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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에 대한 강론

뉴징검다리 2010. 2. 10. 08:02

6. 에베소에서―혼에 대한 강론

아테네를 떠나면서, 그 나그네들은 트로아스 길로 로마아시아 지방의 서울, 에베소로 갔다. 에베소 사람들의 이름난 아르테미스 신전(神殿)까지 여러 번 찾아갔는데, 여기는 그 도시로부터 3.2킬로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아르테미스는 온 소

아시아에서 가장 이름난 여신(女神)이었고, 더 오래 전에, 고대 아나톨리아 시절의 어머니 여신이 지속된 것이다. 그 여신 숭배에 바쳐진 엄청난 신전에 나타난 투박한 우상은 하늘에서부터 떨어졌다는 소문이 있었다. 신성(神性)의 상징으로서 우상을 존중하는 훈련, 가니드가 일찍부터 받은 훈련이 모두 사라지지는 않았고, 그는 소 아시아의 이 다산(多産)의 신을 기념하는 작은 은(銀) 제단을 사는 것이 아주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날 밤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을 숭배하는 것에 관하여 길게 이야기했다.

머무르던 사흘째에 그들은 항구 입구의 바닥을 훑어내는 것을 구경하려고 강가를 내려갔다. 한낮에 어느 젊은 페니키아인과 이야기했는데, 그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많이 풀이 죽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제쳐 놓고 진급한 어떤 젊은이를 질투하였다. 예수는 위로하는 말씀을 주고, 옛 히브리 속담을 인용하였다: “사람의 재능은 자리를 만들어 주고, 그를 위대한 인물 앞으로 데려간다.”

이 지중해 여행에서 방문한 모든 큰 도시 가운데, 그들이 여기서 이룬 성과는 나중에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의 일에 가장 쓸모가 적었다. 그리스도교가 에베소에서 뿌리를 내린 것은 대체로 바울의 노력을 통한 것이었다. 바울은 여기서 2년이 넘도록 살았고, 생계를 위하여 텐트를 만들면서, 티라누스의 학교 주요 강당(講堂)에서 밤마다 종교와 철학에 대하여 강의하였다.

이 지역의 철학 학교와 관련된 어느 진취적인 사상가가 있었는데, 예수는 그와 더불어 몇 차례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이 담화를 가지는 과정에 예수는 되풀이하여 “혼”이라는 말을 썼다. 이 학식 있는 그리스인은 마침내 “혼”이 무엇을 뜻하는가 물었고, 대답은 이러했다:

“혼(魂)은 사람이 자아를 비추어 보고, 진리를 헤아리고 영을 파악하는 그 부분이며, 언제까지나 인간을 동물 세계 수준 위로 높이 올려놓느니라. 자의식은 그 자체로서 저절로 혼은 아니라. 도덕적 자의식이 인간의 참된 자아 실현이요, 인간의 혼의 기초를 이루느니라. 혼은 인간의 체험에서 살아남는 잠재 가치를 대표하는, 사람의 그 부분이라. 도덕적 선택과 영적 달성, 하나님을 알고 그와 같이 되려는 충동은 혼의 특징이라. 사람의 혼은 도덕적 생각과 영적 활동과 따로 존재할 수 없느니라. 침체한 혼은 죽어 가는 혼이라. 하지만 사람의 혼은 그 지성에 거하는 신다운 영과 뚜렷이 다르니라. 신다운 영(靈)은 인간 지성의 첫 도덕적 활동이 일어남과 동시에 도착하며, 그 때가 혼이 태어나는 계제이라.

“혼을 구하거나 잃어버리는 것은 도덕적 의식이 그에 결합된 불멸하는 영적 자질과 영원히 연합함으로 살아남는 지위를 얻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상관이 있느니라. 구원은 도덕적 의식의 자각(自覺)이 영답게 변화되는 것이요, 이로서 살아남는 가치를 가지게 되느니라. 모든 형태의 혼의 갈등은 도덕적 또는 영적 자의식과 순전한 지적(知的) 자의식 사이에 조화가 모자라서 생기느니라.

