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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날

뉴징검다리 2010. 2. 9. 07:06

10. 앞날

그리스도교는 정말로 이 세상에 크게 봉사했지만, 이제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이다. 세상은 주를 모든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필사자, 영에게서 태어난 필사자들의 체험 속에서, 다시 땅에서 사는 예수를 보는 것이 필요하다. 원시 그리스도교의 부흥을 언급하는 것은 무익하다. 있는 자리에서 너희는 앞으로 나가야 한다. 현대 문화는 예수 일생의 새로운 계시(啓示)로 영적 세례를 받고, 영원한 구원을 주는 복음을 새로 이해함으로 빛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높이 들어올려질 때, 예수는 모든 사람을 끌어당길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정복자보다 더한 것, 아니 모든 사람에게 영감과 향상된 생활의 넘치는 근원까지도 되어야 한다. 몸소 체험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는 현실을 발견함으로 신성하게 될 때까지, 종교는 향상된 인본주의(人本主義)일 뿐이다.

땅에서 예수가 산 일생의 아름다움과 숭고함, 그 인간성과 신성(神性), 단순함과 독특함은 사람을 구하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놀랍고 호소하는 그림을 제시하며, 그래서 언제까지나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사람 모습을 입은 하나님의 그러한 초월적 자신 수여로부터, 감히 영적으로 속박하는 신조(信條)를 형성하거나 신학 체계를 지어내지 못하게 효과적으로 제지해야 한다. 예수 안에서 우주는 한 필사 인간을 만들어 냈고, 그분 안에서 사랑의 정신은 시간의 물질적 장애를 이기고, 물리적 기원을 가진 사실을 극복했다.

항상 기억하라―하나님과 사람은 서로 필요하다. 우주 최종의 신성한 운명에서 영원한 성격 체험을 충만하게 마침내 이루는 데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 필요하다.

“너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은 아마도, 아버지가 살아 계신, 사랑의 영이라는 선언 다음으로 예수가 일찍이 하신 가장 위대한 선언(宣言)이었다.

주를 위하여 사람들을 설득할 때,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강제나 의무나 관습으로 처음 5리를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낌없이 봉사하고 자유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하면서 5리를 더 가는 것이며, 그것은 사랑으로 형제를 붙잡고 필사 존재에서 상급의 신성한 목표를 향하여 영적 안내를 받도록 형제를 줄기차게 몰려고 예수처럼 손 뻗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교는 지금도 기꺼이 처음 5리를 가지만, 진정하게 5리를 더 가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인류는 시들고 도덕의 어둠 속에서 넘어진다―예수를 따른다고 공언(公言)하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가 제자들에게 살고 사랑하고 봉사하라고 가르친 대로, 정말로 살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주 드물다.

예수의 하늘나라 형제 정신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수단을 이용하여 새롭고 변화된 인간 사회를 건설하는 모험으로 부름 받는 것은, 육체를 입은 예수의 친구로서 땅에서 이리저리 걷던 시절 이후로 사람들이 그렇게 자극을 받은 적이 없을 정도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기쁨에 떨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실체를 부인(否認)하는 어떤 사회 체계나 정치 체제도, 인간 문명의 진보에 어떤 건설적이고 지속하는 방법으로 이바지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세분되고 세속화되었다시피, 그리스도교는 자체가 더욱 진보하는데 가장 큰 유일한 장애물이 된다. 특히 이것이 동양에 관해서 참말이다.

교회 중심주의는 하늘나라의 영적 교제에서 사람의 형제 단체에 속한 예수의 신앙 친구들이 가진 생생한 믿음, 성장하는 영, 피부로 겪는 체험과, 동시에, 언제까

지나 양립할 수 없다. 지난날 업적의 전통을 간직하려는 칭찬할 만한 소망은 때때로, 낡은 예배 체계의 방어로 이끈다. 고대(古代)의 사상 체계를 육성하려는 좋은 뜻을 가진 소망은 현대인의 확대하고 진보하는 지성의 영적 갈망을 채우도록 고안된, 새롭고 적절한 수단과 방법의 후원을 효과적으로 막는다. 마찬가지로, 20세기의 그리스도 교회들은 진정한 복음―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을 즉시 진전시키는 데에 큰 장애, 하지만 완전히 의식하지 못한 장애가 된다.

복음이 전하는 그리스도에게 기쁘게 충성하려는 열심 있는 많은 사람은, 그의 일생과 가르침의 정신을 너무나 조금 나타내는 교회를 열심히 지지하기가 대단히 어려움을 발견하며, 그들은 그가 그런 교회를 세웠다고 그릇되게 가르침을 받아 왔다. 예수는 이른바 그리스도 교회를 세우지 않았지만, 그의 성품과 일치되는 모든 면에서, 땅에서 일생에 한 일의 대변자(代辯者), 존재하는 최선의 대변자로서 교회를 육성해 왔다.

그리스도 교회가 오직 주의 계획을 감히 지지하려고 한다면, 겉보기에 무관심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러한 영적 사업에 참가하려고 앞으로 달려나오고, 이 큰 모험을 서슴지 않고 끝까지 견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자체의 표어(標語) 하나에 담겨 있는 운명과 심각하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갈라져 서로 싸우는 집은 설 수 없다.” 비그리스도교 세계는 종파로 갈라진 그리스도 국가에 좀처럼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 있는 예수그리스도교의 통일 가능성에 유일한 희망이다. 참된 교회―예수의 형제 정신―은 눈에 보이지 않고, 영적이며, 반드시 획일성이 아니라 통일성의 특징을 가졌다. 획일성은 기계 성질을 가진 물리적 세계의 표시이다. 영적 통일은 살아 있는 예수와 믿음으로 연합하여 생기는 열매이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형제 정신을 진전시키는 데 이제 더 장애물이 되지 말아야 한다. 이 형제 정신은 제도화된 사회 조직과 대조해서, 살아 있는 유기체가 될 운명을 가졌다. 그러한 사회 조직들을 잘 이용해도 좋지만, 그것들에게 밀려나서는 안 된다.

