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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돌아오는길

뉴징검다리 2010. 2. 10. 08:09

제 133 편

로마에서 돌아오는 길

로마를 떠나려고 준비할 때, 예수는 친구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다. 다마스커스 서기관은 아무 발표 없이 로마에 나타났고, 같은 방법으로 사라졌다. 만 1년이 지나서야 그를 알고 사랑하던 자들이, 다시 그를 만날 희망을 버렸다. 둘째 해가 저물기 전에, 그를 알았던 자들의 작은 무리가, 그의 가르침에 공통으로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더불어 즐거운 시간을 가졌던 서로의 기억을 통해서, 함께 이끌림을 발견하였다. 스토아 학파, 견유학파, 신비 종파들로 이루어진 이 작은 집단은 그리스도교의 첫 전도자(傳道者)들이 로마에 나타나기 바로 전까지, 불규칙하게 이 비공식 회의를 계속 열었다.

고노드가니드알렉산드리아로마에서 물건을 무척 많이 샀기 때문에, 소유물을 모두 타렌툼으로 짐 꾸러미 행렬을 통해서 미리 보냈고, 한편 세 나그네는 이름난 아피아 길이탈리아를 가로질러서 한가하게 걸었다. 이 여행에서 온갖 종류의 인간들과 마주쳤다. 고귀한 로마 시민과 그리스인 거류민이 숱하게 이 길을 따라서 살았지만, 이미 큰 무리의 열등(劣等)한 노예들의 자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타렌툼까지 가는 중간쯤에서 어느 날 점심을 먹으면서 쉬는 동안, 가니드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예수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솔직하게 물었다. 예수는 말했다: “비록 인간들이,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여러 면에서 다르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또 영적 세계에서 모든 필사자는 평등한 자리에 서 있느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오직 두 무리의 필사자가 있을 뿐이라. 그의 뜻을 행하기를 바라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이라. 우주가 사람 사는 세계를 바라볼 때, 우주는 마찬가지로 두 계급을 헤아리니, 하나님을 아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이라.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자들은 어느 주어진 영역의 동물과 함께 간주되느니라. 인류(人類)는 다른 자격에 따라서, 신체, 정신, 사회, 직업, 또는 도덕 면에서 저희를 보는 대로, 여러 계급으로 적절히 분류될 수 있지만, 이 다른 등급의 필사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석 앞에 나타날 때, 평등(平等)한 자리에 서느니라. 하나님은 참으로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느니라. 비록 너는 지적·사회적·도덕적 문제에서 구별되는 인간의 능력과 자질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더라도, 하나님이 계신 앞에서 예배하려고 모였을 때, 사람의 영적 모임에서 전혀 그러한 차별을 해서는 안 되느니라.”

1. 자비와 응보

타렌툼에 가까이 갔을 때 길가에서 어느 날 오후에 아주 흥미 있는 사건이 일어났다. 거칠고 약자를 괴롭히는 한 소년이 그보다 작은 소년을 사정없이 공격하는 것을 보았다. 예수는 공격받는 소년을 서둘러 도왔고, 그 아이를 구조했을 때, 작은 소년이 달아날 때까지 공격하는 소년을 단단히 붙들었다. 예수가 작은 건달을

놓아 준 순간, 가니드는 소년에게 달려들어 흠씬 두들겨 패기 시작했고, 가니드예수가 재빨리 간섭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그가 가니드를 제지하고 놀란 소년이 달아나게 만든 뒤에, 젊은이는 숨을 돌리자마자, 흥분해서 소리쳤다: “선생이여,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나이다. 자비가 당신에게 작은 소년을 구하라고 요구한다면, 응보는 몸집이 더 큰 공격하는 젊은이를 벌주라고 요구하지 않나이까?” 예수는 대답하여 말했다:

