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6 편
갈릴리에서 첫 전도 여행
갈릴리에서 첫 대중 전도 여행은 서기 28년 1월 18일, 일요일에 시작되어 약 두 달 동안 이어졌고, 3월 17일에 가버나움으로 돌아와서 끝을 맺었다. 이 여행에서 예수와 열두 사도는, 요한의 옛 사도들의 도움을 받아서, 림몬, 요타파타, 라마, 스불론, 이론, 기스칼라, 코라진, 마돈, 가나, 나인, 엔도르에서 복음을 전하고,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여러 도시에서 묵고 가르쳤으며, 한편 많은 다른 작은 마을에서, 지나가면서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였다.
이번에 처음으로 예수는 동료들에게 제한 없이 전도하라고 허락하였다. 이 여행에서 오직 세 가지 경우에만 주의를 주었다. 나사렛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가버나움과 티베리아스를 지날 때 조심하라고 타일렀다. 마침내 아무 제한 없이 전도하고 가르치는 데 자유롭다고 느낀 것은 사도들에게 큰 만족의 근원이었다. 그들은 복음 전하는 일에 투신했고, 큰 열심과 기쁨을 가지고, 아픈 자들을 보살피고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1. 림몬에서 전도하다
작은 도시 림몬은 한때 바빌로니아의 공기(空氣)의 신 람만을 모시는 데 바쳐졌다. 옛 바빌로니아와 후일 조로아스터의 가르침 가운데 많은 것이 아직도 림몬 사람들의 관념에 담겨 있었다. 따라서 예수와 스물네 사람은 이 옛 신앙과 하늘나라의 새 복음의 차이를 설명하는 과제에 시간을 많이 썼다. “아론과 금 송아지”에 대하여, 베드로는 초기 생애에서 가장 큰 설교 가운데 하나를 여기서 했다.
림몬의 많은 시민은 예수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이 되었지만, 후일에 동포들에게 큰 문제를 일으켰다. 자연 숭배자들을 영적 이상을 찬미하는 단체로 한 생애의 짧은 기간에 완전히 바꾸기는 어렵다.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에 있던 빛과 어둠, 선과 악, 시간과 영원에 관한 많은 상급 관념은, 나중에 소위 그리스도교의 교리 안에 합병되었고, 이를 포함한 것은 근동(近東) 민족들에게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더 쉽사리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나중에 필로가 히브리 신학에 적응한 바와 같이, 이상적 정신, 즉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만물의 보이지 않는 원형(原形)에 관한 플라톤의 여러 이론(理論)을 포함한 것은 바울의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서부 그리스인들이 더 받아들이기 쉽게 만들었다.
림몬에서 토단이 처음으로 하늘나라의 복음을 들었고, 그는 나중에 메소포타미아로, 또 거기를 훨씬 지나서 이 메시지를 가져갔다. 그는 유프라테스를 지나서 사는 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처음으로 전도한 사람들에 속했다.
2. 요타파타에서
요타파타의 서민들은 예수와 사도들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고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요타파타 임무를 구별하는 것은 이 작은 마을에서 머무른 둘째 날 저녁에, 예수가 스물네 사람에게 하신 강론이다. 나다니엘은 머리 속에서, 기도, 감사, 예배에 관한 주의 가르침에 머리가 헛갈렸고, 그의 물음에 대답하여 예수는 가르침의 연장된 설명으로 길게 말씀하였다. 현대의 말투로 줄이면, 이 강론은 다음 몇 가지를 강조하는 것으로 발표해도 좋다:
1.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의식하면서 불의(不義)를 끈질기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과 조물주 사이에, 인간의 혼이 영 통신 회로와 기도(祈禱)로 연결하는 줄을 끊어 버린다. 하나님은 자연히 자식의 간청을 듣지만, 인간의 마음이 일부러 끈질기게 불의의 개념을 품고 있을 때, 땅에 있는 아이와 하늘 아버지 사이에 개인적 교통이 차츰차츰 없어진다.
2. 알려지고 확정된 하나님의 법칙과 모순되는 기도는 파라다이스 신들에게 지긋지긋한 것이다. 하나님들이 영·지성·물질의 여러 법칙대로 만든 창조에게 말씀하실 때, 사람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으면, 피조물이 그렇게 일부러 의식하여 멸시하는 바로 그 행위는, 다루기 힘들고 복종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몸소 드리는 간청을 영 성격자들이 듣지 않고 멀리하게 만든다. 예수는 선지자 스가랴를 사도들에게 인용했다. “저희가 듣기 싫어하여 등을 돌리고, 듣지 않도록 귀를 막았더라. 옳도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내 영이 보낸 내 율법과 말씀을 들을까 두려워, 저희는 돌처럼 마음을 굳게 하였더라. 그러므로 악한 생각의 결과가 저희의 죄지은 머리 위에 큰 진노로 내렸더라. 그래서 저희가 자비를 외쳤어도 들을 귀가 하나도 없게 되었더라.” 그리고 나서 예수는 이렇게 말한 현자의 잠언을 인용했다: “신의 율법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돌리는 자에게는, 그 기도조차 지긋지긋한 것이 될지니라.”
3. 하나님과 사람의 교통 경로에서 인간 쪽을 열어 놓음으로, 필사자들은 여러 세계의 피조물에게 베푸는, 항상 흐르는 신의 봉사의 물결을 즉시 이용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영이 말씀하심을 들을 때, 그런 체험에는 하나님이 동시에 그 사람의 기도를 듣는다는 사실이 저절로 생긴다. 죄의 용서조차도 어김없이 바로 이 모습으로 작용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네가 구하려고 생각하기도 전에 너를 용서했다. 그러나 동료 인간을 용서할 때까지, 그런 용서는 너 개인의 종교 체험에서 소용되지 않는다. 사실은 하나님의 용서(容恕)는 네가 동료를 용서하는 데 달려 있지 않지만, 체험 속에서 그렇게 그대로 조건을 받는다. 신과 인간의 용서가 동시에 생긴다는 이 사실은 예수가 사도들에게 가르친 기도에서, 그렇게 인식되고 서로 연결된다.
