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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내린 큰결정

뉴징검다리 2010. 2. 10. 07:39

5. 처음 내린 큰 결정

자신과 성격화된 조절자와 함께 이 회의를 시작한 지 사흘째에, 집합한 네바돈 하늘 집단의 환상(幻想)이 예수에게 제시되었는데, 그 지휘자들이 사랑하는 군주의 뜻을 보살피라고 이들을 파송하였다. 이 막강한 무리는 12 군단의 세라핌, 또 모든 계급의 우주 지성 존재가 비례해서 섞인 집단을 포함하였다. 예수가 고립되어 있는 동안에 내린 첫 큰 결정은, 뒤이어 유란시아에서 대중 사업을 벌이는 계획과 연결하여, 이 막강한 성격자들을 이용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과 상관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이 명백해지지 않는 한, 이 광대한 집합 가운데 한 성격자도 이용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 일반 결정(決定)을 내렸는데도, 이 광대한 무리는 땅에서 여생 동안 내내, 함께 남아 있었고, 군주의 뜻이 실오라기만큼 표현되어도 언제나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예수는 따라다니는 이 성격자들을 인간의 눈으로 항상 보지는 않았어도, 관계된 성격화된 조절자는 항상 보았고, 모두와 교통할 수 있었다.

산에서 40일 동안 은둔하다가 내려오기 전에, 예수는 이 시중드는 집단의 우주 성격자들의 통솔권을 최근에 성격화(性格化)된 조절자에게 주었고, 우주 지성 존재의 모든 부서로부터 뽑힌 이 성격자들은 유란시아 시간으로 4년이 넘는 동안, 높고 노련하고 성격화된 이 신비의 감시자의 지혜로운 인도를 받으며, 온순하고 공손하게 활동하였다. 이 강력한 집합의 지휘를 맡으면서, 조절자는 한때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일부였고 본질(本質)이었으니까, 아버지가 간섭을 뜻하는 일이 생기지 않으면, 어떤 경우에도 이 초인간 대리자(代理者)들이 땅에서 그의 생애와 연결하여, 또는 그 생애를 위하여 봉사하거나 자신들을 드러내도록 허락하지 않겠다고 예수에게 보장하였다. 이렇게 한 가지 큰 결정으로, 아들이 땅에서 수고하면서 아버지가 어떤 분명한 행위나 에피소드에 따로 참여하기를 선택하지 않으면, 필사 여생과 상관되는 모든 문제에서 모든 초인간적 협동을 예수는 자진해서 박탈하였다.

그리스도 미가엘에게 시중드는 우주 집단의 지휘권을 받아들이면서, 성격화된 조절자는 그러한 집합(集合)의 우주 생물은 창조자가 이양한 권한으로 말미암아 공간 활동이 제한될 수 있지만, 시간 속에서 그 활동과 연관하여 그런 제한은 듣지 않는다고 힘들여 지적하였다. 이 제한은, 일단 성격화되었을 때, 조절자가 비시간(非時間) 존재라는 사실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지휘받는 살아 있는 우주 지성들을 조절자가 통제하는 것은, 공간을 다루는 모든 문제에 관해서 완벽하고 완전하겠지만, 시간에 관하여 부과된 그런 완전한 제한은 있을 수 없다고 예수는 훈계를 받았다. 조절자는 말했다: “너의 지상(地上) 생애와 관련하여 어떤 면에서도, 네가 지시한 대로, 시중드는 이 집단의 우주 지성들이 이용되는 것을 내가 금하겠노라. 그러나 네가 택한 바 파라다이스 아버지가 신성한 뜻이 성취되도록 그런 대리자들을 해방하라고 지시(指示)하는 경우에, 그리고 오직 시간에 관하여 자연스러운 땅의 질서로부터 벗어날 선택, 너의 신 및 인간 의지가 내리는 어떤 결정이나 행위에 네가 관계할 수 있는 경우는 예외이라. 모든 그러한 경우에 나는 무력(無力)하고, 완전하게, 통일된 권력 밑에 여기 모인 너의 생물은 마찬가지로 무력하니라. 너의 연

합된 두 성품이 일단 그러한 소망을 품는다면, 선택한 이 명령들은 대번에 집행될 것이라. 모든 그러한 문제에서 너의 소망은 시간의 단축이겠고, 투영된 물건은 존재하느니라. 나의 지휘 밑에서 이것은 너의 잠재(潛在) 통치권에 부과될 수 있는 가능한 최대의 제한이라. 내 자의식(自意識) 안에서 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시간에 관련된 어떤 일에도 나는 너의 피조물을 제한할 수 없노라.”

