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고통에 대한 오해―욥에 대한 강론
바로 이 날 저녁에 벳세다에서 요한이 또한 예수에게 어째서 겉보기에 결백한 허다한 사람이 많은 병으로 고생하고 그렇게 많이 고통을 겪는가 물었다. 요한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다른 여러 가지 가운데, 주는 말했다:
“이 사람아, 너는 역경의 뜻이나 고통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는도다. 너는 셈족 문학의 걸작―성서에 욥이 고통받는 이야기―를 읽지 아니하였느냐? 이 놀라운 비유가 주의 종의 물질적 번영을 늘어놓고서 시작하는 것을 기억하지 않느냐? 욥은 자식, 재산, 위엄, 지위, 건강, 또 이 현세의 생활에서 사람이 높이 치는 모든 다른 것으로 복을 받았음을 네가 잘 기억하느니라. 아브라함 자손의 전통 있는 가르침에 따르면, 그러한 물질적 번영은 신의 은총을 받았다는 온통 충분한 증거였도다. 그러나 그러한 물질 재산과 현세의 번영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키지 않느니라. 하늘에 계시는 내 아버지는 부자와 똑같이 가난한 자를 사랑하시니, 그가 사람을 차별하시는 분이 아님이라.
“신의 율법을 어기면 머지 않아 벌을 거두는 일이 따르고, 분명히 사람들은 궁극에 저희가 뿌린 것을 거두느니라. 그래도 인간의 고통은 반드시 앞서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이 아님을 알아야 하니라. 욥과 그의 친구들은 저희의 난처한 상황에 대하여 참된 답을 찾아내지 못하였더라. 네가 지금 지니는 빛을 가지고서 너는 이 독특한 비유에서 사탄이나 하나님이 맡는 노릇을 저희에게 도저히 맡기지 아니하리라. 고통을 통해서 욥은 지적(知的) 문제의 결말이나 철학적 어려움의 해답을 찾지 못했어도, 큰 승리를 거두었느니라. 신학적 방어가 무너지는 바로 그 마당에서도 진지하게 ‘나는 나를 몹시 싫어하노라’ 말할 수 있는 그런 영적 높이까지 올라갔고,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환상을 보는 구원이 그에게 허락되었느니라. 그래서 오해했던 고통을 통해서도, 욥은 도덕적으로 이해하고 영적 통찰력을 얻는 초인간 수준에 올라갔느니라. 고통받는 종이 하나님의 환상을 볼 때, 인간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혼의 평화가 따르느니라.
“욥의 첫째 친구 엘리바스는, 그 고통받는 자가 번영하던 시절에 다른 사람들에게 처방해 준 것과 똑같은 인내를 욥이 고난 속에서 보이라고 훈계하였더라. 이 거짓 위로자가 가로되, ‘욥아, 네 종교를 신뢰하라. 고통받는 것은 사악한 자요 올바른 자가 아님을 기억하라. 너는 이 벌을 받아 마땅함이 틀림없으니, 그렇지 않으면 네가 고통받지 아니하리라. 아무도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를 수 없음을 네가 잘 아는도다. 사악한 자가 결코 정말로 번영하지 않음을 네가 아는지라. 어쨌든 사람은 고생하라고 미리 운명을 타고난 듯하고, 아마도 주는 너에게 좋으라고 너를 꾸짖을 뿐이라.’ 불쌍한 욥이 인간이 고통받는 문제를 그렇게 해석해서 큰 위로를 얻지 못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
“그러나 둘째 친구 빌닷의 충고는, 그 때 인정된 신학(神學) 관점에서 볼 때 건전했어도 마음을 더욱 답답하게 하였더라. 빌닷이 말하되, ‘하나님은 부당하실 수 없도다. 네 아이들이 멸망하였은즉 저희가 죄인임이 틀림없도다. 네가 잘못했음이 틀림없으니, 그렇지 않으면 네가 그리 고통받지 아니하리라. 네가 정말로 올바르면, 하나님이 확실히 너를 고통으로부터 구원하리라. 하나님이 사람과 상대한 역사로부터, 너는 전능자가 오직 사악한 자를 멸망시킴을 배워야 하느니라.’