4. 우주에는 응보라는 기본 법칙이 있는데, 자비는 이것을 피해 갈 힘이 없다. 시공 영역에서 철저히 이기적인 생물은 파라다이스의 사심(私心) 없는 영광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조차, 살아남기를 선택하지 않는 어떤 필사 인간에게도 영원히 살아남는 구원을 강제로 줄 수 없다. 자비를 베푸는 큰
허용 범위가 있으나, 결국 자비와 뭉쳐진 사랑조차 실질로 취소할 수 없는 응보의 명령이 있다. 다시 예수는 히브리 성서를 인용했다: “내가 불러도 너희는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뻗었어도 거들떠보는 자가 없었도다. 너희는 나의 모든 조언을 무시하고 내 책망을 물리쳤으며, 이 모반하는 태도로 말미암아 너희가 나를 불러도 불가피하게 대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생명의 길을 물리쳤으매, 너희가 고통받을 때 나를 부지런히 찾을까 싶으나, 나를 찾아내지 못하리라.”
5. 자비를 받고자 하는 자는 자비를 보여야 한다. 판단을 받지 않도록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그 정신으로 너희가 또한 판단을 받을지니라. 자비는 우주의 공평(公平)을 완전히 지워 버리지 않는다. 이것이 마지막에는 참인 것이 판명되리라, “가난한 자가 외치는 소리에 귀를 막는 자는 누구나, 또한 언젠가 도움을 외치겠으나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리라.” 진지한 기도는 하나님이 들으심을 보장한다. 어떤 간구라도 그 영적 지혜와 우주 일관성은 대답의 시간·방법·정도를 결정하는 요인이다. 지혜로운 아버지는 무지하고 경험 없는 아이들의 어리석은 기도를 글자 그대로 들어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터무니없는 간청으로부터 아이들은 많은 기쁨과 혼의 진정한 만족을 얻을지 모른다.
6.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완전히 몸을 바쳤을 때, 너희의 모든 간구에 응답이 앞으로 다가오리니, 너희의 기도가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따르고, 아버지의 뜻은 광대한 우주에 두루, 항상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아들이 바라고 무한한 아버지가 뜻하는 것은 존재한다. 그런 기도는 응답받지 않을 수 없고, 다른 어떤 종류의 간구도 도저히 충분히 응답받을 수 없다.
7. 올바른 자의 외침은 하나님의 자녀의 믿음의 행위요, 선·진리·자비로 가득 찬 아버지의 창고 문을 열며, 이 좋은 선물은 아들이 다가와서 손수 쓰라고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다. 기도는 사람을 향한 신의 태도를 바꾸지 않지만, 변함없는 아버지를 향하여 사람의 태도를 바꾼다. 기도하는 사람의 사회나 경제 지위, 또는 외관상의 종교적 지위가 아니라, 기도의 동기가 신의 귀에 미치는 통행권을 준다.
8. 시간의 지연을 피하거나 공간의 장애를 뛰어넘으려고 기도해서는 안 된다. 기도는 자신을 확대하거나 동료보다 부당한 이점(利點)을 얻기 위한 기법으로 고안되어 있지 않다. 철저히 이기적인 혼은, 참 뜻으로 볼 때, 기도할 수 없다. 예수는 말했다: “너의 최고의 기쁨이 하나님의 성품에 있게 하여라. 그리하면 네 마음이 진지하게 바라는 것을 분명히 주시리라.” “너의 길을 주께 맡기라. 그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그가 행하리라.” “주가 빈궁한 자의 외침을 듣고, 빈곤한 자의 기도를 돌아볼 것임이라.”
9. “나는 아버지로부터 왔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아버지께 무엇을 구할까 언제라도 의심이 들면, 내 이름으로 구하라. 그리하면 너의 진정한 필요와 소망에 따라서, 또 내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내가 너의 간구(懇求)를 내놓으리라.” 기도하는 가운데, 자기 중심이 되는 큰 위험을 조심하라. 자신을 위하여 많이 기도하기를 피하라. 너희 동포의 영적 진보를 위하여 더욱 기도하라. 물질적인 기도를 피하라. 정신이 살아서 기도하고, 영의 선물이 풍부하기를 기도하라.
10. 너희가 아픈 자와 병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 너희의 간구(懇求)가 이 고통받는 자들의 필요에 따라 사랑으로 총명하게 보살피는 일을 대신하기를 기대하지 말라. 너희의 가족과 친구와 동료의 복지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러나 너희를 저주하
는 자를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사랑으로 간구를 드리라. “그러나 언제 기도할까 나는 이르지 아니하리라. 오직 너희 안에 깃드는 영이, 영들의 아버지와 너희가 속에서 가지는 관계를 나타내는 간구를 드리도록 너희에게 감동을 줄까 싶으니라.”
11. 많은 사람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에야 기도에 매달린다. 그런 관습은 경솔하며 잘못으로 이끈다. 괴로울 때 기도가 상책인 것이 참말이지만, 만사가 네 혼에 순조롭게 돌아갈 때도, 아버지에게 아들로서 말하도록 머리를 써야 한다. 진정한 간구를 언제나 남모르게 하라. 사람들이 네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기도를 듣지 못하게 하라. 감사하는 기도는 예배하는 자들의 무리에게 적절하지만, 혼의 기도는 개인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자녀들 모두에게 적절한 오직 한 가지 형태의 기도가 있으니, 이와 같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12. 이 복음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늘나라가 확장되기를 진지하게 기도해야 한다. 히브리 성서의 모든 기도 가운데, 시편(詩篇) 작가의 간구를 가장 만족해서 논평했다. “내 안에서 마음을 깨끗하게 만드소서, 아 하나님, 내 안에서 옳은 영을 새롭게 하소서. 비밀스러운 죄를 내게서 없이하고, 거만한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이 종을 붙드소서.” 기도와 경솔하고 귀에 거슬리는 말의 관계에 대하여 예수는 길게 논평하며, 이렇게 인용하였다: “아 주여, 내 입에 파수를 두소서.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예수는 말했다: “인간의 혀는 거의 아무도 길들일 수 없는 부분이나, 마음 속에 있는 영은 다스리기 힘든 이 부분을 친절한 관용의 목소리로, 영감을 주는 자비로운 봉사자로 변화시킬 수 있느니라.”