사람들 사이에서 한 사람으로서 계속 살겠다는 결정이 해결되어 가는 것에 대하여 예수는 이렇게 통지를 받았다. 오직 시간에 관련된 그런 문제들을 제쳐 놓고, 한 가지 결정으로, 시중드는 모든 우주 집단의 다채로운 지성 존재들이 뒤따르는 대중(大衆) 봉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막았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특별히 달리 판결하지 않으면, 예수가 펼치는 봉사에서 어떤 가능한 초자연적이거나, 짐작컨대 초인간적으로 뒤따라 생기는 일은 온통 시간(時間)의 제거에 관계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렇게 분명히 말한 시간 문제의 경우를 제외하고, 예수가 땅에서 할 남은 수고와 관련하여 일어나는 어떤 기적이나 자비로운 봉사, 또는 어떤 다른 가능한 사건도, 유란시아에서 사는 동안, 인간사에서 확립되고 정상으로 작용하는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행위의 성질이나 특징을 도무지 가질 수 없다. 물론, “아버지의 뜻”이 나타나는 데는 아무런 한계(限界)를 지울 수 없다. 한 우주의 이 잠재 군주(君主)가 분명히 나타낸 소망과 관련하여, 시간의 제거는 이 하나님인 사람의 을 직접, 분명히 표현한 행위로만 회피할 수 있고, 이것은 문제가 된 행위나 사건에 관계되는 대로, 시간이 단축되거나 제거되어서는 안 된다는 효과를 가진다. 명백한 시간 기적이 나타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예수는 항상 시간 의식(意識)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했다. 분명한 소망을 품는 것과 관련하여, 그의 편에서 어떤 시간 의식의 착오(錯誤)가 생기면, 이 아들 창조자의 지성 안에서 상상된 일이 집행되고, 게다가 시간의 간섭이 없이 그렇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관계된 성격화된 조절자의 감독하는 통제를 통해서, 미가엘은 공간에 관하여, 땅에서 친히 하는 활동을 완전히 제한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시간에 관해서는, 네바돈의 잠재 군주로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그의 새로운 지위를 이렇게 제한하기는 불가능했다. 나사렛 예수유란시아에서 대중에게 봉사를 시작하려고 나섰을 때, 이것이 그의 실제 지위였다.

6. 둘째 결정

새로운 신성(神性) 지위에 본래 있는 잠재성에 비추어서 결정될 수 있는 한, 창조된 지성들의 모든 등급, 모든 성격자에 관하여 정책을 결정하고 나서, 예수는 이제 생각을 자신에게 돌렸다.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사물과 존재를 창조한 자, 이제 충분히 자의식하는 그가 사람들 사이에서 일을 다시 시작하려고 갈릴리로 돌아갔을 때 즉시 부닥칠, 되풀이되는 생활 형편에서, 이 창조자 특권(特權)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사실은, 이미 이 외로운 산 속에, 있는 자리에서, 먹을 것을 얻는 일에 이 문제는 어쩔 수 없이 나타났다. 혼자 명상(瞑想)에 잠긴 사흘째가 되어서, 인간의 몸은 배가 고파졌다. 어떤 보통 사람이 하는 것처럼, 먹을 것을 찾아서 나설 것인가, 아니면 그냥 정상의 창조 능력을 써서, 적당한 육체의 영양을 손 닿는 곳에 창조할 것인가? 주의 이 큰 결심을 하나의 시험으로서―가상(假想)하는 적들이 “이 돌로 하여금 빵 덩어리가 되라 명령하라고” 도전했다고―너희에게 발표되었다.

이렇게 예수는 땅에서 수고하는 여생을 위하여, 또 하나의 일관성 있는 정책에 이르렀다. 개인의 필요가 관련된 한, 대체로 다른 인물과 가지는 관계에서도, 이제 땅에서 정상으로 존재하는 길을 추구하기로 신중하게 선택하였다. 자신이 확립한 자연(自然) 법칙을 뛰어넘거나 위반하거나 짓밟을 정책을 쓰지 않기로 분명히 작정하였다. 그러나 성격화된 조절자에게 이미 경고를 받은 바와 같이, 어떤 상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 자연 법칙이 크게 가속될 수 없다고 스스로 다짐할 수 없었다. 원칙으로 보면, 예수는 일생의 일이 자연 법칙에 따라서, 기존의 사회 조직과 조화되게 구성되고 실행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로서 주는 기적과 이적을 행하지 않겠다는 결정에 상당하는 생활 계획을 선택하였다. 다시 “아버지의 뜻”에 찬성하는 쪽으로 결정했다. 다시 만사(萬事)를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손에 맡기었다.

