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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사랑과 형제사랑

뉴징검다리 2010. 2. 10. 07:07

5. 아버지 사랑과 형제 사랑

산상(山上) 설교로부터 마지막 만찬의 강론까지,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형제 사랑보다 아버지 사랑을 나타내라고 가르쳤다. 형제 사랑은 네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할 것이다. “황금률”을 적절히 지키는 것이겠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은 예수가 너를 사랑하는 것 같이, 동료 인간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요구할 것이다.

예수는 인류를 두 가지 애정으로 사랑한다. 땅에서 두 성격으로서―인간과 신으로서―살았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다운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한다―그는 사람의 창조자요, 사람의 우주 아버지이다. 사람의 아들로서, 예수는 형제로서 사람들을 사랑한다―참으로 사람들 사이에 있던 사람이었다.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형제 사랑을 불가능한 수준에서 명시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피조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사람을 바라보고, 따라서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 같이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할 수 있도록―아버지 사랑의 첫걸음을 보여 주도록―예수는 추종자들이 하나님을 닮으려고―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완전하려고―애쓰기를 기대하였다. 열두 사도에게 이렇게 훈계하는 과정에서, 아버지 사랑의 개념이 수많은 사회적 환경에 조정하는 데 관여된 어떤 감정적 태도에 관계되다시피, 이 새로운 개념을 드러내려고 애썼다.

주는 단순한 형제 사랑의 한계와 대조해서, 아버지 사랑의 네 가지 초월적 최상의 반응을 나중에 묘사했으며, 이것의 전주곡(前奏曲)으로서, 네 가지 신앙 태도에 주의를 불러일으켜, 이 중대한 강론을 소개하였다.

먼저, 마음이 낮아져 있는 자, 올바름을 갈급히 찾고, 온유함을 견디고, 마음이 깨끗한 자들을 언급하였다. 영(靈)을 헤아리는 그러한 필사자들은 아버지 사랑을 놀랍게 연습하도록 신성한 무욕(無慾) 수준에 도달하기를 기대할 수 있다. 그래서 통곡하는 사람이라도, 자비를 보이고, 평화를 촉진하고, 박해를 견디고, 이 쓰라린 상황이 계속되는 동안 언제나, 사랑스럽지 못한 인류조차도 아버지 사랑으로 사랑할 힘을 얻을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형제 사랑을 측량할 수 없이 뛰어넘는 헌신 수준에 이를 수 있다.

이 지극한 축복에 나타난 믿음과 사랑은 도덕적 인격을 강화(强化)하고 행복을 창조한다. 공포와 진노는 인격을 약화시키고 행복을 파괴한다. 이 중대한 설교는 행복한 음정(音程)으로 시작되었다.

1. “마음이 낮아져 있는 자―겸손한 자―는 복이 있도다.” 어린아이에게 행복은 당장에 쾌락의 욕구를 채우는 것이다. 어른은 나중에 늘어난 행복을 거두려고 자기를 부인하는 씨를 기꺼이 뿌린다. 예수의 시절과 그 이후로, 행복은 재산 소유 관념과 너무 흔히 연결되어 왔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들의 이야기에서, 하나는 마음이 높아져 있었고―자기 중심이었고―다른 하나는 “마음이 낮아져 있었다”―겸손했다. 하나는 거만하고, 하나는 가르침을 받을 수 있고 진리를 찾았

다. 마음이 낮아져 있는 자는 영적 재산이라는 목표―하나님―을 추구한다. 진리를 찾는 그런 사람들은 먼 앞날에 보상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지금 보상을 받는다. 자신의 마음 속에서 하늘나라를 발견하며, 그런 행복을 지금 체험한다.

2. “올바름을 간절히 바라고 목마르게 찾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채워질 것임이라.” 마음이 낮아져 있는 자라야 언제라도 올바름을 간절히 찾을 것이다. 오직 겸손한 사람이 신의 힘을 찾고 영적 권능을 가지고 싶어한다. 그러나 영적 재산에 대한 욕구를 개선하려고 영적 금식(禁食)에 일부러 빠지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육체의 금식은 나흘이나 닷새 뒤에 위험해진다. 모든 식욕을 잃어버리기 쉽다. 지속된 금식은,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배고픔을 없애는 경향이 있다.

체험으로 얻는 올바름은 기쁨이요 의무가 아니다. 예수의 올바름은 힘찬 사랑이다―아버지와 형제의 사랑이다. 소극적이거나, 어찌하지 말라 하는 종류의 올바름이 아니다. 어떻게 사람이 언제라도 소극적인 것―무언가 “하지 않기”를 간절히 찾을 수 있는가?

어린아이의 머리에 이 지극한 축복(祝福)의 처음 두 가지를 가르치기는 그리 쉽지 않지만, 성숙한 지성은 그 중요성을 파악해야 한다.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물려받을 것임이라.” 진정한 온유함은 두려움과 아무 관계가 없다. 오히려 하나님과 협동하는 사람의 태도이다―“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것은 참을성과 인내심을 담으며, 법을 지키고 친절한 우주를 믿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에 자극을 받는다. 온유함은 신의 이끄심에 반항하려는 모든 유혹을 이긴다. 예수유란시아에서 이상적인 온유한 사람이었고, 광대한 우주를 물려받았다.

4.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 영적 순수성은 의심과 복수심이 빠져 있다는 것을 제쳐 놓고, 부정적인 성질이 아니다. 순수성을 논할 때, 예수는 인간의 성(性)에 대한 태도를 전적으로 다룰 의도는 없었다. 그보다 사람이 동료 인간에 대하여 가져야 할 믿음, 부모가 어린아이에게 가지는 믿음, 아버지가 사랑하는 것 같이 동료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믿음을 언급하였다. 아버지의 사랑은 응석을 받아 줄 필요가 없고 악을 묵인(黙認)하지 않지만, 비웃는 일이 절대로 없다. 아버지의 사랑은 한 가지 목적을 가졌고, 반드시 사람한테서 최선을 찾는다. 그것이 참 부모의 태도이다.

하나님을―믿음으로―보는 것은 참된 영적 통찰력을 얻음을 의미한다. 영적 통찰력은 조절자의 인도하심을 향상하며, 결국에는 하나님 의식을 키워 준다. 너희가 아버지를 알 때, 너희가 신의 아들이라는 보장이 확인되고, 육체를 입은 형제들을 하나하나, 형제로서―형제 사랑으로―사랑할 뿐 아니라, 또한 아버지로서―아버지의 사랑으로―더욱 사랑할 수 있다.