가니드야, 네가 알아듣지 못하는 게 참말이라. 자비를 베푸는 것은 반드시 개인의 일이지만, 응보(應報)의 벌은 사회나 정부나 우주 행정 집단의 활동이라. 한 개인으로서, 나는 자비를 보여야 하느니라. 나는 공격받은 소년을 구하러 가야 하고, 공격한 자를 말리려고 충분한 힘을 써도 전혀 모순이 없느니라. 바로 그것이 내가 한 일이라. 나는 공격받은 소년을 구했고, 그것이 자비를 베푸는 목적이었느니라. 그리고 나서 싸움에서 약한 쪽이 달아나게 할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공격자를 강제로 붙들어 두었고, 그 뒤에 그 일로부터 물러났노라. 더 나아가서 공격한 사람을 심판하고 그렇게 그의 동기를 판단하고―동료를 공격하게 만든 모든 것을 심의하고―다음에 그의 악행에 맞는 공정한 벌에 관하여 내 지성이 지시하는 벌을 집행하려 들지 않았느니라. 가니드야, 자비는 아낌없어도 좋지만, 응보는 엄밀한 것이라. 응보의 요구를 만족시킬 벌에 대하여 두 사람이 찬성할 듯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느냐? 한 사람은 채찍질 40번을 내리고 싶어하고, 한 사람은 스무 번, 또 한 사람은 독방에 가두는 것이 정당한 벌이라 조언하리라. 이 세상에서 그러한 책임은 집단에게 맡겨지거나, 그 집단이 선택한 대표자들이 시행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헤아릴 수 없느냐? 우주에서 심판은 동기뿐 아니라 모든 잘못의 내력(來歷)을 넉넉히 아는 자들에게 맡겨지느니라. 문명화된 사회에서, 조직된 우주에서, 응보의 시행은 공평한 재판의 결과로서 공정한 선고(宣告)를 내릴 것을 미리 가정(假定)하며, 그러한 특권은 세계들의 재판하는 집단과 모든 창조의 상급 우주들을 담당하는 전지한 행정자들에게 맡겨지느니라.”

그들은 여러 날 동안 자비를 보이고 응보를 시행하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가니드는,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 어째서 예수가 몸으로 싸움에 말려들려고 하지 않는가 이해했다. 그러나 가니드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 물었고, 결코 충분히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지 못했다. 그 질문은 이러했다: “그러나 선생이여, 더 힘세고 성질 나쁜 놈이 당신을 공격하고, 죽이려고 위협한다면, 당신은 어찌하겠나이까? 자신을 방어하려고 아무 노력을 하지 않겠나이까?” 구경하는 우주에게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사랑의 모범으로서 그(예수)가 땅에서 살고 있다고, 가니드에게 기꺼이 밝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는 비록 소년의 물음에 충분하고 만족스럽게 대답할 수 없었지만, 이만큼 말하였다:

가니드야, 이 문제들 가운데 더러는 너를 얼마나 어리둥절하게 만드는지 내가 잘 알 수 있고, 나는 네 물음에 답하려고 애써 보리라. 첫째로, 내 몸에 무슨 공격을 받더라도 나는 공격자가 하나님의 아들―육체를 입은 내 형제―인가 아닌가 결정하고, 그러한 사람이 도덕적 판단과 영적 논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 공격자에게 무슨 결과가 생기든지, 서슴지 않고 저항할 수 있는 데까지 나를 방어하리라. 그러나 자기 방어(防禦)의 경우에도, 나는 아들 지위를 가진 동료 인간을 그렇게 공격하지 아니하리라. 다시 말해서, 나를 공격한 것 때문에 재판도 받기 전에, 그를 벌주지 아니하리라.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그렇게 공격하는 것을 미리 막고, 그렇게 하지 않도록 설득하며, 그만두게 하지 못할 경우에는 완화시키려고 애쓰리라. 가니드야, 내 하늘 아버지가 위에서 돌보심을 나는 절대로 확신하노라.

나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몸을 바쳤노라. 나는 진정한 해악이 내게 쏟아질 수 있다고 믿지 않고, 적들이 나에게 무슨 해를 끼치고 싶어 하더라도 그 때문에, 일생의 일이 정말로 위태로울 수 있다고 믿지 않으며, 분명히 친구들로부터는 폭력(暴力)을 두려워할 일이 전혀 없느니라. 나는 우주 전체가 나에게 친절하다고 절대로 확신하노라―겉모습이 모두 반대로 보인다 하더라도, 진심으로 신뢰하면서 나는 이 전능한 진리를 믿기를 주장하노라.”

