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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우위

뉴징검다리 2010. 2. 9. 06:47

3. 종교의 우위

 

 

개인의 영적 종교적 체험은 필사자가 겪는 대부분의 어려움에 효과적인 해결책이며, 인간의 모든 문제를 효과 있게 분류하고 평가하고 조정하는 약(藥)이다. 종교는 인간의 어려움을 제거하거나 없애버리지 않지만, 녹이고 흡수하고 밝게 비춰 주고 초월한다. 참된 종교는 모든 필사자의 요구 조건에 효과적으로 조정하기 위하여 인격을 통일한다. 종교적 믿음―깃드는 신성한 계심이 분명히 이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우주의 첫째 근원그것으로 인식하는 지적 논리, 이 첫째 근원그분이라고 확언하는 혼의 분명한 주장,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간

격을 어김없이 좁힐 수 있게 만들며, 그분은 예수의 복음에서 하늘 아버지요, 인간을 구원하는, 성격을 가진 하나님이다.

우주 실체에는 꼭 세 가지 원소(元素)가 있으니, 사실·아이디어·관계이다. 종교적 의식은 이 실체들을 과학·철학·진리로서 식별한다. 철학은 이 활동을 이성·지혜·믿음―물리적 실체, 지적 실체, 영적 실체―라고 보고 싶어한다. 우리는 이 실체들을 사물·의미·가치로 부르는 버릇이 있다.

실체의 점진적 이해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과 대등하다. 하나님을 찾아내는 것, 실체와 동일함을 의식하는 것은 자아의 완성(完成)―자아 전체성, 자아 총체성―을 체험하는 것과 맞먹는다. 총 실체를 체험하는 것은 하나님을 충만히 깨닫는 것이요, 하나님을 아는 체험의 최종이다.

인생의 총합은 사람이 사실에 따라 교육받고, 지혜로 고귀하게 되며, 종교적 믿음으로 구원된다―정당화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물리적 확실성은 과학의 논리(論理)에 있고, 도덕적 확실성은 철학의 지혜에, 영적 확실성은 진정한 종교적 체험의 진실에 있다.

지성이 전적으로 물질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의 지성이 높은 수준의 영적 통찰력과 그에 상당하는 신성한 가치 분야에 이를 수 있다. 사람의 지성에는 영 알맹이―신의 계심인 조절자―가 있다. 인간의 지성에 이 영(靈)이 깃든다는 세 가지 증거가 따로 있다:

 

1. 인도주의적 교제―사랑. 순전한 동물 지성은 자아를 보호하려고 군생할지 모르지만, 오직 영이 깃드는 지능이 사심 없이 이타적(利他的)이고 무조건 사랑하는 성질이 있다.

 

2. 우주의 해석―지혜. 오로지 영이 깃든 지성이 우주가 개인에게 친절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3. 삶의 영적 평가―예배. 오로지 영이 깃드는 사람이 신의 계심을 깨닫고, 이처럼 신성(神性)을 미리 맛보는 가운데, 그렇게 하면서 더욱 충만한 체험을 얻기를 추구할 수 있다.

 

인간의 지성은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지 않으며, 인간의 체험은 우주를 보는 통찰력을 낳지 않는다. 통찰력, 곧 도덕적 가치를 인식하고 영적 의미를 헤아리는 것에 관하여 말하면, 인간의 지성이 할 수 있는 것은 발견하고 인식(認識)하고 해석하고 선택하는 것이 전부이다.

우주의 도덕적 가치는 필사 지성의 세 가지 기본 판단, 곧 선택을 행사함으로 지적 소유물이 된다:

 

1. 자아의 판단―도덕적 선택.

2. 사회적 판단―윤리적 선택.

3. 하나님 판단―종교적 선택.

 

따라서 인간의 모든 진보는 합동 계시적 진화 기법에 따라서 실현되는 듯하다.

사랑에 빠진 신성한 분이 사람 속에 살지 않으면, 사심 없이 영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 해석(解釋)해 주는 분이 지성 안에 살지 않으면, 우주의 통일성을 참으로 깨달을 수 없다. 평가(評價)하는 분이 사람과 함께 거하지 않으면, 사람은 도저히 도덕적 가치를 평가하고 영적 의미를 헤아릴 수 없다. 사랑하는 이분은 무한한 사랑의 바로 그 근원으로부터 온다. 이 해석자는 우주의 통일의 일부이며, 이 평가자는 신성하고 영원한 실체에 담긴 모든 절대 가치의 중심 근원의 자식이다.

