서 내가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느냐? 내 가르침을 글자 그대로 물질적 일에 적용하지 않고서 내가 땅의 가족을 신성한 관계의 예로 쓰는 것을 너희가 막겠느냐? 머리 속에서 하늘나라의 영적 실체들과 당대의 물질·사회·경제·정치 문제를 분리할 수 없느냐? 내가 영의 언어(言語)를 말할 때, 예를 들 목적으로 평범하고 글자 그대로인 관계를 감히 쓴다고 해서, 내가 의미한 것을 육체의 언어로 풀이하기를 고집하느냐? 아이들아, 부탁하노니, 너희는 영적 나라의 가르침을 노예 제도, 빈곤, 집, 토지와 같은 추한 일에, 인간의 공평과 응보라는 물질적 문제에 그만 적용하여라. 이 현세의 문제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관여할 것이요, 어떤 면에서 그 문제들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는 해도,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를 대표하는 것 같이 세상에서 나를 대표하라고 부름받았느니라. 너희는 영의 나라를 대표하는 영적인 대사(大使)요, 영 아버지의 특별한 대표이라. 이 때가 되어서, 영의 나라에서 충분히 자란 어른으로서 너희를 가르치는 것이 가능해야 하리라. 너희를 겨우 어린아이로서 늘 대접해야 하느냐? 너희의 영적 이해가 결코 자라지 않겠느냐? 그렇다 해도, 육체를 입고서 우리가 가진 관계가 끝나는 바로 그 날까지도, 나는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를 참으리라. 그 때에도 내 영이 너희보다 먼저, 온 세상으로 가리라.”
8. 남쪽 유대 땅에서
4월 말이 되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사이에서 예수에 대한 반대가 너무 현저해져서 주와 사도들은 한동안 예루살렘을 떠나기로 작정했고, 베들레헴과 헤브론에서 일하려고 남쪽으로 갔다. 5월 한 달 모두가 이 두 도시에서, 그리고 둘러싼 마을의 사람들 사이에서, 개인을 상대로 하는 일에 쓰였다. 이 여행에는 아무런 대중 전도가 없었고, 다만 집집마다 방문이 있었다. 얼마 동안, 사도들이 복음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보살폈지만, 예수와 아브너는 엥게디에서 지냈고, 나지르인 거주지를 찾아보았다. 세례자 요한은 이 자리에서 길을 나섰고, 아브너는 이 무리의 우두머리였다. 나지르인 단체의 여러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지만, 고행(苦行)하며 특이한 이 사람들의 대다수는 예수를 하늘이 보낸 선생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가 금식 및 다른 형태의 극기(克己)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을 몰랐다. 대다수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주가 나사렛에서 태어났으리라 짐작했지만, 열둘은 사실을 알았다.
유대의 남부에서 이렇게 머무른 동안은 편안하고 수고의 열매가 풍부히 열린 때였다. 하늘나라에 많은 사람이 늘어났다. 6월초가 되어서,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반대하는 소동이 조용해졌고, 그래서 주와 사도들은 신자들을 가르치고 위로하는 일로 돌아갔다.
예수와 사도들이 6월 내내 예루살렘 안이나 근처에서 보냈어도, 이 기간에 조금도 대중을 가르치지 않았다. 대체로 텐트 안에서 살았고, 그 시절에 겟세마네라고 알려진 그늘진 공원(公園), 즉 동산에 텐트를 세웠다. 이 공원은 올리브 산의 서쪽 비탈에 있었고, 기드론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안식일 주말에 보통 베다니에서 나사로와 그 자매들과 함께 보냈다. 예수는 겨우 몇 번 예루살렘의 담 안으로 들어갔지만, 관심이 있어 묻는 자들의 큰 무리가 그와 이야기하려고 겟세마네로 나왔다. 어느 금요일 저녁 니고데모와 어떤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큰 마음을 먹고 예수를 보러 왔지만, 주의 텐트 입구 앞에서 서 있기까지 했는데, 그 뒤에 두려워서 돌아갔다. 물론, 그들은 예수가 그들이 무엇을 했는가 모두 알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유대인 통치자들이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음을 알았을 때, 예수를 붙잡으려고 준비했지만, 대중을 가르치지 않는 것을 지켜보고, 그들이 이전에 소동을 벌인 것에 겁을 먹었다고 결론을 내렸고, 그를 더 다치지 않고 이렇게 사사로운 방법으로 계속 가르치는 것을 버려 두기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6월 마지막 날까지 일은 조용히 움직였다. 이 때 어떤 시몬이라는 산헤드린 회원이 유대인 통치자들 앞에서 선언한 뒤에, 예수의 가르침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당장에 예수를 체포하려는 새로운 소란이 벌어졌고, 너무나 시끄러워서 주는 사마리아와 데카폴리스의 여러 도시로 물러가기로 결정했다.
