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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와 사십일

뉴징검다리 2010. 2. 10. 07:44

제 136 편

세례와 사십일

요한의 전도에 관하여 대중의 관심이 절정(絶頂)에 이르렀을 때, 팔레스타인유대 민족이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열심히 찾고 있을 때, 예수는 대중 활동을 시작했다. 요한예수는 크게 대조가 되었다. 요한은 열심이 있고 진지한 일꾼이었지만, 예수는 차분하고 행복한 노동자였다. 일생동안 겨우 몇 번 서두른 일이 있었다. 예수는 세상에게 따듯한 위안이요, 얼마큼 모범이었고, 요한은 도저히 위로가 되거나 모범은 아니었다. 하늘나라를 전파했지만, 도저히 그 행복을 맛보았다고 할 수 없다. 비록 예수가 옛 서열의 선지자들 가운데 요한이 가장 크다고 했어도, 또한 새 길의 큰 빛을 보고, 이렇게 하늘나라로 들어간 자들 중에 가장 적은 사람도 요한보다 정말로 크다고 말했다.

요한이 다가오는 나라를 전파했을 때, 그 메시지의 요점은, 회개(悔改)하라! 다가올 진노를 피하라 하는 것이었다. 예수가 전도하기 시작했을 때, 회개하라는 훈계가 남아 있었지만, 그런 메시지에는 언제나 복음, 새 나라의 기쁨·자유라는 기쁜 소식이 뒤따랐다.

1. 기대하던 메시아에 관한 개념

유대인들은 기대하던 구원자에 대하여 많은 아이디어를 가졌고, 메시아를 가르치는 이 다른 학파들은 각자 히브리 성서(聖書)의 여러 구절이 그 주장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지적할 수 있었다. 대체로 유대인들은 그 민족의 역사가 아브라함과 함께 시작되고, 메시아하나님의 나라가 서는 새 시대에 절정에 이른다고 보았다. 초기에는 이 구원자를 “주의 종”이라, 다음에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상상했고, 한편 나중에 더러는 메시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언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씨”나 “다윗의 아들”이라 부르든 상관 없이, 모두가 그는 메시아,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되리라고 의견을 모았다. 이렇게 그 개념은 “주의 종”으로부터 “다윗의 아들,” “사람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에 이르기까지 발전하였다.

요한예수가 살던 시절에, 학식 있는 유대인들은 오실 메시아가 완전하게 된 대표적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관념을 개발했는데, 그 인물 속에 선지자·사제·임금, 이 세 가지 직분을 “주의 종”으로 통합한 것이다.

모세가 놀라운 기적으로 선조(先祖)를 에집트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한 것 같이, 오시는 메시아는 더 큰 강력한 기적과 민족을 승리로 이끄는 이적(異蹟)으로 유대 민족을 로마의 지배로부터 구원하리라고 유대인들은 진지하게 믿었다. 랍비들은 성서로부터 거의 5백 구절을 한데 모았고, 명백히 모순이 있는데도, 이 구절들이 오

시는 메시아를 예언한다고 단언했다. 시간과 기법과 직분에 관한 이 모든 세부 가운데, 그들은 약속된 메시아인격을 거의 통째로 보지 못했다. 세상의 구원보다 유대 민족의 영광(榮光)이 회복되기를―이스라엘을 이 세상에서 높이기를―기대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사렛 예수유대인의 지성이 품었던 이 물질적 메시아 개념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소문난 많은 메시아 예언은, 그들이 이 예언의 말씀을 다른 빛에 비춰보기만 했다면, 예수가 한 시대의 종결자요, 모든 나라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푸는 새롭고 더 좋은 섭리 시대를 개시하는 분임을 인식하도록 생각을 아주 자연스럽게 준비했을 것이다.

유대인은 후광(後光)1의 신조를 믿도록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러나 신의 계심의 이름난 이 상징은 성전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메시아가 오시면 그 상징을 회복하리라고 믿었다. 그들은 종족의 죄, 악하다고 생각된 사람의 성품에 대하여 뒤범벅이 된 생각을 가졌다. 더러는 아담의 죄가 인류를 저주(詛呪)했다, 메시아는 이 저주를 없애고, 사람이 신의 은총을 다시 받게 하리라고 가르쳤다. 더러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면서, 좋은 성품과 나쁜 성품을 모두 그 존재 속에 넣었다, 이런 주선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았을 때, 하나님은 크게 실망했다, “그는 이렇게 사람을 지은 것을 뉘우쳤다”고 가르쳤다. 이렇게 가르친 자들은 메시아가 본래부터 악한 이 성품으로부터 사람을 구출하려고 오시기로 예정되었다고 믿었다.

