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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믿음

뉴징검다리 2010. 2. 9. 07:02

제 196 편

예수의 믿음

예수는 숭고한 믿음,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녔다. 필사 존재의 보통 오르막과 내리막을 겪었지만, 하나님의 보살핌과 안내하심이 확실하다는 것을 결코 종교적으로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믿음은 신성한 존재, 그에게 깃든 조절자의 활동에서 생겨난 통찰력의 결과였다. 그의 믿음은 전통적이거나 단순히 지적인 믿음이 아니었고, 온전히 개인적이고 순수하게 영적인 믿음이었다.

인간 예수하나님이 참되고 아름답고 선할 뿐 아니라, 거룩하고 공정(公正)하고 위대하다고 보았다. 신성의 이 모든 속성을 머리 속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으로 한데 집중하였다. 예수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요, 동시에 “하늘에 계신, 생명과 사랑의 아버지”였다. 하나님아버지라는 개념을 예수가 창시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을 새로이 계시(啓示)함으로, 모든 필사 인간이 이 사랑의 아버지의 자식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포함으로, 그 생각을 숭고한 체험으로 높이고 들어올렸다.

예수는 허덕이는 사람이 우주와 전쟁하면서, 냉담하고 죄 많은 세상과 결사적으로 씨름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매달리지는 않았다. 단지 어려움 한가운데서 위안으로서, 또는 절망의 위협 속에서 하나의 위로로서 믿음에 의존하지 않았다. 믿음은 그저 불쾌한 현실과 생활의 슬픔에 대한 허망한 보상(報償)이 아니었다. 필사 존재에서 생기는 모든 자연스러운 곤경과 현세의 모순과 마주쳐서, 최상으로, 절대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차분함을 맛보고, 하늘 아버지의 바로 그 계심 가운데서, 신앙으로 엄청난 생활의 기쁨을 느꼈다. 이 승리한 믿음은 실제로 영에 도달한 산 체험이었다. 인간 체험의 가치에 예수가 크게 기여한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하여 아주 많은 새 관념을 드러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살아 있는 신앙, 새로운 상급 종류의 신앙을 아주 훌륭하게, 인간답게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이 우주의 모든 세상에서, 어느 한 필사자의 일생에서, 나사렛 예수의 인간 체험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생동하는 실체가 된 적이 없다.

유란시아에서 사신 주의 일생에서, 지역 우주의 이 세상과 모든 다른 세상은 새로운 상급 종류의 종교를 발견하는데, 이것은 우주의 아버지와 개인적으로 가진 영적 관계에 기초를 두고, 진정하게 몸소 겪은 체험의 최고 권한으로 말미암아 온통 정당화된 종교이다. 예수의 이 살아 있는 신앙은 지적(知的) 명상을 넘는 것이요, 신비스러운 명상이 아니었다.

신학(神學)은 신앙을 고정시키고 형성하고 정의하고 교리화할지 모르지만, 예수의 인생에서 신앙은 개인적이고, 살아 있고, 독창성 있고, 자연스럽고 순전히 영적인 것이었다. 이 믿음은 전통에 대한 존경심도, 신성한 신조로서 지녔던 한낱 지적인 관념도 아니었고, 오히려 숭고한 체험이요 그를 단단히 붙든 깊은 확신이었다. 그의 믿음은 너무나 참되고 모든 것을 둘러쌌기 때문에, 어떤 영적 의심도 절대로

