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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종교적 전체주의

뉴징검다리 2010. 2. 9. 07:11

8. 비종교적 전체주의

그러나 사람이 유물론과 기계론을 얼마큼 정복한 뒤에도, 20세기 비종교주의1의 지독한 영향은 영문을 모르는 수많은 혼의 영적 체험을 아직도 망치게 할 것이다.

두 가지 세계적 영향이 현대의 비종교주의를 조장하였다. 비종교주의의 아버지는 19세기와 20세기에 이른바 과학―무신론적 과학―의 태도, 편협하고 신을 믿지 않는 태도였다. 현대 비종교주의의 어머니는 중세의 전체주의적 그리스도 교회였다. 비종교주의는 제도화된 그리스도 교회가 서양 문명을 거의 완전히 지배한 데 대하여 커지는 반항으로서 시작되었다.

이 계시(啓示)가 있을 때, 유럽아메리카의 생활에서 지배하는 지적·철학적 풍토는 명백히 비종교성을 가진다―인본주의이다. 3백 년 동안 서양(西洋)의 사상은 점진적으로 비종교화되었다. 종교는 갈수록 더 이름 뿐인 영향이 되었고, 대체로 예식을 치르는 행사였다. 서양 문명에서 그리스도 교인이라 고백한 사람들의 대다수는 눈치채지 못하면서 실제로 비종교주의자이다.

사람을 시들게 하는 전체주의 교회의 지배하는 손아귀로부터 서양 민족들의 생각과 생활을 해방하는 데는 큰 힘, 막강한 영향력이 필요했다. 비종교주의는 교회의 통제하는 사슬을 깨뜨려 버렸고, 다음에 이제는 현대인의 가슴과 머리에 대하여 새롭고 신을 모르는 종류의 지배력을 굳히려고 위협한다. 전제와 독재의 정치 상태는 과학적 유물론과 철학적 비종교주의의 직계 후손이다. 제도화된 교회의 압제로부터 사람을 해방하자마자, 비종교주의는 사람을 전체주의 국가에 노예처럼 사슬에 묶인 처지로 팔아 버린다. 비종교주의는 사람을 교회에 예속된 처지로부터 풀어 주고서, 정치·경제적 노예 상태의 압제로 팔아 넘길 뿐이다.

유물론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비종교주의는 아예 하나님을 무시(無視)한다. 적어도 이것이 초기의 태도였다. 최근에, 비종교주의는 더욱 호전적 태도를 갖추었고, 한때는 종교의 전체주의적 예속에 항거했는데, 그런 종교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20세기 비종교주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조심하라! 인간 사회에서 신을 모르는 이 철학은 오로지 불안, 적의(敵意), 불행, 전쟁, 세계적 재난으로만 이끈다.

비종교주의는 결코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인간 사회에서 아무 것도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귀담아 들어라! 교회의 전체주의에 대하여 비종교적 반항이 가져온 좋은 이익을 빨리 던져 버리지 말라. 서양 문명은 오늘날 세속적 항거의 결과로서 많은 자유와 만족을 누린다. 비종교주의의 큰 잘못은 이것이었다: 종교적 권한이 거의 통째로 생활을 통제하는 데 항거하면서, 그러한 교회의 학정(虐政)으로부터 해방을 얻은 뒤에, 비종교주의자들은 더 나아가서 하나님 자신에게, 때로는 말없이, 때로는 드러내 놓고, 반란을 시작했다.

너희가 아메리카의 산업주의의 놀라운 창조성과 서양 문명에서 전례 없는 물질적 진보를 얻은 것은 비종교주의의 반란(反亂) 덕분이다. 그리고 비종교주의의 반란이 너무 지나쳤고 하나님 종교를 간과했기 때문에, 또한 찾고 않던 세계 전쟁과 국제적 불안의 결과가 뒤따랐다.