그러나 가니드는 완전히 만족해하지 않았다. 여러 번 이 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고, 예수는 어린 시절의 체험을 얼마큼, 또한 석공의 아들 야곱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어떻게 야곱예수를 방어하는 일을 스스로 맡았는가 듣고 나서 가니드는 말했다: “아하, 비로소 알겠나이다! 첫째로, 어떤 정상 인간이 당신처럼 그렇게 친절한 사람을 공격하고 싶어하는 일은 극히 드물고, 생각이 아주 모자라서 누가 그런 일을 하더라도, 곤경에 빠진 사람을 보면 당신이 언제나 구조하러 가는 것 같이, 당신을 도우려고 급히 달려올 다른 사람이 가까이 있을 것이 아주 확실하나이다. 마음 속으로, 선생이여, 나는 찬성하나이다. 그러나 머리 속에는 아직도, 내가 야곱이었더라면, 단지 당신이 자신을 방어하려 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당신을 주제넘게 공격하려는 버릇없는 친구들을 즐겁게 벌주었으리라 생각하나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도와 주고 곤경(困境)에 빠진 동료들을 보살피는 데 시간을 많이 쓰시므로, 일생을 통해서 나그네 길에 당신은 꽤 안전하다 짐작이 드나이다―참, 언제나 당신을 방어할 누군가가 가까이 있으리라 생각되나이다.” 예수는 대답하였다: “그 시험은 아직까지 오지 않았느니라, 가니드야. 시험이 다가올 때,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지켜야 하리라.” 자기 방어와 무저항을 다루는 이 어려운 주제에 대하여 소년은 선생에게서 더 이상 얻을 수 없었다. 또 다른 기회에 그는 예수에게서, 조직된 사회는 자체의 정당한 명령을 집행하는 데 무력(武力)을 사용할 모든 권한이 있다는 의견을 유도해 냈다.

2. 타렌툼에서 배를 타다

배가 상륙하는 곳에서 머무르며 배가 짐 내리기를 기다리면서, 그 나그네들은 제 아내를 학대하는 어떤 사람을 보았다. 예수는 버릇대로 공격받는 사람을 위해서 간섭했다. 성난 남편 뒤에 걸어가서, 어깨를 부드럽게 툭툭 두드리고 말했다: “친구여, 잠깐 따로 이야기해도 좋으냐?” 성난 사람은 그런 접근에 어리둥절했고, 부끄럽게 망설이던 한 순간이 지나자 더듬거렸다―“어― 어째서요― 좋소, 나한테서 무엇을 원하시오?” 예수가 그를 한쪽으로 끌고 가서 말했다: “친구여, 보아하니 무언가 끔찍한 일이 너에게 일어났음이 틀림없도다. 그렇게 힘센 남자로 하여금 아내, 아이들의 어머니를, 그것도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바로 여기서 때리게 만들도록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내게 일러 주기를 무척 바라노라. 내가 확신하건대, 이렇게 때리기에는 어떤 좋은 이유가 있다고 느낌이 틀림없도다. 남편으로부터 그러한 대접을 받아 마땅할 만큼 아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보아하니, 네 얼굴에는 자비를 베풀 소망은 아니더라도, 정의(正義)를 사랑함이 있음을 내가 헤아린다는 생각이 드노라. 감히 말하건대, 길 옆에서 내가 강도들에게 공격받은 것을 발견했다면, 네가 구하려고 서슴지 않고 달려왔으리라. 네 일생의 과정에서 그런 용감한 일을 많이 했다고 나는 감히 말하노라. 이제, 친구여, 무슨 일인가 내게 이르라. 여자가 무슨 그릇된 일을 했느냐, 아니면 어리석게 정신을 잃고 생각 없이 아내를 때렸느냐?” 이 사람의 가슴을 움직인 것은 말씀보다는, 예수가 말을 마쳤을 때 그를 내려다 본 친절한 모습과 인자한 미소였다. 그 사람은 말했다: “당신이 견유학파의 사제인 줄 깨닫나이다. 당신이 나를 말리셨으니 고맙소이다. 내 아내는

아무런 큰 잘못이 없고, 아내는 착한 여자이나이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헐뜯는 태도로 나를 성나게 만들어서 내가 침착을 잃소이다. 삼가지 못해서 죄송하오이다. 여러 해 전에 더 나은 길을 가르쳐 준 당신의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예전에 약속한 것에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애쓸 것을 약속하나이다. 서약하나이다.”