13. 인생의 길에서 신의 안내하심을 얻으려는 기도는 아버지의 뜻을 알려고 구하는 기도 다음으로 중요하다. 실제로 이것은 신의 지혜를 얻으려는 기도를 뜻한다. 예수는 결코 기도로 인간의 지식과 특별한 기술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 신다운 영의 계심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키우는 데 기도가 한 요인이라고 가르쳤다. 예수가 동료들에게 정신적으로, 진리 속에서 기도하라고 가르쳤을 때, 성실하게, 사람의 깨우침에 따라서 기도하는 것, 진심으로 또 총명하게, 열심히 또 꾸준히 기도함을 언급했다고 설명하였다.
14. 화려한 되풀이, 웅변하는 문구, 금식(禁食), 고행 또는 희생물을 바침으로 기도가 더욱 효력 있게 되리라는 생각을 품지 말라고 추종자들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감사를 통하여 참된 예배에 이르는 수단으로서, 기도를 이용하라고 신자들에게 타일렀다. 추종자들의 기도와 예배에 감사 정신이 너무 적게 보여서 한탄했다. 이 계제에 성서로부터 이렇게 인용하였다. “주께 감사를 드리고 최고자의 이름에 찬미를 드리며, 아침마다 그의 인자함과 밤마다 그의 충실함을 인정하는 것은 좋은 일이니, 그가 하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를 기쁘게 하였음이라. 모든 일에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감사를 드리리라.”
15. 다음에 예수는 말했다: “너희의 평범한 필요에 대하여 항상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라. 땅에서 너희 존재에서 생기는 문제들에 관하여 불안해하지 말 것이나, 이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성실하게 감사드리는 정신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 너희의 필요를 펼쳐 놓으라.” 그리고 나서 성서로부터 인용했다: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겠고, 감사로 그의 이름을 높이리라. 이것이 뿔과 발굽 있는 수소나 송아지를 바치는 것보다 주를 더 기쁘게 하리라.”
16. 아버지께 기도드리고 나서, 깃드는 영이 경청하는 혼에게 말할 좋은 기회를 주도록 고요히 받는 자세로 한동안 남아 있어야 한다고 추종자들에게 가르쳤다. 아버지의 영은 인간의 지성이 참으로 예배하는 태도를 가질 때, 사람에게 말하기가 가장 좋다. 깃드는 아버지 영의 도움을 얻어서, 진리의 보살핌을 통하여 인간의 지성을 비춤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예배는 사람으로 하여금 예배받는 존재와 점점 더 같게 만든다고 예수는 가르쳤다. 예배는 유한자가 무한자의 계심 앞에 차츰 가까이 가고, 궁극에 그에 이르게 하는 체험, 사람을 변화시키는 체험이다.
예수는 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데 대하여 많은 다른 진리를 사도들에게 일러 주었지만, 많지 않은 사람이 그의 가르침을 넉넉히 깨우칠 수 있었다.
3. 라마에서 멈추다
라마에서 예수는 나이 든 그리스인 철학자와 기억에 남을 토론을 가졌는데, 이 사람은 과학과 철학이 인간 체험의 필요를 채우는 데 충분하다고 가르쳤다. 인내와 동정심으로 예수는 이 그리스인 선생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가 말한 많은 것이 진리임을 인정했지만, 말을 마쳤을 때, 그가 인간 존재에 대하여 토론할 때 “어디로부터 와서, 어째서, 어디로 가는가”를 그가 설명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 덧붙였다. “네가 그만둔 곳에서 우리가 시작하느니라. 종교는 사람의 혼에게 주는 계시(啓示)요, 이것은 지성만으로 결코 발견하거나 충분히 잴 수 없는 영적 실체들을 다루느니라. 지적 노력은 생명의 사실을 드러낼지 모르나, 하늘나라 복음은 존재의 진리를 펼쳐 보이니라. 너는 진리의 물질적 그림자를 논의했는데, 영원한 영적 실체들에 관하여 이르는 동안 너는 듣겠느냐? 그것은 필사 존재의 물질적 사실의 그림자, 일시적인 이 시간 그림자를 던지느니라.” 한 시간이 넘도록 예수는 하늘나라 복음의 유익한 진리를 이 그리스인에게 가르쳤다. 늙은 철학자는 주의 접근 방법에 민감했고, 마음이 진지하게 정직했기 때문에, 이 구원의 복음을 재빨리 믿었다.
사도들은 그리스인의 여러 명제(命題)에 예수가 동의하는, 개방된 태도에 얼마큼 당황했지만, 나중에 예수는 개인적으로 말했다: “아이들아, 내가 그 그리스인의 철학에 관대했다고 해서 놀라지 말라. 안에서 참되고 진정한 확신은 바깥에서 분석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 아니하고, 진리는 정직한 비판을 분개하지도 않느니라. 불관용은 사람의 믿음이 참된가에 대하여 비밀스러운 의심을 품는 것을 덮는 가면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느니라. 진심으로 믿는 것이 진리라고 완전히 확신할 때, 사람은 어느 때라도 이웃의 태도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느니라. 용기는 사람이 믿는다고 공언하는 것들에 대하여 철저히 정직함을 확신하는 것이라. 성실한 사람들은 자기의 참된 확신과 고귀한 이상을 비판적인 눈으로 검토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니라.”
라마에서 둘째 날 저녁에, 토마스는 예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주여, 당신의 가르침을 새로 믿는 자가, 이 하늘나라 복음이 진리인가 어떻게 정말로 알고, 정말로 확신할 수 있나이까?”