이러한 훈계는 어린아이에게도 가르치기 쉽다. 아이들은 자연히 사람을 쉽게 믿으며, 부모는 아이들이 단순한 믿음을 잃지 않도록 처신해야 한다. 아이들을 다룰 때, 모든 속임수를 멀리하고 의심을 넌지시 비추기를 삼가라. 자기의 영웅을 선택하고 자기 일생에 할 일을 고르도록 지혜롭게 도와 주라.

다음에 예수는 더 나아가서, 인간의 모든 투쟁의 주요한 목적―완전―의 실현을, 심지어 신성에 이르는 것까지도, 추종자들에게 가르쳤다. 언제나 예수는 타일렀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열둘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훈계하지 않았다. 그것은 쓸모 있는 성취였을 터이고, 형제 사랑의 성취를 가리켰을 것이다. 오히려 그가 그들을 사랑한 것 같이, 사도들에게 사람들을 사랑하라고―형제의 애정 뿐 아니라 아버지의 애정

으로―사랑하라고 타일렀다. 아버지다운 사랑의 네 가지 최고의 반응을 지적함으로 이를 보여 주었다:

1.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받을 것임이라.” 이른바 상식이나 최선의 논리는 슬퍼함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겉으로 또는 허세로 슬퍼함을 말하지 않았다. 마음이 부드러운, 감정적 태도를 가리켰다. 부드러움을 보이거나, 아니면 감정이나 육체적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 남자답지 않다고 소년과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동정심은 여자 뿐 아니라 남자의 귀중한 속성이다. 남자답기 위하여 무정(無情)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용감한 사람을 만드는 잘못된 방법이다.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은 슬퍼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슬퍼하던 모세삼손이나 골리앗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었다. 모세는 훌륭한 지도자였지만 또한 온유한 사람이었다. 인간의 필요를 헤아리고 그에 민감한 것은 진정하고 오래 가는 행복을 창조하며, 한편 그런 친절한 태도는 노여움·미움·의심의 파괴적 영향으로부터 혼을 보호한다.

2. “자비로운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자비를 얻을 것임이라.” 여기서 자비는 가장 참된 우정―자애로움―의 높이와 깊이와 폭을 가리킨다. 자비는 때때로 수동적일까 하지만, 여기서 자비는 능동적이고 힘차다―지극하게 아버지답다. 사랑이 있는 부모는 아이를 용서하는 데, 여러 번이라도, 조금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버릇이 나쁘지 않은 아이의 경우에 고통을 해소하려는 욕구는 자연스럽다. 실제 형편을 이해할 만큼 나이가 들 때, 아이들은 보통 친절하고 동정심이 있다.

3.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 청중은, 화해시키는 자가 아니라 군사적 구원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평화는 유순하고 소극적 종류가 아니다. 시련과 박해와 마주쳐서 말했다. “나의 평화를 너희에게 두고 가노라.” “너희는 마음에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것은 파괴하는 투쟁을 막는 평화이다. 개인의 평화는 인격을 통합한다. 사회의 평화는 두려움·욕심·분노를 막는다. 정치적 평화는 종족의 적대 감정, 국가의 의심, 전쟁을 방지한다. 화평케 하는 것은 불신과 의심을 고치는 약이다.

아이들은 화해시키는 자로 활동하라고 가르치기 쉽다. 집단 활동을 즐기며 함께 놀기를 좋아한다. 또 다른 때에 주는 말했다: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자마다 목숨을 잃으려니와 자기 목숨을 버리려 하는 자마다 목숨을 찾으리라.”

4. “올바름을 위하여 박해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저희 것임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대적하여 온갖 모습의 악한 것을 거짓되게 말할 때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할지니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평화 후에 흔히 박해가 따른다. 그러나 젊은이와 용감한 어른들은 결코 어려움이나 위험을 피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아버지다운 사랑은 이 모두를―형제 사랑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것을―아낌없이 할 수 있다. 진보는 언제나 박해의 마지막 수확이었다.

아이들은 용기를 도전받을 때 반드시 반응한다. 젊은이는 언제라도 기꺼이 “용감하게 도전한다.” 아이들은 모두 일찍부터 희생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산상 설교의 지극한 축복은 믿음과 사랑에 기초를 두었고, 율법에―윤리와 의무에―두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아버지다운 사랑은 악을 선으로―불의를 선행으로―갚기를 기뻐한다.

6. 임명식이 있던 저녁

일요일 저녁에, 가버나움의 북쪽 산지로부터 세베대의 집에 도착한 뒤에, 예수와 열두 제자는 조촐한 저녁을 들었다. 그 뒤에, 예수가 물가를 따라 걸으려고 나간 동안, 열둘은 자기들끼리 이야기했다. 짧은 회의가 있은 뒤에, 쌍둥이가 몸을 따듯하게 하고 빛을 밝히려고 모닥불을 지피는 동안, 안드레예수를 찾으러 나갔고, 따라잡았을 때 말했다: “주여, 내 형제들은 하늘나라에 대한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나이다. 더 가르치기까지, 우리는 이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이다. 뜰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하신 말씀의 뜻을 이해하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하러 왔나이다.” 예수는 사도들을 만나려고 안드레와 함께 갔다.

뜰로 들어갔을 때 예수는 사도들을 둘레에 모으고 이렇게 말하며 더 가르쳤다: “너희는 오래 된 가르침 바로 위에 새 가르침을 세우려 하므로, 내 메시지를 받기가 어려움을 발견하나, 내가 선언하노니 너희는 다시 태어나야 하느니라. 어린아이처럼 새로 시작하고 기꺼이 내 가르침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믿어야 하느니라. 하늘나라의 새 복음을 현재 있는 것에 순응하게 만들 수 없느니라. 너희는 사람의 아들과 그 지상(地上) 사명에 관하여 그릇된 생각을 가졌느니라. 그러나 내가 율법과 선지자를 제쳐 놓으려고 왔다고 잘못 생각하지 말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루고 확대하고 비추려고 내가 왔노라. 율법을 어김이 아니라, 이 새 계명을 너희 마음 속 서판에 써 주려고 내가 왔노라.