그리고 나서, 작별을 알리면서, 예수는 말했다: “여보게, 여자가 기꺼이 자원해서 권한을 주지 않으면, 남자는 여자에 대하여 아무런 정당한 권한이 없음을 늘 기억하여라. 네 아내는 함께 일생(一生)을 지내고, 그 투쟁을 하도록 도우며,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짐에서 훨씬 큰 몫을 맡는 일에 종사하였느니라. 이러한 특별히 봉사한 값으로, 여자가 아이들을 잉태하고, 낳고, 길러야 하는 파트너로서, 남자가 여자에게 줄 수 있는 특별한 보호를 너에게서 받는 것이 가까스로 공평할 따름이라. 아내와 아이들에게 남자가 기꺼이 주는, 사랑의 보살핌과 배려는 남자가 창조적·영적 자의식의 상급 수준에 이른 것을 재는 척도이라. 남자와 여자는, 자라서 불멸하는 혼 잠재성을 소유할 존재를 만들려고 협동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과 파트너인 것을 모르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주의 아이들의 영 어머니를 자신과 동등한 이로서 대우하느니라. 아이들의 생명 속에서 번식(繁殖)하는 신성한 체험을 충분히 너와 함께 나누는 어머니 파트너와 똑같은 조건으로, 네 일생과 그에 관계된 모든 것을 나누는 것이 하나님다우니라.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듯, 네가 아이들을 사랑할 수만 있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무한한 영, 광대한 우주의 모든 영 자식의 어머니에게 영예를 돌리고 그를 높이는 것 같이, 네가 아내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리라.”

배에 올랐을 때, 그들은 눈물을 글썽이는 부부가 고요히 부둥켜안고 서 있는 장면을 되돌아보았다. 예수가 그 사람에게 준 말씀의 후반(後半)을 귀담아들었기 때문에, 고노드는 하루 종일 명상에 잠겼고, 인도로 돌아갔을 때 가정을 다시 조직하기로 결심하였다.

니코폴리스로 가는 여행은 즐거웠지만, 바람이 유리하게 불지 않아서 느렸다. 세 사람은 로마에서 가졌던 체험을 여러 시간 동안 낱낱이 이야기하고, 예루살렘에서 처음 만난 뒤로 일어난 모든 것에 관하여 회상하였다. 가니드는 개인적으로 봉사하는 정신에 젖게 되었다. 배에서 관리하는 일을 시작했지만, 둘째 날에 종교적으로 깊은 바다에 빠졌을 때 요수아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니코폴리스에서 며칠을 보냈는데, 아우구스투스악티움 전투를 기념하려고 “승리의 도시”로 50여년 전에 이 도시를 세웠고, 그 자리는 전투하기 전에 그의 군대와 함께 텐트를 쳤던 땅이었다. 어느 예라미라는 사람의 집에서 묵었는데, 그는 유대 신앙으로 개종한 그리스인이었고, 갑판에서 그를 만났다. 사도 바울은 세 번째 선교(宣敎) 여행 길에서, 바로 그 집에서 예라미의 아들과 온 겨울을 보냈다. 니코폴리스로부터 같은 배로 고린도를 향하여 돛을 달았는데, 여기는 로마아카이아 지방의 서울이었다.

3. 고린도에서

고린도에 다다를 때가 되어서, 가니드유대 종교에 무척 관심이 생겼고, 그래서 어느 날 회당(會堂)을 지나칠 때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 예수에게 예배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 것은 당연했다. 그 날은 학식 있는 어느 랍비가 “이스라엘의 운명”에 관하여 강론(講論)하는 것을 들었고, 예배가 끝난 뒤에 어떤 그리스보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이 회당에서 주 회당장이었다. 여러 번 그들은 예

배하러 회당에 돌아갔지만, 주로 그리스보를 만나려는 것이었다. 가니드그리스보와 그 아내, 아이들이 다섯인 그 가족을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어떻게 유대인이 가족 생활을 해 나가는가 지켜보기를 무척 즐거워하였다.