“다음에 어떻게 욥이 친구들에게 말했는가 네가 기억하느니라: ‘하나님은 내가 도와 달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심을 내가 잘 아노라. 어찌 하나님이 옳으시면서 동시에 나의 결백함을 철저히 무시하실 수 있느냐? 전능자에게 호소해서 내가 아무 만족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노라. 선한 자가 사악한 자에게 박해받는 것을 하나님이 참으심을 너는 깨달을 수 없느냐? 그리고 사람이 아주 약한즉, 전능한 하나님 손에서 사람이 무슨 배려를 받을 수 있느냐? 하나님은 내 지금 모습대로 나를 지으셨고, 이렇게 나를 치실 때, 방어할 수 없노라. 도대체 어째서 하나님이 이 비참한 모양으로 그저 고통을 받으라고 나를 지으셨느냐?’
“친구들의 조언과 머리 속에 꽉 찼던 하나님에 관한 그릇된 관념에 비추어 볼 때, 누가 욥의 태도에 도전할 수 있느냐? 욥이 인간다운 하나님을 몹시 바란 것, 사람의 죽어야 할 지위를 알고,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긴 여행에 이 첫 생명의 일부로서, 결백한 가운데 올바른 자가 때때로 고통받아야 함을 이해하는 그런 신다운 존재와 교통하려고 욥이 갈급히 찾은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그런즉 이제부터 욥이 견딘 고통을 견디라고 요청받을 모든 사람을 위로하고 구원할 수 있도록 사람의 아들이 육체를 입고 인생을 살려고 아버지로부터 왔느니라.
“그리고 나서 욥의 셋째 친구 소팔이 더군다나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을 이렇게 뱉었더라: ‘네가 이렇게 고통을 받는 것을 보아하니, 올바르다고 주장하는 네가 어리석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을 이해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노라. 아마도 너의 모든 불쌍한 처지에 어떤 감추어진 목적이 있는가 보다.’ 모두 세 친구
의 말을 듣고 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목숨이 길지 않고 어려움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내세우면서, 욥은 도와 달라고 바로 하나님께 호소하였더라.
“다음에 친구들과 둘째 회견이 시작되었더니, 엘리바스는 더욱 준엄해지고 비난하며 빈정거렸더라. 빌닷은 욥이 친구들을 경멸하는 것에 분개하게 되었고, 소팔은 우울한 조언을 되풀이하였더라. 이 때가 되어서 욥은 친구들에게 진절머리가 나서 다시 하나님께 호소하였고, 친구들의 철학(哲學)에 모습이 나타나고 자신의 종교적 태도에서도 소중히 간직되었던 불공평한 하나님에 맞서서, 공정한 하나님에게 이제 하소연하였더라. 다음에 욥은 필사 존재에서 생기는 불평등이 좀더 공정하게 시정될까 싶은 미래 생명의 위안 속으로 피난하였더라. 사람한테서 도움 받지 못하자 욥은 하나님께로 향하느니라. 그리고 나서 마음 속에서 믿음과 의심의 큰 싸움이 따르느니라. 마침내, 고통받는 인간이 비로소 생명의 빛을 보고, 시달린 혼(魂)이 희망과 용기의 새로운 경지에까지 올라가느니라. 계속 고생하고, 아니 죽을지 몰라도, 깨우침 받은 혼은 이제 승리의 탄성을 부르짖느니라, ‘내 옹호자가 살아 계시구나!’
“하나님이 부모를 벌하려고 아이들을 괴롭힌다는 신조(信條)에 도전했을 때 욥은 아주 옳았느니라. 언제라도 하나님이 올바름을 쉽사리 인정했지만, 욥은 영원자 자신의 성품에 대하여 혼을 적셔 주는 어떤 계시를 몹시 바랐더라. 이것이 땅에서 우리의 사명이라. 고통받는 필사자에게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늘 아버지의 자비를 이해하여 얻는 위로를 더 부인하지 못하리라. 회오리바람에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이 있던 시절에 훌륭한 개념이었으나, 아버지는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아니하며, ‘이것이 길이라, 그 안에서 걸으라’하고 조용히 작은 목소리로서 인간의 마음 속에서 이르심을 너는 이미 배웠느니라. 하나님이 네 안에 거하시고, 너를 그의 신분으로 만들도록 그가 네 신분이 되었음을 너는 알아듣지 못하느냐!”