유대인들의 대다수는, 민족의 죄 때문에, 개종한 이방인들의 불성실(不誠實) 때문에, 로마의 통치 밑에서 계속 시든다고 믿었다. 유대 민족은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았다, 따라서 메시아는 오시기를 지체한다. 회개(悔改)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그래서 “뉘우치고 세례를 받으라, 하늘나라가 가까웠음이라”하는 요한의 설교가 힘차고 즉시 호소력이 있었다. 하늘나라는 어떤 경건한 유대인에게도 오직 한 가지를 뜻하였으니, 메시아의 오심이었다.

미가엘의 자신 수여에는 유대인의 메시아 개념에 도무지 낯선 한 가지 모습이 있었으니, 인간답고 신다운 두 성품의 연합이었다.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로 메시아를 완전하게 된 인간이라, 초인간이라, 아니 신다운 자라고 상상하기도 했지만, 결코 인간다운 것과 신다운 것의 연합이라는 개념을 도무지 생각해 보지 못했다. 이것이 예수의 초기 제자들에게 큰 장애물이었다. 이전에 있었던 선지자들이 발표한 바와 같이, 메시아다윗의 아들이라는 인간적 개념, 사람의 아들이라는, 다니엘과 어떤 후일의 선지자들의 초인간(超人間) 관념을 파악했고, 에녹서의 저자(著者) 및 같은 시대에 살던 어떤 사람들이 묘사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까지 파악하였다. 그러나 한 순간이라도, 인간다운 것과 신다운 것, 이 두 성품을 땅에서 하나의 인물 안에 뭉치는 참 개념이 떠오르지 않았다. 창조자가 피조물의 모습을 입고 육신(肉身)이 되는 것은 이전에 계시된 적이 없었다. 오로지 예수 안에서 계시되었고, 아들 창조자가 육체가 되어서, 이 땅의 필사자들 가운데서 거하기까지, 세상은 그런 일을 까맣게 몰랐다.

2. 예수가 받은 세례

요한의 메시지―“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메시지―가 주는 기대감으로 팔레스타인이 불이 붙었을 때, 온 유대 사회가 심각하고 엄숙하게 자기 반성(反省)에 들어갔을 때, 요한의 전도가 바로 절정에 이른 때에, 예수는 세례를 받았다. 유대

인의 민족 단결 감각은 대단히 깊었다. 유대인은 아버지의 죄가 아이들을 괴롭힌다는 것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죄가 나라를 저주할지 모른다고 굳게 믿었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에 응한 자들이 모두, 요한이 비난한 특정한 죄를 자신이 저질렀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많은 경건한 사람이 이스라엘의 이익을 위하여,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들 편에서 모르고 지은 어떤 죄가 메시아의 오심을 늦추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죄가 있고 죄로 저주받은 나라에 자신들이 속한다고 느꼈고, 세례를 받아서 민족 회개의 열매를 나타낼까 싶어, 세례를 받으러 나섰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도, 회개하는 의식(儀式)이나, 또는 죄를 용서받으려고 예수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하다. 요한의 손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예수는 다만 많은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의 모범을 따른 것이다.

요단 강으로 세례 받으려고 내려갔을 때, 나사렛 예수는 지성을 정복하고 자아를 영과 동일시하는 데 관계된 모든 문제에서, 인간이 진화로 승천하는 절정에 도달한, 그 영역의 필사자였다. 그 날 시공(時空)의 진화 세계에서 완전하게 된 한 필사자를 요단 강에서 세워 놓았다. 완전한 동시성과 충만한 교통이 예수의 필사 지성과 깃드는 영 조절자,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의 신성한 선물, 사이에 이루어졌다. 미가엘이 우주 지휘권으로 올라간 뒤에, 바로 그러한 조절자유란시아에서 사는 모든 정상(正常) 존재에게 깃든다. 다만 예수조절자는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육신화하여, 다른 초인간, 마키벤타 멜기세덱에게 비슷하게 깃들어서, 이 특별 사명을 위하여 전에 준비되었을 뿐이다.

