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1 편
대중 전도의 시작
서기 27년 1월 19일, 그 주 첫째 날에, 예수와 열두 사도는 벳세다에 있는 본부를 떠나려고 준비했다. 4월에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려고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 요단 강 유역의 길로 여행할 생각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열두 사도는 주의 계획에 대하여 전혀 몰랐다. 사도들의 가족들과 다른 제자들이 잘 가라 인사하고, 바야흐로 시작하려는 새 사업에 성공을 빌려고 왔기 때문에, 한낮 가까이 되기까지, 세베대의 집을 벗어나지 못했다.
떠나기 바로 전에, 사도들은 주를 보지 못했고 안드레가 찾으러 나갔다. 잠깐 찾다가 안드레는 물가에서 예수가 배에 앉아 계시고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열둘은 주가 슬퍼하는 듯한 때를 자주 보았고, 짧은 동안 심각하게 어디에 몰두한 것을 보았지만, 아무도 주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안드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기 바로 전에 주가 이렇게 감동하신 것을 보고 얼마큼 놀랐고, 감히 다가가서 물었다: “이렇게 좋은 날에, 주여, 아버지의 나라를 선포하려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야 하는데, 눈물을 흘리시니 어인 일이니이까? 우리 가운데 누가 당신께 무례하였나이까?” 안드레와 함께 열둘과 합세하려고 가면서 예수는 대답했다. “너희 가운데 아무도 나를 슬프게 하지 않았느니라. 내가 슬퍼하는 것은, 내 아버지 요셉의 집안에서 아무도 기억해서 성공을 빌려고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 이 때 룻은 나사렛에 있는 오빠 요셉을 방문하고 있었다. 가족의 다른 사람들은 기분이 상한 결과로 자만심, 실망, 오해, 사소한 분개심에 빠져, 그를 멀리하였다.
1. 갈릴리를 떠나다
가버나움은 티베리아스에서 멀지 않았고, 예수의 명성(名聲)은 온 갈릴리에, 거기를 지나서 여러 군데에도 쫙 퍼지기 시작했다. 헤롯이 그가 하는 일을 곧 주목할 것을 예수는 알았다. 그래서 남쪽으로, 유대 땅으로 사도들과 함께 여행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1백 명이 넘는 신자들 일행이 함께 가고 싶어했지만, 예수는 그들에게 말씀하며, 요단 강으로 내려가는 길에 사도 무리를 따라오지 말라고 부탁했다. 뒤에 남아 있기로 찬성했어도, 그들 가운데 여럿이 며칠 안에 뒤를 따라 갔다.
첫날에 예수와 사도들은 겨우 타리케아까지 여행했고, 거기서 그 날 밤 쉬었다. 이튿날 펠라 가까이 요단 강의 한 지점, 요한이 1년 전쯤에 전도하고 예수가 세례를 받은 곳까지 여행했다. 여기서 가르치고 전도하면서, 2주가 넘도록 머물렀다. 첫째 주말이 되어서 사람 몇백 명이 예수와 열두 사도가 거하는 곳 가까이 야영지
에 모여들었고, 갈릴리·페니키아·시리아·데카폴리스·페레아·유대에서도 왔다.
예수는 아무런 대중 설교를 하지 않았다. 안드레는 군중을 나누고 오전과 오후 집회를 위하여 설교자를 배치했다. 저녁 식사 뒤에 예수는 열둘과 함께 이야기하였다. 아무런 새 가르침을 주지 않았지만, 앞서 가르친 것을 다시 검토하고 질문에 답하였다. 이렇게 하던 어느 날 저녁, 이 장소 가까이, 산에서 40일 보낸 것에 대하여 열둘에게 무언가 일러 주었다.