“자선하고 기도하고 금식하여 아버지의 은혜를 얻고자 하는 자들을 초월할 올바름을 너희에게 요구하노라.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싶거든, 사랑·자비·진리로 이루어진 올바름―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를 진지하게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하느니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말했다: “주여, 당신이 새로운 계명을 가졌으면, 듣고 싶나이다. 새 길을 우리에게 보이소서.” 예수베드로에게 대답하였다. “너희는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이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지니라’함을 들었느니라. 그러나 나는 동기를 밝히려고 행위를 넘어서 보노라.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형제에게 성내는 자마다 죄 있다고 판결받을 위험이 있느니라. 마음 속에 미움을 품고 머리 속에 복수하려 계획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을 위험이 있도다. 너희는 행위로 동료들을 판단해야 하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심중(心中)을 보고 판단하시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율법 선생들이 이르는 것을 너희가 들었느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란한 생각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마다 이미, 여자와 마음 속에서 간음하였느니라. 너희는 사람들을 오직 행위로 판단할 수 있으나, 내 아버지는 자녀들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그 의도(意圖)와 진정한 욕구에 따라서 자비롭게 판단하시니라.

예수는 다른 계명들을 계속 논의할 생각이 있었지만 이 때 야고보 세베대가 끼어들어 물었다: “주여, 이혼(離婚)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리이까? 모세가 지시한 대로 남자가 아내와 이혼하도록 버려 두어야 하리이까?” 이 질문을 듣자 예수는 말했다: “나는 율법을 세우려 온 것이 아니라 사람을 깨우쳐 주러 왔노라. 이 세상의 나라들을 개혁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오히려 하늘나라를 세우려 왔노라. 정부나 무역이나 사회 행동 규칙(規則)을 너희에게 가르칠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 이것들은 오늘날 좋을지 모르나, 다른 시대의 사회에 도무지 맞지 아니하리라. 나는 오로지 정신을 위로하고, 영들을 해방하고, 사람들의 혼을 구원하러 이 땅에 왔노라. 그러나 이 이혼 문제에 관하여 내가 이르리

니, 모세는 그러한 일을 승인했어도 아담의 시절에, 동산에서는 그렇지 않았느니라.”

사도들끼리 한동안 이야기한 뒤에, 예수는 말씀을 이었다: “사람의 모든 행위의 두 가지 관점―인간다운 것과 신다운 것, 육체의 길과 영의 길, 시간의 추정치와 영원의 관점―을 언제나 인식해야 하느니라.” 비록 열둘은 그 가르침을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어도, 이 가르침은 참으로 유익했다.

다음에 예수는 말했다: “그러나 너희는 내 메시지를 버릇처럼 글자 그대로 풀이하므로 내 가르침에 걸려 넘어지며, 가르침의 정신을 더디게 깨닫는도다. 너희는 내 사자임을 또 다시 기억해야 하고, 내가 영적으로 내 삶을 살아온 것 같이, 너희 생애를 살아야 하느니라. 너희는 나의 개인 대표이나, 모든 사람이 세세(細細)히 너희가 하는 대로 살기를 잘못 기대하지 말라. 나는 이 무리에 속하지 않는 양들을 가졌고, 필사 성품으로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모범을 마련하도록 내가 저희에게도 의무가 있다는 것을 너희가 또한 기억해야 하느니라.”

그러자 나다니엘이 물었다: “주여, 우리는 응보를 인정하지 말아야 하나이까?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 모세의 율법이 이르나이다. 우리는 무어라고 말하리이까?” 대답은 이러했다: “너희는 악을 선으로 갚을지니라. 내 사자(使者)들은 사람들과 다투지 말고, 누구에게든지 부드러워야 하느니라. 치수대로 갚는 것이 너희의 규칙이 되게 하지 말라. 사람들의 통치자는 그러한 율법을 가질지 몰라도 하늘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으니라. 언제나 자비가 너희의 판단을, 사랑이 행위를 결정할지니라. 이 말이 알아듣기 어려우면, 너희는 이제라도 돌아갈 수 있느니라. 사도직의 요구 조건이 너무 어렵거든, 덜 힘든 제자의 길로 돌아가도 좋으니라.”

깜짝 놀랄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사도들끼리 한동안 물러났지만, 곧 돌아와서 베드로가 말했다: “주여, 우리는 당신과 함께 계속하려 하나이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돌아가려 하지 않나이다. 덤을 치를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고, 그 잔을 마시겠나이다. 단지 제자가 아니라 사도가 되려 하나이다.”

이 말을 듣자 예수는 말했다: “그러면 기꺼이 너희의 책임을 지고 나를 따르라. 착한 일을 몰래 하며, 자선금 낼 때 바른 손이 무엇을 하는지 왼 손이 모르게 하라. 기도할 때, 너희끼리 따로 가라, 말을 헛되이 되풀이하거나 뜻 없는 구절을 쓰지 말라. 아버지는 구하기도 전에 너희가 무엇이 필요한 줄 아심을 언제나 기억하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슬픈 얼굴로 금식(禁食)하는 데 빠지지 말라. 하늘나라의 봉사를 위하여 이제 따로 구별하여 내가 택한 사도로서, 자신을 위하여 땅에서 보물을 쌓지 말고, 사심 없이 봉사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을지니, 보물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또한 있음이라.

“육체의 등불은 눈이라. 그런즉 너그럽게 헤아리는 눈이 있으면 온 몸이 빛으로 가득 차리라. 그러나 욕심(慾心)에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두움에 싸이리라. 네 안에 있는 바로 그 빛이 어두워지면 그 어두움이 오죽하겠느냐!”

그리고 나서 토마스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계속 가져야” 하는가 물었고, 주의 대답은 이러했다: “옳도다, 형제들아, 내가 바라건대, 공감하는 한 가족으로서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하느니라. 너희에게 큰 일이 맡겨졌고, 한눈팔지 않고 봉사하기를 몹시 바라노라.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좋은 말씀을 너희가 아느니라. 너희는 하나님을 성실하게 예배하고, 동시에 진심으로 재물을 섬길 수 없느니라. 이제 하늘나라 일을 하려고 아낌없이 지원하였은즉, 생활을 걱정하지 말라.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너희 몸을 위해서도 무슨 옷을 입을까 더군다나 걱정하지 말라. 기쁘게 일하는 손과 진지한 마음은 배고프게 지내지 않을 것을 너희가 이미 배웠느니라. 이제, 너희가 온 에너지를 하늘나라 일에 바치려고 준비할 때, 아버지가 너희의 필요를 모른 체하지 않으실 것을 확실히 믿으라. 먼저

나님의 나라를 찾으라. 너희가 거기에 들어가는 문을 찾고 나서, 모든 필요한 것이 너희에게 더해지리라. 그러므로 앞날을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라. 그 날의 어려움은 그 날로 충분하니라.”