쓸어 버리고, 상반되는 모든 소망을 실질적으로 없애 버렸다. 아무 것도 그를 뜨겁고 숭고한 믿음, 기가 꺾이지 않는 이 믿음의 영적 정박지로부터 몰아 낼 수 없었다. 명백한 패배와 마주치거나, 실망과 위협하는 절망에 한창 시달릴 때도, 두려움 없이, 영적 불굴(不屈)을 가득히 의식하면서 신이 계신 앞에서 차분하게 서 있었다. 예수는 확고한 믿음을 소유한다는, 힘찬 확신을 지녔고, 인생의 벅찬 상황을 만날 때마다 아버지의 뜻에 의심하지 않고 충성함을 어김없이 나타냈다. 더할 나위 없는 이 믿음은 치욕스럽게 죽는, 잔인하고 정신을 짓밟는 위협에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종교적 천재(天才)의 경우에, 강한 영적 믿음은 아주 흔히 비참한 광신으로, 종교적 자아의 과장으로 이끌지만, 예수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특별한 믿음과 영적 달성 때문에 실지 생활에서 불리하게 영향을 받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영적 진보는 하나님을 몸소 겪는 체험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저절로 혼으로 표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온 몸을 불태우며 굴복할 줄 모르는 예수의 영적 믿음은 결코 광신이 되지 않았고, 이것은 실지로, 보통 생기는 사회·경제·도덕적 생활 상황의 비례적 가치에 관하여 잘 균형 잡힌 지적 판단으로부터 믿음이 결코 벗어나려 애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눈부시게 통일된 인간 성격이었다. 완전하게 갖춘 신다운 존재였고, 또한 땅에서 하나의 성격으로서 활동하는 존재, 인간과 신이 통합된 존재로서 훌륭하게 조정되었다. 주는 언제나 혼의 믿음을 성숙한 경험으로 얻은 지혜의 평가와 조정했다. 모든 인간적 충성―개인의 명예, 가족 사랑, 종교적 의무, 사회적 임무, 경제적 필요성―의 현실과 그 신성함을 예민하게 깨닫는 것과 조화 있게 연결되어, 비할 데 없는 종교적 통일 속에서, 개인의 믿음, 영적 희망, 도덕적 헌신은 언제나 서로 관련되었다.

예수의 믿음은 모든 영(靈) 가치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발견된다고 상상했고, 따라서 “먼저 하늘나라를 찾으라”고 하였다. 예수는 하늘나라의 진보된 이상적 친교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완성되는 것을 눈에 선하게 보았다.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의 바로 그 핵심(核心)은 이것이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그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렇게 하늘나라가 하나님의 뜻을 구성한다고 상상했기 때문에, 놀랍게 자기를 잊고 한없는 열심으로 실현하는 운동에 몸을 바쳤다. 하지만 모든 강렬한 사명에서, 특별한 생애 전체를 통해서, 광신자의 격분이나 종교적으로 자기 본위인 사람의 얄팍한 천박성이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주의 일생 전부가 이 살아 있는 믿음, 이 숭고한 종교적 체험에 따라 한결같이 조절되었다. 이 영적 태도가 완전히 그의 생각과 느낌, 믿음과 기도, 가르침과 전도(傳道)를 지배했다. 한 아들이 하늘 아버지가 안내하고 보호하신다는 확실성과 보장을 이렇게 개인적으로 믿는 것은 독특한 생애에 영적 실체의 심오한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그래도, 신성과 가까운 관계를 이렇게 아주 깊이 의식했는데도, 이 갈릴리 사람, 하나님갈릴리 사람은, 누가 “선한 선생”이라 일컬었을 때, 순간적으로 대답했다 “어째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자아를 잊어버리는 그러한 찬란한 태도와 마주칠 때, 어떻게 우주의 아버지가 자신을 그에게 충만히 나타내고, 그를 통해서 그 영역의 필사자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함을 발견했는가 우리는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예수는 그 영역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모든 헌물 가운데 가장 큰 것을 가져왔으니, 즉 신(神)의 뜻을 행하는 훌륭한 봉사에 자신의 뜻을 거룩히 드리고 바치는 것이다. 예수는 언제나, 한결같이,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보는 견지에서 종교를 풀이했다. 종교 생활에서 기도나 어떤 다른 모습에 관해서 주의 생애를 연구할

때, 무엇을 가르쳤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행했는가를 보라. 그에게 기도(祈禱)는 영적 태도의 성실한 표현이요, 혼의 충성을 선언한 것, 개인의 헌신을 낭독한 것, 감사의 표현, 감정의 긴장을 피하는 것이다. 갈등의 방지, 지적 사고(思考)를 승화한 것, 소망을 고귀하게 만드는 것이요, 도덕적 결심의 입증, 생각을 강화한 것, 상급 성향에 활력을 붓는 것, 충동을 거룩히 바치는 것이다. 관점의 해명, 믿음의 선언, 초월하여 의지를 항복하는 것, 확신을 숭고하게 주장하는 것이요, 용기의 계시, 발견의 선언, 최고의 헌신을 고백하는 것이다. 거룩한 헌신을 확인하는 것, 어려움을 조정하는 기법, 이기심·악·죄를 향한 모든 인간 성향을 물리치려고 혼의 총 능력을 힘차게 동원하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신앙심으로 거룩히 바치는 바로 그러한 인생을 살았고, 바로 그러한 기도로 인생을 승리로 마쳤다. 견줄 데 없는 종교 생활의 비결은 하나님의 계심을 이렇게 의식하는 것이었다. 계몽이나 목소리나 환상이나 특별한 종교적 관습이 아니라, 총명한 기도와 성실한 예배로―하나님과 끊임없이 교통함으로―그 비결을 얻었다.