예수의 인간 성품은 첫째 의무가 자아 보존이라고 명령했다. 그것이 시간과 공간의 세계들에서 사는 자연인(自然人)의 정상 태도요, 따라서 유란시아 필사자의 정당한 반응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 세상과 거기 있는 생물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방대한 우주의 다양한 피조물을 가르치고 영감을 주도록 고안된 인생을 살고 있었다.

세례로 깨우침을 받기 전에는, 하늘 아버지의 뜻과 인도하심에 완전히 복종하면서 살았다. 아버지의 뜻에 그렇게 사람으로서 절대로 의존하는 태도를 계속하겠다고 힘차게 결정하였다. 부자연스러운 과정을 밟으리라 의지(意志)하였다―자아 보존을 구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 정책을 계속 추구하기로 했다. 그의 인간 머리에 익숙한 성서(聖書)의 말씀에서 결론을 내렸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지니라.” 배고픔에서 표현되는 바와 같이, 육체의 성질을 가진 식욕(食慾)에 관하여 이렇게 결론을 내리면서, 사람의 아들은 육체의 모든 다른 욕구, 인간의 성질을 가진 자연스러운 충동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선언하였다.

초인간 능력을 남을 위해서 아마 쓸지 모르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저가 남은 구하였으되, 스스로를 구할 수 없도다”하고 사람들이 놀리는 말을 했을 때―그가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종말까지 이 정책을 한결같이 따랐다.

유대인들은 모세보다 더욱 큰 이적을 행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고, 모세는 사막에서 바위로부터 물이 솟게 하고 황무지에서 만나로 조상(祖上)을 먹였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예수는 동포가 어떤 종류의 메시아를 기대하는가 알았고, 가장 낙천적인 기대에 맞게 적응할 모든 능력과 특권이 있었지만, 그러한 능력과 영광을 보이는 멋진 계획에 반대하여 결정하였다. 예수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기적을 행하는 그러한 과정은, 야만인 주술사들이 무지한 마술을 쓰고 퇴화된 관습을 가졌던 옛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아마도, 피조물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연 법칙을 가속할지 몰랐지만, 자기 이익을 위해서나 동료 인간들을 위압(威壓)하기 위해서나, 자신의 법칙을 뛰어넘는 일은 하려 하지 않았다. 주의 결정은 최종이었다.

예수는 민족을 위하여 슬퍼했다. 오시는 메시아를 기대하도록 어떻게 유도되었는가 잘 알았다. 그 때 “땅이 열매를 1만 배 맺고, 한 포도나무에는 1천 가지가 생길 것이요, 가지마다 1천 송이를 생산하고, 송이마다 포도 알 1천 개를 맺으며, 포도 알마다 포도주 1갤론을 생산하리라.”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기적 같이 풍성한 시대를 개시할 것이라 믿었다. 히브리인들은 기적의 전통과 이적(異蹟)의 전설 위에서 오랫동안 젖어 있었다.

그는 빵과 포도주를 불리려고 오는 메시아가 아니었다. 기껏해야 이 세상의 필요를 보살피려고 오지 않았다. 땅에 있는 자녀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드러내려고 왔고, 한편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살려는 진지한 노력(努力)에 그와 함께 하라고 땅에 있는 아이들을 이끌려고 애썼다.

이 결정에서 개인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나, 순전히 이기적 이익과 영광을 얻기 위하여, 신성한 재능과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팔아 넘기는 것이 어리석고 죄 있다는 것을 나사렛 예수는 구경하는 우주에게 보여 주었다. 바로 그것이 루시퍼칼리가스티아의 죄였다.