현대의 비종교주의 반란이 가져온 축복, 곧 관용(寬容), 사회 봉사, 민주 정치, 시민의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희생할 필요는 없다. 비종교주

의자들은 과학을 촉진하고 교육을 향상하기 위해서 참 종교에 적대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비종교주의는 생활이 확대되면서 최근에 얻은 이 모든 이익을 낳은 유일한 부모는 아니다. 20세기에 얻은 이익 뒤에는 과학과 비종교주의 뿐 아니라, 또한 인식되지 않고 인정받지 않은, 나사렛 예수의 일생(一生)과 가르침의 영적 작용이 있다.

하나님 없이, 종교 없이, 과학적 비종교주의는 결코 그 세력을 조정하고, 서로 다르고 경쟁하는 이권(利權)과 종족과 민족주의를 조화시킬 수 없다. 이 비종교주의적 인간 사회는, 비할 데 없는 물질적 업적을 이루기는 했어도, 천천히 무너지고 있다. 적대감이 이렇게 무너지는 데 저항하는 주요한 응집 세력은 민족주의이다. 그리고 민족주의(民族主義)는 세계 평화에 으뜸가는 장벽이다.

비종교주의가 본래부터 가진 약점은 그것이 정치와 권력을 위하여 윤리와 종교를 버리는 것이다. 너희는 단지,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면서 사람들의 형제 정신을 이룩할 수 없다.

비종교적인 사회·정치적 낙관주의는 망상(妄想)이다. 하나님 없이는, 자유도 해방도, 재산과 재물도, 평화로 인도하지 않을 것이다.

과학, 교육, 산업, 사회를 완벽하게 비종교화하는 것은 오직 재난으로 이끌 수 있을 뿐이다. 20세기의 처음 3분의 1 동안에 유란시아인들은 그 때까지 그리스도 시대를 통틀어서 죽은 것보다 더 많은 인간을 죽였다. 이것은 겨우 유물론과 비종교주의로부터 얻는 끔찍한 수확의 시작일 뿐이다. 아직도 더 끔찍한 파괴가 다가올 것이다.

9. 그리스도교의 문제

너희의 영적 유산(遺産), 곧 여러 세기를 통해서, 유물론과 비종교 시대의 황폐한 시절에 이르기까지 흘러 내려온 진리의 강(江)의 가치를 간과하지 말라. 지난 시절의 미신 같은 교리들을 떨어 버리려고 온갖 값진 노력을 기울이면서, 너희는 영원한 진리를 꼭 붙들도록 하여라. 그러나 참을성을 가져라! 미신에 대한 현재의 반란이 끝났을 때, 예수의 복음에 담긴 진리는 새롭고 더 나은 길을 비추려고 영화롭게 지속할 것이다.

그러나 이교화되고 사회화된 그리스도교는 타협하지 않은 예수의 가르침과 새로이 접촉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땅에서 사신 주의 일생을 보는 새로운 시각이 모자라서 시들고 있다. 예수의 종교가 주는 새롭고 더 충만한 계시는 유물론적 비종교주의의 제국을 정복하고, 기계론적 자연주의의 세계 지배를 뒤엎을 운명을 가지고 있다. 유란시아는 사회적 조정, 도덕적 각성, 영적 깨우침이 있는 가장 놀랍고 황홀한 한 시대에, 바로 그 고비에서 지금 부르르 떨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은, 크게 수정되기는 했어도, 태어날 때의 신비종파, 암흑 시대의 무지와 미신(迷信)을 견디었고, 지금도 20세기의 유물론, 기계론, 비종교주의를 천천히 이기고 있다. 큰 시험이 있고 패배의 위협이 있는 시절은 언제나 큰 계시가 내리는 시절이다.

종교는 새로운 지도자들, 오로지 예수와 그의 견줄 데 없는 가르침에만 감히 의존할 남녀가 필요하다. 그리스도교가 사회 및 물질 문제에 계속 바쁘면서 영적 사명을 지속하여 소홀히 하면, 영적(靈的) 르네상스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회복시키는 데 순전히 몸을 바칠 선생들, 예수의 종교를 가르치는 새 선생들이 오기를 기다려

야 한다. 그리고 나서 영에게서 태어난 이 사람들은 세계를 사회·도덕·경제·정치적으로 다시 조직하는 데 필요한 지도력과 영감을 재빨리 공급할 것이다.

