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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종교

뉴징검다리 2010. 2. 9. 06:55

2. 예수의 종교

언젠가 그리스도 교회의 개혁(改革)은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종결자인 예수의 가르침, 섞이지 않은 종교적 가르침으로 돌아가기에 충분히 깊게 침투할지 모른다. 너희는 예수관한 종교를 전파해도 좋지만, 필연적으로 너희는 예수 종교를 실천해야 한다. 오순절의 열심 속에, 베드로는 뜻하지 않게 새 종교, 부활하고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종교를 창시(創始)했다. 사도 바울은 나중에 이 새 복음을 그리스도교로 변화시켰는데, 자신의 신학 견해를 구현하고 다마스커스 길에서 예수를 자신이 몸소 체험한 것을 그리는 종교였다. 하늘나라 복음은 갈릴리예수가 친히 겪은 종교적 체험에 기초를 두었다. 그리스도교는 거의 순전히 사도 바울이 개인적으로 겪은 종교적 체험에 기초를 두었다. 신약(新約)의 거의 전부가, 의미 있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예수의 종교 생활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종교적 체험을 토론하고 개인적인 종교적 확신을 그리는 데 바쳐진다. 마태·마가·누가의 어떤 부분은 별도로 하고, 이 진술에 주목할 예외는 히브리서와 야고보 서한 뿐이다. 베드로도 그가 쓴 글에서, 주의 개인적 종교 생활로 겨우 한 번 돌아갈 뿐이다. 신약은 훌륭한 그리스도교 문헌이지만, 빈약하게 예수다울 따름이다.

육체를 입은 예수의 일생은, 원시적 경외감과 인간적 존경심이 나타나는 초기의 관념으로부터, 몸소 영적으로 교통하는 여러 해를 거쳐서, 마침내 그가 아버지

하나 됨을 의식하는 상급의 높은 지위에 이를 때까지, 탁월한 종교적 성장을 묘사한다. 짧은 일생 안에 예수는 이처럼 사람이 땅에서 비롯하고 파라다이스 이전 생애에, 연속된 수준의 영 훈련 학교들에서 오래 머무른 끝에야 보통 이룩하는, 종교 면에서 영적으로 진보하는 체험을 거쳤다. 예수는 몸소 겪는 종교적 체험에서 얻는, 신앙의 확실한 것들을 순전히 인간적으로 의식(意識)함으로부터 신다운 성품을 분명히 깨닫는 숭고한 영적 높이까지, 한 우주의 경영에서 우주의 아버지와 그가 가까운 관계를 가졌음을 의식하기까지 나아갔다. 그를 선한 선생이라고 부른 사람에게 저절로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외에 아무도 선하지 않으니라” 말하도록 자극한 상태, 사람으로서 의존하는 겸손한 상태로부터 나아갔고, 그로 하여금 “너희 가운데 누가 나를 정죄하느냐?” 외치도록 이끈, 신성(神性)을 성취했음을 숭고하게 의식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인간다운 것으로부터 신다운 것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점진적으로 올라간 것은 순전히 사람의 성취였다. 이렇게 신성에 이르고 나서, 하나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여전히 똑같은 인간 예수, 사람의 아들이었다.

마가·마태·누가는 신의 뜻을 확인하고 그 뜻을 행하려는 숭고한 투쟁에 몰두한 인간 예수의 그림을 얼마큼 간직한다. 요한은 신성을 완전히 의식하면서 땅에서 걷는 승리한 예수의 그림을 제시한다. 주의 일생을 연구한 자들이 저지른 큰 잘못은 더러는 그를 전적으로 인간이라 생각했고, 더러는 오직 신(神)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의 체험 전부를 통해서 내내, 아니 아직도 그렇다시피, 그는 참으로 인간이고 신이었다.

그러나 인간 예수가 종교를 가졌다고 인식했어도, 신다운 예수(그리스도)가 거의 하룻밤 사이에 종교가 되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잘못이 일어났다. 바울그리스도교는 신성한 그리스도를 꼭 찬미하도록 만들었지만, 갈릴리예수, 투쟁하는 용감한 인간 예수를 거의 전적으로 보지 못하고 놓쳤다. 인간 예수는 자신의 종교적 믿음의 용기와 그에 깃든 조절자의 영웅다운 자질로 말미암아, 인간의 낮은 수준으로부터 신성과 하나가 되기까지 올라갔으며, 이처럼 모든 필사자가 그렇게 인간으로부터 신성으로 올라갈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길이 되었다. 영성(靈性)의 모든 단계에서, 모든 세계에 있는 필사자들은, 예수 개인의 일생에서, 가장 낮은 영 수준으로부터 가장 높은 신성한 가치에 이르기까지, 몸소 겪는 모든 영적 체험의 시초부터 끝까지 올라가는 동안에, 힘을 주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을 발견할지 모른다.

