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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의미

뉴징검다리 2010. 2. 9. 08:51

4. 주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의미

예수는 필사 인간이 지은, 종족의 죄책감을 대속하거나, 달리 기분을 상하고 용서 없는 하나님에게 일종의 효과적인 접근을 마련하려고 십자가에서 이렇게 죽지 않았다. 사람의 아들하나님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죄 많은 사람이 구원받는 길을 열어 놓으려고 희생물로서 자신을 내놓지 않았다. 대속(代贖)하고 신을 달랜다는 이 아이디어들이 그릇되기는 하지만, 그런데도 십자가에서 예수가 이렇게 돌아가신 데 부여된 중요성, 지나쳐서는 안 될 중요성이 있다. 유란시아가 사람이 사는 다른 이웃 혹성들 사이에서 “십자가의 세계”라고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예수유란시아에서 육체를 입고 필사자의 일생을 한껏 살기를 바랐다. 죽음은 보통, 삶의 일부이다. 죽음은 필사자의 연극에서 마지막 막(幕)이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의미(意味)를 거짓되게 풀이하는 미신 같은 잘못을 피하려고 좋은 뜻으로 노력하면서, 너희는 주의 죽음의 참된 의미와 진정한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필사 인간은 결코 대사기꾼들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예수는 여러 구체(球體)의 배반한 통치자와 타락한 영주들의 손아귀에서 몸값을 치르고 사람을 되찾으려고 죽지 않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필사자의 혼을 그 조상의 잘못 때문에 벌하는 것처럼 상스러운 불법(不法)을 결코 생각해 내지 않았다. 주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인류가 하나님에게 지게 된 빚을 하나님께 갚으려는 노력으로 이루어진 희생물도 아니었다.

예수가 땅에서 살기 전에는, 너희가 그러한 하나님을 믿어도 아마도 정당화되었을지 모르지만, 주가 너희 동료 필사자들 사이에서 살다가 돌아가신 뒤에는 그렇지 않다. 모세창조자 하나님의 위엄과 응보를 가르쳤지만, 예수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 주었다.

동물적 성질―악행을 향한 성향―은 물려받을지 모르지만, 죄는 부모로부터 아이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죄는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법을 거슬러서, 의지를 가진 개별 피조물이 의식하여, 깊이 생각한 끝에 반항하는 것이다.

예수는 꼭 이 한 세계의 종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 우주 전체를 위하여 살다가 돌아가셨다. 여러 영역의 필사자들은 예수유란시아에서 살다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구원을 가졌지만, 그런데도 이 세상에 그가 자신을 수여한 것은 구원의 길을 크게 비춘 것이 사실이다. 그의 죽음은, 육체를 입고 죽은 뒤에 필사자가 살아남는다는 확실성을 언제까지나 분명히 밝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예수를 희생자, 대속자, 또는 구속자(救贖者)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적당하지 않아도, 구원자라고 언급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그는 언제까지나 구원받는 (살아남는) 길을 더욱 뚜렷하고 확실하게 만들었다. 네바돈 우주의 모든 세상에서 모든 필사자를 위하여 구원의 길을 더욱 낫게, 더욱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하나님이 참되신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관념, 예수가 일찍이 가르친 유일한 개념을 너희가 일단 깨달으면, 일관성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이 기분을 상한 군주요, 첫째 가는 기쁨이 잘못하는 백성들을 찾아내고, 자신과 거의 비슷한 어떤 존재가 그들을 위해서 고통받고, 대체물로서, 그들 대신에 죽으려고 자청하지 않으면 그들이 알맞게 벌받도록 조치를 취하는 엄하고 전능한 통치자라는 모든 원시 개념을 너희는 당장에 완전히 버려야 한다. 몸값을 내고 대속한다는 관념 전체는, 나사렛 예수가 가르치고 본보기를 보인 그 하나님 개념과 양립할 수 없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은, 신다운 성품 가운데 어느 것보다 못하지 않다.

대속(代贖)하고 희생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 모든 개념은 이기심에 뿌리를 박고 근거를 두었다. 예수는 사람이 동료들에게 봉사를 베푸는 것이 영적 신자들의 형제 정신의 가장 높은 개념이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믿는 자들은 구원을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 신자(信者)의 으뜸가는 관심은 개인이 구원받으려는 이기적 소망이 아니라, 예수가 필사 인간들을 사랑하고 섬긴 것 같이, 사람의 동료들을 사랑하고, 따라서, 섬기려는 사심 없는 욕구이어야 한다.