그러나 20세기의 그리스도교조차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랜 시대에 많은 종족에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도덕적 천재가 통합되어 생긴 산물이요, 참으로 땅에서 선(善)을 위한 가장 큰 세력의 하나였고, 따라서 타고난 결함과 얻은 결함이 있어도, 아무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교는 힘찬 도덕적 감정을 가진 반성하는 사람들의 지성을 움직이려고 아직도 궁리한다.

그러나 교회가 상업(商業)과 정치에 말려드는 것에는 아무런 핑계가 없다. 그러한 거룩하지 않은 연합은 주를 지독하게 팔아 버리는 것이다.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제도화된 강력한 교회가 새로 태어난 믿음의 숨통을 때때로 감히 틀어막고, 어쩌다 정통 아닌 옷을 걸친 듯한 진리의 사자(使者)들을 박해했음을 잊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런 스타일의 예배를 좋아한 사람들이 세상에 없었다면, 그러한 교회가 살아남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참말이다. 영적으로 게으른 많은 사람이 의식과 신성한 전통(傳統)으로 이루어진 고대의 권위적 종교를 몹시 바란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종교적 권위가 없이 지내게 만들기에는 인간의 진화와 영적 진보가 도저히 충분하지 않다. 하늘나라의 보이지 않는 형제 정신은, 여러 가지 사회 및 기질 등급으로 이루어진 이 가족 집단이 참으로 영에게 인도받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기꺼이 되기만 한다면, 그들을 포함해도 괜찮다. 그러나 예수의 이 형제 정신에는 종파의 경쟁도 집단의 원한도, 도덕적 우수성과 영적으로 틀릴 수 없다는 주장(主張)도 설 자리가 없다.

이 여러 집합의 그리스도 교인들은 서양 문명의 여러 민족 사이에서 수많은 다른 종류의 신자(信者) 후보생을 받아들이는 데 소용될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세계의 그러한 분할은 예수의 복음을 동양(東洋) 민족들에게 가지고 가려고 시도할 때, 심각한 약점을 제시한다. 이 민족들은 따로, 그리스도교와 얼마큼 떨어져서, 예수의 종교가 있다는 것을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하며, 그리스도교는 갈수록 더 예수에 관한 종교가 되었다.

유란시아의 큰 희망은 예수의 유익한 메시지를 새로 확대해서 발표하여 예수를 새로이 드러내는 가능성에 있으며, 그 메시지는 사랑으로 봉사하는 가운데 오늘날에 예수를 따른다고 공언하는 자들의 수많은 집단을 영적으로 뭉칠 것이다.

세속의 교육조차도, 어떻게 인생의 계획과 인격의 발전을 시작하는가 젊은이를 가르치는 일에 더 주의를 기울이려 한다면, 이 큰 영적 르네상스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모든 교육(敎育)의 목적은 삶의 최대의 목적, 즉 훌륭하고 잘 균형된 인격의 발달을 촉진하고 육성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너무 지나친 자아 만족 대신에 도덕적 훈련을 가르치는 것이 대단히 필요하다. 그러한 기초 위에 종교는 필사인의 생명을 확대하고 강화하는 데, 아니 영생(永生)을 보증하고 향상하는 데에도 영적 동기를 줄지 모른다.

그리스도교는 즉흥으로 만들어진 종교이며, 따라서 저속(低速) 기어에서 작용해야 한다. 고속 기어의 영적 성과는 예수의 참 종교가 새로 계시되고 더욱 널리 받아들여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박힌 목수의 평범한 제자들이, 3백 년 안에 로마 제국을 정복한 가르침을 시작했고, 다음에 계속해서, 로마를 뒤엎은 야만인들을 설득한 것을 보니, 그리스도교는 막강한 종교이다. 바로 이 그리스도교는 히브리 신학과 그리스 철학의 흐름 전체를 정복했다―흡수하고 향상시켰다. 다음에 신비주의와 이교(異敎) 사상에 지나치게 젖은 결과로서, 1천 년이 넘도록 혼수 상태에 빠졌을 때, 이 그리스도교는 스스로 살아나서 서양 세계 전체를 실질적으로 다시 정복했다. 그리스도교는 자체를 불멸로 만들기에 충분하게 예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예수의 가르침을 더 깨달을 수 있기만 하면, 현대인이 새롭고 더욱 까다로워지는 문제를 푸는 것을 돕는 데 훨씬 더 이바지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가 큰 장애물에 깔려 고생하는 것은 온 세상의 지성들이 보기에 서양 문명의 사회 체계, 산업 생활, 도덕 기준의 일부로서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교는 뜻하지 않게 이상주의가 없는 과학, 원칙 없는 정치, 일하지 않고 얻은 재산, 자제 없는 쾌락, 인격 없는 지식, 양심(良心) 없는 권력, 도덕성이 없는 산업을 묵인(黙認)하는 죄책감 밑에서 비틀거리는 한 사회를 후원하는 듯했다.

현대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서양 문명의 사회 체계와 산업 정책을 후원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하며, 한편 아주 용감히 찬양하는 그 십자가(十字架) 앞에서 겸손히 머리를 숙이고, 거기서 나사렛 예수로부터, 필사 인간이 일찍이 들을 수 있던 가장 큰 진리를―하나님은 아버지요 사람은 형제라는 산 복음을―다시 배우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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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비종교주의 또는 세속주의는 종교에 의존하지 않고 인생·윤리·사물을 보자는 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