페레아와 유대에서 온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고 예수의 가르침에 관하여 더 알아보는 데 관심이 있었다. 사도들은 요한의 설교를 어떤 면에서도 깎아내리지 않았고, 이 때 새 제자들에게 세례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요한의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많이 진전을 보았다. 요한이 예수에 대하여 선포한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예수가 그를 감옥(監獄)에서 구해 내려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요한의 추종자들에게 언제나 걸림돌이었다. 요한의 제자들은 어째서 사랑하는 지도자가 모진 죽음을 당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예수가 손을 쓰지 않았는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밤마다 안드레는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들과 화목(和睦)하게 어울리는 일, 까다롭고 어려운 일을 동료 사도들에게 조심스럽게 가르쳤다. 예수가 대중에게 봉사하던 첫해 동안, 추종자의 4분의 3이 넘는 수가 이전에 요한을 따랐고 세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이해, 서기 27년 전체가 페레아와 유대에서 요한이 하던 일을 조용히 이어받는 데 쓰였다.
2. 하나님의 율법과 아버지의 뜻
펠라를 떠나기 전날 밤에 예수는 새 나라에 관하여 얼마큼 더 가르쳤다. 주는 말했다: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오는 것을 기대하라고 가르침 받았으며, 이제 오래 기대하던 이 나라가 가까이 왔고, 이미 여기에 우리 한가운데 있음을 선포하러 내가 오노라. 어느 나라에나 그 보좌에 앉아서 나라의 율법을 선포하는 임금이 있어야 하느니라. 그래서 유대 민족이 땅의 온 민족들을 영화롭게 다스리고, 메시아가 다윗의 보좌에 앉아서, 이 기적 같은 권능의 자리로부터 온 세상의 율법을 선포한다는 하늘나라 개념을 너희가 개발하였느니라. 그러나 아이들아, 너희는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영적(靈的) 이해력이 없이 듣느니라. 내가 선포하노니, 하늘나라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이 다스림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라. 참으로, 이 나라에는 임금이 있고, 그 임금은 내 아버지요 너희 아버지이라. 정말로 우리는 충성하는 백성이지만, 그 사실을 훨씬 초월하는 것은 우리가 그의 아들이라는 진리, 사람을 변화시키는 진리이라. 내 일생에서 이 진리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되리라. 우리 아버지는 또한 보좌에 앉으시나, 손으로 만든 보좌가 아니라. 무한자의 보좌는 가장 높은 하늘에서 아버지가 거하시는 영원한 자리이라. 그는 만물을 채우시고 율법을 온 우주에 선포하시니라. 아버지는 필사 인간의 혼 속에서 살라고 보내신 영으로 말미암아, 땅에서 사는 자녀들의 마음 속에서 또한 다스리시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백성일 때, 정말로 우주 통치자의 율법을 듣게 되느니라. 그러나 내가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러 왔더니, 그 복음 때문에 너희가 아들임을 믿음으로 발견할 때, 너희는 이제부터 전능한 왕의 율법 밑에 있는 백성이 아니라, 사랑이 많은 신성한 아버지의 아들, 특권을 가진 아들로서 자신을 바라보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버지의 뜻이 너희의 율법이 될 때, 너희는
도저히 하늘나라에 있다 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 참으로 너희의 뜻이 될 때, 너희는 하늘나라에서 바로 그 진리 안에 있으니, 하늘나라가 이로서 너희 안에서 확고한 체험이 되었음이라. 하나님의 뜻이 너희의 율법이 될 때, 너희는 고귀한 노예 백성이라. 그러나 신의 아들이라는 이 새 복음을 믿을 때, 내 아버지의 뜻은 너희의 뜻이 되겠고, 너희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아이, 하늘나라의 해방된 아들의 높은 자리로 올라가느니라.”
어떤 사도들은 이 가르침에서 무언가 깨달았지만, 혹시 야고보 세베대를 제외하고, 아무도 이 엄청난 선언의 중요성을 완전히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마음 속에 가라앉았고, 봉사하는 후일에 떠올라서 그들의 직분을 기쁘게 해 주었다.