제 143 편
사마리아를 거쳐서
서기 27년, 6월말에,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의 반대가 커졌기 때문에, 예수와 열두 사도는 텐트와 자질구레한 개인 용품을 베다니의 나사로 집에 저장하도록 미리 보낸 뒤에, 예루살렘을 떠났다. 북쪽으로 사마리아로 가면서, 안식일 동안 베델에서 머물렀다. 여기서 고프나와 에브라임에서 온 사람들에게 며칠 동안 전도했다. 아리마대와 탐나에서 온 한 시민 집단은 자기네 마을을 방문하라고 예수를 초청하려고 왔다. 주와 사도들은 이 지역에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을 가르치면서 2주가 넘게 보냈다. 여러 사람이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을 들으려고, 안티파트리스만큼 먼 곳에서 왔다.
남부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고,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사도들은 사마리아인에 대하여 많은 편견(偏見)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 유다가 이 사마리아인들을 사랑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7월 마지막 주에 예수와 동료들은 요단 강 가까이, 새 그리스 도시 파사엘리스와 아켈라이스를 향하여 떠나려고 준비했다.
1. 아켈라이스에서 전도하다
8월의 처음 절반 동안 사도 일행은 그리스인 도시 아켈라이스와 파사엘리스에서 본부를 차렸다. 거기서 거의 순전히 이방인―그리스인·로마인·시리아인―모임에게 전도하는 첫 경험을 얻었는데, 거의 아무 유대인도 이 두 그리스인 마을에서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로마 시민들과 접촉하면서 사도들은 다가오는 하늘나라 메시지를 선포하는 데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直面)하고 예수의 가르침에 대하여 새로운 반대에 부닥쳤다. 사도들과 가진 여러 저녁 회의 중 하나에서, 열두 사도가 개인적으로 수고하여 얻은 사람들과 겪은 체험을 되풀이하는 동안, 예수는 하늘나라 복음에 반대하는 이유를 주의 깊게 들었다.
빌립이 내놓은 질문은 그들이 겪는 어려움의 대표적인 것이었다. 빌립은 말했다: “주여, 이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우리의 메시지를 가벼이 여기고, 그러한 가르침은 오직 약자와 노예들에게 어울린다 하나이다. 이방인의 종교는 힘세고 튼튼하고 공격적인 인격을 얻으라고 북돋아 주므로, 우리의 가르침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하나이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수동적인 무저항자, 허약해진 종자로 바꾸려 하고, 이들은 지상에서 곧 멸망하리라 주장하나이다. 주여, 저희는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의 가르침이 하늘 같고 이상적이라고 아낌없이 인정하지만, 우리를 진지하게 다루려 하지 않나이다. 당신의 종교는 이 세상에 맞지 않고, 사람들은 당신이 가르치는 대로 살 수 없다고 주장하나이다. 이제, 주여, 이 이방인들에게 우리가 무어라고 이르리이까?”
토마스, 나다니엘, 열심당원 시몬, 마태가 내놓은 이유, 하늘나라 복음에 대하여 비슷한 반대 이유를 듣고 난 뒤에, 예수는 열둘에게 말했다: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의 사랑하는 성품을 온 인류에게 드러내려고 내가 이 세상으로 왔노라. 형제들아, 그것이 내 사명이라. 오늘날이나 또 다른 세대의 유대인이나 이방인(異邦人)이 내 가르침을 오해함에 상관 없이, 나는 이것 하나를 해내리라. 그러나 신의 사랑조차 심한 징계가 있다는 사실을 지나쳐서 안 되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때때로 아버지로 하여금 생각이 모자라는 자식의 지혜롭지 못한 행위를 삼가도록 재촉하느니라. 아이는 아버지의 제지하는 징계에서 지혜로운 사랑의 동기를 반드시 이해하지는 못하느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파라다이스에 계시는 내 아버지는 사랑의 꽉 붙드는 힘으로 온 우주를 다스리느니라. 사랑은 모든 영 실체 가운데 가장 큰 것이요, 진리는 해방을 주는 계시이지만, 사랑은 최상의 관계이라. 오늘날의 세계를 관리하는 일에 너희 동료 인간들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에는 내가 너희에게 선언하는 복음이 바로 이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 인간이 진보하는 궁극의 목표는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경건하게 인식하는 것과 사람의 형제 정신을 사랑으로 실현하는 것이라.
