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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뒤에

뉴징검다리 2010. 2. 9. 07:33

제 195 편

오순절 뒤에

오순절에 베드로가 설교한 결과는,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는 노력에서 사도들 대다수의 미래 정책(政策)을 결정하고 계획을 정하게 하는 것과 같았다. 베드로그리스도 교회의 진정한 창시자였다. 바울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이방인들에게 가져갔고, 그리스인 신자들은 온 로마 제국으로 가져갔다.

전통에 묶여 있고 사제들에게 억눌려 있는 히브리인들은 한 민족으로서, 하나님은 아버지요 사람은 형제라는 예수의 복음이나, 또는 베드로바울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선포한 것을 (나중에 그리스도교) 믿지 않았어도, 로마 제국의 나머지는 생성되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좋게 받아들인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서양 문명은 이 시절에 지적(知的)인 것이었고, 전쟁에 지치고, 모든 기존 종교와 우주 철학에 대하여 철저하게 회의를 품었다. 그리스 문화의 수혜자인 서양 세계의 민족들은 위대한 과거의 전통을 우러러보았다. 그들은 철학·예술·문학에서, 정치의 발전에서, 큰 업적의 유산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업적과 함께, 혼을 흐뭇하게 채워 주는 종교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의 영적 소망은 채워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인간 사회의 그러한 무대에,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에 담겨 있는 예수의 가르침이 갑자기 밀어닥쳤다. 이처럼 새 체제의 생활이 이 서양 민족들의 간절한 마음에 제시되었다. 이 상황은 더 오래 된 종교 관습과 세상에 주는 예수의 가르침의 그리스도교 판(版), 이 둘 사이에 즉시 갈등이 생김을 의미했다. 그러한 갈등은 새 것이나 옛 것이 결정적으로 승리하든지, 아니면 어느 정도의 타협을 틀림없이 가져온다. 역사는 그 투쟁이 타협으로 끝났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교는 너무 많은 것을 주제넘게 담으려 했기 때문에 어느 민족이라도 한두 세대에 동화(同化)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가 사람들의 혼에게 제시한 바와 같은, 단순한 영적 호소가 아니었다. 종교 예식, 교육, 마술, 의술, 예술, 문학, 법률, 정부, 도덕, 성(性) 규제, 일부 다처제, 그리고 어느 정도로 노예 제도에 대해서도, 일찍부터 분명한 태도를 가졌다. 그리스도교는 새 종교가―온 로마 제국과 동양 전체가 기다리고 있던 어떤 것이―아니라, 새 체제의 인간 사회로서 나타났다. 그러한 허세로서, 그리스도교는 오랜 세월에 걸친 사회적·도덕적 충돌을 급히 재촉하였다. 예수의 이상은, 그리스 철학이 다시 풀이하고 그리스도교 안에서 사회화된 바와 같이, 이제 서양 문명의 윤리·도덕·종교에 구현된 인류의 전통에 대담하게 도전하였다.

처음에, 그리스도교는 오직 낮은 사회 및 경제 계층만 개종시켰다. 그러나 2세기 초가 되어서, 그리스·로마 문화의 최선(最善) 부분은 이 새 체제의 그리스도교 신앙, 사는 목적과 존재 목표에 대한 이 새로운 개념을 향하여 갈수록 더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어떻게 유대인의 기원을 가진 이 새로운 메시지가, 태어난 땅에서 거의 실패했는데, 그렇게 빨리, 효과적으로 로마 제국의 일류(一流) 지성을 붙잡았는가? 그리스도교가 철학적 종교와 신비 종파들에게 승리한 것은 다음 이유 때문이었다:

1. 조직. 바울은 위대한 조직자였고 후계자들은 그가 시작한 속도를 유지했다.

2. 그리스도교는 철저히 그리스화되었다. 히브리 신학의 정수(精髓) 뿐 아니라 그리스 철학의 최선을 담았다.