땅에서 사신 예수의 생애에서 종교는 생생한 체험, 즉 영적 경외감으로부터 실용적인 올바름으로 직접 몸소 넘어가는 것이었다. 예수의 믿음은 신다운 영의 초월적 열매를 맺었다. 그 믿음은 어린아이의 것처럼 미숙하고 쉽사리 믿는 것이 아니라, 여러 면에서 어린아이처럼 의심하지 않는 신뢰와 비슷하였다. 아이가 부모를 신뢰하는 것과 많이 비슷하게 예수하나님을 신뢰하였다. 우주를 깊이 신뢰했다―어린아이가 부모(父母)의 환경을 믿는 것 같이, 바로 그런 신뢰를 가졌다. 우주가 근본적으로 선함을 예수가 진심으로 믿는 것은 어린아이가 지상(地上) 환경이 안전함을 믿는 것과 대단히 비슷하였다. 어린아이가 땅에 있는 부모에게 기대듯 하늘 아버지에게 의존했고, 뜨거운 믿음은 결코 하늘 아버지의 보살핌이 확실함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두려움이나 의심이나 회의(懷疑)에 심각하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불신(不信)은 그의 생애에서 자유롭고 독창적인 표현을 막지 않았다. 충분히 성장한 사람의 굳건하고 총명한 용기, 믿는 어린아이의 성실하고 신뢰하는 낙관주의를 한데 모았다. 그의 믿음은 도무지 두려움이 없는 그러한 신뢰의 경지에까지 다다랐다.

예수의 믿음은 어린아이의 신뢰처럼 순수했다. 그 믿음은 아주 절대적이고 의심이 없었고, 그래서 동료 존재들과 접촉하는 황홀함에, 또 우주의 경이에 반응했다. 신다운 것에 기대는 감각은 아주 완벽하고 아주 자신이 넘쳐서, 성격이 절대로 안전하다는 기쁨과 확신을 낳았다. 그의 종교적 체험에는 망설이는 티가 전혀 없었다. 충분히 성장한 사람의 이 거대한 지능 속에서 어린아이의 믿음이 종교적 의식(意識)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를 최고로 다스렸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고는, 너희가 하늘나라로 들어가지 못할지니라”하고 한때 말한 것은 당연하다. 예수의 믿음이 어린아이 같았는데도, 어떤 의미에서도 유치하지는 않았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를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함께 믿으라, 하나님의 사랑이 현실임을 믿고, 충분한 확신 속에서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확신이 안전함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주는 모든 추종자가 그의 초월적 믿음을 충분히 나눠 가지기를 바란다. 그가 믿은 것을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가 믿은 것처럼 믿으라고, 예수는 아주 감동적으로 추종자들에게 도전했다. 이것이 “나를 따르라”하는 한 가지 최상의 요구 조건이 가진 충분한 의미이다.

땅에서 예수의 일생(一生)은 한 가지 큰 목적에 바쳐졌다―즉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 종교적으로, 신앙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예수의 믿음은 어린아이의 믿음처럼 신뢰하는 것이었지만, 전혀 주제넘지 않았다. 튼튼하고 당당하게 결정을 내렸고, 다양한 실망에 용감히 부딪쳤고, 특별한 어려움을 굳게 이겨냈으며, 의무의 엄격한 여러 요구 조건에 주춤하지 않고 부닥쳤다. 예수가 믿은 것을 그가 믿은 것처럼 믿는 데는 힘찬 의지와 틀림없는 확신이 필요했다.

1. 사람 예수

아버지의 뜻에, 그리고 사람에게 베푸는 봉사에, 예수가 헌신한 것은 사람의 결심과 인간적 결의보다 더 컸고, 그렇게 아낌없이 사랑을 수여하는 데 마음을 다하여 거룩히 몸을 바치는 것이었다. 미가엘이 군주라는 사실이 아무리 크더라도 상관 없이, 사람들로부터 인간 예수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 주는 하나님일 뿐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는 사람들에게 속하고, 사람들은 그에게 속한다. 인간 예수를 허덕이는 필사자들로부터 빼앗도록 종교 자체가 잘못 풀이되는 것은 얼마나 딱한 일인가! 그리스도의 인간성이나 신성을 토론하더라도, 나사렛 예수가 신앙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기를 성취한 종교적인 사람이었다는 유익한 진리를 가리게 하지 말라. 그는 유란시아에서 일찍이 살았던 가운데 참으로 가장 종교적인 사람이었다.