사실과 모순되고, 진리·아름다움·선의 가장 높은 개념들과 어울리지 않는 종교를 현대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왜곡되고 절충된 현대 그리스도교의 참된 최초의 기초(基礎)―예수의 참 일생과 가르침―을 다시 발견할 때가 오고 있다.

원시인은 종교적 두려움에 미신처럼 매여 있는 인생을 살았다. 현대의 문명화된 사람들은 강한 종교적 확신에 지배를 당한다는 생각을 두려워한다. 생각하는 사람은 종교에 붙들려 있기를 언제나 두려워했다. 힘세고 감동시키는 종교가 지배하려고 위협할 때, 그는 변함없이 그것을 합리화·전통화·제도화하려고 시도하며, 그로서 통제하기를 바란다. 계시된 종교조차도 그러한 과정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만든 것이 되고 사람이 지배하게 된다. 총명한 현대의 남녀는 예수의 종교가 그들에게―또 그들을 가지고―무엇을 할까 두려워서 피한다. 모든 그러한 두려움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 예수의 종교는, 참으로, 그 신자들을 지배하고 변화시키며,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알려고 추구하는 데 일생(一生)을 바치라고 요청하고, 사는 에너지를 사람의 형제 정신에 사심 없이 봉사하는 데 거룩히 바치라고 요구한다.

이기적인 남녀는 사람에게 일찍이 제공된 가장 큰 영적 보물을 위해서도 단지 그런 값을 치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고 사람을 속이는 이기심(利己心)의 추구에 따르는 슬픈 실망에 사람이 환멸을 충분히 느꼈을 때, 형식화된 종교가 열매 없음을 발견하고 난 다음에야, 진심으로 하늘나라 복음, 나사렛 예수의 종교로 돌이킬 생각을 가질 것이다.

세상은 손을 거치지 않은 종교가 더욱 필요하다. 그리스도교조차―20세기 종교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인데도―예수관한 종교일 뿐 아니라, 사람이 한 다리 걸쳐서 맛보는 종교이다. 인정된 종교 선생들한테서 물려받은 그대로 그 종교를 통째로 삼킨다. 세상이 땅에서 정말로 산 그대로 예수를 보고, 생명을 주는 그의 가르침을, 한 다리 걸치지 않고 알 수만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큰 깨우침을 얻을 것인가! 아름다운 것을 묘사하는 말씀은, 구경하는 것처럼 기쁨에 떨게 할 수 없고, 교리(敎理)의 말씀도 하나님이 앞에 계심을 아는 체험처럼 사람의 혼에 영감을 줄 수 없다. 그러나 기대하는 믿음은 저 건너 여러 세상에서 신성한 가치를 가진 영원한 영적 실체들까지 들어가기 위하여 사람의 혼 속에서 희망의 문을 늘 열어 놓을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욕심, 전쟁의 미친 짓, 권력을 얻으려는 욕심이 도전하는 앞에서 감히 이상(理想)을 낮춰 버렸다. 그러나 예수의 종교는 더럽혀지지 않고 초월적인 영적 호출로서 유효하며, 사람의 힘이 자라는 한, 동물로서 진화한 이 모든 유물을 딛고 일어서라고, 은혜로 말미암아, 참된 인간 운명의 도덕적 높이에 이르라고 소리친다.

그리스도교는 형식주의, 지나친 조직, 주지주의(主知主義), 다른 비영적 경향 때문에 천천히 죽을 위협을 받는다. 현대의 그리스도 교회는 예수가 인류의 연속된 세대를 계속 영적으로 변화시키라고 임명한 것과 같은, 그러한 박력 있는 신자들의 단체가 아니다.

이른바 그리스도교는 종교적 관념·관습 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운동이 되어 버렸다. 현대 그리스도교의 흐름은 많은 고대(古代) 이교도의 늪과 많은 야만 같은 수렁에서 물을 받고 있다. 순전히 그 근원이라고 생각되는 높은 갈릴리 고원(高原) 뿐 아니라 많은 옛 문화의 분수령이 이 현대 문화의 흐름 속으로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