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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과 휴식

뉴징검다리 2010. 2. 10. 06:49

3. 오락과 휴식

이 무렵에 크게 신경이 곤두서고 감정이 팽팽해진 상태가 사도들과 그 직계 제자 동료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함께 살고 일하는 데 도저히 익숙하다 할 수 없었다. 요한의 제자들과 순탄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골칫거리가 늘어나고 있었다. 이방인과 사마리아인들과 접촉하는 것은 이 유대인들에게 큰 시련이었다. 이 모든 것 외에도, 예수가 요즘에 하신 말씀은 정신 상태를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안드레는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까 몰랐고, 그래서 문제와 답답한 것들을 가지고 주에게 갔다. 사도의 우두머리가 걱정거리를 설명하는 것을 듣고 나서 예수는 말했다: “안드레야, 사람들이 그렇게 몰두한 단계에 이를 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격한 감정을 가지고 관여할 때, 그 곤경에서 사람들을 구할 수 없느니라. 네 요청을 들어 줄 수 없노라―나는 개인의 사회적 문제에 끼어 들지 아니하리라―그러나 사흘 동안 쉬고 긴장을 풀려고 너희와 함께 즐기리라. 너희 형제들에게 가서, 모두가 나와 함께 사르타바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알리라, 거기서 내가 하루나 이틀 동안 쉬고 싶노라.

“이제 열한 형제 각자에게 가서, 개인적으로 이렇게 말해야 하느니라: ‘주가 한동안 쉬고 긴장을 풀려고, 따로 우리가 함께 가기를 바라시느니라. 우리 모두가 정신적으로 많이 시달리고 정신의 긴장을 요즈음에 겪었으니, 이 휴일 동안에 우리의 시련과 곤경에 대하여 입을 열지 말라고 내가 제안하노라. 이 문제에서 네가 협조

할 것을 내가 기대할 수 있느냐?’ 이 방법으로 형제 각자에게 사사롭게 직접 접근하여라.” 안드레는 지시받은 대로 하였다.

이것은 각자의 체험에서 놀라운 기회였고, 그들은 산에 올라갔던 그날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 여행 동안 내내, 그들의 문제에 대하여 거의 한 마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산 꼭대기에 다다르자, 예수는 주위에 그들을 앉히면서 말했다: “내 형제여, 너희는 모두 휴식의 가치와 긴장 해소의 효능을 배워야 하느니라. 어떤 얽힌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은 한동안 버려 두는 것임을 깨달아야 하느니라. 그리고 나서 너희가 휴식이나 예배를 마치고 새롭게 돌아갈 때, 더욱 굳은 각오는 말할 것도 없고, 더 맑은 정신과 더 미더운 손으로 너희 문제와 씨름할 수 있느니라. 게다가, 정신과 육체가 쉬는 동안, 문제의 크기와 비중(比重)이 줄어든 것이 누차 발견되느니라.”

이튿날 예수는 열두 사도에게 각가 토론할 주제를 나누어 주었다. 그 날 전부가 회상하고 종교적인 일과 관계 없는 문제를 논하는 데 소비되었다. 한낮 점심으로 빵을 먹을 때, 예수가 감사를―입으로―드리는 것조차 소홀히 했을 때, 그들은 한 순간 충격을 받았다. 이 때에 주가 그런 형식을 소홀히 함을 처음 보았다.

산으로 올라갔을 때, 안드레의 머리는 문제들로 꽉 차 있었다. 요한은 마음 속에서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야고보의 혼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이방인들 사이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에, 마태는 기금이 모자라 가슴을 태우고 있었다. 베드로는 과로했고, 최근에는 여느 때보다 더 변덕을 부렸다. 유다는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과민과 이기심에 시달렸다. 시몬은 애국심과 형제 정신의 사랑을 절충하려는 노력으로 특별히 마음이 산란하였다. 빌립은 일이 되어 가는 형편 때문에 갈수록 어리둥절했다. 이방(異邦) 인구와 접촉한 뒤로 나다니엘은 유머가 줄어들었고, 토마스는 심한 우울증을 한창 겪고 있었다. 오직 쌍둥이가 정상이었고 동요되지 않았다. 요한의 제자들과 어떻게 평안히 어울리는가, 모두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사흘째에 산 밑으로, 야영지로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 그들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인간의 숱한 골칫거리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급박한 문제들은 과장된 두려움의 산물이요 불안이 확대되어 생긴 소산(所産)이라는 중요한 발견을 했다. 그러한 골칫거리는 모두 버려 두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훌쩍 떠나 버림으로 그런 문제들이 저절로 풀리도록 버려 두었다.