그리고 나서 끝으로 이렇게 말씀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사람의 아이들 괴롭히기를 기뻐하지 않으시니라. 사람은 첫째로 뜻밖의 사고(事故)로, 또 미숙한 육체적 존재의 악에서 생기는 불완전으로부터 고통을 받으며, 다음에 사람은 죄―빛과 생명의 법을 어김―이 낳는 냉혹한 결과로 괴로움을 받느니라. 마지막으로, 사람은 땅에서 하늘의 올바른 통치에 맞서 불의한 저항을 계속함으로부터 수확을 거두느니라. 그러나 사람의 곤경(困境)은 신의 심판이 개인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현세에 겪는 고통을 줄이려고 많이 일할 수 있고, 그렇게 하리라. 그러나 이번을 마지막으로, 악마가 부추기는 바람에 하나님이 사람을 괴롭힌다는 미신에서 벗어나라. 욥기를 공부하고서, 착한 사람들조차 하나님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그릇된 생각을 솔직히 품을 수 있는가, 바로 이것을 발견하라. 다음에 쓰라리게 고통받던 욥조차, 그런 그릇된 가르침을 받았는데도, 위로하고 구원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찾아냈는가 주목하라. 마침내 그의 믿음은 고통의 구름을 꿰뚫었고, 아버지로부터 쏟아지는 생명의 빛이 치유하는 자비요 영원한 올바름인 것을 헤아렸더라.”
요한은 여러 날 동안 마음 속에서 이 말씀을 숙고하였다. 뜰에서 주와 이렇게 대화를 나눈 결과로, 그 후 요한의 전 생애가 뚜렷하게 바뀌었고, 후일에, 인간의 평범한 고통의 근원·성질·목적에 관하여 다른 사도들의 관점을 바꾸려고 많이 애썼다. 그러나 요한은 주가 떠나실 때까지, 이 회견에 대하여 입을 열지 않았다.
7. 손이 마른 사람
사도들과 새 전도단이 두 번째 갈릴리 전도 여행을 떠나기 전 둘째 안식일에,
예수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올바른 삶의 기쁨”에 대하여 말씀했다. 예수가 말씀을 마치자, 큰 무리의 불구자, 절름발이, 병자, 고통받는 자들이 둘레에 몰려들어서 병 고침을 받으려 하였다. 또한 이 무리에는 사도들과 많은 새 전도사,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 첩자들이 있었다. 예수가 가신 데는 어디나 (아버지의 일에 몰두하느라고 산에 있을 때를 제쳐 놓고) 예루살렘 첩자 여섯 명이 꼭 따라왔다.
정탐하는 바리새인들의 두목은, 예수가 서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마른 손을 가진 사람에게, 예수에게 다가가서 안식일에 고침받는 것이 합당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날 도움을 구해야 할까 물으라고 유도했다. 그 사람을 보고 할 말을 듣고 나서, 바리새인들이 보냈음을 알아차리고, 예수는 말했다: “너에게 한 마디 묻는 동안 앞으로 나아오라. 너에게 양 한 마리가 있어,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다면, 손을 뻗어서 양을 붙잡아서 들어올리겠느냐?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그 사람은 대답했다: “예, 주여, 안식일에 그처럼 좋은 일 하는 것이 합당하리이다.” 그러자 예수가 모두에게 말했다. “무엇 때문에 너희가 이 사람을 내 앞으로 보냈는가 내가 아노라. 내가 안식일에 자비를 보이도록 유혹할 수 있으면, 너희는 내게서 안식일을 어긴 근거를 찾으리라. 안식일에도 불행한 양을 구덩이에서 들어올리는 것이 합당하다고, 너희는 모두 말없이 찬성하였느니라. 안식일에 동물 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인자함을 나타내는 것이 합당함을 너희가 증거하라고 내가 요구하노라. 사람은 양보다 얼마나 더 값이 있느냐! 내가 선포하노니, 안식일에 사람들에게 좋은 일 하는 것이 옳으니라.” 그 앞에서 다 조용히 서 있자, 예수는 손이 마른 남자에게 일렀다. “모두가 너를 보도록 여기 내 옆에 일어서라. 그리고 이제 안식일에 좋은 일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줄 너희가 알까 하니, 네가 고침을 받을 믿음이 있으면, 너에게 명하노니 손을 펴라.”