“성숙하고 고귀하게 되고 영답게 변화되었을 때, 인간의 혼은,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 물질 자아와 신다운 영 사이에 개재하는 통일체에 가까워진다는 뜻에서, 하늘의 지위에 다가가느니라. 물질적으로 조사하거나 영적 증명 방법으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진화하는 혼은 묘사하기 힘들고 보여 주기는 더욱 어려우니라. 물질 과학은 혼이 존재함을 보여 줄 수 없고, 순전한 영적 시험도 그럴 수 없느니라. 물질 과학과 영적 기준이 인간의 혼이 존재함을 발견하지 못하는데도,

도덕 의식을 가진 모든 필사자는 실재하는 체험, 실제로 몸소 겪는 체험으로서, 자신의 혼이 존재함을 아느니라.”

7. 키프러스에서 머무름―지성에 대한 말씀

얼마 안 있어 나그네들은 키프러스를 향해 돛을 달았고, 로드에서 멈추었다. 긴 항해는 즐거웠고, 몸을 푹 쉬고 맑은 정신 상태로 섬 목적지에 다다랐다.

지중해 여행 길의 끝이 가까워지고 있으니까, 이번 키프러스 방문에 정말로 쉬고 노는 시간을 가지려고 계획했다. 바보스에 상륙해서 가까이 있는 산에 몇 주 동안 머물려고 당장에 양식을 모으기 시작했다. 도착한 뒤 사흘째에 짐을 단단히 실은 짐승들과 함께 산을 향하여 떠났다.

두 주 동안 세 사람은 무척 즐겁게 지냈는데, 그리고 나서 아무 예고 없이 젊은 가니드가 갑자기 몹시 아팠다. 두 주 동안 끓어오르는 열병을 앓았고, 때때로 헛소리를 했다. 예수고노드는 아픈 소년을 보살피느라고 바빴다. 예수는 익숙하고 부드럽게 소년을 돌보았고, 아버지는 아픈 젊은이를 보살피는 모든 정성에서 나타난 예수의 부드러움과 재빠름에 놀랐다. 사람이 사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소년이 너무 아파서 옮길 수 없었다. 그래서 거기 산 속에서 건강을 찾을 때까지, 그를 돌보려고 가능한 최선으로 준비하였다.

가니드가 건강을 회복하는 3주 동안, 예수는 그에게 자연과 그 여러 변화에 대하여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다. 그들이 산을 거닐면서, 소년은 묻고 예수는 대답하고, 아버지는 그 연출 전체에 감탄하면서, 얼마나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는지.

산에서 머무르던 마지막 주에, 예수가니드는 인간 지성의 작용에 대하여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시간 동안 토론한 뒤에, 소년은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선생이여, 고등 생물보다 사람이 더 높은 형태의 자의식을 체험한다고 하시니, 무슨 뜻으로 말씀하나이까?” 현대의 말투를 빌려서 다시 표현하면,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이야, 사람의 지성과 그 안에 사는 신다운 영에 관하여 이미 너에게 누차 일러 주었다. 그러나 이제 자의식이 하나의 실체임을 강조해야겠다. 어느 동물이 자의식을 가질 때, 그는 원시인이 된다. 그러한 달성은 비성격 에너지, 그리고 영을 파악하는 지성, 이 둘 사이에 활동을 조정함으로부터 생긴다. 인간 성격을 위하여 한 절대 초점(焦點),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영을 수여할 근거가 되는 것은 이 현상이다.

아이디어는 그저 감각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아이디어는 감각에 성격 자아의 반성하는 해석을 더한 것이다. 자아는 사람이 가진 감각의 합보다 더 크다. 진화하는 자아 속에서 통일성에 접근하는 무엇이 비로소 생기는데, 그 통일성은 절대 통일성의 일부분이 깃들어 계심으로부터 파생되며, 그러한 자의식하는 지성, 동물 기원을 가진 지성을 영적으로 활성화시킨다.

어떤 단순한 동물도 시간적 자의식을 소유할 수 없다. 동물은 감각 및 인식의 결합과 그 기억을 생리적으로 조정하지만, 지적이고 돌이켜보는 인간 해석의 결론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어떤 동물도 감각의 의미 있는 인식(認識)을 체험하거나, 이 통합된 육체적 체험을 목적에 맞게 연결짓는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 자의식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사실은, 나중에 영적 체험의 실체와 결합하여, 사람을 우

주의 잠재적인 아들로 만들고, 궁극에 사람이 우주의 최상 통일에 도달한다는 것을 미리 예시한다.