보통은, 세상의 한 필사자가 그런 높은 수준의 인격을 완성할 때, 영적으로 높아지는 예비 현상(現象)이 일어나고, 이것은 그 사람의 성숙한 혼이 관계된 신다운 조절자와 궁극에 융합함으로 종결된다. 그런 변화는 예수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두 동생과 함께 요단 강으로 내려간 바로 그 날, 나사렛 예수 인격의 체험에서 일어나기로 예정되었던 듯하다. 이 예식은 유란시아에서 순전히 인간다운 생명에서 마지막 행위였고, 많은 초인간 관찰자는 조절자가 그 깃든 지성과 융합(融合)하는 것을 구경할까 기대했지만, 모두 실망하도록 정해졌다. 무언가 새롭고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요한예수에게 세례를 주려고 손을 얹었을 때, 깃들던 조절자요수아 벤 요셉의 완전하게 된 인간 혼(魂)을 마지막으로 떠났다. 몇 순간이 지나자 이 신성한 통일체는 신별로부터 한 성격화된 조절자요, 네바돈 지역 우주 전역에 걸쳐서 그 종류의 우두머리로서 돌아왔다. 이렇게 예수는 자신이 전에 지녔던 그 신성한 영이 돌아올 때, 성격화된 모습을 입고 내려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파라다이스 기원을 가진 바로 그 영이 이제 말씀하는 것을 들었다: “이는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요, 내가 아주 기뻐하는 자라.” 또한 요한예수의 두 동생과 함께, 이 말씀을 들었다. 요한의 제자들은 물가에서 서 있었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지 못했고, 성격화된 조절자의 환영(幻影)도 보지 못했다. 오직 예수의 눈이 성격화된 조절자를 보았다.

돌아와서 이제 신분이 높아진 성격화된 조절자가 이렇게 말씀했을 때, 모두가 말이 없었다. 네 사람이 물 속에서 기다리는 동안, 예수는 가까이 있는 조절자를 우러러보면서 기도했다: “하늘에서 군림하시는 내 아버지여, 주의 이름이 거룩하옵소서. 주의 나라가 오소서!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기도하고 나자 “하늘이 열렸고,” 이제 성격화된 조절자가 제시한 환상을

사람의 아들이 보았는데,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땅으로 내려오기 전의 신분대로, 육신화된 생명이 끝났을 때 그가 될,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의 환상(幻想)이었다. 이 하늘의 환상은 예수의 눈에만 보였다.

요한예수가 들은 것은 우주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말씀하신 성격화된 조절자의 목소리였고, 이는 조절자파라다이스 아버지로부터, 아버지로서 왔기 때문이다. 예수가 땅에서 살던 여생 동안 내내, 이 성격화된 조절자는 모든 수고에서 그와 관계되었다. 예수는 신분이 높아진 이 조절자와 항상 교통하고 있었다.

세례를 받았을 때, 예수는 아무런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고, 아무 죄를 고백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거룩하게 바친 세례였다. 세례를 받을 때 아버지의 분명한 부르심, 아버지의 일을 돌보라는 마지막 호출을 들었고, 이 여러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40일 동안 개인적으로 은둔하려고 떠나갔다. 땅에 있는 동료들과 활발하게 인격 접촉을 하지 않고, 한동안 이렇게 물러나면서, 예수는 한 승천하는 필사자가, 마음 속에 우주의 아버지의 계심과 융합할 때는 언제나 상물질 세계에서 생기는 바로 그 과정을, 그 신분 그대로, 유란시아에서 밟고 있었다.

세례 받은 이 날은 예수의 순전히 인간다운 인생을 끝마쳤다. 신다운 아들아버지를 발견했고, 우주의 아버지는 육신화한 아들을 발견했으며, 서로 말을 건다.

(세례 받을 때, 예수는 거의 서른 한 살 반이었다. 누가예수티베리우스 케자가 통치하던 15년째 해에 세례 받았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투스가 서기 14년에 죽었으니까, 이 해는 서기 29년일 것이다. 티베리우스아우구스투스가 죽기 전에,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2년 반 동안 공동으로 황제(皇帝)였고, 후자를 기념하려고 서기 11년 10월에 주화(鑄貨)를 찍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실제로 통치하던 15년째는, 바로 서기 26년, 예수가 세례를 받은 해이다. 이 해는 또한 폰티오 빌라도유대 총독으로 통치를 시작한 해였다.)