밤새도록 질문하면서 늦게 있고 싶어하는 것을 보고 예수는 말했다: “형제들아, 너희는 토기(土器)이라. 내일 일을 준비하도록 잠자러 가는 것이 최선이라.” 그러나 그들의 눈에서 이미 잠이 달아났다. 베드로는 나서서 주에게 요청했다: “나는 당신과 개인적으로 그냥 조금 의논할 것이 있나이다. 형제들과 따로 무슨 비밀을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괴롭고, 혹시라도 주로부터 꾸지람을 받아야 한다면, 당신하고만 따로 더 견디기 쉽겠나이다.” 집으로 길을 인도하며, 예수는 말했다 “베드로야, 따라 오라.” 주가 계신 곳으로부터 베드로가 무척 명랑해지고 크게 격려받고 돌아왔을 때, 야고보예수와 함께 이야기하러 가려고 마음먹었다. 이런 식으로 날이 샐 때까지, 다른 사도들은 하나씩 주와 함께 이야기하러 갔다. 잠든 쌍둥이를 제쳐 놓고, 모두가 예수와 개인적으로 상담했을 때, 안드레예수가 계신 데로 들어가서 말했다: “주여, 쌍둥이는 뜰에서 불 옆에 잠들었나이다. 당신과 또한 이야기하고 싶은지 저희를 깨워서 물어 보리이까?” 예수는 빙그레 웃으며 안드레에게 말했다. “저희는 잘 하느니라―그냥 두어라.” 이제 밤이 지나갔고, 새 날의 빛이 밝아오고 있었다.

7. 임명식 다음 주

몇 시간 동안 잠자고 난 뒤에, 열둘이 함께 늦은 아침을 먹으려고 모였을 때, 예수는 말했다: “이제 너희는 기쁜 소식을 전파하고 신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해야 하느니라. 예루살렘으로 갈 준비를 하여라.” 예수가 말한 뒤에, 토마스는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말했다: “주여 그 일에 들어가려고 우리가 준비되어야 함을 내가 아나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직 이 큰 사업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드나이다. 우리가 하늘나라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며칠만 더 이 근처에 우리가 남아 있는 데 찬성하시겠나이까?” 사도들이 모두 똑같은 두려움에 빠져 있음을 보고서 예수는 말했다: “너희가 요청한 대로 될지니라. 우리가 안식일 동안 여기에 남아 있으리라.”

몇 주 동안,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의 작은 무리가 호기심에 이끌린 구경꾼들과 함께, 예수를 보려고 벳세다로 오고 있었다. 이미 그에 관한 소식이 시골에 퍼졌다. 티레·시돈·다마스커스·케자리아·예루살렘과 같이 먼 도시로부터 수소문하는 무리가 왔다. 여태까지 예수는 이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하늘나라에 관하여 가르쳤지만, 이제 이 일을 열둘에게 넘겼다. 안드레는 사도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한 집단의 방문자들에게 배치했고, 때로는 열둘이 다 그렇게 바빴다.

낮에는 가르치고 밤이 늦도록 사사로운 모임을 가지면서, 이틀 동안 일했다. 사흘째에, “고기를 잡으러 가거나, 홀가분하게 변화를 찾거나, 아니면 혹시 너희 가족을 찾아보라”하고 사도들을 보낸 동안, 예수세베대살로메와 친교하였다. 사흘 동안 더 가르치려고 그들은 목요일에 돌아왔다.

연습하는 이 주간에, 예수는 세례 받은 뒤에 땅에서 이루어야 할 사명의 두 가지 큰 동기(動機)를 여러 번 사도들에게 되풀이하여 말했다:

1. 아버지를 사람에게 드러내는 것.

2. 사람들이 아들 의식을 갖도록―최고자의 자녀인 것을 믿음으로 깨닫도록―이끄는 것.

한 주 동안 이 다양한 체험은 열둘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다. 더러는 지나치게 자신감이 생기기도 하였다. 마지막 회의에서, 안식일이 끝난 그 날 밤에, 베드로야고보예수에게 와서 말했다, “우리는 준비가 되었나이다―이제 하늘나라를 치러 갑시다.” 이에 예수는 대답하였다. “너희의 지혜가 열심을 필적하고, 용기가 무지(無知)를 보상하기를―.”

비록 가르침을 많이 알아듣지 못했어도, 사도들은 예수가 함께 지낸 기막히게 아름다운 삶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고 깨달았다.

8. 호수에서 목요일 오후에

예수는 사도들이 가르침을 완전히 새겨듣지 못했음을 잘 알았다. 베드로·야고보·요한에게 얼마큼 특별 교육을 주기로 작정하였고, 그들이 동료들에게 그 아이디어를 분명히 밝힐 수 있기를 바랐다. 열둘이 영적 하늘나라 관념의 어떤 모습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다윗의 왕좌(王座)를 회복하고 땅에서 현세의 권력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시 세운다는, 글자 그대로 하늘나라 개념, 오래 되고 뿌리 깊은 개념 바로 위에, 끈질기게 이 새 가르침을 붙이려고 고집하는 것을 보았다. 따라서 목요일 오후에, 하늘나라의 일을 의논하려고 예수베드로·야고보·요한과 함께 배를 타고 물가를 떠나갔다. 이것은 네 시간 동안 가르치는 회의여서 수십 가지 질문과 대답을 포함했고, 시몬 베드로가 형 안드레에게 다음 날 아침에 준 대로, 이 중요한 오후의 요약(要約)을 다시 정리해서 이 기록에 넣는 것이 가장 유익할까 한다:

1.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 하늘 아버지가 전반적으로 돌보심을 신뢰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맹목적이고 수동적인 운명론(運命論)이 아니었다. 이 날 오후에 어느 옛 히브리 속담을 인정하여 인용했다: “일하려 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지니라.” 가르침에 대한 충분한 논평으로서 자신의 체험을 가리켰다. 아버지를 신뢰함에 대한 교훈은 현대나 어느 다른 시대의 사회 또는 경제 조건에 비추어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의 가르침은 어느 시대나 어느 세계에도, 하나님과 가까이 사는 이상적 원칙을 포함한다.