가니드가 가족 생활을 연구하는 동안, 예수는 종교 생활에서 더 나은 길을 그리스보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예수는 미래를 내다보는 이 유대인과 스무 번이 넘게 회담을 가졌다. 여러 해 뒤에, 바울은 바로 이 회당에서 설교했는데, 유대인들은 그 메시지를 물리치고 회당에서 그가 계속 설교하는 것을 금하기로 투표했다. 그리고 나서 이방인들에게 갔을 때, 그리스보는 가족 전부와 함께 새 종교를 받아들이고, 바울이 나중에 고린도에서 조직한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주요한 지지자가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고린도에서 전도한 18개월 동안, 바울은 “어느 인도인 상인 아들의 유대인 가정 교사”에게 가르침을 받은 다른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나중에 실라스디모데바울과 합세하였다.

고린도에서는 세 대륙으로부터 온 모든 종족의 사람들을 만났다. 알렉산드리아로마 다음으로, 고린도는 지중해의 제국에서 가장 국제적인 도시였다. 이 도시에는 사람의 눈을 끄는 것이 많이 있었다. 가니드는 요새를 방문하는 데 지칠 줄 몰랐고, 이것은 바다에서 거의 600미터나 솟아 있었다. 또한 여가의 상당히 큰 부분을 회당 근처에서, 또 그리스보의 집에서 보냈다. 유대인 집에서 여자의 지위에 대하여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고, 나중에는 매력을 느꼈다. 이 젊은 인도인에게는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예수가니드는 또 다른 유대인, 유스도의 집에서 가끔 손님이 되었는데, 그는 회당 옆에서 살던 경건한 상인이었다. 여러 번 나중에, 사도 바울이 이 집에 머물렀을 때, 인도인 젊은이와 유대인 가정 교사가 이렇게 방문한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고, 한편 바울유스도는 그렇게 지혜롭고 눈부신 히브리인 선생이 어떻게 되었는가 궁금해하였다.

로마에 있을 때, 가니드예수가 공동 목욕탕으로 따라가려 하지 않는 것을 관찰하였다. 몇 번이나 나중에 젊은이는 남녀 관계에 관하여 예수가 더 의견을 표현하도록 유인하려고 애썼다. 젊은이의 물음에 대꾸하려고 했어도, 결코 이 주제를 길게 논하고 싶어하지 않는 듯했다. 어느 날 저녁, 요새의 담이 바다로 이끄는 곳 가까이서 걷고 있을 때, 두 매춘부가 인사를 건네었다. 가니드예수가 높은 이상을 가진 사람이요, 더러운 티가 나거나 악의 냄새가 나는 것을 모두 싫어한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고, 그는 또한 옳았다. 따라서 이 여자들에게 톡 쏘아붙였고, 무례하게 손짓해서 보냈다. 이것을 보자 예수가니드에게 일렀다: “너는 좋은 의도를 가졌지만, 하나님의 자녀에게, 비록 어쩌다가 저희가 잘못하는 자녀일지라도, 그렇게 주제넘게 말해서는 안 되느니라.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 여자들을 판단하느냐? 생계를 잇는 그러한 방법에 의존하도록 이끈 모든 상황을 혹시 아느냐? 우리가 이 문제들을 논하는 동안, 여기서 멈추어라.” 그 말씀에 창부들은 가니드보다 더욱 놀랐다.

달빛 아래서 거기 서 있는 동안, 예수는 말씀을 이었다: “모든 인간 지성 안에는 신다운 영이 살고 있으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선물(膳物)이라. 이 착한 영은 늘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고, 하나님을 찾아내고 하나님을 알도록 도우려고 애쓰느니라. 그러나 필사자 안에는 또한 자연스러운 육체적 성향이 많이 있고, 이것을 창조자는 개인과 종족의 복지(福祉)에 쓰이도록 집어넣었느니라. 자, 때때로, 남자와 여자는 자신들을 이해하는 노력과, 대체로 이기심과 죄에 지배된 세상에서, 생계를 잇는 잡다한 어려움과 맞붙어 싸우는 노력에서 헛갈리게 되느니라. 가니드야,

