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기도와 예배에 대한 가르침
게리짐 산에서 저녁 회의가 있을 때, 예수는 큰 진리를 많이 가르쳤고, 특히 다음을 강조했다:
참된 종교는 창조자와 자의식하는 관계에서 개별 혼이 하는 행위이다. 조직된 종교는 사람이 개별 신자들의 예배를 사회화하려는 시도이다.
예배―영적인 숙고―는 봉사, 즉 물질적 실체와 접촉하는 일과 번갈아 있어야 한다. 일은 놀이와 교체되어야 하며, 종교는 유머로 균형을 얻어야 한다. 깊은 철학은 리듬 있는 시(詩)로 긴장을 풀어야 한다. 생활의 긴장―인격이 시간 속에 받는 긴장―은 예배가 주는 휴식으로 해소해야 한다. 우주에서 인격이 고립되는 두려움에서 생기는 불안한 느낌은 아버지를 믿고 숙고함으로, 또 최상위를 깨달으려고 애씀으로 그 해독을 풀어야 한다.
기도는 사람에게 생각을 적게 하게 만들지만, 깨우침을 더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기도는 지식을 늘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통찰력을 키우도록 고안되어 있다.
예배는 앞으로 개선된 생활을 기대하고, 다음에 이 새로운 영적 의미를 지금 있는 생활로 돌이켜 반영하려고 뜻하는 것이다. 기도는 영적 자양분을 주지만, 예배는 신성하게 창조하는 성질이 있다.
예배는 여러 사람에게 봉사하는 영감을 얻으려고 하나를 바라보는 기술이다. 예배는 혼이 물질 우주로부터 떨어져 있는 범위, 또 혼이 동시에 모든 창조의 영적 실체들에 안전히 붙어 있는 범위를 재는 척도이다.
기도는 자아를 상기시킨다―숭고한 사고(思考)이다. 예배는 자아를 잊는 것이다―초월 사고이다. 예배는 힘 안드는 집중이요, 혼이 참되게 이상적으로 쉬는 것, 일종의 편안한 영적 노력이다.
예배는 한 부분이 전체와, 유한자가 무한자와, 아들이 아버지와 일체가 되는 행위요, 시간이 영원과 발걸음을 맞추는 행위이다. 예배는 아들이 신성한 아버지와 몸소 친교하는 행위요, 인간의 혼이 신선하고 창조적인 태도, 친근하고 열렬한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사도들은 야영지에서 그의 가르침 가운데 몇 가지만 깨달았어도 다른 세상들은 그 가르침을 깨달았고, 땅에서 다른 세대들도 그럴 것이다.
제 144 편
길보아와 데카폴리스에서
9월과 10월은 길보아 산의 비탈에 자리잡은 한적한 캠프에서 은둔한 가운데 보냈다. 9월 한 달을 예수는 여기서 사도들하고만 지냈고, 하늘나라의 진리를 가르치고 교육했다.
사마리아와 데카폴리스의 경계에서 이 때 예수와 사도들이 은둔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무척 반감(反感)을 가지고 있었다. 헤롯 안티파스는 아직도 요한을 감옥에 가두어 놓고, 석방하거나 처형하기를 두려워했고, 한편 요한과 예수가 어떤 면에서 관련되었다는 의심을 품었다. 이러한 조건 때문에 유대나 갈릴리에서 적극적 활동을 계획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았다. 셋째 이유가 있었는데,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사도들, 이 두 집단의 지도자들 사이에 서서히 긴장(緊張)이 고조되고 있었고, 이것은 신자들의 무리가 늘어나면서 악화되었다.
예수는 가르치고 전도하는 예비 작업 시절이 거의 끝났으며, 다음 움직임은 땅에서 일생에 심혈을 기울인 마지막 노력의 시작과 관련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 사업의 시작이 어떤 면에서도 세례자 요한을 시련을 주거나 난처하게 만들지 않기를 바랐다. 따라서 예수는 사도들을 연습시키면서 은둔하여 얼마 동안 시간을 보내고, 다음에 요한이 집행되든지, 아니면 석방되어서 연합된 노력에 합세할 때까지, 데카폴리스의 여러 도시에서 조용한 일을 얼마큼 하기로 결심하였다.