진정한 신자들은 죄에 대하여 앞날에 벌받는 것을 그렇게 많이 걱정하지 않는다. 진정한 신자는 오늘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에만 아랑곳한다. 지혜로운 아버지가 아들들을 꾸짖을 수 있다는 것이 참말이지만, 사랑으로, 고치는 목적으로, 이 모든 것을 행한다. 그들은 성이 나서 벌을 내리지 않으며, 징벌로 꾸짖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응보가 최고로 다스리는 우주에서 엄격하고 정당한 군주라 하더라도, 죄지은 위반자 대신에 결백한 희생자를 바꿔치는 어리석은 계획에 만족해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예수의 죽음에 관하여 큰 일은, 인간 체험을 부유하게 하고 구원의 길을 넓히는 데 관계되다시피, 그가 죽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죽음을 대한 더할 나위 없는 태도와 견줄 데 없는 그 정신이다.

대속한다는 이 몸값 아이디어 전체가 구원을 비현실 수준에 놓으며, 그러한 개념은 순전히 철학적이다. 인간의 구원은 실재하며, 구원은 피조물의 믿음으로 붙잡고, 그로서 개별 인간의 체험 속으로 합병될 수 있는 두 가지 실체에 근거를 둔다. 즉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 그리고 그와 관계되어, 사람이 형제라는 진리이다. 결국은 “너희에게 빚진 자들을 너희가 용서하는 것 같이, 너희의 빚도 용서를 받으리라”는 것이 참말이다.

5. 십자가로부터 얻는 교훈

예수의 십자가는 참 목자가 그의 양 떼 가운데서 자격 없는 구성원에게도 최상으로 헌신함을 한껏 보여 준다. 그 십자가는 언제까지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모

든 관계를 가족의 기초 위에 둔다. 하나님아버지요 사람은 아들이다. 사랑, 즉 아버지가 아들을 위하는 그 사랑은, 창조자와 피조물의 우주 관계에서 핵심 진리가 된다―악을 행하는 백성이 고통을 받고 벌받는 데서 만족을 추구하는 임금이 내리는 응보는 그렇지 않다.

십자가는 죄인들을 향한 예수의 태도가 정죄(定罪)도 묵인도 아니지만, 오히려 영원하고 사랑하는 구원임을 언제까지나 보여 준다. 예수의 삶과 죽음이 사람들을 선하고 올바르게 살아남도록 설득한다는 의미에서, 그는 참으로 구원자이다. 예수는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그의 사랑은 인간의 가슴 속에서 사랑의 반응을 일깨운다. 사랑은 참으로 전염성이 있고 영원히 창조성이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죄를 용서하고 모든 악행을 삼킬 만큼, 충분히 힘찬 신성한 사랑을 본보기로 보여 준다. 예수는 이 세상에게 정의보다―단지 엄밀한 의미에서 옳고 그른 것보다―더 높은 품질의 올바름을 드러냈다. 신의 사랑은 다만 잘못을 용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잘못을 흡수하고 실제로 없애 버린다. 사랑에서 나오는 용서는 자비로 베푸는 용서를 완전히 초월한다. 자비는 나쁜 일을 행한 죄를 한쪽으로 몰아놓지만, 사랑은 그로부터 생기는 죄와 모든 약점을 언제까지나 없애 버린다. 예수는 새로운 생활 방법을 유란시아에 가져왔다. 악에 저항하지 말고 그를 통해서 악을 효과적으로 없애 버리는 선을 찾으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예수의 용서는 묵인이 아니라, 정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이다. 구원은 잘못을 무시하지 않으며, 잘못된 것을 옳게 바꾼다. 참된 사랑은 미움과 타협하거나 미움을 묵인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을 없애 버린다. 예수의 사랑은 결코 그냥 용서하는 것만으로 만족해하지 않는다. 주의 사랑은 회복, 영원히 살아남는 것을 뜻한다. 너희가 이 영원한 회복을 의미한다면, 구원을 죄값 치르기로 언급하는 것이 전적으로 적절하다.

사람들을 몸소 사랑하는 힘으로, 예수는 죄와 악의 위력을 깨뜨릴 수 있었다. 이로서 더 나은 생활 방법을 선택하라고 사람들을 해방하였다. 예수는 과거로부터 구원받음을 묘사했고, 구원은 그 자체로 앞날의 승리를 약속했다. 용서는 이렇게 구원을 마련했다. 신의 사랑의 아름다움은, 일단 인간의 마음에 충분히 인정을 받으면, 언제까지나 죄의 매력과 악의 힘을 없애 버린다.

예수의 고통은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실제로 나사렛 예수는 정말로 맹렬하게 필사자로 존재하는 십자가에서 약 25년을 보냈다. 십자가의 참된 가치는 십자가가 그의 사랑의 최고이자 마지막 표현, 그의 자비의 완성된 계시라는 사실에 있다.

