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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에 무슨일이...

뉴징검다리 2010. 2. 9. 07:44

3. 오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야릇하고 이상한 많은 가르침이 오순절 날에 대한 초기의 이야기와 관련을 가지게 되었다. 진리의 영, 즉 새 선생이 인류와 함께 거하려고 온 이 날에 일어난 사건들은 후세에, 마구 감정(感情)의 표현이 어리석게 돌발하는 것과 혼동되었다. 쏟아진 이 아버지아들 영의 주요한 사명은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자비로움에 관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들은 신성한 모든 다른 성품의 특징보다 사람들이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 신성(神性)의 진리이다. 진리의 영은 1차적으로 아버지의 영 성품과 아들의 도덕적 품위를 드러내는 데 관심을 가진다. 아들 창조자는 육체를 입고서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드러냈다. 진리의 영은 마음 속에서 아들 창조자를 사람들에게 드러낸다. 일생에 “영의 열매”를 맺을 때, 사람은 다만 땅에서 산 자신의 일생에서 주가 나타낸 특성을 내보이는 것이다. 땅에 계실 때, 예수는 하나의 인격자로서―나사렛 예수로서―일생을 살았다. 사람에게 깃드는 “새 선생”의 영으로서, 오순절 뒤로, 주는 진리를 가르침 받은 모든 신자의 체험 속에서 일생을 새로이 살 수 있었다.

인간 생활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이 이해하기 힘들고, 진리가 이기고 올바름이 승리하는 그러한 우주라는 관념과 조화시키기가 어렵다. 너무나 흔히 중상

(中傷), 거짓말, 부정직(不正直), 불의―죄―가 이기는 듯하다. 궁극에는 믿음이 악, 죄, 불법을 이기는가? 그렇다. 예수의 삶과 죽음은 영의 인도를 받는 피조물의 선함과 믿음의 진실성이 언제나 정당화되리라는 영원한 증명이다. “하나님이 와서 구원할 것인가 보자” 하면서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조롱하였다. 십자가에 처형되는 그 날은 어둡게 보였지만, 부활의 아침에는 영화롭게 밝았다. 오순절 날에는 더욱 밝고 더욱 즐거웠다. 비관하는 절망(絶望)의 종교들은 인생의 짐에서 해방되기를 찾으며, 끝없는 잠과 휴식 속에서 절멸되기를 바란다. 이것들은 원시의 두려움과 공포에서 생긴 종교이다. 예수의 종교는 허덕이는 인류에게 선포해야 할 새로운, 믿음의 복음이다. 이 새 종교는 믿음, 희망, 사랑에 바탕을 둔다.

필사의 일생은 예수에게 가장 힘들고, 가장 모질고, 가장 쓰라린 주먹질을 했다. 이 사람은 믿음과 용기,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흔들리지 않는 결심으로 이 절망스러운 직책에 부닥쳤다. 예수는 모든 끔찍한 현실 가운데서 삶에 부딪쳤고―죽음 속에서도―삶을 통달하였다. 생활의 도피(逃避)로서 종교를 쓰지 않았다. 예수의 종교는 또 다른 존재에서 기다리는 더없는 기쁨을 누리려고 이 생명을 도피하기를 추구하지 않는다. 예수의 종교는 사람들이 육체를 입고 지금 사는 인생을 높이고 고귀하게 하려고, 또 다른 영적 존재 상태의 기쁨과 평화를 마련해 준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아편이라면, 그것은 예수의 종교가 아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감각을 마비시키는 약을 마시기를 물리쳤고, 온 육체에 부어진 그의 영은 사람을 위로 이끌고 앞으로 재촉하는, 힘찬 세계적 영향이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영적 욕구는 이 세상에 있는 가장 힘센 추진력이다. 진리를 배우는 신자는 땅에서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혼이다.

오순절 날에 예수의 종교는 민족의 제한과 종족의 사슬을 모두 깨뜨렸다. 이것은 언제까지나 진리이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해방이 있다.” 이 날에 진리의 영은 주가 모든 필사자에게 친히 주신 선물이 되었다. 이 영은 하늘나라 복음을 더욱 효과 있게 전파하라고 신자들에게 자격을 주는 목적으로 수여되었지만, 그들은 퍼부어진 영을 받는 체험이, 그들의 무의식 중에 형성하는 새 복음의 일부라고 잘못 생각했다.

진리의 영이 모든 성실한 신자에게 수여되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라. 이 영 선물은 사도들에게만 내린 것이 아니다. 위층 방에 모인 남녀 120명은 모두, 온 세상에 두루, 마음이 정직한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새 선생을 받았다. 이 새 선생은 인류에게 수여되었고,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과 영적 실체들을 깨닫고 이해하는 능력에 따라서, 모든 사람이 받았다. 마침내, 참 종교는 사제(司祭)들과 모든 신성한 계급이 관리하는 상태에서 구제되고, 사람들의 개별 혼 속에서 그 진정한 표현을 발견한다.