예수는 토마스에게 말했다: “너희가 아버지의 하늘나라 집안으로 들어갔고, 너희가 하늘나라의 자녀들과 함께 영원히 살아남으리라는 확신은 전적으로 개인적 체험―진리의 말씀을 믿는 신앙―의 문제이라. 영적 확신은 신성한 진리를 담은 영원한 실체들을 너희가 몸소 종교적으로 체험하는 것에 해당하며, 달리 말하면 진리
실체들을 총명하게 이해하는 것에, 영적 믿음을 더하고, 정직하게 의심하는 것들을 뺀 것과 같으니라.
“아들은 아버지의 생명을 자연히 부여받느니라. 아버지의 살아 있는 영을 받았은즉, 따라서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아버지의 살아 있는 영, 곧 영생하는 선물과 동일시되기 때문에, 너희는 육체의 물질 세계에서 인생을 살고 살아남느니라. 정말로 내가 아버지로부터 오기 전에, 많은 사람이 이 생명을 가졌고, 더욱 많은 사람이 내 말을 믿었으므로 이 영을 받았느니라. 그러나 내가 선언하노니,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 아버지는 그의 영을 모든 사람의 마음 속으로 보내리라.
“너희는 머리 속에서 신의 영이 일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으나, 혼의 능력의 통제를 하늘 아버지의 영, 깃드는 이 영의 가르침과 안내에 맡긴 정도를 발견하는 실용적 방법이 있으니, 즉 너희가 동료 인간을 사랑하는 정도이라. 아버지의 이 영은 아버지의 사랑을 함께 가지며, 사람을 지배함에 따라서, 신을 예배하고 친구들을 사랑으로 여기는 방향으로 어김없이 인도하느니라. 처음에는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으니, 나의 가르침이 우리 아버지의 깃드는 계심이 마음 속에서 인도하심을 너희가 더욱 의식하도록 만든 까닭이라.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진리의 영이 모든 육체에게 퍼부어지겠고, 내가 지금 너희 가운데 살고 진리의 말씀을 일러 주는 것 같이, 이 영은 사람들 사이에 살고 모든 사람을 가르치리라. 이 진리의 영은 혼의 영적 자질을 변호하면서,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도록 도우리라. 아버지의 깃드는 계심을 어김없이 증언하겠고, 너희의 영은, 몇 사람 안에 지금 거하는 것 같이, 모든 사람 안에 거하면서 너희가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러 주느니라.
“이 영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땅에 사는 자녀마다 궁극에는 하나님의 뜻을 알며, 내 아버지의 뜻에 굴복하는 자는 언제까지나 살리라. 지상(地上) 생명으로부터 영원의 영토로 가는 길은 너희에게 쉽게 설명되지 않았으나, 한 길이 있고, 언제나 있었느니라. 그것을 새 생명의 길로 만들려고 내가 왔노라.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이미 영생(永生)을 가졌느니라―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고 나서, 이 말씀 중에 많은 것을 너희가 더욱 잘 알아듣겠고, 현재 체험을 돌이켜볼 수 있으리라.”
이 복된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크게 즐거워하였다. 유대인의 가르침은 의로운 자가 살아남는 것에 관하여 혼잡하고 확실치 않았는데, 모든 참된 신자(信者)가 영원히 살아남는 것에 관하여 아주 뚜렷하고, 확신을 주는 분명한 말씀을 들은 것은 예수의 추종자들에게 기운을 주고 영감을 주었다.
사도들은 계속 전도하고 믿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한편 가정을 방문하는 관습을 계속 지키며, 낙심한 자를 위로하고 환자와 병자들을 보살피었다. 예수의 사도들 각자가 이제 요한의 사도 하나를 동료로서 가진 점에서, 사도의 조직은 확대되었다. 아브너는 안드레의 동료였고, 이 계획은 다음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내려갈 때까지 지속되었다.
스불론에서 머무르는 동안 예수의 특별 교육은 하늘나라의 공동 의무에 관하여 연장된 토론과 대체로 상관이 있었고, 개인의 종교적 체험, 사회적 종교 의무를 가진 친교, 이 둘의 차이를 밝히려고 고안된 가르침이 담겨 있었다. 이것은 종교의 사회적 모습에 대하여 주가 일찍이 말씀하신 몇 번 안 되는 기회 중의 하나였다.
땅에서 산 생애 전체를 통하여 예수는 종교의 사회화(社會化)에 대하여 추종자들에게 가르침을 거의 주지 않았다.
스불론 사람들은 혼합된 종족이었고, 도저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라 할 수 없었는데, 가버나움에서 병자들을 고쳤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거의 아무도 정말로 예수를 믿지 않았다.
4. 이론에서 복음 전파
갈릴리와 유대 지방에서 작은 축에 속하는 여러 도시에서도 그렇다시피 이론에는 회당이 하나 있었는데, 예수가 봉사하던 초기 시절에, 안식일에 이 여러 회당에서 말씀하는 것이 버릇이었다. 어떤 때 그가 아침 예배에 말씀하고,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 가운데 하나가 오후 시간에 설교하곤 하였다. 예수와 사도들은 또한 아주 흔히, 회당에서 주중에 저녁 집회에서 가르치고 설교하곤 하였다. 예루살렘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갈수록 더 적대시(敵對視)하게 되었지만, 도시 바깥에 있는 회당들에 대하여 직접 아무런 통제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예수의 대중 봉사 후기까지, 그가 가르치지 못하게 거의 보편적으로 회당(會堂) 문을 닫도록 널리 그에 대하여 적대감을 일으킬 수 없었다. 이 때 갈릴리와 유대의 모든 회당은 그에게 문을 열었다.