이 휴일을 마치고 돌아온 것은 요한의 추종자들과 관계가 크게 개선된 기간이 시작되었음을 표시한다. 생활의 일상적인 임무에서 떠나 사흘 동안 휴가를 보낸 결과로, 모든 사람의 정신 상태가 변화된 것을 눈치채고, 그들에게 생겼던 신경 과민에서 벗어나는 것을 관찰했을 때, 다수가 정말로 즐거움에 빠졌다. 인간의 접촉에서 단조움은 골칫거리를 크게 불리고 문제를 확대할 위험이 언제나 있다.

그리스인 도시, 아켈라이스파사엘리스에서, 많지 않은 이방인이 복음을 믿었지만, 열두 사도는 순전히 이방인 인구와 처음으로 이렇게 널리 일하면서 값진 체험을 얻었다. 그 달 중순쯤, 어느 월요일 아침에, 예수안드레에게 말했다: “사마리아로 들어가자.” 야곱의 우물 가까이 있는 시카 시(市)를 향하여 당장에 길을 떠났다.

4.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6백 년이 넘도록 유대 지방의 유대인, 그리고 나중에는 갈릴리에 있는 유대인도, 사마리아인과 적대 관계에 있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이 싫은 감정은 이런 식으로 생겼다: 기원전 7백 년 무렵에, 아씨리아의 임금 사르곤팔레스타인 중부에서 일어난 폭동을 진압하면서,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유대인을 25만 명이 넘게 데려다가 포로로 만들었고, 그 자리에 거의 같은 수의 인·세파르브인·하마트인의 후손들을 정착하게 하였다. 나중에 아슈바니팔은 또 다른 여러 이민단을 사마리아에 거하라고 보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종교적 적대 관계는 바빌로니아 포로 생활로부터 유대인이 귀향할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때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의 재건을 방해하였다. 그들은 나중에 알렉산더의 군대를 친절히 도와 줌으로 유대인들의 기분을 건드렸다. 그 친절에 대한 보답으로 알렉산더사마리아인들이 게리짐 산에 성전 건축을 허락했는데, 거기서 야웨 및 부족 신들을 섬기고,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 순서를 비슷하게 좇아서 희생물을 바쳤다. 적어도 마카비의 시절까지 이 숭배를 계속했고, 그 때 요한 히르카누스게리짐 산에 있는 성전을 파괴했다. 예수가 돌아가신 뒤에, 사마리아인들을 위하여 수고하면서 사도 빌립은 이 옛 사마리아 성전 터에서 많은 모임을 가졌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적대 관계는 전통이 오래고 역사(歷史)가 깊다. 알렉산더 시절 이후로, 그들은 갈수록 더 서로 상관이 없었다. 열두 사도는 데카폴리스시리아그리스인 및 기타 이방 도시들에서 전도하기를 싫어하지 않았지만, “사마리아로 가자” 예수가 말했을 때, 그것은 주에게 바치는 충성심을 재는 어려운 시험이었다. 그러나 예수와 함께 했던 한 해 남짓한 동안에, 그들은 일종의 개인적 충성심을 길렀고, 이것은 그의 가르침을 믿는 신앙과 사마리아인에 대한 편견도 뛰어넘었다.

5. 시카의 여인

주와 열두 사도가 야곱의 우물에 다다랐을 때, 여행에 지쳤기 때문에 예수는 우물가에서 머물렀고, 그 동안에 빌립시카에서 먹을 것과 텐트 가져오는 것을 도우려고 사도들을 데리고 갔는데, 한동안 이 근처에서 머무를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세베대의 아들들은 예수와 함께 남아 있었을 터이지만, 예수는 형제들과 함께 가라고 부탁하며 말했다: “나를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 이 사마리아인들은 친절하리라. 오직 우리 형제인 유대인들이, 우리를 해치려 하느니라.” 예수가 우물가에서 사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앉았을 때는 이 여름 날 저녁, 거의 6시가 되었다.