“그러나 내 복음이 겨우 노예나 약자(弱者)에게 주려고 의도한 것이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렀느냐? 너희, 내가 뽑은 사도들이 약자를 닮았느냐? 요한이 약자 같더냐? 내가 두려움에 노예가 된 것을 너희가 보느냐? 이 세대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이 복음을 전도받은 것이 참말이라. 이 세상의 종교들은 가난한 자를 소홀히 여겼으나, 내 아버지는 사람을 차별하는 분이 아니라. 게다가, 오늘날의 가난한 자는 뉘우치고 아들임을 받아들이라는 부름을 먼저 주목하는 자니라. 하늘나라의 복음은 모든 사람―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인과 로마인, 자유로운 자와 매인 자―에게, 젊은이와 늙은이, 남자와 여자에게, 똑같이 전파되어야 하느니라.
“내 아버지가 사랑의 하나님이요 자비 베풀기를 기뻐한다고 해서, 하늘나라의 봉사가 지루하게 편한 일이라는 생각에 젖지 말라.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것은 모든 시대에 걸쳐서 최고의 모험이요, 영원을 향한 험난한 성취이라. 땅에서 하늘나라에 봉사하는 것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일하는 자들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용감한 남성(男性) 자질을 모두 요구하리라. 너희 가운데 여럿은 이 하늘나라 복음에 충성한 것 때문에 죽음에 빠지리라. 함께 싸우는 친구들이 있어서 너희의 용기가 강화될 때 육체의 싸움터에서 죽기는 쉽거니와, 네 필사의 가슴 속에 소중히 여기는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차분하게, 온전히 혼자서 목숨 버리는 데는 더 높고 깊은 형태의 인간다운 용기와 헌신을 요구되느니라.
“오늘, 믿지 않는 자들은 무저항의 복음을 전도하고, 폭력을 쓰지 않고 생활하는 너희를 비웃을까 싶으나, 너희는 이 나라의 복음을 진지하게 믿는 자들의 긴 대열에서 먼저 나선 자요, 이 가르침에 영웅답게 헌신하여 모든 인류를 놀라게 하리라. 너희와 충성스러운 후계자들은 좋은 소식―하나님이 아버지요 사람들이 형제라는 것―을 외치며 온 세계로 떠나가리니, 저희가 장래 보일 것보다 세계의 어느 군대도 더 큰 용기와 용감을 보인 적이 없느니라. 육체의 용기는 가장 비천한 형태의 용감이라. 지성의 용감은 더 높은 종류의 인간다운 용기이나, 가장 높고 지극한 것은 깊은 영적 실체들을 깨우친 확신에 굳게 충성하는 것이라. 그러한 용기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영웅심이라. 너희는 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요, 진실로 사람의 아들의 개인적인 동료이라.”
이것은 그 기회에 예수가 하신 말씀의 전부가 아니라 연설의 서론이었고, 예수는 이 선언을 확대하고 예를 들면서 아주 길게 말씀을 이었다. 이것은 예수가 일찍이 열두 사도에게 가장 열심히 연설한 것 가운데 하나였다. 주는 확고한 느낌이 눈
에 띄게 사도들에게 말씀한 일이 드물었지만, 이것은 뚜렷한 감정과 더불어, 열심을 나타내며 말씀하신 드문 기회의 하나였다.
사도들이 대중에게 전도하고 개인을 상대로 봉사한 결과는 곧 나타났다. 바로 그 날부터 그들의 메시지는 용기가 백배한 새로운 빛을 띠었다. 열둘은 하늘나라의 새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정신을 계속 얻었다. 이 날 이후로 그들은 다채로운 주의 가르침의 부정적 효력과 수동적(受動的) 명령을 설교하는 일에 그다지 정신을 빼앗기지 않았다.
2. 자제에 대한 교훈
주는 인간의 자제(自制)의 표본, 완전하게 된 표본이었다. 욕설을 듣고 욕하지 않았다. 고통받을 때, 괴롭히는 자에게 위협하는 말을 전혀 뱉지 않았다. 적들에게 비난받았을 때,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올바른 판단에 자신을 맡겼다.