그 시절에 이론은 광범위한 광산들이 있던 장소였고, 광부(鑛夫)의 생애를 함께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는 이론에 머무르는 동안 광산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사도들이 집을 방문하고 공공 장소에서 전도하는 동안, 예수는 이 지하 노동자들과 함께 광산에서 일했다. 병 고치는 사람으로서 예수의 이름이 이 구석진 마을까지도 퍼졌고, 많은 병자와 고통받는 자들이 도움을 구했으며, 많은 사람이 병 고치는 봉사로부터 크게 소득을 얻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문둥병자의 경우를 제쳐 놓고, 주는 이른바 병 고치는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
이론에서 사흘째 오후 늦게, 광산에서 돌아오면서, 예수는 투숙하는 장소로 가는 길에 어쩌다가 좁은 샛길을 지나가게 되었다. 문둥병 걸린 어떤 남자의 더러운 헛간 가까이 다가갔을 때, 치유자라는 명성을 들었은즉, 그 병자는 예수가 문 앞을 지나갈 때,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대담하게 인사를 드리며 말했다. “주여, 당신이 원하시기만 하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당신이 거느리는 선생들의 메시지를 내가 들었고, 깨끗하게 될 수 있다면 나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싶나이다.” 그 문둥병자가 이렇게 말한 것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문둥병자는 회당에 가거나, 달리 대중 예배에 참석하는 것조차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문둥병을 치유받지 못하면 다가오는 하늘나라에서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정말로 믿었다. 그가 질병이 걸렸음을 보고, 꽉 매달리는 믿음의 말을 들었을 때, 예수의 사람 마음은 감동했고 신의 마음은 동정으로 움직였다. 예수가 바라보자, 그 사람은 엎드려서 경배하였다. 그러자 주는 손을 뻗어 그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내가 바라노니―깨끗하여라.” 그는 즉시 고침을 받았다. 문둥병이 이제 더 괴롭히지 않았다.
발 앞에 꿇어 엎드린 사람을 일으켰을 때, 예수는 당부했다: “아무에게도 네가 병 고침받은 것을 말하지 말고, 오히려 조용히 네 일을 보도록 처리하여라. 사제에게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증언으로 모세가 명한 희생물을 바치어라.” 그러나 이 사람은 예수가 지시한 대로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마을에 두루, 예수가 그의 문둥병을 고쳤다고 떠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온 마을에서 알려져 있으므로, 그가 병이 깨끗이 나았음을 사람들은 뻔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예수가 타이
른 대로 사제들에게 가지 않았다. 예수가 병을 고쳐 주었다는 소식을 그가 널리 퍼뜨린 결과로서, 주는 병자들에게 너무나 둘러싸였고, 그래서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마을에 들어가지 않았어도, 예수는 광산 가까운 교외에서 이틀 동안 남아 있었고, 하늘나라 복음에 관하여 믿는 광부들에게 계속하여 더 가르쳤다.
문둥병자를 이렇게 고친 것은 이 때까지 예수가 마음먹고 계획하여 행한, 이른바 첫 기적이었다. 이것은 진짜 문둥병의 경우였다.
이론으로부터 기스칼라로 가서 이틀 동안 복음을 선포하며 지냈고, 다음에 코라진을 향하여 떠났는데, 거기서 좋은 소식을 전도하면서 거의 한 주를 보냈다. 그러나 코라진에서는 하늘나라로 신자를 많이 얻을 수 없었다. 예수가 가르친 어느 곳에서도, 메시지를 그렇게 일반적으로 물리치는 일에 부닥친 적이 없었다. 코라진에서 머문 것은 대부분의 사도들에게 아주 침울했고, 안드레와 아브너는 동료들의 용기를 지탱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가버나움을 조용히 지나치면서, 줄곧 마돈 마을로 갔는데, 거기서 운이 조금도 낫지 않았다. 아주 최근에 방문한 이 여러 마을에서 성공하지 못한 것은, 가르치고 전도하면서 예수가 병 고치는 자라는 언급을 삼가라고 예수가 고집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대부분 사도들의 머리 속에 자리잡았다. 예수가 또 다른 문둥병자를 고치든지, 아니면 어떤 다른 방법으로 권능을 드러내서 사람들의 눈을 끌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그러나 주는 그들이 열심히 재촉하는 데 꼼짝하지 않았다.
5. 가나로 돌아와서
“내일 우리는 가나로 가리라” 예수가 발표했을 때, 사도 일행은 크게 기운이 났다. 가나에서 공감하는 청중(聽衆)을 가지리라는 것을 알았으니, 예수가 거기에서 아주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데려오는 일을 잘 해 나가고 있었는데, 사흘째에 가버나움의 어떤 특출한 시민, 타이투스가 가나에 도착했다. 그는 얼마큼 믿는 사람이었고, 그 아들이 위독했다. 예수가 가나에 계시다는 말을 들었고, 그래서 서둘러 예수를 만나러 갔다. 가버나움에 있는 신자들은 예수가 어떤 병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나에서 예수를 찾아냈을 때, 이 귀인(貴人)은 예수에게 가버나움으로 서둘러 가서 앓는 아들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다. 사도들이 숨을 죽이고 기대하며 서 있는 동안, 예수는 아픈 소년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너희를 얼마나 오래 참으랴? 하나님의 권능이 너희 사이에 있거늘 너희가 징조(徵兆)를 보고 이적을 구경하지 않으면, 믿으려 하지 않는도다.” 그러나 그 귀인은 예수에게 간청하며 말했다: “내 주여, 나는 믿나이다. 그러나 내 아이가 죽기 전에 오소서. 내가 떠날 때도 그가 죽을 지경에 있었던 까닭이나이다.” 예수가 머리를 한 순간 숙이고 명상에 잠겼다가 갑자기 말했다: “네 집으로 돌아가라, 네 아들이 살리라.” 타이투스는 예수의 말씀을 믿었고, 가버나움으로 서둘러 갔다. 돌아가는 동안에, 종들이 만나려고 나와서 말했다: “기뻐하소서, 당신의 아들이 낫고 있음이니이다―그가 살았나이다.” 그러자 타이투스는 어느 시간에 그 소년이 낫기 시작했는가 물었고, “어제 오후 1시쯤에 아이가 열이 내렸더이다” 종들이 대답했을 때, 그 때가 “네 아들이 살리라”하고 예수가 말씀하신 그 시간쯤이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타이투스는 이 때부터 마음을 다하여 믿었고, 또한 온 집안이 믿었다. 이 아들은 하늘나라의 힘찬 봉사자가 되었고, 나중에 로마에서 고통받은 자들과 함께 목숨을 바쳤다. 타이투스의 집안 전체와 그 친구들, 그리고 사도들까지 이 에피소드를 기적이라고 여겼어도,
기적은 아니었다. 적어도 육체의 병을 고치는 기적은 아니었다. 다만 자연 법칙의 과정에 관하여 선견(先見)을 가진 사례(事例)였을 뿐이고, 세례 받은 뒤에 예수가 자주 이용한 것과 같은 그런 지식이었다.