예수는 사도(使徒)와 제자가 되는 요건의 차이를 세 사람에게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나서도 열두 사도에게 신중함과 예견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 선견(先見)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근심·걱정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였다.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정신차리고 복종하기를 가르쳤다. 검소와 절약에 관한 많은 질문에 답하여, 다만 목수와 배 건축자와 어부로서 살았던 생활, 그리고 열둘을 신중하게 조직한 것을 주목하라고 했다. 세상을 적(敵)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생활 환경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나란히 작용하는 신의 섭리의 일부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려고 애썼다.

개인적으로 무저항(無抵抗)을 실천한 것을 이해시키는 데 예수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아예 자신을 방어하려 하지 않았고, 사도들의 눈에는 그들이 똑같은 정책을 추구한다면 주가 기뻐할 듯이 보였다. 악에 대항하지 말라고, 불법이나 권리 침해에 맞서 싸우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악행을 수동적으로 묵인(黙認)하기를 가르치지는 않았다. 행악자와 범죄자들을 사회가 처벌하는 것을 승인한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법을 집행하는 데 국가 정부가 때때로 무력(武力)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이 날 오후에 예수는 분명히 밝혔다.

예수앙갚음하는 악습이 나쁘다고 제자들에게 그침 없이 경고하였다. 그는 복수, 앙갚음하는 관념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았다. 불평 품는 것을 딱하게 여겼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는 관념을 인정하지 않았다. 개인으로서, 몸소 앙갚음하는 개념 전체를 찬성하지 않았고, 이 문제를 한편으로 국가 정부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에 맡겼다. 그의 가르침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세 사람에게 뚜렷하게 말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그 때까지 가르친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너희의 적을 사랑하라―인간이 형제라는 도덕적 주장을 기억하라.

악(惡)은 무익하다: 한 가지 악은 복수(復讐)로 고쳐지지 않는다. 악 자체의 무기(武器)로 악에 대항하여 싸우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믿음―신의 정의(正義)와 영원한 선이 궁극에 이긴다는 확신―을 가지라.

2. 정치적 태도. 당시에 유대 민족과 로마 정부 사이에 존재하던 긴장된 관계에 대한 논평을 조심하라고 사도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어떤 면에서도 그들이 이 난국에 말려드는 것을 금했다. 그는 적들이 놓은 정치적 덫을 피하려고 언제나 조심스러웠고, “케자의 물건을 케자에게 돌리고, 하나님의 물건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늘 대답했다. 구원받는 새 길을 확립하는 사명으로부터 주의(注意)를 빼앗기지 않으려 하였다. 자신이 어떤 다른 것에 관여하도록 버려 두지 않았다. 사생활에서 언제나 모든 국가의 법과 규칙을 마땅히 준수했다. 모든 대중 교육에서 시민, 사회, 경제 분야를 무시(無視)했다. 오직 사람의 속, 개인의 영적 생활의 원칙에만 관심을 가진다고 세 사도에게 일러 주었다.

따라서 예수는 정치적 개혁가가 아니었다. 세상을 다시 조직하려고 오지 않았다. 이렇게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시대와 세대에만 적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최선으로 사는 길을 사람에게 보여 주었으며, 어떤 세대(世代)에도 어떻게 자체의 문제에 예수의 생애를 최선으로 적용하는가 발견하는 수고가 면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어떤 정치 이론이나 경제 이론, 어떤 사회 체제나 산업 체제와 동일시하는 잘못을 결코 저지르지 말라.

3. 사회적 태도. 유대인 랍비들은 이 문제를 오랫동안 논의해 왔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예수는 와서, 적극적이고 저절로 우러나오는 친절 관념을 제시하였다. 동포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진지해서, 그 사랑이 전 세계를 포함하고, 그래서 모든 사람을 자기 이웃으로 만들기까지, 이웃을 확대했다. 그러나 이 모두와 함께, 예수는 대중이 아니라 오직 개인에 관심을 가졌다. 예수는 사회학자가 아니었지만, 온갖 형태의 이기적 고립을 깨뜨리려고 수고했다. 순전한 동정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르쳤다. 네바돈미가엘은 자비에 지배를 받는 아들이다. 동정심은 바로 그의 성품이다.

주는 사람들이 결코 친구에게 식사를 대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추종자들이 가난한 자와 불행한 자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예수는 확고한 응보 감각을 가졌지만, 그것은 반드시 자비로 말미암아 부드럽게 되었다. 예수는 사도들에게 사회의 기생충이나 전문(專門)으로 자선을 바라는 자들에게 이용당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사회적 선언을 하기에 아주 접근한 것은 “판단을 받지 않도록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한 것이다.

그는 무차별한 친절이 여러 가지 사회악에 책임이 있을지 모른다고 분명히 말했다. 다음 날, 그가 요청하거나, 두 사도가 공동으로 간청할 때를 제쳐 놓고, 사도의 기금을 하나도 자선금으로 주어서는 안 된다고 유다에게 분명히 지시했다. 이 모든 문제에서 “뱀 같이 지혜로우나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늘 말하는 것이 예수의 버릇이었다. 모든 사회 상황에서 참을성·관용·용서를 가르치는 것이 목적인 듯하였다.

가족은―여기서, 그리고 다음 세상에서―예수의 생활 철학의 바로 그 핵심을 차지했다. 하나님에 관한 가르침을 가족에 기초를 두었고, 한편 조상을 지나치게 존경하는 유대인의 성향을 고치려고 애썼다. 가족 생활을 가장 높은 인간의 임무로서 높였지만, 가족 관계가 종교적 의무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가족이 이 세상의 제도요, 죽음 뒤에 살아남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가족이 아버지의 뜻에 충돌했을 때 예수는 가족을 서슴지 않고 버렸다. 사람의 새롭고 더 큰 형제 정신―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예수의 시절에 팔레스타인에서,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이혼 관습은 흐리멍덩했다. 결혼과 이혼에 관하여 율법 세우기를 거듭 물리쳤지만, 초기에 예수를 따르던 많은 사람은 이혼에 관하여 뚜렷한 의견을 가졌고, 그런 의견을 서슴지 않고 예수의 탓으로 돌렸다. 요한 마가를 빼고, 신약(新約)의 저자들은 모두 결혼에 대하여 좀더 엄격하고 진보된 이 관념을 지켰다.