예수의 이 큰 결정은 이기적 만족감과 감각의 충족만으로는, 저절로, 진화하는 인간들에게 행복을 줄 수 없다는 진리를 눈부시게 보여 준다. 필사 존재에는 더 높은 가치―지적(知的) 통달과 영적(靈的) 성취―가 있고, 이것은 사람의 순전히 육체적 욕구와 충동의 충족, 필요한 충족을 훨씬 초월한다. 사람이 천성으로 부여받은 재능과 능력은 더 높은 지성 및 영 능력을 개발하고 높이는 데 주로 바쳐야 한다.

이렇게 예수는 새롭고 더 나은 길의 기법, 생활의 더 높은 도덕적 가치, 공간 세계에서 진화(進化)로 인간이 존재하는 더 깊은 영적 만족을 우주 생물에게 드러냈다.

7. 셋째 결정

먹을 것과 물질인 몸의 필요를 육체적으로 보살피는 것, 자기와 동료들의 건강을 돌보는 일과 같은 문제에 관하여 결정을 내리고 나서, 해결해야 할 다른 문제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신변(身邊)의 위험에 부닥쳤을 때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인가? 인간적 안전에 대하여 정상으로 경계하고, 육체를 입은 생애가 때 이르게 끝나지 않도록 분별 있게 조심하지만, 육체를 입은 일생에 위기가 닥칠 경우에, 그는 모든 초인간적 간섭을 삼가기로 결심하였다. 이 결정에 도달하고 있을 때, 예수는 앞에, 바로 거기에, 벼랑과 함께 툭 튀어나온 바위 선반 위에 있는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 선반에서 훌쩍 몸을 던져서 공중으로 나갈 수 있고, 유란시아에서 일생의 일을 집행하는 데 하늘 지성 존재들이 개입하라고 부르지 않겠다는 처음 큰 결정을 취소하고, 자아 보존(保存) 태도에 관계되는 둘째 결정을 돌이킨다면, 몸을 다치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깨달았다.

예수는 동포가 자연 법칙을 초월할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 성구(聖句)를 무척 잘 배웠다: “아무런 악도 너에게 닥치지 아니하리라, 아무 전염병이 네 거처에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라. 그는 너의 모든 길에서 지키라고, 천사들이 너를 책임지게 할 것임이라.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도록 손 안에 너를 붙들리라.” 이 따위의 주제넘은 태도, 아버지의 인력(引力) 법칙을 이렇게 무시하는 것이, 가능한 해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아니면 혹시나 잘못 가르침받고 헛갈린 민족의 신임을 얻기 위하여, 정당화(正當化)될 수 있는가? 그러나 그런 과정은, 표징(標徵)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아무리 흡족하더라도, 아버지를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확립된 법칙을 집적거리는 의심스러운 일이리라.

이 모두를 이해하고서, 개인 행동이 관계된 한, 주가 확정된 자연 법칙을 무시(無視)해서 일하기를 물리쳤음을 아니까, 결코 물 위로 걷거나 세계를 관리하는 물질 질서를 짓밟는 어떤 다른 일도 하지 않았음을 너희가 분명히 안다. 물론, 성격

화된 조절자의 관할에 맡겨진 문제와 관련하여, 시간 요소(要素)에 대한 통제력의 부족으로부터 그를 온전히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아직까지 전혀 발견되지 않았음을 언제나 기억하여야 한다.

땅에서 전 생애를 통하여, 예수는 이 결정에 한결같이 충성했다. 바리새인들이 표징(標徵)을 얻으려고 비웃든지, 아니면 갈보리에서 구경꾼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대들든지, 그는 산허리에서 이 때 내린 결정을 변치않고 고수하였다.

8. 넷째 결정

하나님인 사람이 씨름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당장 결정한 다음으로 큰 문제는, 동료 인간들의 눈길을 끌고 지지를 얻을 목적으로 초인간 능력 중에 무엇이라도 사용해야 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 관련되었다. 굉장하고 놀라운 것을 몹시 바라는 유대인들의 갈망(渴望)을 충족시키는 데 우주 권능을 어떤 방법으로든 써야 할 것인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결심하였다. 사람들이 그의 사명을 주목하게 만드는 방법과 같은, 모든 그러한 버릇을 없애는 정책 과정을 결정하였다. 그는 이 큰 결정에 한결같이 충실히 살았다. 시간을 절약하는, 수많은 자비 행위가 나타나는 것을 허락했을 때에도, 치료의 보살핌을 받은 자들에게, 받은 이익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거의 변함없이 타일렀다. 신성을 증명하고 전시하면서 “우리에게 징조(徵兆)를 보이라” 적들이 비웃으며 도전하는 것을 언제나 물리쳤다.

