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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문제

뉴징검다리 2010. 2. 9. 07:23

5. 현대의 문제

20세기는 그리스도교와 모든 다른 종교가 풀어야 할 새로운 문제를 가져왔다. 문명(文明)이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사회를 안정시키고 그 물질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고 사람이 기울이는 모든 노력에서 “먼저 하늘의 실체들을 찾는” 의무가 더욱 필요하게 된다.

갈기갈기 찢고, 분리하고, 고립하고, 지나치게 분석했을 때, 진리는 때때로 사람을 헛갈리게 하고 잘못 인도하기까지 한다. 살아 있는 진리는, 물질 과학의 사실이나 중간에 개재하는 예술이 주는 영감(靈感)이 아니라, 온전히, 살아 있는 영적 실체로서, 품에 안았을 때에야 진리를 찾는 사람을 바르게 가르친다.

종교는 사람에게 그의 신성하고 영원한 운명에 대한 계시이다. 종교는 순전히 몸소 겪는 영적 체험이며, 다음과 같이, 사람이 가진 다른 높은 형태의 생각과 언제까지나 구별되어야 한다:

1. 물질적 실체인 사물에 대한 사람의 논리적 태도.

2. 더러움과 대조해서 사람이 아름다움을 미학적으로 이해하는 것.

3. 사람이 사회적 채무와 정치적 의무를 윤리적으로 인식하는 것.

4. 인간의 도덕성을 느끼는 사람의 감각조차, 그 자체로서 저절로 종교성은 없다.

종교는 우주에서 믿음·신뢰·확신을 요구하는 가치를 찾아내도록 고안되어 있고, 종교는 예배(禮拜)에서 절정에 이른다. 종교는 혼을 위해서, 지성이 발견한 상대적 가치와 대조가 되는 최고의 가치를 찾아낸다. 그러한 초인간적 통찰력은 오로지 진정한 종교적 체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영적 실체에 의존하는 도덕성이 없이, 오래 가는 사회 체계는, 중력(重力) 없는 태양계처럼, 유지될 수 없다.

육체를 입고 사는 짧은 일생에, 호기심을 채우거나 혼 속에서 솟아오르는 모든 잠재하는 모험심을 만족시키려 시도하지 말라. 참아라! 값싸고 더러운 모험으로 멋대로 돌진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말라. 너의 에너지를 활용하고 정열(情熱)에 고삐를 쥐어라. 진보하는 모험과 가슴 떨리는 발견이 가득한 끝없는 생애가 멋지게 펼쳐지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너희는 차분히 있어라.

사람의 기원(起源)에 관한 혼란 속에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보지 못하고 놓치지 말라. 예수가 어린아이들조차 사랑했다는 것, 언제까지나 인간 성격의 큰 가치를 분명히 밝혔다는 것을 잊지 말라.

세상을 볼 때, 너희가 보는 검은 악의 조각들은 궁극의 선(善)의 흰 바탕과 대조해서 보인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그저 악의 바탕에 초라하게 보이는, 선한 흰 조각들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다.

널리 퍼뜨리고 선포할 좋은 진리가 아주 많이 있는데, 어째서 세상에 있는 악이 사실로 보인다고 해서 사람들은 악(惡)에 골몰해야 하는가? 진리가 가진 영적 가치의 아름다움은 악의 현상보다도 더욱 유쾌하고 사람의 정신을 높여 준다.

현대 과학이 실험 기술을 추구하는 것 같이, 종교에서 예수는 체험의 방법을 주장하고 따랐다. 우리는 영적 통찰력의 인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지만,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의무에 충성하고, 신의 선함을 예배함으로써, 혼의 이 통찰력에 가까이 간다. 그러나 이 모든 가치 있는 것 중에서 사랑은 진정한 통찰력으로 인도하는 참된 안내자이다.

6. 유물론

과학자들은 뜻하지 않게 인류를 유물론(唯物論)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오래 된 도덕 은행(銀行)에서 경솔하게 지불 청구를 시작했지만, 이 인간 체험의 은행은 광대한 영적 자원을 가졌고, 내민 청구를 들어 줄 수 있다. 오로지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들이 인류의 영적 자산이 충분히 있는가 두려움에 빠진다. 유물론과 비종교의 공포가 끝날 때, 예수의 종교는 파산(破産)되지 않은 것이 발견될 것이다. 하늘나라의 영적 은행은 “의 이름으로” 인출(引出)하는 모든 사람에게 믿음과 희망과 도덕적 보증을 지불해 줄 것이다.

유물론과 예수의 가르침 사이에 어떤 명백한 갈등이 있든지 상관 없이, 너희는 다가오는 시대에, 주의 가르침이 완전히 승리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실제로, 참 종교는 과학과 어떤 논쟁에도 말려들 수 없고, 어떤 면에서도 물질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종교는 다만 과학에 개의하지 않지만 과학과 공감하며, 한편 그 과학자에게 최상으로 관심을 기울인다.

단순한 지식의 추구는, 그에 따른 지혜로운 해석과 종교적 체험을 보는 영적 통찰력이 없이, 궁극에는 비관주의와 인간의 절망으로 이끈다. 얄팍한 지식은 참으로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이 책을 기록할 때, 유물론 시대의 최악(最惡)은 끝났다. 더 낫게 이해하는 시절이 이미 밝아오고 있다. 과학 세계의 상급 지성은 철학 면에서 이제는 더 송두리째 유물론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하층 계급의 사람들은 옛 가르침의 결과로서 아직도 그 방향으로 쏠린다. 그러나 이 물리적 현실주의 시대는 땅에서 사람의 생애에서 기껏해야 지나가는 사건일 따름이다. 현대 과학은 참 종교를―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인생에서 풀이된 예수의 가르침을―다치지 않고 두었다. 과학이 이룩한 업적은, 인생을 그릇되게 풀이한 유치한 환상을 깨뜨렸을 뿐이다.