3.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는 새롭고 위대한 이상을 담았고, 이것은 예수의 생명 수여에서 생긴 메아리요, 온 인류에게 구원을 주는 메시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4. 그리스도교의 지도자들은 미트라교와 기꺼이 타협해서, 미트라교 추종자들 가운데 상급의 절반이 안티옥 종파에 설득되었다.

5. 마찬가지로, 다음 및 후세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이교도(異敎徒)와 그렇게 더 타협했고, 그래서 로마 황제 콘스탄틴까지도 새 종교에 설득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교인들은 이교도 예식의 허례를 받아들이고, 한편 이교도가 바울 그리스도교의 그리스판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했다는 점에서, 이교도와 수지 맞는 거래를 했다. 미트라 종파와 거래한 것보다 이교도들과 더 이익이 남는 협상을 하였다. 그러나 초기의 타협에서, 그리스도 교인들은 페르시아 신비교의 상스러운 부도덕과 또한 비난할 수많은 다른 풍습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정복자가 되고도 남았다.

지혜로웠든 그렇지 않았든, 그리스도교의 이 초기 지도자들은 예수의 많은 아이디어를 구하고 촉진하려는 노력으로 계획적으로 예수이상을 타협했고, 뛰어나게 성공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라! 이렇게 타협된 주(主)의 이상은 아직도 복음 속에 잠자고 있으며, 궁극에는 세상에 온전한 권능을 주장할 것이다.

이렇게 이교화(異敎化)됨으로써 옛 체제는 예식의 성질을 띤 많은 하찮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리스도교는 다음 이유로 주도권을 얻었다:

1. 인간의 도덕에서 새롭고 엄청나게 높은 음(音)을 부르짖었다.

2. 새롭고 크게 확대된 하나님 개념을 세상에 주었다.

3. 불멸의 희망은 세상에 인정받는 종교가 주는 보장의 일부가 되었다.

4. 나사렛 예수를 사람의 갈급한 혼에게 주었다.

예수가 가르친 큰 진리 가운데 많은 것은 이 초기의 타협(妥協)에서 거의 분실되었지만, 이교화된 그리스도교의 이 종교 안에 아직도 잠자고 있으며, 그리스도교는 한편 사람의 아들의 일생과 가르침의 바울 판이었다. 그리고 미처 이교도처럼 변하기 전에도 그리스도교는 먼저 철저히 그리스화되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인들에게 많이, 듬뿍 빚을 졌다. 에집트에서 온 그리스인이 니케아에서 아주 용감하게 일어서서, 아주 두려움 없이 이 집회에 도전했고, 그래서 그 집회는 예수의 수여에 관한 진정한 진리가 세상에 사라질 위험에 빠지도록 예수의 성품에 관한 개념을 감히 흐릿하게 만들지 못했다. 이 그리스인의 이름은 아다나시우스였고, 이 신자의 웅변과 논리가 아니었더라면, 아리우스의 설득이 승리했을 것이다.

1. 그리스인의 영향

그리스도교의 그리스화는 사도 바울아데네에서 아레오파구스의 의회(議會) 앞에 서서, 아데네 사람들에게 “알지 못하는 신”에 관하여 이야기한 그 중대한 날에 진지하게 시작되었다. 거기서 아크로폴리스의 그늘 아래서, 이 로마 시민은 유대갈릴리에서 기원을 가졌던 새 종교에 대하여 견해를 선포했다. 그리스 철학과 예수의 가르침 사이에는 이상하게 비슷한 무엇이 있었다. 그들은 공통된 목표가 있었다―이 두 가지가 개인의 뚜렷한 등장을 겨냥했다. 그리스인들은 사회·정치적 등장, 예수는 도덕 및 영적 등장이 목표였다. 그리스인은 정치적 자유로 이끄는 지적 자유주의를 가르쳤고, 예수는 종교적 해방으로 인도하는 영적 자유주의를 가르쳤다. 이 두 아이디어가 한데 모여 인간의 자유를 위한, 새롭고 강력한 헌장이 되었고, 사람의 사회·정치 및 영적 해방의 전조(前兆)가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주로 두 가지 때문에 존재하게 되고, 경쟁하는 모든 다른 종교를 이기게 되었다:

1. 그리스의 지성은 유대인들한테서도 새롭고 좋은 아이디어를 기꺼이 빌렸다.