야곱의 우물 물은 시카의 우물 물보다 광물(鑛物)이 적었고, 따라서 마실 물로 훨씬 높게 쳤다. 예수는 목이 말랐지만, 우물에서 물을 길을 방도(方道)가 없었다. 그래서 시카의 어느 여인이 물그릇을 가지고 와서 우물에서 물을 길으려고 준비했을 때, 예수는 말했다. “내게 물을 다오.” 이 사마리아 여인은 모습과 옷차림으로 예수유대인인 줄 알았고, 사투리로 보아 갈릴리 유대인이라 짐작했다. 그 여자의 이름은 날다였고, 잘생긴 인물이었다. 유대인 남자가 이렇게 우물가에서 말을 걸고 물을 달라 하는 것에 많이 놀랐는데, 자존심 있는 남자가 버젓이 여자에게 말

거는 것, 더군다나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이야기하는 것을 그 시절에 괜찮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다예수께 물었다: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마실 물을 달라 하시니 어인 일이니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내가 정말로 너에게 마실 물을 달라 하였으나, 네가 알 수만 있다면, 생명의 물 한 모금을 달라 내게 청하리라.” 그러자 날다가 말했다: “하지만 주여, 당신은 물을 길을 그릇이 없고, 그 우물은 깊나이다. 그러니 어디에 이 생명(生命)의 물을 가지셨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보다 당신은 더 위대하시나이까? 그는 우리에게 이 우물을 주었고 자기와 아들들과 가축도 거기서 마셨나이다.”

예수는 대답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목이 다시 마르려니와 살아 있는 영(靈)의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 생명의 물은 그 사람 속에서, 바로 영생(永生)에 이르기까지 솟아오르는 시원한 샘물이 되리라.” 그러자 날다가 말했다. “내게 이 물을 주시사 나로 하여금 목마르지도 않고 물 길으러 여기까지 멀리 오지도 않게 하소서. 게다가 사마리아 여인이 그런 훌륭한 유대인에게 받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기쁨이 되리이다.”

날다예수가 기꺼이 자기와 이야기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 여자는 주의 얼굴에서 올바르고 거룩한 사람의 빛을 보았지만, 친절을 보통 친숙함으로 잘못 생각했고, 그 비유를 자기에게 추파(秋波)를 던지는 방법으로 잘못 해석했다. 품행이 단정치 않은 여인이었으니까, 드러내 놓고 희롱할 생각이 있었는데, 그 여자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예수는 명령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여, 가서 네 남편을 여기로 데려오라.” 이 명령은 날다가 정신을 차리게 했다. 주의 친절함을 그릇 판단했음을 깨달았고, 자기가 말투를 잘못 판단했음을 알아차렸다. 놀라서 자기가 특별한 사람 앞에 서 있음을 비로소 깨닫고, 머리 속에서 적당한 대답을 더듬으며, 크게 산만하여 말했다. “그러나 주여, 남편을 부를 수 없사오니, 남편이 없음이니이다.” 그러자 예수는 말했다: “네가 진실을 말하였으니, 네가 한때는 남편이 있었는가 싶으나, 네가 이제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은 네 남편이 아님이라. 내 말을 가지고 장나하지 말고 내가 오늘 너에게 내민 생명의 물을 구하는 것이 더 좋으리라.”

이 때가 되어서 날다는 정신이 퍼뜩 들었고, 선한 자아(自我)가 깨어났다. 전적으로 선택해서 부도덕한 여자는 아니었다. 남편에게 무자비하게 부당하게 버림받고, 막다른 골목에서 어떤 그리스인의 아내로서, 하지만 결혼도 하지 않고 같이 살기로 동의했다. 날다는 이제 예수에게 생각 없이 말한 것을 크게 부끄럽게 느꼈고, 몹시 뉘우치는 마음으로 주를 향하여 말했다: “내 주여, 당신께 버릇없이 말씀드린 것을 뉘우치오니, 당신은 거룩한 사람이든지, 아마도 선지자인 것을 깨닫기 때문이나이다.” 주께 바로 개인적인 도움을 막 구하려고 할 때, 그 여자는 허다한 사람이 그 전에도 그 후에도 한 일을 했다―신학과 철학 토론에 주의를 돌림으로 개인이 구원받는 문제를 피한 것이다. 재빨리 자신의 필요로부터 신학(神學) 논쟁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게리짐 산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의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그래도 당신은 예루살렘이 사람들이 예배해야 할 곳이라고 말씀하리이다. 그렇다면 어디가 하나님을 예배할 바른 장소이니이까?”