종교적 의미―영적 통찰력―이 담긴 도덕적 평가는 선과 악, 진리와 오류,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 인간다운 것과 신다운 것, 시간과 영원 사이에 개인이 선택함을 뜻한다. 인간이 살아남는 것은 대체로 이 영 가치 분류자―깃드는 해석자이자 통일자―가 골라 놓은 가치를 선택하는 데 인간의 의지(意志)를 거룩하게 바침에 달려 있다. 개인의 종교적 체험은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는 인간 지성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요, 하나는 깃드는 신다운 영이 계시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복잡하게 만들어서, 또는 종교가라고 공언하는 자들의 경건치 못한 행위의 결과로서, 한 사람 또는 한 세대의 사람들조차 안에 깃드는 하나님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그만둘 수 있다. 신성한 계시(啓示) 속에서 진보하거나 그 계시를 달성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영적으로 진보하지 않는 그러한 태도는 깃드는 생각 조절자의 계심과 영향 때문에 오랫동안 버틸 수 없다.

신성한 깃드심의 실체를 느끼는 이 심오한 체험은 언제까지나 자연 과학의 투박한 유물론 기법을 뛰어넘는다. 너희는 영적 기쁨을 현미경 밑에 놓을 수 없고, 사랑을 저울에 달 수 없고, 도덕적 가치를 자로 잴 수 없다. 영적 예배의 질(質)을 어림할 수도 없다.

히브리인들은 도덕 면에서 숭고한 종교를 가졌고,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의 종교를 진화했으며, 바울과 그와 의논한 자들은 믿음·소망·자선의 종교를 창시했다. 예수는 사랑의 종교, 즉 아버지 사랑의 보장과 함께, 인간의 형제 정신에 봉사하면서 이 사랑을 나누는 결과로서 기쁨과 만족을 얻는 종교를 계시하고 본보기로 보였다.

골똘히 생각해서 도덕적인 선택을 할 때마다, 사람은 즉시 혼(魂)에 새로이 신(神)이 쳐들어옴을 체험한다. 도덕적 선택은 종교를 외부 조건에 대하여 안에서 반응하는 동기로 만든다. 그러나 그러한 진정한 종교는 순전히 주관적 체험은 아니다. 총 객관성―우주와 그 조물주―에 대하여 의미 있게, 총명하게 반응하는 개인의 주관성 전체를 의미한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아름답고 초월적인 체험은 순전히 주관적이라고 해서 단순히 심리적 환상은 아니다. 필사 존재들과 결합된 참으로 신답고 객관적인 한 실체, 즉 생각 조절자는 인간이 관찰하기에 순전히 객관적 현상으로서 활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가장 높은 객관적 실체,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은 그를 알고, 예배하고, 그의 아들임을 깨닫는 순전히 주관적 체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참된 종교적 예배는 자아(自我)를 속이는 쓸데없는 혼잣말이 아니다. 예배는 신성하게 실재하는 것, 실체의 바로 그 근원인 것과 몸소 교통하는 것이다. 사람은 예배로 말미암아 더 나아질 생각을 품고, 그로서 궁극에는 최선에 이른다.

진리·아름다움·선을 이상(理想)으로 만들고 그에 봉사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진정한 종교적 체험―영적 실체―의 대용물이 아니다. 심리학과 유심론(唯心論)은 종교적 실체와 대등하지 않다. 인간의 지능이 투영한 것들은 정말로 거짓 신―사람의 모습을 입은 신―들을 창시할지 모르지만, 참된 하나님 의식은 그런 기원을 가지지 않는다. 하나님 의식(意識)은 깃드는 영 안에 거한다. 사람이 만든 많은 종교 체계는 인간의 지능이 빚은 것으로부터 생겨나지만, 하나님 의식이 반드시, 괴상한 이 종교적 노예 체계의 일부는 아니다.

하나님은 단지 사람의 유심론(唯心論)이 발명한 물건이 아니라, 동물을 뛰어넘는 모든 그러한 통찰력과 가치의 바로 그 근원이다. 하나님은 진리·아름다움·선에 관한 인간의 개념을 통일하려고 지어 낸 가설(假說)이 아니다. 사랑의 성격자이며, 그로부터 이 모든 우주 명시가 파생된다. 사람의 세계에 있는 진리·아름다움·선은

파라다이스 실체들을 향하여 올라가는 필사자가 겪는 체험의 영적 성향이 증가됨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된다. 진리·아름다움·선의 통일은 오로지 하나님을 아는 성격의 영적 체험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도덕성은 몸소 하나님을 의식하고, 조절자가 안에 계심을 몸소 깨닫는, 필수이고 선재(先在)하는 토양이지만, 그러한 도덕성은 종교적 체험의 근원과 그에 따라 생기는 영적 통찰력이 아니다. 도덕적 성품은 동물을 뛰어넘지만 영 밑에 있다. 도덕성은 의무를 인식하는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의 존재를 깨달음과 대등하다. 성격이 달성하는 물질 분야와 영적 분야 사이에서 상물질계가 활동하는 것처럼, 도덕의 구역은 동물과 인간 종류의 지성 사이에 개재한다.