그는 기적을 행하고 놀라운 일을 하는 것은 물질 지성을 위압해서 기껏해야 겉으로 나타나는 충성을 요구하리라는 것을 아주 지혜롭게 내다보았다. 그런 연출은 하나님을 계시하지도, 사람을 구하지도 않는다. 그는 단순히 이적(異蹟)을 행하는 자가 되지 않으려 하였다. 오직 한 가지 일에―하늘나라를 세우는 데―몰두하기로 결의하였다.

예수가 자신과 교통하는 이 중대한 대화(對話) 전체를 통해서, 질문하고 거의 의심하는 인간적 요소가 있었는데, 이는 예수하나님일 뿐 아니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면 결코 유대인들이 그를 메시아로서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이 뻔했다. 게다가 꼭 한 가지 초자연적인 일을 하기로 찬성한다면, 인간 지성은 그것이 참으로 신의 지성에 복종해서 된 것임을 확실히 알 것이다. 인간 지성의 의심하는 성질에게 신의 지성이 이렇게 양보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과 일치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결정했고, 성격화된 조절자의 계심을, 신성이 인류와 협동 관계에 있다는 충분한 증거로 제시하였다.

예수는 발이 닳도록 여행하였다. 로마·알렉산드리아·다마스커스를 회상하였다. 세상의 방법―정치와 상업에서 사람들이 타협과 외교(外交)로 어떻게 목적을 이루는가―알았다. 땅에서 사명을 촉진하는 데 이 지식을 이용할 것인가? 아니라! 마찬가지로, 하늘나라를 세우는 데 세상의 지혜(知慧)와 어떤 타협도 반대하고, 부(富)의 영향을 받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다시 아버지의 뜻에 순전히 의존하기로 작정하였다.

예수는 한 가지 능력에 이르는 지름길을 충분히 알았다. 나라와 온 세상의 눈길이 자신에게 즉시 집중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알았다. 얼마 안 있어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의 축하가 있을 터이고, 도시는 방문자들로 들끓을 것이었다. 그는 성전의 꼭대기에서 내려와서, 놀란 군중 앞에서 공중에서 걸을 수 있었다. 이것이 그들이 찾고 있던 종류의 메시아였다. 그러나 다윗의 왕좌를 다시 세우려고 오지 않았으니까, 나중에 실망을 줄 것이었다. 신의 목적을 이루는 길, 자연스럽고 느리고 확실한 길보다 더 앞서 가려고 애쓰는, 칼리가스티아의 방법이 쓸모 없음을 알았다. 다시 사람의 아들아버지의 길, 아버지의 뜻에 온순하게 머리를 숙였다.

예수는 자연스럽고 평범하고 어렵고 벅찬 방법으로, 인류의 가슴 속에서 하늘나라를 세우기를 택했고, 이것이 하늘나라를 확대하고 그 세력을 키우는 과제에서, 땅에 있는 자녀들이 따르는 바로 그런 과정이었다. “숱한 시련을 통해서 대대로 많은 자손이 하늘나라로 들어가리라”는 것을 사람의 아들이 잘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문명화된 사람의 가장 큰 시험, 권력을 순전히 이기적이거나 개인적인 목적에 쓰기를 굳건하게 물리치는 시험을 지금 거치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일생과 체험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아들은 20세기나 다른 세기에 살던 필사자의 지성이 아니라, 1세기 인간의 지성 속에서 육신화되었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의 인간 자질은 자연스럽게 얻었다는 생각을 전하려는 것이다. 그는 그 시대의 유전(遺傳) 및 환경 요소, 받은 훈련과 교육 영향의 산물이었다. 그의 인간성은 진정하고 자연스러웠고, 그 시절과 세대의 실제 지적(知的) 상태와 사회·경제 조건에 선행하는 것들로부터 얻어졌고, 그로 말미암아 육성되었다. 이 하나님인 사람의 체험 속에서 신(神)의 지성이 인간의 지능을 초월하리라는 가능성이 언제나 있었지만, 그런데도, 인간 지성이 활동할 때, 그렇게 하는 동안, 신의 지성은 그 시절의 인간 환경의 조건 밑에서, 참된 필사 지성이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예수는 멋대로 권한을 보여 줄 목적으로 인위적(人爲的) 상황을 만들어 내거나, 도덕적 가치를 향상시키든지 영적 진보를 가속하려는 목적으로 특별한 권능에 탐닉하는 것이 어리석음을 광대한 우주의 모든 세계에 보여 주었다. 땅에서 이룰 사명을 마카비 통치가 안겨 준 실망을 되풀이하는 데 쓰지 않으리라 결심하였다. 땀 흘려 벌지 않은 인기(人氣)를 얻으려는 목적이나, 정치적 위신을 얻으려고 신의 속성을 팔아 버리기를 물리쳤다. 신의 창조적 에너지를 국가 권력이나 국제적 위신으로 변질시키는 것을 묵인하려 하지 않았다. 나사렛 예수는, 죄와 함께 어울리기는커녕, 과 타협하기를 거절하였다. 승리감에 넘쳐, 주는 아버지의 뜻에 충성하는 것을 땅에서 현세에 고려할 모든 다른 것 위에 올려놓았다.