예수는 그 여자의 혼이 조물주와 직접 탐구하는 접촉을 피하려 애쓰는 것을 알아챘지만, 또한 더 좋은 생명의 길을 알려는 소망이 그 혼 속에 있음을 보았다. 결국, 날다의 가슴 속에 생명의 물을 바라는 참된 목마름이 있었다. 그래서 참을성 있게 다루며 말했다: “여자여, 네게 이르노니, 이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너희가 아버지를 예배하지 않을 날이 곧 다가오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하는 것을 지금 예배하니, 여러 이교도 신(神)들의 종교와 이방의 철학이 섞인 것이라. 유대인들은

적어도 누구를 예배하는지 알고, 예배를 한 분의 하나님, 야웨에 집중하여 모든 혼란을 없애 버렸느니라. 그러나 모든 진지한 예배자가 영으로, 진실로 아버지를 예배할 때가 곧 오리라―지금도 그런 때이라―내가 말할 때 나를 믿어야 하나니, 이는 바로 그러한 예배자들을 아버지가 찾으심이라. 하나님은 영이요, 그를 예배하는 자는 정신적으로, 진실하게 예배해야 하느니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또는 어디서 예배해야 하는가를 알아서가 아니라, 내가 너에게 지금도 내미는 이 생명의 물을 네 마음 속에 받아들임으로 너의 구원이 오느니라.”

그러나 날다는 땅에서 자기의 개인 생활과 하나님 앞에서 자기 혼의 지위에 관하여 거북한 질문을 논하기를 피하려고 다시 한 번 애썼다. 한 번 더 일반 종교적 질문을 택하고 말했다: “예, 주여, 요한교화자(敎化者)가 오시는 것에 대하여 전했는데, 그를 구원자라 부를 것이요, 그가 오실 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선언할 줄을 내가 아나이다”―날다의 말을 막으며, 예수는 놀라운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너에게 말하는 내가 그니라.”

이것은 예수가 땅에서 신의 성품과 아들임을 처음으로 바로, 분명하게, 감추지 않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것도 한 여자에게,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순간까지 남자들 눈에 의심스러운 인격을 가진 여자에게 선언하였다. 그러나 신의 눈은, 자신이 원해서 죄를 짓기보다 남이 그 여자에게 죄를 저질렀다고, 그 여자는 지금 성실하게, 마음을 다하여, 구원을 바라는 인간 혼이라고 보았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날다가 개선하고 더 고귀한 생활 방법을 찾으려는 진정한 개인 소망을 막 표현하려 했을 때, 마음 속의 진정한 소망을 말할 준비가 되었을 때, 열두 사도가 시카로 돌아왔고, 예수가 이 여자와 함께―이 사마리아 여자와, 그것도 혼자서―아주 친밀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에 들이닥쳤을 때,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랐다. 소모품을 재빨리 저장하고 옆으로 비켰고, 아무도 감히 잔소리를 하지 않았으며, 한편 예수날다에게 말했다: “여자여, 길을 가라. 하나님이 너를 용서하였느니라. 이제부터 너는 새로운 삶을 살리라. 생명의 물을 받았으니, 새로운 기쁨이 네 혼 속에서 솟아나겠고, 너는 최고자의 딸이 될지니라.” 그 여자는, 사도들이 싫어하는 눈치를 채고서,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도시로 달아났다.

도시로 들어가면서, 만난 모든 사람에게 외쳤다: “야곱의 우물로 가라, 빨리 가라, 왜냐하면 거기서 내가 일찍이 한 일을 모두 내게 일러 준 사람을 너희가 볼 것이기 때문이라. 이 사람이 교화자(敎化者)일 수 있느냐?” 해가 지기 전에, 큰 무리가 야곱의 우물에서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였다. 주는 생명의 물, 깃드는 영의 선물에 대하여 그들에게 더 말씀했다.

사도들은 예수가 여자, 그것도 의심스러운 인격을 가진 여자, 아니 부도덕한 여자하고도 기꺼이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서 받은 충격을 결코 떨쳐 버리지 못했다. 여자, 아니 소위 부도덕한 여자도, 하나님아버지로 택할 수 있는 혼을 가졌고, 이로서 하나님의 딸이요, 영생(永生)의 후보자가 된다는 것을 사도들에게 가르치기가 무척 어려웠다. 19세기가 지난 뒤에도 많은 사람이 주의 가르침을 붙들기를 꺼려하는 똑같은 태도를 보인다. 그리스도교조차 그리스도의 일생의 진리가 아니라, 그가 죽은 사실을 중심으로 끈질기게 쌓아 올렸다. 세상은 예수의 비극적이고 슬픈 죽음보다 행복하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그의 삶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날다는 이튿날 이 이야기를 전부 사도 요한에게 일러 주었지만, 그는 결코 다른 사도들에게 전부 밝히지 않았고, 예수는 열두 사도에게 자세한 말씀을 하지 않았다.