3. 사십일

여섯 주 동안 헤르몬 산의 이슬에 젖어 있을 때, 예수는 세례 받기 전에 필사자로 수여하는 생애에서 큰 시험을 견디었다. 거기 헤르몬 산에서, 이 땅에서 도움 받지 않은 필사자로서, 유란시아의 허세부리는 자, 칼리가스티아, 곧 이 세상의 임금을 만나서 물리쳤다. 그 중대한 날에, 우주의 기록에는, 나사렛 예수유란시아혹성 영주가 되었다. 이 유란시아영주는, 금방 네바돈의 최고 군주로 선포될 예정이었고, 이제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하나님의 새 나라를 선포하는 계획을 세우고 그 방법을 결정하려고 40일 동안 은둔에 들어갔다.

세례를 받은 뒤에, 조절자가 성격화됨으로 말미암아 달라진 세상 및 우주 관계에 40일 동안 자신을 적응(適應)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페레아 언덕에서 혼자 있던 이 기간에, 바야흐로 개시하려 하는 지상(地上) 생활의 새롭고 변화된 국면에서 추구할 정책과 사용할 방법을 결정했다.

예수는 금식(禁食)할 목적으로, 혼에 고통을 주려고 은둔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금욕주의자가 아니었고, 하나님께 접근하는 데 관한 모든 그러한 개념을 영원히 깨뜨리려고 왔다. 이렇게 은둔하기를 구하는 이유는 모세엘리야, 아니 세례

자 요한을 자극한 이유들과 전혀 달랐다. 예수는 그의 우주에 대하여, 또한 온 우주와 그의 관계를 온통 자의식하고 있었고, 파라다이스 아버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감독을 받았다. 유란시아 육신화(肉身化)에 들어가기 전에, 형 이마누엘이 시행한 수여 임무와 그 지침을 이제 충분히 기억했다. 이제 방대(尨大)한 이 모든 관계를 뚜렷하고 완전하게 이해했고, 이 세상과 지역 우주에 있는 모든 다른 세계를 위하여, 대중 임무를 실행하는 계획을 생각해 보고 그 과정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한동안 조용히 명상하려고 떠나 있기를 바랐다.

산에서 적당한 피난처를 찾아서 헤매 다니면서, 예수는 그의 우주의 최고 집행자, 네바돈밝은 새벽별, 곧 가브리엘을 만났다. 가브리엘은 이제 우주의 아들 창조자와 개인적으로 교통하는 경로를 다시 열었다. 유란시아 수여에 들어가는 준비로 에덴시아에 갔을 때 미가엘구원자별에서 동료들을 떠난 뒤에 처음으로, 직접 만났다. 이마누엘의 지시에 따라서, 유버르사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권한을 받고서, 가브리엘은 이제, 그의 우주에 대하여 완전하게 된 통치권의 획득, 그리고 루시퍼 반란의 종결, 이 두 가지와 관련된 한도에서, 유란시아에서 예수의 자신 수여 체험이 실지로 종결되었음을 가리키는 정보를 예수 앞에 제시하였다. 전자(前者)는 세례 받는 날에 이루어졌는데, 그 때 조절자가 성격화된 것은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행한 자신 수여(授與)가 완전하고 완수되었음을 보여 주었고, 후자는 기다리는 소년 티글라스와 함께 하려고 헤르몬 산에서 내려왔을 때, 역사적 사실이 되어 버렸다. 지역 우주와 초우주의 가장 높은 권한을 근거로 하여, 통치권과 반란의 관계에서 개인 지위에 영향을 주는 한도에서, 수여 과업은 끝났다고 예수는 이제 통지를 받았다. 세례 받으면서 본 환상 속에서, 또 깃드는 생각 조절자가 성격화한 현상에서, 이미 이 확신을 파라다이스로부터 직접 받았다.

가브리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산에서 머무르는 동안, 에덴시아의 별자리 아버지예수가브리엘에게 친히 나타나서 말했다: “기록은 완결되었나이다. 미가엘 611,211번이 네바돈 우주를 다스릴 통치권은 우주의 아버지의 바른 편에 완결된 상태로 쉬나이다. 나는 유란시아에서 육신화하는 일에, 당신의 후원자이자 형 이마누엘이 수여에서 해방한다는 지침을 가져오나이다. 지금이나 나중에 어느 때라도 자신이 택하는 방법으로, 육신화 수여를 끝내고, 아버지의 바른 편으로 올라가서 통치권을 받고, 땀흘려 얻은 권리, 온 네바돈의 무조건 통치권을 자유롭게 맡아도 좋사옵나이다. 또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권한에 따라서, 당신의 우주에서 모든 죄와 반란을 종결하는 데 상관되는 기록, 앞날에 어떤 그러한 가능한 반란이 일어나더라도 그를 처리할 무제한 전권(全權)을 당신에게 부여하는 초우주의 기록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또한 증언하나이다. 절차로 볼 때, 유란시아에서, 필사 인간의 육체를 입고 당신이 하시는 일은 끝났사옵나이다. 이제부터 당신이 걷는 길은 자신이 택하는 문제이나이다.”