예수의 종교는 가장 높은 부류의 영적 성격을 만들어 내고 그 사람의 신성함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가장 높은 종류의 인간 문명을 육성한다.

오순절에 진리의 영이 오신 것은 과격하지도 보수적이지도 않은 종교를 가능하게 만들고, 그런 종교는 낡은 것도 새로운 것도 아니다. 늙은이나 젊은이에게 지배되어서도 안 된다. 예수가 땅에서 사셨다는 사실은 시간의 닻을 내리기 위하여 고

정된 점을 마련해 주며, 한편 진리의 영은 그가 실천한 종교와 선포한 복음을 영구히 확장하고 끝없이 성장하게 만든다. 그 영은 모든 진리로 안내하며, 영은 끝없이 진보하고 신성하게 펼쳐지는 종교, 확대되고 늘 성장하는 종교의 선생이다. 이 새 선생은 진리를 찾는 신자에게 사람의 아들의 인격과 성품 안에 아주 신성하게 접혀 있던 것을 언제까지나 펼쳐 줄 것이다.

“새 선생”의 수여와 관련되어 나타난 현상,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함께 모였던 여러 종족과 민족의 사람들이 사도들의 전도를 받아들인 것은 예수의 종교가 보편성이 있음을 가리킨다. 하늘나라 복음은 아무런 특별한 민족이나 문화나 언어와 동일시(同一視)되어서는 안 된다. 이 오순절 날은 예수의 종교를 자체가 물려받은 유대인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려고 영이 크게 노력했음을 입증했다. 모든 육체에 영이 쏟아지는 이 전시가 있은 뒤에도, 처음에 사도들은 개종한 사람들에게 유대교의 요구 조건을 부과하려고 애썼다. 바울조차도 이방인들을 이 유대 관습에 복종시키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형제들과 다툼이 있었다. 어떤 계시(啓示) 종교도 어떤 민족 문화에 젖게 되거나, 아니면 확립된 종족, 사회, 또는 경제 관습과 연결되는 심각한 잘못을 저지를 때에는 온 세상에 퍼질 수 없다.

진리의 영의 수여는 어떤 형태와 예식과 신성한 장소에도, 그 명시(明示)를 충분히 받은 자들의 특별 행위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그 영이 위층 방에 모인 자들에게 닥쳤을 때, 그들은 말없이 기도에 막 들어갔으니까, 그저 거기에 앉아 있기만 했다. 그 영은 도시 뿐 아니라 시골에서도 수여되었다. 사도들이 그 영을 받기 위하여, 혼자서 명상하는 몇 년 동안, 외로운 곳으로 따로 가는 것이 필요 없었다. 언제까지나 오순절은 영적 체험의 관념을 특별히 유리한 환경에서 얻는다는 개념으로부터 독립시킨다.

오순절은, 그날 영적으로 부여된 것과 함께, 언제까지나 주의 종교를 물리적 세력에 전혀 의존하지 않게 해방하려고 고안되었다. 이 새 종교의 선생들은 이제 영적 무기를 갖추었다. 그들은 어김없는 용서, 견줄 데 없는 선의(善意), 풍부한 사랑을 가지고, 나가서 세상을 정복해야 한다. 그들은 선으로 악을 이기고, 사랑으로 미움을 정복하고, 진리 속에서 용감하고 팔팔한 믿음으로 두려움을 깨뜨리기 위하여 장비를 갖추었다. 예수는 그의 종교가 결코 소극적이 아니라고 추종자들에게 가르쳤다. 제자들은 봉사를 베푸는 데, 사랑을 드러내는 데, 언제나 활발하고 적극성이 있어야 했다. 이 신자들은 이제 더 야웨를 “만군의 주”로 바라보지 않았다. 이제 영원한 을 “하나님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아버지”로 여겼다. 하나님이 또한 모든 사람의 영적 아버지라는 진리를 충분히 깨닫는 데 어느 정도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적어도 거기까지는 진보했다.

개인이 받은 상처를 용서하고, 가장 지독한 불법(不法) 한가운데서도 부드러움을 유지하며, 소름끼치는 위험을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히 있으며, 두려움 없이 사랑과 인내의 행위로 미움과 진노의 악에 도전하는 힘을 오순절은 필사 인간에게 주었다. 유란시아는 그 역사(歷史) 속에서 크고 파괴하는 여러 전쟁의 상처를 겪었다. 이 끔찍한 투쟁에 참여한 모든 편이 패배했다. 승자(勝者)는 오직 하나 있었다. 향상된 명성을 가지고 이 모진 투쟁에서 벗어 나온 유일한 승자가 있었다―나사렛 예수요, 선으로 악을 이기는 그의 복음이었다. 더 좋은 문명을 세우는 비결은 인간이 형제라는 주의 가르침, 사랑하고 서로 신뢰하는 선의(善意) 속에 단단히 묶여 있다.