2. 바울과 그 후계자들은 기꺼이, 하지만 날카롭고 현명하게, 타협하는 사람이었다. 신학(神學)을 파는 기민한 상인이었다.

아데네에서 바울이 일어나서 “그리스도요 십자가에 못박힌 분”을 전했을 때, 그리스인들은 영적으로 갈급했다. 궁금하여 묻고, 관심을 가졌고, 영적 진리를 실제로 찾고 있었다. 처음에는 로마인들이 그리스도교를 적대하여 싸웠고, 한편 그리스인들은 받아들였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 문화의 일부로서 그 때 수정된 이 새 종교를 받아들이도록 나중에 로마인들을 글자 그대로 강요한 것은 그리스인이었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라.

그리스인은 아름다움, 유대인은 거룩함을 존경했지만, 두 민족이 진리를 사랑하였다.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인은 종교를 제외하고, 모든 인간 문제―사회·경제·정치·철학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토론했다. 거의 아무 그리스인도 종교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자기네 종교조차도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러 세기 동안 유대인들은 이 다른 분야의 사상을 소홀히 했고, 한편 머리를 종교에 쏟았다. 자기네 종교를 아주 심각하게, 너무 심각하게 여겼다. 예수의 메시지의 내용이 보여 주다시피, 여러 세기 동안 이 두 민족의 사상(思想)이 뭉쳐서 생긴 산물은 이제 새 체제의 인간 사회에, 어느 정도는 새 체제의 인간의 종교 관념과 관습에 추진력이 되었다.

알렉산더가 근동(近東) 세계에 고대 그리스 문명을 퍼뜨렸을 때, 그리스 문화의 영향은 이미 서부 지중해의 땅에 침투하였다. 그리스인들은 작은 도시 국가에서 사는 한, 종교와 정치를 잘 처리했지만, 마케도니아 왕이 아드리아 바다로부터 뻗어서 인더스 강까지 그리스를 감히 하나의 제국으로 키웠을 때, 문제가 시작되었다. 그리스의 예술과 철학은 제국을 확장하는 과제와 제대로 어깨를 겨루었지만, 정치 행정이나 종교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이 제국으로 커진 뒤에, 오히려 촌티 나는 신들은 조금 이상하게 보였다. 더 오래 된 유대 종교의 그리스도교화된 신판이 왔을 때, 그리스인들은 정말로 유일한 하나님, 더 위대하고 더 훌륭한 하나님을 찾고 있었다.

그리스 제국은 그런 상태로 오래 갈 수 없었다. 문화적 지배는 계속되었지만, 서방으로부터 제국의 행정을 위하여 로마의 정치적 수완을 얻은 뒤에, 그리고 동방으로부터 한 종교를 얻은 뒤에야 오래 견디었고, 그 종교의 유일한 하나님은 제국의 품위를 갖추었다.

그리스도 이후 1세기에, 고대(古代) 그리스 문화는 이미 절정에 이르렀고, 쇠퇴가 시작되었다. 학문이 진보되고 있었지만, 천재(天才)가 줄어들고 있었다. 바로 이 때, 예수의 아이디어와 이상이, 그리스도교에 어느 정도 구현되어, 그리스 문화와 학문을 구출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알렉산더그리스 문명의 문화적 선물을 가지고 동방으로 진격했다. 바울예수 복음의 그리스도교 판을 가지고 서방을 공략했다. 그리고 서방 전역에 걸쳐 그리스 문화가 우세한 곳에, 그리스화된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렸다.

예수의 메시지의 동방판은, 그의 가르침에 더 충실하게 남기는 했어도, 타협하지 않는 아브너의 태도를 계속 따랐다. 결코 그리스화된 판처럼 진보하지 못했고, 궁극에는 이슬람 운동 속에 파묻혀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