에덴시아최고 아버지가 떠났을 때, 예수는 우주 복지(福祉)에 대하여 가브리엘과 오랜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마누엘에게 안부를 전하면서, 유란시아에서 바야흐로 착수하려는 과제에서, 구원자별에서 자신 수여 이전에 행해진 책임 부여와 관련하여 받았던 충고(忠告)를 늘 염두에 두겠다고 확언을 주었다.

혼자 있던 이 40일 동안 내내,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요한은, 예수를 찾는 일에 열중했다. 여러 번 그가 거하는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왔지만, 결코 발견하지 못했다.

4. 대중 사업을 위한 계획

날마다 산에서, 예수유란시아 수여에서 여생(餘生)을 위하여 계획을 세웠다. 먼저 요한과 같은 시기에 가르치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요한의 일이 목적을 이룰 때까지, 아니면 갑자기 갇혀서 요한이 멈추기까지, 비교적 은둔 상태에 남아 있기로 계획하였다. 예수요한의 두려움 없고 요령(要領) 없는 전도가 곧 집권자들의 두려움과 적의를 일으킬 것을 잘 알았다. 요한의 불안한 상황에 비추어서, 예수는 민족과 세계의 이익을 위하여, 그의 광대한 우주에 두루, 사람 사는 모든 세계를 위하여, 대중 임무 계획을 분명히 세우기 시작했다. 사람으로 미가엘의 자신 수여는 유란시아에서 있었지만, 네바돈모든 세계를 위한 것이었다.

자기의 프로그람을 요한의 운동과 조정하는 대강 계획을 살펴본 뒤에, 예수가 먼저 한 일은 머리 속에서 이마누엘의 지시(指示)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수고하는 방법에 관하여 받은 충고, 혹성(惑星)에 아무런 영구 기록을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았다. 모래를 빼고, 예수는 결코 다시 어떤 것에도 글을 쓰지 않았다. 다음에 나사렛을 방문할 때, 동생 요셉이 아주 서운해하였지만, 예수는 목수 작업장 근처의 판자들에 보존되어 있고, 옛 집의 벽에 걸려 있던 기록을 모조리 없애 버렸다. 그가 발견한 세상에 대한 경제·사회·정치적 태도에 관하여 이마누엘이 준 충고(忠告)를 곰곰이 생각하였다.

예수는 혼자 있는 이 40일 동안에 금식하지 않았다. 먹을 것이 없이 지낸 가장 오랜 기간은 산 속에서 처음 이틀이었고, 그 때 생각에 너무 골똘하여 먹는 것을 모두 잊어 버렸다. 그러나 사흘째에 먹을 것을 찾아서 갔다. 이 기간에 이 세상에서 주둔하거나 어느 다른 세상에서 온, 어떤 악한 영이나 반란 성격자들에게 시험받지도 않았다.

이 40일은 인간 지성과 신(神)의 지성 사이에 마지막 회의가 있은 기회, 아니 오히려 이 두 지성이 이제 하나가 되어 처음으로 정말로 활동하는 때였다. 이 중대한 명상의 시간으로부터 생긴 결과는, 신의 지성이 인간의 지능을 이기고 영적으로 지배했음을 확고히 보여 주었다. 이 때부터 계속, 사람의 지성은 하나님의 지성이 되었고, 비록 사람 지성의 자아(自我)가 늘 자리에 있었어도, 영적으로 변화된 이 인간 지성은 언제나 말한다. “내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 중대한 시간에 일어난 거래는 굶고 허약해진 지성이 황홀한 환상을 본 것이 아니고, “황야에서 받은 예수의 시험”이라고 나중에 기록에 남은, 뒤범벅이 된 유치한 상징(象徵)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 기간은 유란시아 수여에서 중대하고 다채로운 생애 전체에 대하여 생각하고, 한편 또한 반란으로 고립된 모든 다른 구체를 개선하는 데 무언가 이바지하면서, 이 세상에 최선(最善)으로 쓰이도록 계속 봉사하는 계획을 조심스럽게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안돈폰타의 시절부터, 아담의 실수를 거쳐서, 또 살렘에 있던 멜기세덱의 봉사에 이르기까지, 예수유란시아에서 인간 생활의 폭 전체를 생각해 보았다.