오순절까지, 종교는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을 드러냈을 뿐이다. 오순절 이후에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을 찾고 있지만, 하나님이 사람을 또한 찾고, 하나님이 사람을 발견하고 나서 안에서 거하라고 그의 영을 보내는 광경이 온 세상에 비치고 있다.

오순절에서 절정에 이른 예수의 가르침이 있기 전에, 여자들은 오래 된 여러 종교의 교리에서 거의 또는 아무런 영적 지위가 없었다. 오순절 이후에, 하늘나라의 형제 단체에서 여자(女子)는 남자와 동등하게 하나님 앞에 선다. 이렇게 영의 특별한 방문을 받은 120명 가운데 많은 여제자가 있었고, 그들은 이 축복을 남자 신자들과 똑같이 나누어 가졌다. 종교적 봉사를 베푸는 일을 이제는 더 남자가 감히 독점할 수 없다. 바리새인은 “여자나 문둥병자나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계속 감사드릴지 모르지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여자는 성에 근거를 둔 온갖 종교적 차별에서 언제까지나 해방되었다. 오순절은 종족 구별, 문화의 차이, 사회 계급, 또는 성(性) 편견에 기초를 둔, 모든 종교적 차별을 없애 버렸다. 새 종교를 믿는 이 신자들이 “주의 영이 있는 곳에 해방이 있도다”하고 외치려 한 것이 당연하다.

예수의 어머니와 아우가 120명의 신자들 사이에 있었고, 이 보통 제자 집단의 한 사람으로서 또한 쏟아 부어진 영을 받았다. 동료들보다 좋은 선물을 더 많이 받지 않았다. 아무런 특별한 선물이 땅에서 예수의 집안 사람들에게 수여되지 않았다. 오순절은 특별한 사제(司祭) 계급과 신성한 가족들에 대한 온갖 관념의 종말을 표시했다.

오순절 이전에, 사도들은 예수를 위하여 많은 것을 버렸다. 집과 가족과 친구, 속세의 물건과 지위를 바쳤다. 그들은 오순절에 하나님께 헌신하였고, 아버지아들은 자신들을 사람에게 주심으로―사람 안에서 살라고 그들의 영을 보내서―반응했다. 자아(自我)를 잃고 영(靈)을 얻는 이 체험은 감정의 체험이 아니었다. 지적으로 자아를 항복하고, 아낌없이 거룩하게 바치는 행동이었다.

오순절은 복음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 영적으로 단결하라는 부름이었다. 그 영이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에게 내려왔을 때, 똑같은 일이 필라델피아알렉산드리아에, 참 신자들이 사는 모든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신자들의 무리 가운데 오로지 한 마음과 혼이 있었다”는 것이 글자 그대로 참말이었다. 예수의 종교는 세상이 일찍이 본 가운데, 가장 강력한 통일하는 영향력이다.

오순절은 개인, 집단, 나라, 종족들의 자기 주장을 줄이려고 고안되었다. 긴장을 너무 고조(高調)되어 이따금 파괴하는 전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은 이 자기 주장의 정신이다. 인류는 영적 접근으로만 통일될 수 있고, 진리의 영은 보편적인 세계 영향력이다.

진리의 영이 오신 것은 인간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받는 자를 인도하여 오직 하나님의 뜻과 사람들의 복지에 심혈을 기울인 일생의 목적을 가지게 만든다. 이기심(利己心)이라는 물질적 정신은 자신을 생각지 않는 이 새 영적 수여에 휩싸여 사라졌다. 그 때에도 지금도, 오순절은 역사적인 예수가 생생하게 체험하는 신의 아들이 되었음을 가리킨다. 퍼부어진 이 영의 기쁨은 인간 생활에서 의식하며 겪었을 때, 건강에 좋은 강장제요, 지성에 자극이요, 혼에는 한없는 에너지이다.

기도가 오순절 날에 영이 내리게 만들지 않았지만, 개별 신자들의 특징을 나타내는 감수성 능력을 결정하는 데 많이 상관되었다. 기도는 아낌없이 수여하도록 신

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지만, 아주 흔히 더 크고 더 깊은 길을 파며, 그래서 그 길 안에서, 성실한 기도와 참된 예배를 통해서, 조물주와 끊임없는 교통을 유지하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가슴과 혼으로, 신이 수여하는 것들이 흘러갈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