사람이 사는 수백만의 세계에서, 도덕적 투쟁을 그만두고 훌륭한 믿음의 싸움을 버리라고 유혹받았을지 모르는 수십조에 이르는 진화하는 피조물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다시 한 번 보고 나서, 다음에 하나님이 사심(私心) 없이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데 바쳐진 그의 육신화된 목숨을 버리는 광경을 보고서, 영감을 받고 착실히 전진하였다.

십자가 위에서 죽음이 가져온 승리는 예수를 공격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에 나타난 정신에 모두 요약된다.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소서, 저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나이다”하고 기도했을 때, 그는 십자가를 사랑이 미움을 이기고 진리가 악에 승리하는 영원한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 사랑의 헌신은 광대한 우주에 두루 전염되었다. 제자들은 주로부터 그 헌신을 전염받았다. 이 봉사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라고 요청받은, 주의 복음을 가르친 최초의 선생은,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 때 말했다, “이 죄를 저희들의 책임에 돌리지 마소서.”

십자가가 사람의 가장 좋은 성품에 최대로 호소하는 것은 자기의 동료 인간에게 봉사하는 데 목숨을 기꺼이 버린 사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

을 기쁘게 버리려 하는 것, 사람은 이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질 수 없다―예수는 적들을 위하여 목숨을 기쁘게 버리는 그런 사랑을 가졌고, 이것은 땅에서 그 때까지 알려진 어떤 것보다 더 큰 사랑이었다.

유란시아와 마찬가지로 다른 여러 세상에서, 골고다의 십자가 위에서 인간 예수가 죽는 이 숭고한 광경은 필사자들의 감정을 휘저었고, 한편 천사들의 가장 높은 헌신을 일깨웠다.

십자가는 신성한 봉사, 사람이 자기 동료들의 복지와 구원에 목숨을 바치는 것을 나타내는 높은 상징이다. 십자가는 죄지은 사람들 대신에, 기분을 상한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 결백한 하나님의 아들을 희생함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광대한 우주를 통해서 두루, 선한 자들이 자신을 악한 자들에게 수여하고, 그로서 바로 이 사랑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구원하는 신성한 상징으로서 언제까지나 서 있다. 십자가는 가장 높은 형태의 사심 없는 봉사를 나타내는 표시로서, 죽음, 십자가의 죽음 속에서도, 진심으로 베푸는 봉사에서 올바른 생명을 충분히 수여하는 최고의 헌신(獻身)을 나타내는 표시로서 서 있다. 예수의 수여 생명의 큰 상징이 된 바로 그 광경은, 우리 모두가 가서 마찬가지로 하고 싶어하도록 참으로 영감을 준다.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는 예수를 바라볼 때, 생각 있는 남녀는 하찮은 골칫거리와 순전히 허구(虛構)인 많은 불만은커녕, 인생의 가장 혹독한 어려움에도 자신이 불평하도록 다시는 도저히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삶은 너무 영화롭고 죽음은 아주 승리에 넘쳐서, 우리 모두가 이 두 가지를 기꺼이 나누도록 마음이 이끌린다. 소년 시절부터, 십자가에서 죽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이 광경에 이르기까지, 미가엘의 자신 수여 전체에는 마음을 끄는 참된 힘이 있다.

그러면 너희가 십자가를 하나님의 계시(啓示)로서 바라볼 때, 원시인의 눈으로나 후일의 야만인의 관점을 가지고 보지 않도록 하여라. 이들은 하나님을 엄격하게 응징하고 엄밀하게 법을 집행하는 무자비한 군주로 여겼다. 차라리 너희는 광대한 우주의 필사 종족들에게 수여하는 일생의 사명에 예수가 쏟은 사랑과 헌신의 마지막 명시를 십자가에서 꼭 보도록 하여라. 사람의 아들의 죽음 속에서, 필사자 구체들에 사는 아들들에게 쏟는 아버지의 신다운 사랑이 펼쳐지는 그 절정을 보아라. 이처럼 십자가는 그러한 선물과 헌신을 기쁘게 받는 자들에게 기꺼이 애정을 바치고 자진해서 구원을 주는 것을 묘사한다. 십자가에는 아버지가 요구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오로지 예수가 아주 기쁘게 준 것, 피하려 하지 않은 것만 있었다.

사람이 달리 예수를 고맙게 여기고 땅에서 그가 자신을 수여한 뜻을 이해할 수 없다면, 적어도 예수가 필사자로 고통을 같이 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이 현세에서 받는 고통의 성질이나 한계를 창조자가 모른다고 결코 아무도 걱정할 수 없다.

우리가 알건대, 십자가에서 죽음은 사람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과 아들의 끝없는 자비를 사람이 깨닫도록 자극하고, 이 보편적 진리를 온 우주에 퍼뜨리기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