이 마을에서 베푼 봉사에 뒤따라 이런 종류의 둘째 사건으로 지나치게 눈을 끌었기 때문에, 예수는 다시 가나로부터 서둘러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물과 포도주를 기억하였고, 아주 먼 거리에서 귀인의 아들을 고쳤다고 생각되었으니까, 사람들은 병자와 고통받는 자들만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고생하는 자들을 먼 거리에서 고치라고 요청하는 사자들을 보냈다. 온 시골이 떠들썩함을 보자, 예수는 말했다, “나인으로 가자.”
6. 나인과 과부의 아들
이 사람들은 징조(徵兆)를 믿었고, 이적을 구하는 세대였다. 이 때가 되어서 갈릴리 중부 및 남부의 사람들은 예수와 개인적 봉사를 베푸신 것에 관하여 기적에 정신이 쏠려 있었다. 순전한 신경(神經) 질환으로 고생하고 감정의 장애로 고통받는 몇십, 몇백의 정직한 사람들이 예수 앞으로 왔고, 그리고 나서 친구들한테 예수가 그들을 고쳤다고 외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무지하고 생각이 단순한 이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치유된 그런 사례를 육체적 치유, 기적의 고침으로 여겼다.
예수가 가나를 떠나서 나인으로 가려 했을 때, 큰 무리의 신자들과 호기심 있는 많은 사람이 따랐다. 기적과 이적을 구경하려고 단단히 별렀고, 실망하지 않게 되어 있었다. 예수와 사도들이 도시의 대문 가까이 다가가자, 근처의 공동 묘지로 가는 장례 행렬을 만났는데, 나인에서 과부가 된 어머니의 외아들을 나르고 있었다. 이 여인은 많이 존경받는 사람이었고, 마을의 절반이 죽었다고 생각된 이 소년의 관(棺)을 나르는 자들을 따라갔다. 장례 행렬이 예수와 추종자들에게 다가왔을 때, 과부와 그 친구들은 주를 알아보고, 아들을 살려 달라고 간청했다. 기적을 바라는 기대가 얼마나 높이 솟았는지, 예수가 어떤 인간의 병도 고칠 수 있고, 그런 치유자가 죽은 자를 살리기까지 할 수 없는가 생각했다. 이렇게 성가시게 졸라대는 것을 들으면서, 예수는 앞으로 나서서, 관의 뚜껑을 열고, 소년을 들여다보았다. 젊은이가 정말로 죽지 않았음을 발견하고, 그가 그 자리에 계신 것이 비극을 막을 수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 어머니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울지 말라. 네 아들이 죽지 않았고 잠자느니라. 네 품에 그를 돌려 받으리라.” 다음에 소년의 손을 잡고 말했다, “깨어서 일어나라.” 죽었다고 생각된 소년이 당장에 일어나 앉아서 말하기 시작했고, 예수는 그들을 집으로 보냈다.
예수는 군중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고, 아이가 정말로 죽지 않았다, 자기가 그를 무덤에서 살려보낸 것이 아니라 설명하려고 헛되이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따라오던 군중, 또 나인 마을 전체가, 열광의 극치(極致)에 이르기까지 자극받았다. 두려움이 많은 사람을 휩쓸었고 더러는 공포에 사로잡혔으며, 더러는 털썩 주저앉아 기도하고 그들의 죄 때문에 슬피 울었다. 밤이 다가오고 오래 지나서야 시끄럽던 군중이 흩어질 수 있었다. 물론, 소년이 죽지 않았다고 예수가 말했는데도, 사람마다 기적이 일어났다, 죽은 자조차 살렸다고 주장하였다. 소년이 다만 깊이 잠들어 있었다고 예수가 일렀어도, 그들은 그것이 예수의 말버릇이라고 설명했고, 예수가 언제나 아주 겸손하게 기적들을 감추려 하였다는 사실에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갈릴리에 두루, 또 유대까지, 예수가 과부의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렸다는 말이 퍼졌고, 이 보고를 들은 많은 사람이 믿었다. 예수가 과부의 아들에게 깨어서 일어나라고 명했을 때, 소년이 정말로 죽지 않았다는 것을 예수는 모든 사도에게도 결코 충분히 납득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누가의 기록을 제쳐 놓고, 후일의 모든 기록에 들어가지 않을 만큼 예수는 충분히 강조했다. 누가는 이 에피소드를 전해 받은 그대로 이야기를 기록했다. 또 다시 예수는 의사(醫師)로서 너무 사람들에게 에워싸여서, 이튿날 일찍 엔도르를 향하여 떠났다.
7. 엔도르에서
엔도르에서 예수는 육체의 병 고침을 얻으려고 아우성치는 군중으로부터 며칠 동안 피하였다. 이곳에서 머무르는 동안, 예수는 사도들을 가르치려고 사울 임금과 엔도르의 마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죽은 자의 영이라고 생각된 것을 때때로 흉내내던, 그릇된 길에 빠지고 모반한 중도자들이 곧 통제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이상한 짓을 계속할 수 없으리라고 예수는 사도들에게 알기 쉽게 일러 주었다.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간 뒤에, 두 분이 영들을 모든 육체에게 퍼부어 준 뒤에, 그러한 준영(準靈) 존재―이른바 더러운 귀신―들이 사람들 중에 무르고 악한 정신을 가진 자들에게 더 들어갈 수 없으리라고 일러 주었다.