9. 다섯째 결정

자연 법칙 및 영적 능력과 그의 개인적 관계에 대하여 그런 정책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세우는 데 쓰일 방법의 선택에 눈을 돌렸다. 요한은 이미 이 일을 시작했다. 어떻게 그가 이 메시지를 계속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요한의 사명을 이어받아야 하는가? 효과적인 노력과 지적 협조(協助)를 얻기 위하여 추종자들을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가? 예수는 더 이상 자신을 유대인의 메시아로, 적어도 그 시절에 대중이 메시아를 상상한 대로, 보는 것을 금할 최종의 결정에 지금 이르고 있었다.

기적 같은 능력을 입고 와서 이스라엘의 적들을 동댕이치고, 빈궁과 억압이 없이 유대인을 세계 통치자로서 세울 구원자를 유대인들은 마음 속에 상상하고 있었다. 하늘나라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악을 뒤집어엎는 것과 상관이 있고, 순전히 영적 관심거리의 문제임을 알았다. 눈부시게 번쩍 권력을 전시함으로 영적인 나라를 개시하는 것이 현명한가 생각해 보았지만―그러한 과정은 허락될 수 있었고, 온전히 미가엘의 관할 안에 있었다―그러한 계획을 반대하기로 완전히 결심하였다. 칼리가스티아의 혁명(革命) 기법과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뜻에 복종함으로 잠재적으로 세상을 얻었고, 그가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로서, 할 일을 마치기로 계획하였다.

이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력을 잠재적으로 소유하면서, 하나님인 이 사람이 통치권의 깃발을 펄럭이기로, 기적을 행하는 대군(大軍)을 전투 대열로 정렬하기로 일단 결심하면, 유란시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인가 너희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타협(妥協)하려 들지 않았다. 추측컨대, 하나님의 숭배를 그로부터 얻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악을 섬기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뜻을 지키려 하였다.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을 예배하고 오로지 그를 섬길지니라”하고 바라보는 우주에게 선포할 생각이었다.

여러 날이 지나가자, 점점 더 또렷하게 예수는 어떤 종류의 진리 계시자가 될 것인가 깨달았다. 하나님의 길이 쉬운 길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헤아렸다. 남은 인간 체험의 잔이 아마 씁쓸할지 모른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지만, 들이키기로 결심했다.

그의 인간 지성조차 다윗의 왕좌(王座)에 작별을 알리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이 인간 지성은 신의 지성의 길을 따라간다. 인간 지성은 아직도 질문하지만, 아버지의 영원하고 신성한 뜻을 행하는 데 무조건 항상 복종하면서, 세상에서 사람으로 사는 이 통합된 일생 동안에, 신이 준 대답을 마지막 판결로서 어김없이 받아들인다.

로마는 서양 세계의 여왕이었다. 혼자 있는 가운데 이 중대한 여러 결정에 이르렀으니까, 지금은 하늘 무리들을 지휘하에 거느리고서, 사람의 아들유대인들이 세계 정복(征服)을 성취할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땅에서 태어난 이 유대인은, 그렇게 엄청난 지혜와 권력을 소유했는데, 자아를 확대하거나 민족을 왕좌에 올려 놓기 위하여 그의 우주 재산을 쓰기를 거부하였다. 말하자면 “이 세상의 나라들”을 보았고, 점령할 능력을 소유했다. 에덴시아최고자들은 이 모든 권력을 손에 맡기었지만, 그는 원하지 않았다. 땅의 나라들은 한 우주의 창조자통치자의 흥미를 끌기에 하찮은 것이었다. 오직 한 가지 목적이 있었으니, 즉 하나님을 더욱 사람에게 드러내는 것, 하늘나라의 확립, 인류의 마음 속에서 하늘 아버지가 다스리는 것이었다.