인간의 자아는 겨우 연속된 의식 상태의 총합도 아니다. 의식 분류 인자(因子)와 결합 인자가 효율적으로 작용하지 않으면, 한 자아(自我)라는 명칭을 정당화할 충분한 통일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통일되지 않은 그러한 지성은 인간의 지위를 가진 의식 수준에 도저히 이를 수 없다. 의식의 결합이 그저 우연(偶然)으로 생긴 것이라면, 모든 사람의 지성은 정신적으로 미친 어떤 단계들이 통제되지 않고 닥치는 대로 결합된 것임을 드러낼 것이다.

오로지 육체의 감각을 의식함으로부터 빚어진 인간 지성은, 결코 영적 수준에 이를 수 없다. 이 종류의 물질 지성은 도덕적 가치의 감각(感覺)이 전혀 모자라고, 영적으로 지배하는 안내 감각이 없을 터인데, 이것은 시간 속에서 조화되는 성격의 통일을 얻는 데 필수이며, 영원 속에서 살아남는 성격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

인간의 지성은 일찍부터 초물질 성질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참으로 돌이켜보는 인간 지능은 전적으로 시간의 한계에 묶이지는 않는다. 개인들이 일생에 이룩한 성취가 무척 다르다는 것은 서로 다른 유전(遺傳) 자질과 상이한 환경의 영향뿐 아니라, 자아가 성취한 바 아버지의 깃드는 영과 통일된 정도를 가리키며, 이것은 하나가 다른 하나와 동일시됨을 재는 척도이다.

인간의 지성은 2중으로 충성하는 갈등을 잘 견디지 못한다. 선과 악, 이 두 가지를 섬기는 노력을 체험하는 것은 그 혼에게 벅찬 부담이 된다. 최상으로 행복하고 효과 있게 통일된 지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데 전적으로 몸을 바친 지성이다. 해결되지 않은 갈등은 통일을 해치며, 지성의 분열로 끝날지 모른다. 그러나 혼의 살아남는 인품은, 어떤 값을 치르든 지성의 평화를 얻으려고 애쓴다고 해서, 고귀한 포부를 내던진다고 해서, 영적 이상(理想)을 타협한다고 해서, 길러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평화는 참된 것이 승리하기를 꿋꿋하게 주장함으로 얻어진다. 이 승리는 선의 강한 힘으로 악을 이기는 데서 이루어진다.

이튿날 살라미스를 향해서 떠났고, 거기서 시리아의 바닷가에 있는 안티옥을 향하여 출발했다.

8. 안티옥에서

안티옥로마시리아 지방의 서울이었고, 제국의 총독은 여기에 거처를 두었다. 안티옥은 50만의 주민을 가졌는데, 크기로는 제국에서 셋째 도시요, 사악하고 지독하게 부도덕한 면에서는 첫째였다. 고노드는 처리할 업무가 어지간히 있었다. 그래서 예수가니드는 혼자 있는 일이 많았다. 다프니의 숲을 제외하고, 여러 나라 말을 쓰는 이 도시 근처를 모조리 찾아다녔다. 고노드가니드는 악명 높은 이 치욕의 성지를 찾아갔지만, 예수는 따라가기를 거절했다. 그러한 장면은 인도인에게 그다지 충격이 아니었지만, 이상주의적인 히브리인에게는 불쾌했다.

예수팔레스타인에 다가가고 여행의 끝이 가까워짐에 따라서, 정신이 들고 회상(回想)하는 기분에 젖었다. 안티옥에서는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고, 도시에서 돌아다니는 일이 드물었다. 안티옥에 관하여 선생이 어째서 거의 흥미를 나타내지 않는가 여러 번 물은 뒤에, 가니드예수가 마침내 입을 열게 하였다: “이 도시는 팔레스타인에서 그다지 멀지 않으니라. 아마도 나는 언젠가 여기에 돌아올 것이라.”