1. 길보아에서 야영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열두 사도는 예수에게 더욱 헌신하고, 하늘나라 일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그들의 헌신은 대체로 개인적 충성의 문제였다. 그들은 다면적인 가르침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의 성품이나, 땅에서 그 수여의 중요성을 넉넉히 이해하지 못했다.
세 가지 이유로 은둔하고 있다고 예수는 사도들에게 분명히 설명했다:
1. 하늘나라의 복음을 그들이 이해하고 믿는 것을 확인하려고.
2. 유대와 갈릴리에서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한 반대가 가라앉게 하려고.
3. 세례자 요한의 운명을 기다리려고.
길보아 산에서 머무르면서, 예수는 그의 초기 생활과 헤르몬 산에서 겪은 체험에 대하여 많은 것을 열두 사도에게 일러 주었다. 또한 세례를 받은 바로 뒤 40일 동안에 산에서 일어난 것에 관하여 얼마큼을 또한 밝혔다. 그가 아버지한테로 돌아
가기까지 이 여러 체험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직접 당부했다.
그들은 이 9월 몇 주 동안 쉬었고, 예수가 봉사로 처음 부른 뒤에 겪은 체험을 이야기하고 되새겼으며, 주가 이 때까지 가르친 것을 조정하려는 진지한 노력에 몰두했다. 어느 정도 모두가 이것이 길게 쉬는 마지막 기회일 것이라 느꼈다. 유대나 갈릴리에서 다음에 대중에게 쏟을 노력은 다가오는 나라의 마지막 선포가 시작됨을 표시하리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하늘나라가 다가왔을 때 그것이 무엇일까에 대하여 거의 또는 아무런 정해진 관념(觀念)이 없었다. 요한과 안드레는 하늘나라가 이미 왔다고 생각했고, 베드로와 야고보는 하늘나라가 아직도 오지 않았다고 믿었다. 나다니엘과 토마스는 영문을 모른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마태와 빌립과 열심당원 시몬은 확실치 않았고 갈피를 잡지 못했다. 쌍둥이는 다행히도 그 논쟁을 눈치채지 못했고, 가룟 유다는 말이 없고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이 때에 예수는 야영지 가까이, 산에서 혼자 지내는 일이 많았다. 때때로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을 데리고 갔지만, 기도하거나 혼자서 교통하느라고 훌쩍 떠나는 일이 더 흔했다. 예수가 세례 받고 페레아 산에서 40일 보낸 뒤에, 아버지와 이 때 교통한 시간을 기도라고 하기는 도저히 적당하지 않으며, 예수가 예배했다고 말하는 것도 조리가 없지만, 이 기간을 아버지와 개인적으로 교통한 시간이라 하는 것이 아주 정확하다.
9월 한달 내내 토론의 중심 주제는 기도와 예배였다. 며칠 동안 예배에 대하여 논의한 뒤에, “주여,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하는가 가르쳐 주소서”하고 토마스가 요청한 데 답하여, 예수는 마침내 기억에 남을 말씀을 하였다.
요한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는데, 다가오는 나라에서 구원을 얻기 위한 기도였다.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요한의 기도 형식을 쓰지 말라고 금하지 않았지만, 판에 박힌 형식의 기도문을 외우는 관습을 충분히 승인하지 않음을 사도들은 아주 일찍 알아차렸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어떻게 기도하는가 가르쳐 달라고 항상 요청하였다. 열두 사도는 예수가 어떤 형태의 간구를 승인할 것인가 몹시 알고 싶어했다. 주로, 서민들을 위하여 어떤 간단한 기도가 이렇게 필요했기 때문에, 예수는 이 때 토마스의 요청에 답하여, 제시하는 형태의 기도를 가르치겠다고 찬성하였다. 길보아 산에서 머무르던 셋째 주, 어느 날 오후에 예수는 이 교훈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