날다예수가 “내가 일찍이 행한 모든 것”을 자기에게 일러 주었다고 요한에게 말했다. 요한날다와 이 이야기를 예수께 여러 번 묻고 싶었지만,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예수는 그 여자에 관하여 오직 한 가지를 일렀지만, 눈을 들여다보고 그 여자를 다룬 태도는, 한 순간에 날다의 머리 속에 얼룩진 생활 전부를 파노라마처럼 다시 보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여자는 과거의 생활을 이렇게 자신이 드러낸 것을 모두 주의 눈길과 말씀과 연결하였다. 예수는 그 여자가 다섯 남편이 있다고 이르지 않았다. 그 여자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뒤에 다른 네 남자와 살았는데, 이것은 모든 과거와 함께, 예수하나님의 사람이었음을 깨달은 순간, 머리 속에 아주 선하게 살아났고, 그래서 예수가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정말로 자기에게 일러 주었다고 나중에 요한에게 되풀이하였다.

6. 사마리아의 부흥

날다시카에서 예수를 보라고 군중을 이끌어 낸 날 저녁에, 열두 사도는 먹을 것을 가지고 막 돌아왔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말고 예수에게 함께 드시라고 청했는데, 하루 종일 끼니를 걸러서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어둠이 곧 다가올 것을 알았고, 그래서 사람들을 돌려보내기 전에 말씀할 결심을 버리지 않았다. 군중에게 말씀하기 전에 예수에게 한 입 잡수시라고 안드레가 설득하려고 했을 때, 예수는 말했다 “나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고기가 있노라.” 이 말을 듣자 사도들끼리 말했다: “누군가 그에게 무슨 잡수실 것을 가져왔느냐? 도대체 그 여자가 예수께 마실 것 뿐 아니라 잡수실 것도 드렸을 수 있느냐?”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듣자, 사람들에게 말씀하기 전에, 예수는 옆으로 머리를 돌려 열둘에게 말했다: “나의 고기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이루는 것이라. 너희는 이제 더 추수할 때까지 시간이 어느 만큼 있다고 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사마리아 도시에서 이 사람들이 우리의 말씀을 들으려고 나오는 것을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판이 추수하도록 이미 희니라. 거두는 자는 삯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이 열매를 거두느니라. 그 결과로 씨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이는 ‘한 사람이 씨 뿌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하는 말씀이 여기서 참인 까닭이라.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곳에서 거두라고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 남들은 수고하였고, 너희는 그 수고를 막 시작하려 하느니라.”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전도를 언급한 것이다.

예수와 사도들은 시카로 들어가서, 게리짐 산에서 캠프를 세우기 전에 이틀 동안 전도했다. 시카에서 많은 주민이 복음을 믿고 세례 받기를 청했지만, 예수의 사도들은 아직 세례를 주지 않았다.

게리짐 산에서 야영하던 첫날 밤에 사도들은 야곱의 우물에서 그 여자에게 보인 태도 때문에 예수가 꾸짖으리라 기대했지만, 그 문제에 대하여 말이 없었다. 그 대신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중심인 실체들”에 관하여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그들에게 해 주었다. 어떤 종교에서도 가치가 균형을 잃도록 버려 두고, 인간의 신학에서 사실이 진리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버려 두기가 너무나 쉽다. 십자가(十字架)의 사실은 후일에 그리스도교의 핵심이 되었지만, 그것은 나사렛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종교의 핵심 진리가 아니다.

게리짐 산에서 예수의 가르침의 주제는, 그가 (예수가) 형제요 친구인 것 같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아버지인 친구로서 보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진리가 이 신성한 관계를 관찰한 것 중에 가장 큰 선언인 것처럼, 사랑은 세상에서―우주에서―가장 큰 관계라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예수 자신이 사마리아인들에게 아주 충만히 선언한 것은 안전하게 그렇게 할 수 있었고, 하늘나라 복음을 전도하려고 사마리아의 심장부로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예수와 열둘은 8월말까지 게리짐 산에서 야영했다. 여러 도시에서 낮에는 사마리아인들에게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하나님아버지임―을 전도하고, 밤에는 야영지에서 지냈다. 사마리아의 이 여러 도시에서 예수와 열두 사도가 한 일은 하늘나라를 위하여 많은 혼을 얻었고, 예수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뒤에, 예루살렘에서 신자들의 모진 박해로 말미암아 사도들이 땅 끝까지 흩어지고 난 뒤에, 이 지역에서 빌립의 놀라운 일을 위하여 길을 예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