어느 날 저녁 회의에서, 안드레는 예수께 물었다: “주여, 요한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처럼 우리가 극기(克己)를 실천해야 하나이까, 아니면 당신이 가르치는 자제(自制)를 얻고자 애써야 하리이까? 당신의 가르침과 요한의 가르침이 어떤 점에서다르니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요한은 정말로 조상들의 빛과 율법에 따라서 올바른 길을 너희에게 가르쳤고, 그것은 자기 반성과 극기의 종교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자기를 잊고 자제하라는 새로운 메시지를 가지고 오노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내게 드러내신 생명의 길을 너희에게 보이노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자아를 다스리는 자는 한 도시를 점령하는 자보다 크니라. 자아의 통달(通達)은 사람의 도덕적 성품을 재는 척도요, 영적 발전을 가리키는 지표이라. 옛 체제 밑에서 너희는 굶고 기도하였느니라. 영에게서 다시 태어난 새 피조물로서, 너희는 믿고 기뻐하라는 가르침을 받느니라.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는 새 피조물이 되어야 하며, 옛 것은 사라져야 하느니라. 보라, 어떻게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가 내가 보여 주노라. 너희가 서로 사랑함으로 속박으로부터 해방으로, 죽음으로부터 영생(永生)으로 건너갔다는 확신을 너희가 세상에 주어야 하느니라.
“옛 길을 따라서, 너희는 참고 복종하고 생활 규칙에 순응하려고 애쓰느니라. 새 길을 따라서, 너희는 먼저 진리의 영으로 말미암아 변화되고, 이로서 네 정신을 항상 영적으로 새롭게 함으로 네 마음 속 혼이 강하게 되며, 그렇게 하나님의 인자하고 적절하고 완전한 뜻을 확실하고 기쁘게 행하는 힘을 부여받느니라. 잊지 말라―하나님의 지극히 크고 값진 약속을 몸소 믿는 것이 네가 신다운 성품을 받는 자가 되도록 보장하느니라. 이처럼 너희의 믿음으로, 영이 변화됨으로, 너희는 실제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그의 영이 사실로 네 안에 거하느니라. 그런즉 그 영이 네 안에 거하면, 너희는 이제 더 육체에 매인 노예가 아니라, 자유롭고 해방된 영의 아들이라. 자아를 구속하는 두려움과 극기에 노예가 되기를 가르치는 옛 율법 대신에, 영의 새로운 율법은 자아를 통달하는 해방을 너희에게 부여하느니라.
“너희가 악을 행했을 때, 여러 번, 너희 행위를 악마의 영향으로 돌리려고 생각했으나, 실제는 자신의 자연스러운 성향(性向)에 따라서 그릇된 길에 빠졌을 뿐이라. 선지자 예레미야가 오래 전에 사람의 마음은 무엇보다도 속이는 성향이 있고, 때로는 지독하게 사악(邪惡)하기까지 하다고 너희에게 이르지 않더냐? 너희가 스스
로 속고, 그로서 어리석은 두려움, 몇 가지 탐욕,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쾌락, 악의, 질투, 아니 복수하는 미움에 빠지기가 얼마나 쉬우냐!
“육체의 독선적 행동이 아니라, 영이 다시 태어남으로써 구원을 얻느니라. 너희는 믿음으로 정당하게 되고, 두려움과 육체의 극기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친교를 얻느니라. 하지만 영에게서 태어난 아버지의 아이들은 늘, 언제나 자아, 육체의 욕구에 관계되는 모든 것의 주인이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 때, 너희는 하나님과 더불어 진정한 평화를 가지며, 이 하늘의 평화가 있는 길을 따르는 자는 모두, 영원한 하나님의 늘 진보하는 아들들은 영원한 봉사에 거룩히 바치도록 예정되느니라. 이제부터,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너희가 완전을 추구하는 동안, 스스로 정신과 육체에서 모든 악을 깨끗이 없애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오히려 상급 특권이라.
“너희의 아들 신분은 믿음에 바탕을 두며, 너희는 계속 두려움에 마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하니라. 너희의 기쁨은 신의 말씀을 신뢰함에서 생기며, 따라서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가 현실임을 의심할 유혹을 받지 말지니라. 하나님의 바로 그 선이 사람들을 참되고 진정한 뉘우침으로 인도하며, 자아를 통달하는 비밀은 깃드는 영을 너희가 믿는 것과 밀접히 관계되고 그 영은 늘 사랑으로 일하시니라. 구원하는 이 믿음조차 너희는 저절로 갖지 아니하니, 그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라. 너희가 이 살아 있는 믿음의 아이라면, 이제 더 자아의 노예가 아니라 오히려 자아를 다스리는 승리한 주인이요, 하나님의 해방된 아들이라.
“그러면, 아이들아, 너희가 영에게서 태어났다면, 극기하고 육체의 욕구를 경계하는 생활의 속박, 자의식(自意識)하는 속박으로부터 언제까지나 구원받으며, 즐거운 영의 나라로 옮겨지고, 거기서부터 일상 생활에서 영의 열매를 저절로 맺느니라. 영의 열매는 즐겁고 사람을 고상하게 만드는 자제, 아니 땅에서 필사자가 도달하는―참된 자아 통달의―높이까지 이르는, 가장 높은 종류의 자제의 본질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