보아하니 이 여자들 가운데 아무도 의지하여 악하지 않으니라. 얼굴을 보니, 저희가 슬픔을 많이 겪었음을 알 수 있노라. 겉보기에 잔인한 운명의 손에 저희가 많이 고생하였고, 의도하여 이 종류의 생활을 택하지 않았느니라. 절망하다시피 낙심하는 가운데 저희는 닥친 때의 압력에 굴복하였고, 희망(希望)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벗어나는 최선의 길로서, 생계를 잇는 이 불쾌한 수단을 받아들였느니라. 가니드야,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정말로 사악하며 못된 일을 일부러 선택하느니라. 그러나 지금 눈물로 얼룩진 이 얼굴을 들여다볼 때, 너는 나쁘거나 사악한 무엇을 보느냐?” 예수가 대답을 들으려고 멈추자, 가니드는 더듬으며 목이 메었다: “아니, 주여, 보지 못하나이다. 저희에게 내가 무례한 것을 사과하나이다―나는 저희의 용서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말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저희를 용서했음을 내가 아버지 대신 말하는 것 같이, 저희가 너를 용서한 것을 저희를 대신하여 말하노라. 이제 모두 나와 함께 어느 친구의 집으로 가자. 거기서 음식을 구하고, 새롭고 더 좋은 앞날의 생활을 위하여 계획하리라.” 이 때까지 깜짝 놀란 여인들은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서로를 보고, 남자들이 길을 이끄는 대로 조용히 따라갔다.

유스도의 아내가 놀란 것을 상상해 보라. 이 늦은 시간에 예수가니드와 낯선 두 사람을 데리고 나타나서 말했다: “이 시간에 우리가 온 것을 용서하겠지만, 가니드와 나는 조금 먹고 싶고, 새로 발견한 이 친구들과 더불어, 나누어 먹고자 하니, 이들도 또한 영양이 필요하니라. 이 모든 것 외에도, 이 여인들이 인생을 새로 출발(出發)하기 위하여 무엇이 최선인가 함께 의논하는 데 관심이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우리가 오노라. 저희는 사정(事情)을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으나, 추측컨대 저희는 많은 곤경을 겪었고, 이 집에 여기 와 있는 바로 그것이, 착한 사람들을 얼마나 진지하게 알고 싶어하는가, 얼마나 기쁘게 온 세계에―하늘의 천사들에게도―저희가 얼마나 용감하고 고귀한 여자가 될 수 있는가 보여 줄 기회를 잡으려 하는가 증언하느니라.”

유스도의 아내, 마르다가 먹을 것을 식탁 위에 펼쳐 놓았을 때, 예수는 뜻밖에 떠나면서 말했다: “때가 늦었고, 젊은이의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너희―세 여인―최고자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함께 여기 두고 떠남을 용서하기 바라노라. 땅에서 새롭고 더 좋은 생활과 큰 저 세상에서 영생(永生)을 계획하는 동안 너희가 영적 안내를 받도록 기도하리라.”

이렇게 예수가니드는 여인들을 떠났다. 이제까지 두 창녀(娼女)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가니드도 말이 없었다. 몇 순간 동안 마르다도 그랬지만, 당장에 그 형편에 부닥쳤고, 이 낯선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가 희망했던 대로 모두 처리하였다. 둘 중에 나이 든 여인은 그 뒤에 얼마 있다가 영생(永生)을 얻으리라는 밝은 희망을 가지고 죽었고, 나이 어린 여자는 유스도의 사업 장소에서 일하다가, 나중에는 고린도에서 첫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일생토록 회원(會員)이 되었다.

몇 차례 그리스보의 집에서, 예수가니드는 어느 가이우스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나중에 바울을 충실히 지지하는 사람이 되었다. 고린도에서 이 두 달 동안에 몇십 명의 쓸 만한 사람들과 밀접한 이야기를 가졌고, 겉보기에 우연한 이 모든 접촉의 결과로서, 이렇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절반이 넘게 나중에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회원이 되었다.