이 사람이 마른 손을 폈을 때, 손이 온전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에게 달려들 생각이 있었지만, 예수는 차분히 있으라 명하며 말했다: “안식일에 착한 일 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이 합당(合當)하다고 너희에게 막 일렀으나, 남을 해치라고, 죽이고 싶은 욕심에 굴복하라고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였도다.” 성난 바리새인들은 사라졌고, 안식일이었는데도, 당장에 허둥지둥 티베리아스로 가서 헤롯과 의논했으며, 헤롯당원들을 예수에 반대하는 연합군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헤롯의 편견을 갖게 하려고 힘이 자라는 데까지 무엇이든지 했다. 그러나 헤롯은 예수에게 적대해서 행동하려 하지 않았고, 불평(不平)을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라고 조언하였다.
이것은 적들의 도전에 반응하여 처음으로 기적을 일으킨 사례이다. 병 고치는 능력을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종교적 휴식을 온 인류에게 의미 없이 제한하는 진정한 속박으로 만드는 데 대한 실질적 항의로서, 소위 이 기적을 행하였다. 이 사람은 석공으로서 자기 일로 돌아갔고, 병 고침을 받고 나서 감사하고 올바르게 산 사람이었음이 판명되었다.
8. 벳세다에서 마지막 주
벳세다에서 머무르던 마지막 주에, 예루살렘 첩자(諜者)들은 예수와 그 가르침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紛紛)했다. 이 바리새인들 가운데 세 사람은 듣고 본 것에 엄청나게 감명을 받았다. 한편, 예루살렘에서, 산헤드린의 젊고 영향력 있는 회원 아브라함은 예수의 가르침을 드러내 놓고 지지하였고, 실로암 못에서 아브너에게
세례를 받았다. 온 예루살렘이 이 사건을 놓고 떠들썩하였고, 바리새인 첩자 여섯 명을 부르려고 사자들이 벳세다로 즉시 파견되었다.
이전의 갈릴리 여행에서 하늘나라를 믿도록 설득된 그리스인 철학자가 알렉산드리아의 어떤 부자 유대인과 함께 돌아왔는데, 병자를 위한 병원 뿐 아니라, 철학과 종교를 합동으로 가르치는 학교를 세울 목적으로 자기네 도시로 오라고 한 번 더 예수를 초청했다. 그러나 예수는 정중하게 초청을 물리쳤다.
이 무렵에 벳세다 야영지에 박다드에서부터 어떤 키르메스라 하는, 최면술 쓰는 선지자가 도착했다. 선지자라고 생각되던 이 사람은 최면 상태에 있을 때 특이한 환상을 보았고, 잠이 방해를 받았을 때 환상적인 꿈을 꾸었다. 캠프에서 어지간히 소동을 일으켰는데, 열심당원 시몬은 스스로 속는 그 사칭자를 오히려 거칠게 다루자고 했지만, 예수가 간섭하였고 며칠 동안 완전한 행동 자유를 주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자는 모두, 하늘나라 복음으로 판단하건대, 그 가르침이 건전하지 않음을 금방 깨달았다. 얼마 있다가 박다드로 돌아갔고, 불안정하고 이상한 사람 여섯 명만 데리고 갔다. 그러나 박다드 선지자를 위하여 예수가 탄원하기 전에, 다윗 세베대는 스스로 임명한 위원회의 도움을 받아서, 키르메스를 호수로 데리고 가서, 물 속에 연거푸 처박은 뒤에, 거기서 떠나라―자기 캠프를 조직하고 세우라―고 조언했다.
