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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의 취약성

뉴징검다리 2010. 2. 9. 07:18

7. 유물론의 취약성

물질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기계론적 우주 이론과 같이 그렇게 허약한 이론에 참된 종교를 몸소 체험하는 광대한 영적 자원을 빼앗기도록 버려 두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사실은 결코 진정한 영적 믿음과 다투지 않지만, 이론은 그럴지 모른다. 과학은 종교적 신앙―영적 실체와 신성한 가치를 믿는 인간의 믿음―을 뒤엎으려고 애쓰기보다는, 미신(迷信)을 없애는 데 헌신하는 것이 좋다.

종교가 사람에게 영적 면에서 하는 일을, 과학은 사람에게 물질 면에서 해야 한다: 인생의 시야를 늘이고 인격을 키우는 일이다. 참된 과학은 참된 종교와 오래 다툴 수 없다. “과학적 방법”은 다만 물질적 모험과 물리적 성취를 재는 지적 척도일 뿐이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온통 지적 성질을 가졌으니까, 과학적 방법은 영적 실체와 종교적 체험을 평가하는 데 도무지 쓸모가 없다.

현대 기계론자의 모순은 이렇다: 이것이 기껏해야 물질 우주이고 사람이 겨우 기계라면, 그런 사람은 자신이 그러한 기계임을 도무지 알아볼 수 없고, 마찬가지로 그런 기계 인간은 그러한 물질 우주가 존재하는 사실을 도무지 의식(意識)하지 못할 것이다. 기계론적 과학이 낳는 유물론적 낙심과 절망은, 잘못되고 스스로 모순되는 유물론적 우주 개념들을 형성하는 과학자, 바로 그 초물질 통찰력을 가진 과학자의 지성에 영이 깃드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진리·아름다움·선의 가치, 영원하고 무한한 파라다이스 가치는 시공 우주들에서 생기는 현상의 사실 안에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이 영적 가치를 찾아내고 헤아리는 데는 영에게서 태어난 사람 안에 믿음의 눈을 요구한다.

영적 진보의 실체와 가치는 “심리적 투영”―물질 지성이 꿈꾸는 단순히 미화된 몽상―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깃드는 조절자, 사람의 지성 속에 사는 하나님 영의 영적(靈的) 예측이다. 희미하게 힐끗 본 “상대성(相對性)”의 발견을 가지고 하는 장난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무한성에 대한 너희의 개념이 흔들리지 말라. 자아 표현의 필요성에 관하여 너희가 무슨 간청을 드리더라도, 조절자 표현, 진정하고 더 나은 자아를 표현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라.

이것이 겨우 물질적인 우주라면, 물질 인간은 그렇게 순전한 물질적 존재를 가지는 기계적 인격 개념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우주에 대한 바로 이 기계적 개념은 그 자체로서 지성의 비물질 현상이며, 아무리 철저히 물질에 조건을 받고 기계적으로 통제받는 듯해도, 모든 지성은 비물질에 기원을 가진다.

필사 인간이 가진 부분적으로 진화된 정신 작용은 일관성이나 지혜(知慧)를 지나치게 부여받지 않는다. 사람의 자만은 가끔 이성(理性)을 뛰어넘고 자신의 논리를 벗어난다.

가장 비관적인 유물론자의 바로 그 비관주의는, 그 자체로서 저절로, 비관주의자가 보는 우주가 전적으로 물질이 아님을 충분히 증명한다.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는 사실 뿐 아니라 가치를 의식하는 지성 속에 있는 개념적 반응이다. 우주가 참으로 유물론자가 보는 바와 같은 것이라면, 그 때 인간 기계인 사람은 바로 그 사실을 도무지 의식으로 깨닫지 못할 것이다. 영에게서 태어난 지성 안에서 가치의 개념을 의식하지 않고는, 우주 유물론(唯物論)의 사실과 우주가 작용하는 기계론적 현상은 사람에게 도무지 인식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기계는 다른 기계의 성질이나 가치를 의식할 수 없다.

생명과 우주에 대한 기계론적 철학이 과학적일 수 없다는 것은 과학이 오로지 물질과 사실을 인식하고 다루기 때문이다. 철학(哲學)은 불가피하게 과학을 초월한다. 사람은 자연의 물질적 사실이지만, 사람의 생명은 지성의 통제하는 속성과 영의 창조적 질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자연의 물질 수준을 뛰어넘는다.

사람이 기계론자가 되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것은 사람이 지성과 도덕 면에서 자살하려고 쓸데없이 노력하는 비극적 현상을 나타낸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우주가 기껏해야 물질이고 사람이 겨우 기계라면, 이렇게 우주의 기계화를 가정하는 과학자를 격려할 아무런 과학(科學)이 없을 것이다. 기계들은 자체를 재거나 분류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 오로지 기계를 초월하는 지위를 가진 어떤 통일체가 그러한 과학적 작품을 만들 수 있다.

우주 실체가 겨우 하나의 광대한 기계라면, 그 때 사람은 그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그런 평가로부터 얻는 통찰력을 의식하기 위해서, 우주 바깥에, 우주로부터 따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

사람이 겨우 기계라면, 무슨 기법(技法)으로 이 사람이 그가 겨우 기계라는 것을 믿게 되거나 아니면 안다고 주장하는가? 사람의 자아를 스스로 의식하여 평가하는 체험은 결코 단순한 기계의 속성이 아니다. 자의식(自意識)하고 기계론자로 자처하는 사람은 기계론에 대하여 가능한 가장 좋은 대답이다. 유물론이 사실이라면, 스스로 의식하는 기계론자가 결코 있을 수 없다. 사람이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기 전에, 먼저 도덕이 있는 성격자이어야 한다는 것이 또한 참말이다.