4. 경제적 태도. 예수는 그가 발견한 세상에서 일하고, 살고, 물건을 교환했다. 경제 개혁가가 아니었지만, 재산의 불평등한 분배가 부당한 것에 빈번히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치유하는 방법으로 아무런 대안(代案)을 내놓지 않았다. 사도들이 재산을 지녀서는 안 되지만, 부와 재산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재산이 불평등하고 불공정하게 분배되는 것이 그릇되다고 설교한다고 세 사람에게 분명히 일러 주었다. 사회 정의(正義)와 산업의 공정이 필요함을 인정했지만,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아무런 원칙을 내놓지 않았다.

결코 추종자들에게 세상의 소유물을 피하라고 가르치지 않았고, 다만 열두 사도에게 그렇게 했다. 의사(醫師)인 누가는 사회의 평등을 뚜렷이 믿는 사람이었고, 그의 개인적 관점과 조화되게 예수의 말씀을 풀이하려고 많이 애썼다.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공동체 형태의 생활을 채택하라고 친히 지시한 적이 없었고, 그러한 문제에 관하여 어떤 종류의 선언도 하지 않았다.

예수는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탐욕에 대하여 자주 경고했고, “사람의 행복은 물질 재산의 풍부함에 있지 않느니라” 선언하였다. 항상 되풀이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혼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으리요?” 재산 소유를 직접 공격하지 않았지만, 영적 가치의 우선(于先)이 영원히 필수라고 주장했다. 후기의 가르침에서, 대중에게 봉사하는 과정에서 그가 제시한 수많은 비유를 이야기함으로 유란시아의 그릇된 여러 생활 관점을 고치려고 애썼다. 예수는 결코 경제 이론을 만들려고 의도하지 않았다. 각 시대는 기존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자체의 처방을 진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예수가 오늘날 육체를 입고 살면서 땅에 계시다면, 대다수의 착한 남녀의 기대에 크게 어긋날 터인데, 오늘날의 정치나 사회나 경제 논쟁(論爭)에서 편을 들지 않으리라는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순전히 인간적인 너희 문제들을 풀려고 도전하는 데 너희를 몇 배나 더 유능하게 만들도록, 마음의 영적 생활을 어떻게 완전하게 만드는가 가르치면서, 숭고하게 초연(超然)할 것이다.

예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처럼 만들고, 다음에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신의 정치·사회·경제 문제들을 해결하는 동안, 이해심을 가지고 기다리려 할 것이다. 그가 비난한 것은 재산이 아니라, 재산에 굴종하는 대다수의 사람에게 재산이 미치는 영향이었다. 이 목요일 오후에 예수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처음으로 동료들에게 말했다.

5. 개인적 종교. 너희는 예수의 사도들처럼, 예수의 생애를 보고 그 가르침을 더 잘 이해해야 한다. 그는 완전하게 된 일생을 유란시아에서 살았고, 독특한 가르

침은 오직 그 일생을 닥친 그 배경에서 상상할 때 겨우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의 신성한 성품과 사랑하는 성격을 드러내는 데 가장 도움이 될 것은 그의 일생이지, 열둘에게 준 가르침이나 군중에게 한 설교가 아니다.

예수히브리 선지자나 그리스 도덕가들의 가르침을 공격하지 않았다. 주는 이 위대한 선생들이 대표하는 많은 좋은 것을 인식했지만, 무언가 더 큰 것, “사람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자진해서 순종(順從)하기”를 가르치려고 땅에 내려왔다. 예수는 다만 종교인, 종교적 느낌으로 온통 싸여 있고 오직 영적 충동에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을 만들기를 원하지 않았다. 너희가 한 번 얼핏 뵐 수 있었다면, 예수가 이 세상일에 큰 경험을 가진 실재한 사람이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이 점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교 시대의 여러 세기를 통해서 계속, 터무니없이 왜곡되고 많이 와전(訛傳)되었다. 너희는 또한 주의 온유와 겸손에 대하여 비뚤어진 생각을 지녀 왔다. 그의 일생의 목표는 최상의 자존심이었던 듯하다. 사람이 참으로 높아질 수 있도록 오직 스스로 겸손하라고 충고했다. 그가 정말로 의도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겸손이었다. 그는 성실함―깨끗한 마음―을 높이 평가했다. 인격의 평가에서, 충실은 으뜸가는 미덕이었고, 한편 용기는 그의 가르침의 바로 그 핵심이었다. “두려워 말라”가 표어요, 참고 견딤은 인격의 강건함에 대한 이상(理想)이었다. 예수의 가르침은 용감·용기·영웅심의 종교를 이룬다. 이것이 바로 어째서 보통 사람 열두 명을 개인 대표로서 골랐는가 하는 이유이며, 이들의 대다수는 거칠고 튼튼하고 남자다운 어부였다.

예수는 그 시대의 사회악에 대하여 할 말이 거의 없었다. 도덕적 방탕을 언급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는 참된 미덕을 긍정적으로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가르침을 나누어 주는 부정적 방법을 세심하게 피했고, 악을 선전하려 하지 않았다. 도덕을 개혁하는 자가 아니었다. 인류의 육욕(肉慾)은 종교적 꾸지람이나 율법으로 금지함으로 억누를 수 없음을 잘 알았고, 그렇게 사도들에게 가르쳤다. 얼마 안 되는 비난은 대체로 자만·잔인·억압·위선을 향한 것이었다.

예수요한이 한 것처럼, 바리새인들조차 맹렬히 비난하지 않았다. 많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마음에는 정직(正直)함을 알았고, 종교적 전통에 노예처럼 매여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예수는 “먼저 나무를 좋게 만드는 일”을 크게 강조했다. 어떤 몇 가지 특별한 미덕이 아니라, 생애 전체를 평가한다는 것을 세 사람에게 강조하였다.