3. 아마투스에서 머무르다
주와 사도들은 거의 3주 동안 아마투스 가까이 남아 있었다. 사도들은 날마다 두 차례 군중에게 계속 설교했고, 예수는 토요일 오후마다 설교했다. 수요일의 노는 시간을 계속하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안드레는 한 주 6일의 각 요일마다 두 사도가 쉬어야 한다고 정했고, 한편 모두가 토요일 예배에 근무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대중 설교의 대부분을 맡았다. 빌립과 나다니엘과 토마스와 시몬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일했고, 특별한 집단의 질문자들을 위하여 학급을 운영했다. 쌍둥이는 일반 치안 감독을 계속했고, 한편 안드레와 마태와 유다는 세 사람으로 구성된 일반 관리 위원회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 셋은 또한 각자 종교적인 일을 상당히 했다.
안드레는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새 제자들 사이에, 항상 되풀이해서 생기는 오해와 의견 차이를 좁히는 일에 많이 분주했다. 며칠마다 심각한 상황이 터지곤 했지만, 동료 사도들의 도움을 받아서 안드레는 다투는 편들을 그럭저럭, 적어도 일시나마, 어떤 종류의 협정에 이르도록 유도했다. 예수는 이 회담 중 어디에도 참여하려 하지 않았다. 이 난관을 적절히 조정하는 데 아무 조언도 주려 하지 않았고, 한 번도 사도들이 이 난처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제안하지도 않았다. 안드레가 이 문제들을 가지고 왔을 때, 예수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주인이 손님의 집안 문제에 끼어 드는 것이 지혜롭지 않으니라. 슬기로운 부모는 아이들의 사소한 싸움에서 결코 편을 들지 않느니라.”
주는 사도들과 모든 제자를 다루는 온갖 일에 큰 지혜를 보이고 완전히 공평함을 보였다. 예수는 참으로 사람들을 통달했고, 성격의 통합된 매력과 힘 때문에 동료 인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거칠고 방랑하며 집 없이 사는 생활에는 미묘하게 위엄 있는 힘이 있었다. 권위 있는 교육 방법, 맑은 논리, 추리력, 지혜로운 통찰력, 총명한 지성, 비할 데 없이 차분한 태도, 더할 나위 없는 관용(寬容)에는 지적 매력과 영적 인력(引力)이 있었다. 그는 단순하고, 남자답고 정직하며, 두려움이 없었다. 주의 풍채에 나타난 이 모든 신체적·지적 영향과 함께, 인격과 관련하여, 존재의 모든 영적 매력이 있었다―참을성 있고 싹싹하고, 온유하고 부드럽고 겸허했다.
나사렛 예수는 정말로 튼튼하고 힘찬 성격이었다. 지적인 힘이요 영적 요새였다. 그의 인격은 추종들 가운데 영적 생각을 가진 여자들 뿐 아니라, 교육받고 지
적인 니고데모, 강건한 로마인 군인에게도 매력이 있었으니, 십자가에서 머무르면서 지키던 지휘관은 주가 돌아가시는 것을 끝까지 보고 나서 말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원기 있고 거친 갈릴리 어부들은 그를 주라고 불렀다.
예수의 초상화들은 아주 보기 민망했다. 이 그리스도의 그림들은 청년들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쳐 왔다. 그가 너희 미술가들이 보통 묘사한 그런 사람이었다면, 성전(聖殿) 상인들은 예수 앞에서 도저히 도망(逃亡)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위엄 있는 어른이었고, 선했어도 자연스러웠다. 예수는 연약하고 다정하고 부드럽고 친절한 신비주의자의 태도가 없었다. 그의 가르침은 가슴이 떨리도록 힘에 넘쳤다. 그는 좋은 의도를 가졌을 뿐 아니라, 실제로 착한 일을 하며 다녔다.
주는 결코 “게으르고 꿈꾸는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말씀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번 일렀다: “수고하는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휴식―영적 힘―을 주리라.” 주의 멍에는 정말로 가볍지만, 그렇다 해도 결코 그 멍에를 강제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자기의 자유 의지대로 이 멍에를 메어야 한다.