진화된 지성(知性)은 법칙·도덕률·윤리를 발견할 수 있지만, 수여된 영, 깃드는 조절자는 진화하는 인간 지성에게 입법자를,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모든 것의 아버지 근원을 드러낸다. 그렇게 빛을 받은 사람은 종교가 있으며, 하나님을 찾는, 길고 모험이 가득한 탐색을 시작하기 위하여 영적 장비가 갖추어져 있다.

도덕성은 반드시 영적인 것이 아니지만, 전적으로, 순전히 인간다울지 모른다. 하지만 참된 종교는 모든 도덕적 가치를 높이고 더욱 뜻있게 만든다. 종교가 없는 도덕은 궁극의 선을 드러내지 못하며, 또한 그 자체의 도덕적 가치조차 살아남지 못하게 한다. 종교는 도덕이 인식하고 승인하는 모든 것을 향상하고 영화롭게 만들고, 그것이 살아남기를 보장한다.

종교는 과학, 예술, 철학, 윤리, 도덕률 위에 서지만, 이로부터 독립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모두 분리할 수 없게, 개인 및 사회적인 인간 체험 속에 서로 얽혀 있다. 종교는 필사 성품을 입고서 사람이 맛보는 최대의 체험이지만, 유한한 언어는 언제까지나 신학(神學)이 진정한 종교 체험을 언제라도 적절히 묘사하기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종교적 통찰력은 패배를 더 높은 소망과 새로운 결의로 바꾸는 힘을 소유한다. 사랑은 사람이 우주에서 올라가면서 이용해도 좋은 가장 높은 동기이다. 그러나 진리·아름다움·선을 벗어 버린 사랑은 기껏해야 감정, 철학적 왜곡, 심리적 환상, 영적 속임수일 뿐이다. 사랑은 반드시 상물질과 영이 진보하는 연속된 수준에서 다시 정의(定義)되어야 한다.

예술은 사람이 물질 환경에서 아름다움이 결여된 상태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는 결과로 생기며, 예술은 상물질 수준을 향한 손짓이다. 과학은 사람이 물질 우주에서 수수께끼로 보이는 것들을 풀려고 기울이는 노력이다. 철학은 사람이 인간의 체험을 통일하려는 시도이다. 종교는 사람의 최고의 손짓이요, 최종의 실체를 향하여 멋지게 손을 뻗는 것, 하나님을 찾아내고 그와 같이 되려는 결심이다.

종교적 체험 분야에서, 영적 가능성은 잠재(潛在)하는 실체이다. 앞을 향한 사람의 영적 욕구는 심리적 환상이 아니다. 사람은 우주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닐지 모르지만, 많은 것, 허다한 것이 진리이다.

 

 

어떤 사람들의 인생(人生)은 너무 위대하고 고귀해서, 단순히 성공적인 낮은 수준으로 내려올 수 없다. 동물은 환경에 적응해야 하지만, 종교적인 사람은 환경을 뛰어넘고, 이 방법으로 이 신다운 사랑의 통찰력을 통해서, 현재 물질 세계의 한계를 벗어난다. 이 사랑 개념(槪念)은 사람의 혼 속에서 진리·아름다움·선을 발견하려는, 동물을 초월하는 노력을 일으킨다. 이것들을 찾아낼 때, 사람은 그 품에 안겨 영화롭게 된다. 사람은 이것들을 실천하고, 정의(正義)를 실행하려는 소망으로 불탄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라. 인간의 진화는 아직도 진행하고 있고, 예수 안에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에 주는 계시(啓示)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현대인에게 큰 도전은 인간의 지성 안에 거하는 신다운 감시자와 더욱 낫게 교통하는 것이다. 육체를 입고서 사람이 겪는 가장 큰 모험은 영 의식의 경계지에 이르려고―신성한 계심과 접촉하려고―마음을 다하여 기울이는 노력에서, 싹트는 혼 의식의 어두컴컴한 영역을 거쳐서, 자의식(自意識) 테두리를 바깥으로 내미는 노력, 균형 잡히고 정신차린 노력에 있다. 그러한 체험은 하나님 의식이요, 하나님을 아는 종교적 체험의 선재하는 진실을 힘차게 확인하는 체험이다. 그러한 영 의식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성을 아는 것에 해당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들이라는 확신은 믿음의 체험이다.

하나님 의식은 자아(自我)를 우주와 함께, 우주에서 영적 실체의 가장 높은 수준에서 통합하는 것과 대등하다. 어떤 가치에서도 오직 그 영(靈) 알맹이가 썩지 않는다.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도 인간의 체험에서 썩지 않을지 모른다. 사람이 살아남기를 택하지 않는다면, 그 때 살아남는 조절자는 사랑 속에 태어나고 봉사 속에서 양육된 그 실체들을 보존한다. 이 모두가 우주의 아버지의 일부이다. 아버지는 살아 있는 사랑이요, 아버지의 이 생명(生命)은 그 아들들 안에 있으며, 아버지의 영은 아들들의 아들―사람―안에 계신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보건대, 아버지 관념은 아직도 인간이 가진 바, 가장 높은 하나님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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