19세기의 신학 전통과 종교적 독단(獨斷) 한가운데서, 인간 예수가 묻힌 무덤으로부터 상징적 부활을 증언할 때가 무르익었다. 나사렛 예수는,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라는 눈부신 개념에도 이제 더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이 계시를 통해서, 사람의 아들이 전통적 신학(神學)의 무덤으로부터 회복되고, 그 이름을 지니는 교회와 모든 다른 종교에게 살아 있는 예수로서 제시된다면, 얼마나 초월적 봉사일 것인가! 그리스도교에서 신자들의 교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종교적으로 헌신하고, 사람에게 사심 없이 봉사하는 데 거룩히 바친 진정한 일생을 보여 주면서, 그 교제가 주의 “뒤를 따를” 수 있도록, 분명히 서슴지 않고 그러한 믿음과 생활 관습을 조정할 것이다. 그리스도 교인이라고 공언(公言)한 자들은,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이기적인 경제적으로 잘못 적응된 교제, 거만하고 거룩하게 헌신하지 않은 교제가 노출될까 두려워하는가? 갈릴리예수가 필사 인간들의 지성과 혼 속에서 개인의 종교 생활의 이상으로서 다시 자리를 찾는다면, 제도화된 그리스도교는 전통적 교회 권한의 가능한 위협을, 아니 교회 권한이 뒤엎어질까 두려워하는가? 정말로 예수의 살아 있는 종교가 예수에 관한 신학적 종교를 갑자기 갈아치운다면, 그리스도교 문명에서 사회의 재조정, 경제적 변화, 도덕적 원기 회복, 종교적 수정은 철저하고 혁신이 될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그의 종교적 믿음을 몸소 나누고, 사람에게 사심 없이 봉사한 주의 일생의 정신에 들어감을 의미한다. 인간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예수가 무엇을 믿었는가를 찾아내고, 그 이상(理想)을 발견하며, 그의 드높은 인생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애쓰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지식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은 예수의 종교적 일생과 그가 어떻게 일생(一生)을 살았는가를 아는 것이다.

서민들은 예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고, 진리가 세상에 다시 선포된다면, 거룩히 바친 종교적 동기를 가진 그의 성실한 인생을 발표하는 것에 다시 반응할 것이다.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기쁘게 들은 것은 그가 그들 가운데 하나요, 꾸밈없는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 스승은 정말로 보통 사람이었다.

육체를 입은 예수의 일생, 겉에서 보이는 일생을 글자 그대로 모방(模倣)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믿음을 함께 나누는 것이 하늘나라를 믿는 사람들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한 것 같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가 사람들을 믿은 것 같이 사람들을 믿는 것이다. 예수하나님이 아버지인 것이나 사람들이 형제인 것에 관하여 한 번도 논쟁하지 않았다. 하나를 생생하게 보여 주었고, 다른 하나를 심오하게 전시하였다.

인간다운 것을 의식함으로부터 신다운 것을 깨닫기까지 사람들이 진보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사람의 성품으로부터 하나님의 성품을 의식하는 데까지 올라갔다. 주는 필사자 지능의 믿음과 깃드는 조절자의 행위가 합동으로 이룬 성취로 말미암아, 인간다운 것으로부터 신다운 것으로 이렇게 올라가는 일을 해냈다. (인간성의 현실을 내내 충분히 의식하면서) 신성(神性)의 총체를 얻었음을 사실로 깨닫는 데는 점진적으로 신이 되는 것을 믿음으로 의식하는 일곱 단계가 따랐다. 점진적으로 자아를 각성하는 이 여러 단계는 주가 자신을 수여하는 체험에서 다음의 특별한 사건들로 말미암아 구별된다:

1. 생각 조절자의 도착.

2. 열두 살쯤 되었을 때,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나타난 이마누엘의 사자.

3. 세례에 따른 여러 표시.

4. 변모산에서 겪은 체험.

5. 상물질 부활.

6. 영의 승천.

7. 마침내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품에 안긴 것. 이것은 그의 우주에 대하여 무제한 통치권을 부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