신약(新約)이 기록될 때, 그 저자(著者)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을 아주 깊이 믿었을 뿐 아니라, 하늘나라를 완성하려고 그가 땅으로 즉시 돌아오리라고 열심히, 성실하게 믿었다. 주가 즉시 돌아오리라는 이 굳센 믿음은 주의 순전히 인간적인 체험과 속성을 그리는 언급을 기록으로부터 빼 버리는 경향에 많이 기여하였다. 그리스도교 운동 전체가 나사렛 예수의 인간다운 그림으로부터 멀리, 부활하신 그리스도, 영화롭게 되었고 곧 돌아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옮아가는 경향이 있었다.

예수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인간 형제들에게 봉사하면서 몸소 겪은 체험의 종교를 세웠다. 바울은 영화롭게 된 예수가 예배의 대상(對象)이 되고, 그 형제 단체가 신다운 그리스도를 믿는 동료 신자들로 이루어진 그러한 종교를 세웠다. 예수의 수여(授與)에서 이 두 개념은 신이자 인간인 일생에 잠재했다. 주의 인간 성품과 신다운 성품이 땅에서 산 일생에서 뗄 수 없이 붙어 있고 최초의 하늘나라 복음에

서 아주 영화롭게 설명된 바와 같이, 이 두 성품을 적절히 인정했을지도 모르는 통일된 종교를 추종자들이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은 정말로 유감스럽다.

예수가 세상에서 아주 진심으로 헌신한 종교가였다는 것을 기억하기만 한다면, 너희는 그의 어떤 강경한 발언에 충격을 받거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아낌없이 몸을 바친, 온통 거룩하게 헌신한 사람이었다. 어렵게 보이는 말씀 가운데 많은 것은 추종자들에게 주는 명령이라기보다 믿음을 친히 고백한 것이요 헌신(獻身)의 서약이었다. 바로 이러한 한결같은 목적과 사심 없는 헌신이 그로 하여금 짧은 일생에서 인간 지성을 정복하는 데 그렇게 특별히 진보할 수 있게 하였다. 그의 선언 가운데 많은 것은 모든 추종자에게 요구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자신에게 부과한 요구를 고백한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하늘나라 운동에 헌신하면서, 예수는 지나간 다리를 모두 불살랐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있는 모든 장애물을 희생했다.

예수가 가난한 자들을 축복한 것은 그들이 보통 성실하고 경건했기 때문이다. 보통 바람을 피우고 종교성이 없기 때문에 부자(富者)들을 비난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종교성이 없는 빈민을 비난하고, 거룩하게 헌신하고 종교적인 부자를 칭찬할 것이다.

예수는 세상에서 사람을 편안하게 느끼도록 이끌었다. 사람들을 금기(禁忌)에 노예가 된 상태로부터 구원했고, 세상이 근본적으로 악하지 않다고 가르쳤다. 땅의 생활로부터 도피하기를 동경(憧憬)하지 않았다.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 아버지의 뜻을 수긍할 만하게 행하는 기법을 통달했다. 현실적인 세상 바로 한가운데서 이상주의적 종교 생활에 도달하였다. 예수는 인류에 대하여 바울의 비관적 견해를 가지지 않았다. 주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바라보았고, 살아남기를 택하는 자들에게 멋지고 영원한 앞날이 있음을 내다보았다. 도덕 면에서 회의론자가 아니었고,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사람을 보았다. 모든 사람이 사악하기보다 약하다고, 타락하기보다 갈팡질팡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상태가 어떻든지 상관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의 형제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시간과 영원 속에서 자신을 높이 평가하라고 가르쳤다. 사람들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예수는 기꺼이 인류에게 끊임없이 봉사하는 데 몸을 바쳤다. 그의 종교에서 황금률을 필수 요인으로 만든 것은 바로 유한자(有限者)의 이 무한한 가치였다. 어떤 필사자가 예수가 그를 특별히 신뢰하는 데 격려를 받지 않을 수 있는가?

예수는 사회의 진전을 위하여 아무런 규칙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의 사명은 종교적인 것이었고, 종교는 순전히 개인의 체험이다. 사회의 가장 진보된 성취의 궁극의 목적은 결코 사람이 형제(兄弟)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뛰어넘기를 바랄 수 없고, 그것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인식에 기초를 둔다. 모든 사회적 성취의 이상은 오직 이 신의 나라가 오면서 이루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