예수는 더 나아가서, 떠난 인간들의 영은 살아 있는 친구들과 교통하려고 기원이 있던 세계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사도들에게 더 설명했다. 오직 한 섭리 시대가 지난 뒤에야 필사 인간의 진급하는 영이, 그것도 특별한 경우에, 그 혹성의 영적 행정의 일부로서, 땅으로 돌아오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틀 동안 쉬고 나자, 예수는 사도들에게 말했다: “시골이 조용해지는 동안, 내일 아침에 가버나움으로 돌아가서 머무르고 가르치자. 집에서 이 때가 되어서는 사람들이 이 종류의 흥분으로부터 얼마큼 회복되었으리라.”
제 147 편
막간의 예루살렘 방문
예수와 사도들은 3월 17일, 수요일에 가버나움에 이르렀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떠나기 전에 벳세다 본부에서 2주를 보냈다. 이 2주 동안 사도들은 바닷가에서 사람들을 가르쳤고, 한편 예수는 산에서 혼자 아버지의 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기간에, 야고보와 요한 세베대를 동반하고 예수는 두 차례 티베리아스로 몰래 여행했는데, 거기서 신자들을 만나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가르쳤다.
헤롯 집안의 여러 사람이 예수를 믿었고, 이 모임에 참석했다. 헤롯의 정식 가족 가운데서 이 신자(信者)들의 영향이 예수에 대한 통치자의 적대감을 줄이도록 도왔다. 티베리아스에 있는 이 신자들은 예수가 선포한 그 “나라”는 영적 성질을 가졌고 정치적 모험이 아니라고 충분히 헤롯에게 설명했다. 헤롯은 자기 집안에 있는 이 사람들을 오히려 믿었고, 따라서 예수의 가르침과 병 고침에 관한 여러 보고가 널리 퍼지는 것에 지나치게 놀라지 않았다. 예수가 병 고치는 자나 종교 선생으로서 일하는 것에 아무런 반대가 없었다. 헤롯의 많은 조언자, 헤롯 자신조차 호의적 태도를 가졌는데도, 한 무리의 부하들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매우 영향을 받아서 예수와 사도들에게 모질고 위협적인 적으로 남았고, 후일에 대중 활동을 많이 방해했다. 예수에게 가장 큰 위험은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었고 헤롯에게 있지 않았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와 사도들은 예루살렘과 유대보다, 갈릴리에서 무척 많은 시간을 보내고 대중 전도의 대부분을 수행하였다.
1. 백부장의 종
유월절 축제를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려고 준비하기 전날, 가버나움에 주둔하던 로마 수비대의 백부장(百夫長), 즉 지휘관 망구스가 회당장들에게 가서 말했다: “나의 충실한 전령이 아프고 죽을 지경에 있나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나를 대변하여 예수에게 가서 내 종을 고쳐달라고 부탁드리겠나이까?” 로마인 지휘관이 이렇게 한 것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에게 더 영향력이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장로들이 예수를 만나러 갔고, 그 대변자가 말했다: “선생이여, 당신이 가버나움으로 가서 로마인 백부장이 아끼는 종을 구해 주시기를 진지하게 부탁드리나이다. 당신이 눈여겨볼 자격이 있는 것은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당신이 회당에서 여러 번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 회당을 우리에게 지어주기까지 하였음이니이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예수가 말했다: “내가 너희와 함께 가겠노라.” 그들과 함께 백부장의 집으로 갔고, 그 집 뜰로 들어가기 전에, 로마 군인은 예수를 맞이하러 친구들을 보내서, “주여, 내 집으로 들어오려고 수고하지 마소서, 당신이 내 지붕
밑으로 들어오실 만큼 자격이 없음이니이다. 당신에게 가도록 자격이 있다 생각지도 않나이다. 그러므로 당신 민족의 장로들을 보냈나이다. 그러나 당신이 서신 자리에서 말씀할 수 있고, 그러면 내 종이 나을 것을 아나이다. 이는 내가 다른 사람의 명령 밑에 있고, 내 아래에 군인들이 있으며,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다른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오며, 내 종들에게 이리 하라, 저리 하라 하면 저희가 그대로 하나이다.”
예수가 이 말을 들었을 때, 돌이켜 사도들, 또 함께 있는 자들에게 말했다: “그 이방인(異邦人)의 믿음이 놀랍도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그렇게 큰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아니라, 이스라엘에서는 아니라.” 돌아서면서 예수는 말했다. “여기서부터 가자.” 백부장의 친구들이 그 집으로 들어가서 예수가 말씀한 것을 망구스에게 일렀다. 그 시간부터 그 종은 낫기 시작했고, 결국은 정상 건강과 쓸모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이 경우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결코 몰랐다. 단지 이것이 기록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백부장의 종에게 병을 고쳐 주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예수를 동반했던 자들에게 드러나지 않았다. 우리는 오직 그 종이 완전히 회복했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 뿐이다.
2.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다
3월 30일, 화요일 아침 일찍, 예수와 사도 일행은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났고, 요단 강 유역의 길로 갔다. 4월 2일 금요일 오후에 도착했고, 여느 때처럼 베다니에서 본부를 차렸다. 예리고를 통과하면서 쉬려고 멈추었는데, 그 동안에 유다는 가족의 한 친구가 경영하는 은행에 공동 기금(基金)의 얼마를 저축했다. 이 때 처음으로 유다는 여분의 돈을 지녔고, 이 저축은 예수가 재판받고 죽기 바로 전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마지막 중대한 여행에서, 예리고를 다시 지날 때까지 다치지 않고 두었다.
그 일행에게 예루살렘까지 아무 일이 닥치지 않았지만, 베다니에서 자리를 잡자마자, 가까이서 멀리서, 육체의 병을 고치고 시달린 정신에 위로를 얻고 혼이 구원받기를 찾는 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너무 모여서 예수는 쉴 겨를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겟세마네에서 텐트를 치고, 항상 그에게 몰려드는 군중을 피하려고, 주는 베다니로부터 겟세마네까지 오가곤 하였다. 사도의 일행은 예루살렘에서 거의 3주 동안 지냈지만, 예수는 아무런 대중 전도를 하지 말고, 오직 개인적으로 가르치고 개인을 상대로 일하라고 타일렀다.