바로 그 날, 어느 페니키아 여인, 베스마리온이 너무 미쳐서 정신이 나갔고, 물 위에서 걸으려고 애쓰다가 거의 물에 빠져 죽게 된 뒤에, 친구들이 그 여자를 돌려보냈다.
예루살렘에서 온, 새로 전향한 바리새인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서 가진 재산 모두를 사도의 금고에 기부했고, 이 기부금은 새로 훈련받은 전도사 1백 명을 즉시 보낼 수 있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안드레는 야영지를 걷어치울 것을 이미 발표했고, 모두가 집으로 가든지 아니면 전도사들을 따라서 갈릴리로 가려고 준비했다.
9. 중풍병자를 고치다
10월 1일, 금요일 오후에, 세베대의 집에, 널찍하고 확장한 앞쪽에 있는 방에서 예수가 사도와 전도사들, 흩어지는 야영지의 다른 지도자들, 그리고 이 모임의 앞줄에 앉아 있던, 예루살렘에서 온 여섯 바리새인과 마지막 회의를 하고 있을 때, 예수가 땅에서 사신 전 생애에서 가장 이상하고 독특한 여러 에피소드 중의 하나가 벌어졌다. 이 때에 주는 이 큰 방에서 서서 말씀하고 있었고, 이 방은 비오는 철 동안, 이 모임에 편리를 주려고 지었다. 그 집은 예수의 강론에서 얼마큼 얻어들으려고 귀를 쫑긋하고 있는 광대한 집합의 사람들로 온통 둘러싸여 있었다.
집이 이렇게 사람들로 들끓고, 열심 있는 청중에게 온통 둘러싸여 있는 동안, 중풍으로 오래 앓고 있던 어떤 사람이 가버나움에서 친구들에게 작은 침상에 들려 내려왔다. 이 중풍병자는 예수가 벳세다를 막 떠나려한다는 말을 들었고, 아주 최근에 몸이 온전하게 된 석공 아론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므로, 병 고침을 얻을 수 있도록 예수 앞으로 들려 가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친구들이 앞문과 뒷문으로 세베대의 집으로 들어가려고 애썼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이 싸여 있었다. 하지만 그 중풍병자는 패배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사다리를 얻어 오라고 지시
했고, 그것으로 친구들이 예수가 말씀하고 있는 방의 지붕으로 올라갔다. 타일을 벗겨 놓은 뒤에, 아픈 사람이 바로 주 앞에 마루에 놓일 때까지 밧줄로 침상에 들린 병자를 대담하게 내려보냈다. 그들이 한 일을 보자, 예수는 말씀을 그쳤고, 한편 방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아픈 사람과 그 친구들의 집요함에 감탄했다. 중풍병자가 말했다: “주여, 나는 당신의 가르침을 훼방하고 싶지 않나이다. 그러나 나는 온전히 되려고 결심하였나이다. 나는 고침을 받는 즉시 당신의 가르침을 잊어버린 자들과 같지 않나이다. 하늘나라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나는 온전히 되고자 하나이다.” 자, 스스로 생애를 잘못 보내서 이 사람의 병이 닥쳤는데도, 예수는 믿음을 보고, 중풍병자에게 말했다: “아들아, 무서워 말라, 너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느니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할지니라.”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바리새인들이, 같이 앉았던 다른 서기관과 율법사들과 더불어, 이렇게 선언하신 것을 들었을 때, 속으로 비로소 혼잣말을 했다: “이 사람이 어찌 감히 이렇게 말하느냐? 그런 말이 신성 모독임을 저가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 이렇게 머리 속에서, 자기들끼리 따지는 것을 정신으로 알아차리고, 주는 말씀했다: “어찌하여 너희가 마음 속에서 그리 따지느냐? 나를 판단하다니 너희는 누구이냐? 이 중풍병자에게, 너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아니면 일어나서 네 침구(寢具)를 들고 걸으라 하고 말하든 무슨 차이가 있느냐?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목격하는 너희가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할 권한과 능력이 있음을 마침내 알도록, 이 병자에게 이르리라. 일어나서 네 침구를 들고, 집으로 가라.” 예수가 이렇게 말씀하시자 중풍병자는 일어났고, 길을 비키는 대로, 모두 앞에서 걸어 나갔다. 구경한 사람들은 놀랐다. 베드로는 집회를 해산했고, 한편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그렇게 이상한 일을 한 번도 전에는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하였다.