땅에서 인간의 삶에 관계되다시피, 과학은 양적(量的) 체험이요, 종교는 질적(質的) 체험이다. 과학은 현상을, 종교는 기원·가치·목표를 다룬다. 물리적 현상의 한 설명으로서 원인을 어디에 돌리는 것은 궁극의 것들을 모른다고 고백하는 것이요, 끝에는 과학자를 시초의 큰 원인―파라다이스에 계신 우주의 아버지―까지 곧장 거꾸로 인도할 뿐이다.

기적의 시대로부터 기계 시대로 휙 건너간 것은 사람을 아주 당황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기계론이라는 거짓 철학의 영리함과 교묘함은 바로 그 기계론적 주장이 거짓임을 나타낸다. 한 유물론자의 지성이 보인 숙명론(宿命論)의 영리함은 우주가 눈이 멀고 목적이 없는 에너지 현상이라는 주장이 그릇되다는 것을 언제까지나 증명한다.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어떤 사람들의 기계론적 자연주의, 길거리에 있는 사람의 지각없는 비종교주의, 이 두 가지는 순전히 사물에 흥미를 가진다. 이것들은 믿음과 희망과 영원한 보장이 결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영적 성질을 가진 모든 진정한 가치, 인정(認定), 만족감을 낳지 못한다. 현대 생활에서 큰 문제의 하나는 사람이 너무 바빠서 영적 명상(瞑想)과 종교적 예배를 위하여 틈을 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유물론은 사람을 혼이 없는 자동 인형(人形)으로 격하시키고, 단지 꿈이 없고 기계론적 우주의 수학 공식에서 무력한 자리를 찾는 산술 기호로 만든다. 그러나 큰 수학자가 없이 이 모든 광대한 수학적 우주가 어디로부터 오는가? 과학은 물질의 보존에 관하여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을까 싶지만, 종교는 사람의 혼이 보존되는 것을 입증한다―종교는 사람이 영적 실체와 영원한 가치를 체험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

오늘날 유물론을 믿는 사회학자는 한 공동체를 조사하고, 보고서를 쓰고서, 발견한 그대로 사람들을 버려 둔다. 1천9백 년 전에, 학식 없는 갈릴리 사람들은 사람의 속 체험에 영적 기여로서 일생을 바친 예수를 훑어보았고, 다음에 나가서 로마 제국 전체를 뒤집어엎었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중세(中世)의 트럼펫 소리에 맞추어 영적 전투에 나서라 부르려고 애쓸 때, 종교 지도자들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종교는 새롭고 첨단을 달리는 표어(標語)를 마련해야 한다. 민주주의나 어떤 다른 정치적 만병 통치약도 영적 진보를 대신할 수 없다. 거짓 종교들은 현실의 도피를 대표할지 모르지만, 예수는 복음에서 영적으로 진보하는 영원한 현실의 바로 그 문 앞까지 필사 인간을 데려갔다.

지성이 물질로부터 “솟아났다”는 것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우주가 기껏해야 기계 작용이고 지성(知性)이 물질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면, 우리는 어떤 관측된 현상에 대하여 결코 두 가지 다른 해석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善)의 개념은 물리학이나 화학에 본래부터 있지 않다. 기계는 진리를 알고, 올바름을 간절히 찾고 선을 소중히 간직하기는커녕, 능력이 없다.

과학은 물리적일 수도 있지만, 진리를 헤아리는 과학자의 지성은 동시에 물질을 초월한다. 물질은 진리를 모르고, 물질은 자비를 사랑하거나 영적 실체를 기뻐할 수도 없다. 영적 깨우침에 기초를 두고 인간의 체험에 뿌리를 둔 도덕적 확신은 물리적 관측에 기초를 둔 수학적 추론처럼 똑같이 실재하고 확실하지만, 한층 높은 다른 수준에서 그렇다.

사람들이 기껏해야 기계라면, 물질 우주에 대하여 얼마큼 한결같이 반응할 것이다. 성격은커녕, 개성(個性)이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온 우주의 중심에서 파라다이스의 절대적 기계 작용의 사실은, 둘째 근원 중심의 무조건적 의지가 있는 가운데, 결정자(決定者)들이 우주의 독점 법칙이 되지 않

도록 영원히 처리한다. 물질 작용이 있기는 해도, 그것만 혼자 작용하지는 않는다. 기계 작용이 있지만 무조건 그렇지는 않다. 결정(決定)하는 작용이 있기는 해도, 그것 혼자만 있지는 않다.

지성과 영, 이 둘이 함께 존재하지 않는다면, 물질로 이루어진 유한한 우주는 궁극에는 한결같고 결정론(決定論)대로 될 것이다. 우주 지성의 영향은 물질 세계 속에도 항상 자발성을 주입한다.

존재의 어떤 영역에서도 자유나 독창성은 영적 영향과 우주 지성이 통제하는 정도, 다시 말해서, 인간의 체험에서 “아버지의 뜻”을 실제로 행하는 정도에 정비례한다. 그래서 너희가 하나님을 찾으려고 일단 길을 떠나면, 그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이미 찾았다는 확고한 증명이다.

선·아름다움·진리를 진지하게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에게로 이끈다. 모든 과학적 발견은 우주에서 자유(自由)와 획일성이 존재함을 보여 준다. 발견하는 사람은 발견할 자유가 있었다. 발견된 물건은 실재하고 겉보기에 한결같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의 사물로 규명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