베다니에서 조용히 유월절을 축하하였다. 이 때 처음으로 예수와 열두 사도 모두가 피 없는 유월절 잔치를 함께 먹었다. 요한의 사도들은 예수와 그의 사도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같이 먹지 않았다. 그들은 아브너, 또 요한의 설교를 초기에 믿은 여러 사람과 함께, 축제를 보냈다. 이것은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함께 두 번째로 지킨 유월절이었다.
예수와 열두 사도가 가버나움을 향하여 떠났을 때, 요한의 사도들은 함께 돌아오지 않았다. 아브너의 지휘 밑에서 예루살렘과 그 주위의 시골에 남아서, 하늘나라를 널리 펴려고 조용히 수고했고, 그 동안에 예수와 열두 사도는 갈릴리에서 일하려고 돌아갔다. 전도사 70인을 임명하고 내보내기 얼마 전까지, 스물네 사람 모두가 다시 함께 모이지 않았다. 그러나 두 집단은 협동했고, 의견을 달리 했는데도, 가장 좋은 감정을 서로 유지했다.
3. 벳세다 물웅덩이에서
예루살렘에서 둘째 안식일 오후에, 주와 사도들이 성전 예배에 참석하려 할 때 요한이 예수에게 말했다. “나와 함께 오소서. 당신에게 무엇인가 보여드리고자 하나이다.” 요한은 예루살렘의 한 성문을 거쳐서 밖으로, 벳세다라고 부르는 물 웅덩이로 안내했다. 이 웅덩이 둘레에는 다섯 현관으로 된 구조가 있고, 그 밑에 병을 고치려고 큰 무리의 병자들이 얼씬거렸다. 이것은 온천이었고 붉은 빛이 도는 물이 웅덩이 밑, 바위 동굴에서 가스가 모이기 때문에 불규칙한 간격을 두고 끓어올랐다. 따듯한 물이 정기적으로 이렇게 끓어오르는 것을 많은 사람이 초자연의 영향 때문이라 믿었고, 그렇게 부글거린 뒤에 그 물에 처음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을 가졌든지 고침을 받으리라는 믿음이 유행하였다.
사도들은 예수가 부과한 제한(制限) 밑에서 얼마큼 들떠 있었고, 열둘 가운데 가장 어린 요한은 이 조건 밑에서 특별히 차분하지 못하였다. 모여든 병자들의 광경이 주의 동정심에 크게 호소해서 병 고치는 기적을 행하도록 마음이 움직이리라, 그로서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라고 당장에 하늘나라 복음을 믿도록 설득되리라 생각하면서 예수를 웅덩이로 모시고 왔다. 요한이 예수에게 말했다: “주여, 이 고통받는 자들을 다 보소서, 우리가 저희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요한아, 내가 택한 길로부터 돌이키라고 어찌하여 나를 유혹하느냐? 영원한 진리의 복음을 선포하는 대신에 이적을 행하고 병자를 고치기를 어찌하여 네가 계속 바라느냐? 이 사람아, 네가 원하는 것을 내가 하지 않을까 싶지만, 이 병자와 고통받는 자들에게 힘을 주고 영원히 위로하는 말을 하도록 저희를 함께 모으라.”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는 말했다: “오랫동안 그릇되게 살았기 때문에, 너희 가운데 다수가 아프고 병들어 여기에 왔느니라. 더러는 뜻밖의 사고로, 더러는 조상이 잘못한 결과로 고생하며, 한편 더러는 현세에 존재하는 불완전한 조건의 장애 밑에서 허덕이느니라. 그러나 땅에서 너희 상태를 개선하려고, 하지만 특히 영원한 신분을 보장하려고 내 아버지가 일하시며, 나도 일하려 하노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어떻게 뜻하시는가 발견하지 않으면, 우리 중에 아무도 생활의 곤경(困境)을 바꾸려고 많이 일할 수 없느니라. 결국 우리는 모두 영원자의 뜻을 행하도록 은혜를 입었도다. 육체의 질병을 다 고침받을 수 있다면, 너희가 정말로 놀라리라. 그러나 모든 영적 병이 깨끗해지고, 모든 도덕적 허약을 고침받는 것이 더욱 큰 일이라. 너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요,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라. 시간의 쇠사슬은 너희를 괴롭히는 듯하나, 영원의 하나님은 너희를 사랑하시니라. 심판의 때가 다가올 때, 두려워 말라, 너희 모두가 응보 뿐 아니라, 넘치는 자비를 발견할지니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나라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이 가르침을 믿는 자는 영생(永生)을 받느니라. 그러한 신자들은 이미 심판과 죽음으로부터 빛과 생명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느니라. 무덤에 있는 사람들조차 부활의 목소리를 들을 때가 다가오는도다.”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의 복음을 믿었다. 병든 자들 가운데 더러는 무척 감명을 받고 영적으로 다시 생기를 얻어서, 육체의 병을 고침받았다고 선포하며 다녔다.
혼란한 정신 질환 때문에 수년간 풀이 죽고 심하게 앓던 어느 사람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고, 그 날이 안식일인데도 제 자리를 들고 집으로 가 버렸다.
고통받던 이 남자는 누군가가 그를 도와 주기를 여태까지 기다렸다. 자신의 무력한 느낌에 희생자였기 때문에, 결코 한 번도 자신을 도울 생각을 품은 적이 없었고,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해야했던 유일한 것―자리를 들고 걷는 것―임이 드러났다.
다음에 예수는 요한에게 말했다: “대사제(大司祭)와 서기관들이 들이닥쳐 이 병자들에게 우리가 생명의 말씀을 들려 준 것에 성내기 전에 떠나자.” 친구들과 합치려고 성전으로 돌아갔고, 당장에 모두 베다니에서 밤을 지내려고 떠났다. 그러나 요한은 다른 사도들에게 이 안식일 오후에 벳세다의 웅덩이까지 자신과 예수가 이렇게 방문한 것을 결코 일러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