요한이 이 날의 가르침으로부터 한 가지 얻은 것은 예수가 가진 종교의 핵심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도록 자극받은 성격과 함께 자비로운 인품을 얻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그들이 바야흐로 선포하려는 복음은 온 인류를 위하여 정말로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을 깨달았다. 그는 이 인상을 나중에 바울에게 전했고, 바울은 이로부터 그리스도가 “둘째 아담”이라는 신조를 지어 냈다.

야고보는 땅에서 자녀들이 마치 완성된 하늘나라 시민이 이미 된 것처럼 살기를 예수가 바란다는 감격스러운 진리를 깨달았다.

예수는 사람들이 다른 것을 알았고, 사도들에게 다르게 가르쳤다. 제자와 신자들을 어떤 정해진 형식에 맞추어 형식화하려고 애쓰기를 삼가라고 사도들을 항상 훈계하였다. 각 사람이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되는 독립된 개인을 개발하도록 버려 두려고 애썼다. 베드로의 여러 질문 중 하나에 대답하여, 주는

말씀했다: “새롭고 더 나은 생활에 어린아이로서 새로 시작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해방하기를 내가 원하노라.” 예수는 참된 선함은 의식(意識)하지 않고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자선을 베풀 때 바른 손이 무엇을 하는지 왼손이 모르게 하기를 언제나 주장하였다.

주의 종교가 영적 자기 반성에 대하여 아무 규정이 없음을 깨닫고 세 사도는 이 날 오후에 놀랐다. 예수의 시절 이전과 이후에 있던 모든 종교는, 그리스도교조차, 양심적인 자아 검토를 조심스럽게 마련한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의 종교는 그렇지 않았다. 예수의 생활 철학은 종교적 내성(內省)이 없다. 목수의 아들은 결코 인격을 형성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인격의 성장을 가르쳤고,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외쳤다. 그러나 예수는 거만한 자기 본위를 방지하는 수단으로 자아의 분석을 금지할 말씀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권리는 신앙, 몸소 믿는 데 달려 있다. 하늘나라로 진보하여 계속 올라가는 길에 치르는 비용은, 사람이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얻고자 하는 값비싼 진주와 같다.

예수의 가르침은, 약자(弱者)와 노예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종교이다. 그의 종교는 (그 시대에) 결코 신조(信條)와 신학 법칙으로 구체화되지 않았다. 그는 한 줄의 글도 뒤에 남기지 않았다. 그의 일생과 가르침은 어느 시대나, 어느 세계에도, 영적 안내와 도덕적인 가르침에 적당한 유산(遺産), 영감을 주는 이상적 유산으로서 우주에 남겨 주었다. 오늘날도, 예수의 가르침은 모든 종교와 따로 구별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 가르침은 각 종교에게 살아 있는 희망이다.

예수는 종교가 땅에서 사람의 유일한 추구 대상이라고 사도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관한 유대인 관념이었다. 그러나 종교가 열두 사도가 전념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신자들의 진정한 교양의 추구를 막으려고 예수가 가르친 것은 하나도 없다. 다만 그는 전통에 묶인 예루살렘의 종교 학당들을 깎아내렸다. 그는 아낌없이 주었고, 마음이 넓고, 널리 알고, 너그러웠다. 자의식하는 경건은 올바르게 사는 그의 철학에서 아무런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주는 그 시대나 후일 어느 시대의 비종교 문제들을 위하여, 아무런 해결책을 내놓지 않았다. 예수는 영원한 실체들을 꿰뚫어보는 영적 통찰력을 개발하고 생활의 독창성에서 주도권 쥐는 것을 자극하기 바랐다. 그는 인류의 기초에 있는 영구한 영적 필요에만 순전히 관심을 가졌고, 하나님과 동등한 선(善)을 드러냈다. 사랑―진리·아름다움·선―을 신다운 이상과 영원한 실체로서 높이었다.

주는 사람 속에서 새로운 정신, 새로운 의지를 창조하려고―진리를 알고, 동정심을 체험하고 선을 택하는 새 능력을 나눠 주려고―오셨으니, 그 뜻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완전하게 되려는 영원한 욕구와 아울러,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려 하는 의지이다.

9. 성스럽게 헌신하는 날

다음 안식일을 예수는 사도들에게 쏟았고, 사도들을 세운 산지로 돌아갔다. 길고도 아름답게 감동적인 격려의 말씀을 친히 하신 뒤에, 열둘을 성화(聖化)하는 엄숙한 행위에 들어갔다. 이 안식일 오후에 예수는 산허리에서 둘레에 사도들을 모으고, 세상에 그들만 두고 떠나야 하는 날을 준비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손에 그들을 맡기었다. 이 계제에 아무런 새로운 가르침이 없었고, 다만 이야기와 친교에 시간을 보냈다.

예수는 바로 이 자리에서 하셨던 임명 설교의 여러 모습을 돌아보았고, 다음에 하나씩 앞으로 부르고, 그의 대표로서 세상으로 떠나가도록 임명했다. 주의 성화(聖化) 명령은 이것이었다, “온 세계로 가서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라. 영적으로 포로 된 자들을 해방하고 억압받는 자를 위로하며, 고통받는 자를 돌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예수는 돈이나 여벌 옷을 가지지 말라 타이르며 말했다 “일꾼은 임금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마침내 그는 말했다. “보라 내가 이리들 한가운데 양처럼 너희를 보내노라. 그런즉 너희는 뱀과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그러나 살필지니, 너희의 적이 너희를 공회(公會)로 끌고 갈 것이요, 회당에서 너희를 징계할 것임이라. 이 복음을 믿는다고 해서 너희는 총독과 통치자들 앞에 넘겨지겠고, 너희의 바로 그 간증이 저희에게 나를 위한 증언이 될지니라. 그리고 너희를 재판으로 이끌 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 내 아버지의 영이 너희 안에 깃들고 그런 때에 너희를 통해서 말씀하시리라. 너희 중에 더러는 죽음을 당하겠고, 땅에서 하늘나라를 세우기 전에 이 복음 때문에 숱한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러나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고, 내 영을 온 세계로 너희 앞에 보내리라. 그리고 너희가 먼저 유대인에게, 다음에 이방인에게 가는 동안, 내 아버지가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그리고 산에서 내려와서 그들은 세베대의 집에 있는 거처로 돌아갔다.