가니드안티옥에서 무척 흥미 있는 체험을 겪었다. 이 젊은이는 자신이 영리한 생도임을 증명했고, 예수의 가르침을 얼마큼 이미 실천하기 시작했다. 안티옥에는 아버지의 사업과 관련된 어떤 인도인이 살았는데, 아주 불쾌하고 불평이 많아서, 그를 해고하는 것이 고려되었다. 가니드가 이 말을 듣자, 아버지의 사업 장소로 가서 동포와 함께 길게 의논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적당하지 않는 자리에 배치되었다고 느꼈다. 가니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관하여 일러 주었고, 여러 방법으로 종교적 관점을 넓혀 주었다. 그러나 가니드가 말한 것 중에서, 히브리 속담을 인용한 것이 가장 효력이 있었고, 그 지혜의 말씀은 이러했다: “네 손에 무슨 일이 맡겨지든지, 힘을 다하여 일하라.”

낙타 카라반을 위하여 짐을 준비한 뒤에 시돈으로, 거기서부터 다마스커스로 계속 내려갔고, 사흘 뒤에 사막의 모래를 횡단하는 먼 길을 위하여 준비하였다.

9. 메소포타미아에서

사막(沙漠)을 횡단하는 카라반 여행은, 여행에 이력이 난 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험이 아니었다. 선생이 낙타 스무 마리에 짐 싣는 일을 돕고, 동물을 몰려고 자원하는 것을 지켜본 뒤에, 가니드는 외쳤다: “선생이여, 당신이 할 수 없는 일도 있나이까?” “부지런한 생도가 보기에는 분명히, 선생이 명예가 없지 않구나” 하면서, 예수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이렇게 옛 도시 우르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예수우르의 초기 역사(歷史)에 무척 관심이 있었고, 여기는 아브라함의 출생지였다. 수사의 옛터와 전통에 똑같이 마음이 끌렸다. 너무 그래서, 예수에게 조사(調査)할 시간을 더 주고, 또한 함께 인도로 돌아가자고 설득하기에 더 좋은 기회를 잡으려고, 고노드가니드는 이 지역에서 체류를 3주 동안 연장했다.

가니드우르에서 지식, 지혜, 진리의 차이에 관하여 예수와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히브리 현자의 말에 크게 반하였다: “지혜가 첫째 가는 것이라. 그러므로 지혜를 얻으라. 지식을 얻으려고 추구하면서, 이해를 얻으라. 지혜를 높이라, 그리하면 지혜가 너를 높이리라. 오로지 지혜를 품고자 하면 지혜가 너를 명예롭게 하리라.”

마침내 이별의 날이 왔다. 모두가, 특히 소년이, 용감했지만, 그것은 어려운 시련이었다. 그들은 눈물을 글썽였어도 용감했다. 선생에게 작별을 알리면서, 가니드는 말했다: “잘 가소서, 선생이여, 하지만 영원히 가는 것은 아니요. 다마스커스로 다시 돌아올 때, 당신을 찾아보리이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틀림없이 무언가 당신과 같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나이다. 적어도 아버지에 관하여 당신이 내게 일러 준 것과 당신이 무척 비슷한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나는 당신의 가르침을 기억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당신을 결코 잊지 않으리이다.” 아버지는 말했다: “위대한 선생이여, 우리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고 하나님을 알도록 도와 주신 분에게, 작별(作別)이오.” 예수는 대답했다. “당신에게 평화가 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축복이 늘 당신과 함께 있기를.” 작은 배가 그들을 정박한 배까지 바깥으로 나르는 동안 예수는 바닷가에 서서 구경했다. 이렇게 주는 인도에서 온 친구들을 카락스에서 떠나보냈고, 세상에서 다시는 그들을 보지 못했다. 이 세상에서, 그들도 나중에 나사렛 예수로서 나타난 그 사람이 막 떠나보낸 바로 이 친구―그들의 선생 요수아―인 줄 결코 알지 못했다.

인도에서 가니드는 자라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 탁월한 아버지의 마땅한 후계자가 되었고, 사랑하는 선생 예수에게서 배운 고귀한 많은 진리를 바깥에 퍼뜨렸다.

가니드는 십자가에서 생애를 마친, 이상한 선생이 팔레스타인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만년(晩年)에 들었을 때, 이 사람의 아들이 전한 복음과 유대인 가정 교사의 가르침 사이에 비슷한 점을 깨닫기는 했어도, 이 둘이 실제로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결코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사람의 아들의 일생에서 요수아 선생의 사명이라고 부를까 싶은 장(章)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