예수는 희생으로, 즉 자만과 이기심을 희생하여, 승리함을 보여 주었다. 자비를 보여서 모든 불만·불평·노여움, 이기적인 권력과 복수를 몹시 찾는 태도로부터 영적으로 구원받음을 보여 주려고 뜻하였다. “악에 저항하지 말라” 하였을 때, 죄를 묵인(黙認)하거나 불의와 사귀라고 조언함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나중에 설명했다. 용서를 더욱 가르치고, “사람의 인격을 악하게 대우하는 데, 인격의 위엄에 대하여 가진 느낌을 악한 방법으로 상처 입히는 데 저항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4. 아버지에 대한 가르침
아마투스에 머무르는 동안, 예수는 사도들에게 새로운 하나님 개념을 가르치면서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하나님은 아버지요, 땅에서 살며 잘못하는 아이들에게 손해 되는 기록, 나중에 온 창조의 공정한 재판관으로서 판결을 내릴 때 불리하게 쓰일 죄악의 기록을 적는 일로 대체로 바쁜, 크고 높은 회계원(會計員)이 아니라고 사도들에게 거듭 강조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만민 위에 있는 임금으로, 아니 민족의 아버지라고까지 상상했지만, 전에는 큰 집단의 필사 인간들이 하나님이 개인에게 사랑의 아버지라는 생각을 품은 적이 없었다.
“하늘나라의 이 하나님은 누구시나이까?” 하는 토마스의 물음에, 예수는 대답했다. “하나님은 너의 아버지요, 종교―내 가르침―은 네가 그의 아들이라는 진리를 믿고 인정(認定)하는 것, 이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으니라. 내 일생과 가르침에서 이 두 아이디어를 밝히려고, 내가 육체를 입고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
예수는 또한 종교적 의무로서 동물 잡아 바치는 관념으로부터 사도들의 생각을 해방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날마다 희생물을 바치는 종교에서 훈련받은 이 사람들은 그가 무슨 말씀을 하는가 더디게 이해했다. 그런데도 주는 가르치는 데 지치지 않았다. 한 가지 예를 써서 모든 사도의 생각에 미치지 못할 때, 메시지를 다시 말씀하고, 해명할 목적으로 또 다른 종류의 비유를 이용하곤 했다.
이 때 예수는 “고통받는 자를 위로하고 아픈 자를 돌보는” 임무에 관하여 더 자세히 열둘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주는 온전한 인간―남자나 여자 개인을 이루는 육체·지성·영의 연합―에 대하여 많이 가르쳤다. 예수는 그들이 마주칠 세 가지 형태의 고통에 대하여 이야기했고, 더 나아가서 인간의 질병에서 생기는 슬픔을 겪는
모든 사람을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가 설명했다. 다음을 헤아리라고 가르쳤다:
1. 육체의 병―몸의 병으로 보통 간주하는 고통.
2. 불안한 지성―후일에 감정·정신의 어려움과 장애로 여긴 비육체적 질병.
3. 악한 귀신에 들린 것.
예수는 그 시절에 흔히 더러운 귀신이라고 부른 이 악한 영들의 성질, 그리고 그 기원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몇 경우에 사도들에게 설명했다. 주는 악한 귀신에 들린 것과 미친 것의 차이를 잘 알았지만, 사도들은 그렇지 않았다. 유란시아의 초기 역사에 관하여 그들이 가진 제한된 지식에 비추어 볼 때, 예수가 이 문제를 그들이 충분히 알아듣도록 시도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 악한 영들을 언급하면서, 여러 번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올라갈 때, 하늘나라가 큰 권능과 영적 영화로움 속에 오는 그 시절에, 모든 육체에게 내 영을 퍼부어 준 뒤에, 저희가 사람들을 더 괴롭히지 아니하리라.”
주마다 달마다, 이 해 내내, 사도들은 아픈 자들을 치료하는 봉사에 갈수록 더 주의를 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