이 무렵에 산헤드린의 사자들이 여섯 첩자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 명령하려고 도착했다. 이 소식을 듣자, 자기들끼리 진지하게 토론에 빠졌다. 의논을 마치고 난 뒤에, 두목과 두 동료가 사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으며, 한편 정탐하던 세 바리새인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였고, 바로 호수(湖水)로 가서, 베드로에게 세례 받고, 하늘나라의 자녀가 되어 사도들과 사귀었다.
제 149 편
두 번째 전도 여행
갈릴리에서 두 번째 대중 전도 여행은 서기 28년 10월 3일, 일요일에 시작되었고, 거의 석 달 동안 계속되어, 12월 30일에 끝났다. 이 노력에는 예수와 열두 사도가 참여했고, 새로 모집한 전도사 117명의 집단, 그리고 관심 있는 수많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이 여행에서 가다라·프톨레마이스·야피아·다바리타·메기도·예즈릴·스키토폴리스·타리케아·히포·가말라·벳세다 줄리아스, 그리고 기타 여러 도시와 마을을 방문했다.
이 일요일 아침에 떠나기 전에, 안드레와 베드로는 예수에게 새 전도사들에게 마지막 책임을 지우는 말씀을 부탁했지만, 예수는 남들이 쓸 만하게 수행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그의 직분이 아니라 하면서 물리쳤다. 마땅히 검토를 거친 뒤에, 야고보 세배대가 책임 지우는 선서를 시행하기로 결정이 내렸다. 야고보의 논평이 끝났을 때 예수는 전도사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책임을 받은 대로 일하도록 이제 떠나라, 나중에 너희가 능력과 충성심이 있음을 보였을 때,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도하도록 너희를 세우리라.”
이 여행에서 오직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와 함께 길을 떠났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저마다 전도사(傳道師)를 열두 명쯤 데리고 갔는데, 전도하고 가르치는 일을 해 나가는 동안 그들과 가까운 접촉을 유지했다. 신자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되자마자, 사도들이 세례를 주곤 하였다. 예수와 두 동반자는 이 석 달 동안 널리 여행했는데, 전도사들의 일을 지켜보고 하늘나라를 세우려는 노력을 격려하느라고 때때로 하루에 두 도시를 방문했다. 이 둘째 전도 여행 전부가 주로, 새로 훈련받은 이 전도사 117명의 무리를 위하여 실용적 경험을 마련해 주려는 노력이었다.
이 기간 내내, 또 그 뒤에, 예수와 열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마침내 떠날 때까지, 다윗 세베대는 벳세다에 아버지 집에서, 하늘나라 사무를 위하여 영구(永久) 본부를 유지했다. 여기가 땅에서 예수의 일을 위한 정보 교환소였고, 팔레스타인의 여러 곳과 인접 지역에 있는 일꾼들 사이에, 다윗이 수행한 사자(使者) 서비스의 연결 역(驛)이었다. 그는 이것을 모두 솔선해서, 그러나 안드레의 승인을 얻어서 했다. 다윗은 급히 확대되고 뻗어나가는 하늘나라 사무의 정보 분과에서 40에서 50명의 사자를 고용했다. 이렇게 고용된 동안, 얼마큼 시간을 옛날 고기잡이 일에 써서 어느 정도 자신을 부양했다.
1. 널리 알려진 예수의 이름
벳세다 캠프가 해산할 때가 되어서, 예수의 이름은, 특히 병 고치는 자로서, 팔레스타인의 모든 구석, 시리아와 그 주위의 시골 전체를 통해서 알려졌다. 그들이
벳세다를 떠난 뒤에 몇 주 동안, 병자들이 계속 도착했고, 주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다윗으로부터 그가 어디 계신가 소식을 듣고서, 예수를 찾아서 가곤 하였다. 이 여행에서 예수는 병 고치는 기적이라 부르는 어떤 일도 계획하여 행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병자 몇십 명이 병 고침을 찾을 수밖에 없게 한 맹렬한 믿음의 회복하는 힘의 결과로 건강과 행복을 되찾았다.