10. 성화가 있은 날 저녁

비가 오기 시작했으므로, 그 날 저녁에 집에서 가르치는 동안 예수는 길게 말씀했고,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열둘에게 보여 주려 했다. 그들은 올바름―구원―에 이르는 수단으로서 어떤 일을 하라고 짐을 지우는 종교만 알았다. 그러나 예수는 되풀이하곤 했다. “하늘나라에서, 일하기 위하여 너희는 바르게 살아야 하느니라.” 여러 번 되풀이했다. “그런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그가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려고 왔고, 오직 믿음으로, 단순하고 성실하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그 동안 내내, 주는 놀란 사도들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예수는 말했다: “요한은 옛 생활 방식을 회개하고 슬퍼하는 세례를 외쳤느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친교하는 세례를 선포해야 하느니라. 회개의 가르침이 필요한 자들에게 회개를 외치라. 그러나 하늘나라로 들어가기를 이미 진지하게 찾는 자들에게는, 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의 아들들의 즐거운 친교로 들어오라 청하라.” 그러나 이 갈릴리 어부들에게, 하늘나라에서 믿음으로 올바르게 되는 것이 땅에서 사람들이 나날의 생활에서 올바른 일 행하는 것에 앞서야 한다고 설득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열둘을 가르치는 이 일에 또 다른 큰 장애물은, 종교적 진리를 담은 상당히 이상적이고 영적인 원칙을 개인의 행동에서 지킬 구체적 규칙으로 다시 만드는 경향이었다. 예수는 혼의 태도에 담긴 아름다운 정신을 제시하곤 했지만, 그들은 그러한 가르침을 개인의 행동 규칙으로 풀이하기를 고집했다. 주의 말씀을 분명히 기억했을 때, 그들은 예수무슨 말씀을 하지 않았는가 거의 확실히 잊어버린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가 가르친 모든 것의 실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천천히 그 가르침을 소화했다. 말씀으로 가르쳐서 얻을 수 없는 것은 그와 함께 살면서 차츰차츰 얻었다.

주가 방대한 우주의 모든 세계에서, 노소(老少)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인생을 사는 데 전념했다는 것이 사도들에게는 명백하지 않았다. 이따금 예수가 무슨 말씀을 했는데도, 사도들은 그가 이 세상에서, 그러나 광대한 창조에 있는 모든 다른 세상을 위하여 일한다는 생각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는 이 세상의 남녀를 위하여 개인적으로 사람으로 사는 모범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세계에 사는 모든 필사 존재를 위하여 영적이며 영감을 주는 높은 이상을 창조하려고, 유란시아에서 이 세상의 삶을 살았다.

바로 이 날 저녁 토마스예수께 물었다: “주여,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전에,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당신이 말씀하셨사온데, 그래도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지도 말고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당신이 경고하였나이다. 이제,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어리둥절하나이다. 당신의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없나이다.” 예수토마스에게 대답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너희를 참으리요! 너희는 나의 모든 가르침을 늘 글자 그대로 고집하는도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값으로서 어린아이 같이 되라 요구했을 때, 쉽게 속거나, 단지 기꺼이 믿으라거나, 호감(好感)이 가는 낯선 사람을 얼른 신뢰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느니라. 내가 바라건대, 그 예로부터 너희가 얻어야 할 것은 아이와 아버지의 관계였느니라. 너희는 어린아이요, 너희가 들어가고자 하는 것은 너희 아버지의 나라이라. 모든 정상의 아이와 아버지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애정이 있으니, 그것은 이해하고 사랑하는 관계를 보장하며,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얻으려고 협상하는 모든 성향을 언제까지나 막느니라. 너희가 나가서 전도하려는 그 복음은 바로 이 영원한 아이-아버지 관계를 믿음으로 깨달아서 생기는 구원과 상관이 있느니라.”

예수의 가르침의 한 가지 특징은 그 철학에 담긴 도덕성이 개인이 하나님과 가지는 개별 관계에서―바로 이 아이-아버지 관계에서―생겨난다는 것이다. 예수는 종족이나 나라가 아니라, 개인에 중점을 두었다. 저녁을 들면서 예수마태와 이야기했고, 그 말씀 가운데 어떤 행동이라도 그 도덕성은 개인의 동기에 따라 좌우된다고 설명하였다. 예수의 도덕성은 언제나 긍정적이었다. 예수가 다시 진술한 황금률은 적극적인 사회 접촉을 요구한다. 오래 된 부정적인 규칙은 격리되어 지킬 수 있다. 예수는 도덕으로부터 모든 법칙과 예식을 벗겨 버리고, 도덕을 영적으로 생각하고 참으로 올바르게 사는, 기품 있는 수준으로 높이 올려 놓았다.

예수의 이 새 종교는 실용적 함축성이 없지 않았지만, 그 가르침에서 실용적인 정치, 사회, 또는 경제적 가치를 가진 무엇이 발견되든지, 개인적으로 진정한 종교 체험을 겪으면서 날마다 자연스럽게 베푸는 봉사에서 영의 열매를 나타내는, 그 혼이 내부에서 얻는 이 체험이 자연히 풀려나가는 작용이다.

예수마태가 이야기를 마친 뒤에, 열심당원 시몬이 물었다. “그러나 주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니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옳도다, 시몬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것이 너희가 선포할 좋은 소식이라.” 그러나 사도들은 그러한 교리를 깨달을 수 없었다. 새롭고 이상하고 깜짝 놀랄 발언이었다. 이 진리를 강조하려는 소망 때문에, 그는 추종자들에게 모든 사람을 형제로 대우하라고 가르쳤다.

안드레가 묻는 데 답하여, 그의 가르침의 도덕성은 그가 실천하는 종교와 불가분하다고 분명히 일러 주었다. 사람의 성품으로부터가 아니라,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로부터 도덕성을 가르쳤다.

요한예수에게 물었다: “주여, 하늘나라는 무엇이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하늘나라는 이 세 가지 요건으로 이루어지느니라. 첫째는 하나님의 통치권이 사실

임을 인정하는 것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를 믿는 것이요, 셋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하나님과 같이 되려는―인간 최고의 소망이 효과 있음을 믿는 것이라. 믿음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의 이 모든 요건을 갖출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복음이 주는 좋은 소식이라.”

그리고 이제 기다리는 주간이 지났고, 이튿날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려고 준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