유물론의 바로 그 주장은 그러한 독단을 주제넘게 부르짖는 지성의 초물질 의식을 암시한다. 기계 작용은 나빠질지 모르지만, 결코 진보할 수 없다. 기계들은 생각하거나 창조하거나 꿈꾸거나, 뜻을 품거나 무엇을 이상으로 만들거나, 진리를 간절히 찾거나, 올바름을 목마르게 찾지 않는다. 기계들은 다른 기계들에게 봉사하고 영원히 진보할 목표로서 하나님을 찾고 그와 같이 되려고 애쓰는 숭고한 과제를 택할 정열로 자기의 일생을 자극하지 않는다. 기계들은 결코 지능이나 감정이나, 미학이나 윤리나, 도덕이나 영성(靈性)이 없다.

예술은 사람이 기계론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만, 사람이 영적으로 불멸함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예술은 필사자의 상물질이요, 물질인 사람과 영적인 사

람 사이에 개재하는 분야이다. 시(詩)는 물질적 실체로부터 영적 가치로 달아나려는 노력이다.

높은 문명에서 예술은 과학을 인간답게 만들고, 한편 다음에 참 종교는―영적 가치와 영원한 가치를 보는 통찰력은―예술을 영적으로 변하게 만든다. 예술은 실체에 대한 인간의 시공(時空) 평가를 그린다. 종교는 우주의 가치를 신성하게 품에 안는 것이요, 영적으로 올라가고 확대하는 데서 영원히 진보함을 의미한다. 오직 시간 속에 실체의 그림자로서 영원이 비쳐 주는 신성한 형태의 영(靈) 표준을 예술이 보지 못할 때에야 시간 속의 예술이 위험하다. 참된 예술은 인생에서 물질인 것들을 효과 있게 조종하는 것이다. 종교는 인생에서 물질적 사실을 고상하게 변화시키는 것이요, 예술에 대하여 끊임없이 영적 평가를 내린다.

자동 인형(人形)이 자동 기계론의 철학을 상상할 수 있다고 추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다른 동료 자동 인형들에 대하여 그런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고 추정하는 것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가!

물질 우주에 대한 어떤 과학적 해석도, 과학자를 마땅히 인식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 예술에 대한 어떤 이해도, 그 예술가를 인식하지 않으면 진정하지 않다. 도덕률에 대한 어떤 평가도 그 도덕가를 셈에 넣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 철학에 관한 어떤 인식도 그 철학자를 무시하면 교훈이 되지 않고, 종교는 그 종교가의 실재하는 체험이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그는 바로 이 체험 속에서, 그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아내고 알려고 애쓴다. 마찬가지로, 온 우주는 스스로 계시는 이, 그 우주를 만들고 그칠 줄 모르고 관리하는 무한한 하나님과 동떨어져서는 의미가 없다.

기계론자―인본주의자―는 물질의 흐름에 따라서 떠내려가는 성향이 있다. 유심론자(唯心論者)와 심령주의자는 에너지 흐름에서 순전히 물질적 과정으로 보이는 것을 수정하려고 지능과 활력으로 감히 노를 젓는다.

과학은 지성의 수학을 이용하여 살며, 음악은 감정의 템포를 표현한다. 종교는 무한자의 영원한 상급 멜로디의 측정과 시공에서 조화를 이룬, 혼의 영적 리듬이다. 종교적 체험은 인생에서 참으로 수학을 초월하는 무엇이다.

언어에서, 하나의 알파벳은 유물론의 기계 장치를 대표하며, 한편 천 가지 생각, 위대한 아이디어, 그리고―사랑과 미움, 비겁과 용기에 관한―고귀한 이상의 의미를 표현하는 낱말들은, 물질 법칙과 영적 법칙에 따라서 정의되고, 성격 의지의 주장에 지휘를 받고, 본래부터 있는 상황의 재산에 제한받는 그런 규모 안에서 지성의 연출을 묘사한다.

우주는 과학자가 발견하고 과학으로 여기게 되는 그러한 법칙, 기계 작용, 불변성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주는 이렇게 우주 현상을 지켜보고, 창조에서 물질 면의 기계적 단계에 본래부터 있는 수학적 사실을 분류하는 과학자(科學者), 호기심 있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창조적이며 통합하고 구별하는 과학자와 같다. 우주는 예술가의 예술과 같지도 않지만, 오히려 영적 목표에 이르려는 노력으로 물질적 사물의 세계를 초월하려 애쓰는 예술가, 힘을 기울이고, 꿈을 꾸고, 큰 뜻을 품고, 진보하는 예술가와 같다.

과학이 아니라 과학자가, 에너지와 물질로 이루어진 진화하고 진보하는 우주의 실체를 깨닫는다. 예술이 아니라 예술가(藝術家)가 물질 존재와 영적 해방 사이에 끼는 일시적 상물질 세계가 존재함을 보여 준다. 종교가 아니라 종교가(宗敎家)가 영원한 진보에서 마주치게 될 영 실체들과 신성한 가치가 존재함을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