이 사명을 수행하던 무렵에―그리고 땅에서 예수의 여생 동안 내내―특이하고 설명되지 않은 일련의 치유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석 달 동안의 여행 과정에서 유대·이두미아·갈릴리·시리아·티레·시돈으로부터, 또 요단 강 건너로부터 1백 명이 넘는 어른과 아이들이 예수가 이렇게 의식하지 않고 고치는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예수의 이름을 더욱 퍼뜨렸다. 뜻밖에 고침 받는 이 사례들의 하나를 지켜볼 때마다, 예수가 “아무에게 말하지 말라”고 수혜자들에게 직접 당부하곤 했는데도, 그렇게 했다.
뜻밖에, 곧 무의식으로 고치는 이 여러 사례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는 계시받은 적이 없다. 몇몇 경우에 단지 “권능이 내게서 나갔음을 내가 깨닫노라” 말한 것 외에, 주는 사도들에게 어떻게 이 치유가 일어났는가 설명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 어느 아픈 아이가 그를 만졌을 때, 한 마디 던졌다: “생명이 내게서 나갔음을 내가 깨닫노라.”
뜻밖에 순간적으로 치유하는 이 사례들의 성질에 관하여 주로부터 직접 말씀이 없는 마당에, 우리 편에서 어떻게 이 일이 이루어지는가 설명을 시도하는 것은 주제넘겠지만, 모든 그런 치유 현상에 대하여 우리의 의견을 기록하는 것은 괜찮을 것이다. 병 고치는 기적으로 보이는 이 일들은, 땅에서 예수가 봉사를 베푸는 과정에서 일어난 바와 같이, 강력하고, 유효하고, 관련된 다음 세 가지 영향이 공존하는 결과라고 우리는 믿는다:
1. 집요하게 치유받기를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 속에, 강하고 지배적이고 살아 있는 믿음이 있는 것. 아울러 순전히 육체의 회복보다 오히려 그 영적 이익 때문에 그러한 치유가 바람직하다는 사실.
2. 그러한 인간의 믿음과 동시에, 육신화되고 자비에 지배된, 하나님의 아들 창조자의 큰 동정심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존재하는 것. 그는 몸 안에 거의 한없고 시간을 초월하는 창조적 치유 권능과 특권을 실제로 소유했다.
3. 피조물의 믿음과 창조자의 생명과 함께, 하나님인 이 사람이 아버지의 뜻이 성격으로 표현된 것임을 또한 주목해야 한다. 인간의 필요와 그것을 채우는 신의 권능이 접촉할 때 아버지가 달리 뜻하지 않으면, 그 둘이 하나가 되고, 인간 예수가 의식하지 않고서 치유가 일어나지만, 즉시 신다운 성품이 인식한다. 그러면 병을 고친 이 많은 사례(事例)의 설명은 우리에게 오랫동안 알려진 큰 법칙에서 찾아야 하는데, 이렇다: 아들 창조자가 바라고 영원한 아버지가 뜻하시는 것은 동시에 존재한다.
그러면 예수가 친히 계신 앞에서, 어떤 형태의 심오한 인간의 믿음은, 우주의 어떤 창조 세력, 그리고 당시에 사람의 아들과 아주 밀접히 연결된 성격자들로 말미암아 치유가 나타날 때, 글자 그대로, 참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의견
이다. 따라서 예수는 그가 계신 앞에서 사람들이 힘찬 개인적 믿음으로 스스로 고치도록 자주 버려 두었다는 것이 기록된 사실이 된다.
다른 여러 사람이 완전히 이기적 목적으로 치유받기를 추구했다. 티레의 어느 부유한 과부는 수행원들과 함께, 질병을 치유받으려고 왔다. 갈릴리를 통해서 여기저기 따라다니는 동안, 마치 하나님의 권능이 돈을 가장 많이 내는 사람이 살 수 있는 물건인 듯, 점점 더 많은 돈을 계속 내밀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복음에 한 번도 아랑곳하려 하지 않았다. 얻고자 한 것은 오직 육체의 병의 치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