한동안 유란시아에 머무르기로 할 경우에, 자신을 세상에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 있다고 가브리엘예수에게 상기시켰다. 이 문제에서 그의 선택은 우

주 통치권이나 루시퍼 반란의 종결과 아무 상관이 없으리라는 것이 예수에게 뚜렷이 전달되었다. 세계에 봉사하는 두 가지 길은 다음과 같다:

1. 자기의 길―이 세상의 직접적 요구와 자신의 우주를 현재, 교육하는 관점에서 가장 쾌적하고 유익하게 보일까 싶은 길.

2. 아버지의 길―온 우주의 파라다이스 행정을 맡은 높은 성격자들이 상상하는 바 피조물 생명의 이상, 멀리 내다보는 이상을 모범으로 보이는 것.

땅에서 여생(餘生)을 정리할 수 있는 두 가지 길이 이처럼 예수에게 뚜렷해졌다. 이 길들은 각기, 눈앞의 상황에 비추어서 볼 때, 좋다고 볼 수 있는 무엇이 있었다. 이 두 가지 행동 방법 사이의 선택은 우주 통치권을 받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으리라는 것이 사람의 아들에게 분명해졌다. 그것은 이미 결정되었고 온 우주의 기록에서 봉인(封印)된 문제요, 친히 청구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예수가 언제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그렇게 고귀하게 시작한 것처럼, 땅에서 육신화하는 생애를 마치는 것을 좋게 본다면, 파라다이스이마누엘에게 큰 만족감을 주리라는 것이 지적되었다. 이렇게 혼자 있는 가운데 사흘째, 예수는 땅에서 생애를 마치려고 세상으로 돌아가겠다고, 두 가지 길이 있는 상황에서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택하리라고 다짐하였다. 그 결심에 언제나 충실하게, 땅에서 여생을 끝까지 살았다. 쓰디쓴 끝날까지 군주의 뜻을 하늘 아버지의 뜻에 변함없이 복종시켰다.

산의 불모지에서 40일 동안은, 큰 시험을 받는 기간이 아니라, 오히려 주가 큰 결정을 내린 기간이었다. 자신과 혼자서, 아버지의 가까운 계심과―성격화된 조절자와―교통하던 이 기간에 (개인 수호 천사가 이제 더 없었다) 하나씩 큰 결정에 도달했고, 이것은 땅에서 여생 동안 그의 정책과 행위를 통제하게 되었다. 큰 시험이 있었다는 전통(傳統)이 나중에, 이 고립된 기간에 달라붙게 되었는데, 이는 헤르몬 산에서 있었던 투쟁에 관한 이야기 조각들과 뒤섞여, 더 나아가서 금식하고 기도했다고 생각된 이 기간을 거침으로써, 모든 위대한 선지자와 인간 지도자가 공생애(公生涯)를 시작하게 만드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새롭거나 심각한 어떤 결정에 부닥쳤을 때,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추구하려고, 자신의 영과 교통하려고 은둔하는 것이 언제나 예수의 관습이었다.

땅에서 여생의 이 모든 계획에서, 예수는 두 가지 상반되는 행동 과정 때문에 인간 마음이 언제나 갈등이 있었다:

1. 민족―그리고 전 세계―가 그를 믿고 영적인 새 하늘나라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려는 강력한 소망을 품었다. 오시는 메시아에 관하여 그들이 가진 생각을 잘 알고 있었다.

2. 아버지가 승인하리라고 생각한 대로 살고 일하며, 곤경에 빠진 다른 세계들의 이익을 위하여 일을 처리하고, 하늘나라를 세우는 일에 계속 아버지를 드러내고, 아버지의 신성한 사랑하는 성품을 보여 주는 것.

이 중대한 기간 내내, 예수는 고대(古代)의 바위 동굴 안에서 살았고, 여기는 바이트 아디스라고 언젠가 부른 마을 가까이, 산 옆에 있는 피난처였다. 그는 이 바위 피난처 가까이 있는 산 옆에서 나온 작은 샘물로부터 물을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