전투·싸움·학살의 관념은 예수에게 달갑지 않았다. 그것을 거들떠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의 하나님을 드러내는 평화의 왕으로서 땅에서 나타나고 싶었다. 세례 받기 전에, 로마의 억압자들에 항거하는 반란에서 열심당원들을 이끌라는 제안을 다시 물리친 적이 있었다. “주가 내게 말씀하셨으니,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면, 너의 유산으로서 이교도를, 땅의 가장 먼 나라들을 네 소유물로 주리라. 너는 쇠막대기로 저희를 부숴 버리고, 도공(陶工)의 그릇처럼 산산조각 부술지니라’” 이렇게 어머니가 가르쳐 준 그 성서 구절에 관하여 최종 결정을 내렸다.

나사렛 예수는 그러한 발언은 그를 언급하는 말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드디어 사람의 아들의 인간 지성은 이 모든 메시아의 어려움과 모순―

히브리 성서, 부모의 훈련, 하잔의 가르침, 유대인의 기대, 인간다운 포부로 동경하는 마음―을 싹 쓸어 버렸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갈 길을 결정했다. 갈릴리로 돌아가서 하늘나라의 선포를 조용히 시작하고, 날마다 과정의 세부를 해결해 나가도록 그의 아버지(성격화된 조절자)를 신뢰하려 하였다.

이 여러 결정으로, 예수가 영적 문제를 증명하려고 물질적으로 시험하기를 거절했을 때, 자연 법칙을 주제넘게 무시하기를 거절했을 때, 그는 광대한 우주에 두루, 모든 세계에 사는 모든 성격자에게 값진 본보기를 보였다. 영적 영광의 전주곡(前奏曲)으로서 이 세상의 권력 붙잡기를 마다했을 때, 우주에 충성하고 도덕적으로 고귀한 모범,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모범을 보였다.

세례를 받은 뒤에 산으로 올라갔을 때,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사명(使命)과 그 성질에 대하여 어떤 의심이라도 있었다면, 혼자 있으면서 결정하던 40일 뒤에 동료들에게 돌아왔을 때는 전혀 의심이 없었다.

아버지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예수는 한 계획을 세웠다. 사람들에게 육체적 만족을 제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로마에서 아주 최근에 행해지는 것을 본 것처럼 군중에게 빵을 나누어 주지 않을 것이다. 비록 유대인들이 바로 그런 종류의 구원자를 기대하고 있더라도, 이적을 행함으로 자신에게 눈을 끌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권한이나 현세의 권능을 보임으로, 세상이 영적 메시지를 받아들이기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기대하는 유대인들의 눈에, 다가오는 나라를 돋보이게 하는 이 여러 방법을 물리치면서, 예수는 바로 이 유대인들이 분명히, 마침내, 권한과 신성(神性)에 대한 그의 모든 주장을 물리치리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모두를 알았기 때문에, 예수는 초기에 추종자들이 그를 메시아로 언급하는 것을 막으려고 오랫동안 애썼다.

대중에게 봉사하는 동안 내내, 항상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세 가지 상황을 처리할 필요성에 부딪쳤는데, 즉 먹여 달라 소리치는 것, 기적을 고집하는 것, 추종자들이 그를 임금으로 추대함을 허락하라는 마지막 요구였다. 그러나 예수페레아 산 속에서 혼자 지내던 이 여러 날 동안 내린 결정으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10. 여섯째 결정

혼자 있던, 기억에 남을 이 기간의 마지막 날에, 요한과 그 제자들과 합세하려고 산을 내려가기 전에, 사람의 아들은 마지막 결정(決定)을 내렸다. 이 결정을 이 말씀으로 성격화된 조절자에게 교통하였다: “그리고 모든 다른 문제에서, 이제 이 여러 결정·기록과 같이,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겠다고 나는 당신께 서약하나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산을 내려갔다. 얼굴은 영적 승리를 얻고 도덕적으로 성취한 영광으로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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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Shekinah는 신의 자리에 나타나는 야웨의 모습 또는 후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