처음에 고린도에 갔을 때, 바울은 오랫동안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유대인 가정 교사가 그가 수고하도록 얼마나 길을 잘 예비했는지 알지 못했다. 게다가, 아퀼라프리실라 때문에 이미 큰 관심이 생겼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아퀼라로마에 있을 때 예수가 접촉하게 된 견유(犬儒) 학파의 한 사람이었다. 이 부부는

에서 온 유대인 피난민이었고, 재빨리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바울은 그들과 함께 살고 일했는데, 그들이 또한 천막 만드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 때문에 바울고린도에서 체류를 연장하였다.

4. 고린도에서 개인적으로 한 일

예수가니드고린도에서 더 흥미 있는 체험을 많이 겪었다. 큰 무리의 사람들과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들은 예수로부터 받은 가르침 때문에 큰 소득을 얻었다.

방앗간 주인에게, 신다운 생활에서 알아듣기 어려운 것들을 동료 필사자 가운데 약하고 가냘픈 자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려고 진리의 알곡을, 사는 체험의 방아 속에서 가루로 만드는 것에 관하여 가르쳤다. 예수는 말했다: “영적(靈的)으로 이해하는 면에서 젖먹이인 자들에게 진리의 젖을 주라. 생생하게 사랑으로 베푸는 봉사 속에서, 영적 음식을 맛있는 모양으로, 네게 묻는 자들 하나하나의 받아들일 능력에 맞게 준비하여라.”

로마의 백부장에게 말했다: “케자의 것은 케자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리라. 이 홀로 주장할 수 있는 존경을 케자가 제 것으로 주제넘게 가지지 않는 한, 하나님께 성실히 봉사하는 것과 케자를 충실히 섬기는 것은 서로 충돌하지 않느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충성은, 그를 알게 된다면, 자격 있는 황제에게 헌신하는 일에 너를 더욱 충성하고 충실하게 만들 것이라.”

미트라교의 열심 있는 지도자에게 말했다: “영원한 구원의 종교를 찾으니 너는 잘하는구나. 하지만 사람이 만든 신비와 인간 철학 사이에서 그러한 영화로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니라. 영원한 구원의 신비(神秘)는 네 자신의 혼 안에 거함을 알지 못하느냐? 하늘의 하나님은 그의 영을 네 안에 살라고 보내셨고, 이 영은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께 봉사하는 모든 사람을 이 생명으로부터, 죽음의 입구를 거쳐서, 하나님이 자녀들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영원한 빛의 높이까지 인도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 결코 잊지 말라. 하나님을 아는 너희는, 그와 같이 되기를 참으로 동경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쾌락주의 학파의 선생에게 말했다: “너는 최선을 고르고 좋은 것을 존중하니 잘 하지만, 인간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계심을 깨달음으로 얻어지고 영의 분야에서 구현된 것, 인생에서 더 큰 일을 헤아리지 못하니 네가 지혜로우냐? 인간의 모든 체험 속에서 큰 일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깨달음이요, 그의 영은 네 안에서 살면서, 우리의 공통된 아버지, 즉 모든 창조의 하나님이요 우주들의 주가 친히 계신 앞에 이르는 길, 길고도 거의 끝없는 나그네 길에서, 너를 인도하려 하시니라.”

그리스인 계약자요 건축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친구여, 사람들의 물질적 건물을 짓는 동안, 혼 안에서 신성한 영의 모습을 좇아서 영적 인품을 기르라. 이 세상에서 건축가로서 세우는 업적이 하늘나라의 영적 아들로서 세울 업적을 앞서지 못하게 하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시간 속에 저택을 짓는 동안, 네 몸을 위하여 영원한 저택에서 살 권리를 얻기를 소홀히 하지 말라. 한 도시가 있음을 늘 기억할지니, 그 기초는 의로움과 진리요, 건축하고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라.”

로마인 재판관에게 말했다: “네가 사람들을 재판하는 것 같이, 네 자신이 언젠가 우주의 통치자들의 법정 앞에 재판받으러 올 것을 기억하라. 네가 언젠가 이렇

최상 중재자의 손에서 자비로운 배려를 몹시 바라리니, 올바르게, 아니 자비롭게 판단하라. 이렇게 글자 그대로 뿐 아니라, 법률 정신에 안내를 받아, 비슷한 형편에서 네가 재판받고 싶은 대로 재판하라. 앞에 끌려 온 사람들의 필요에 비추어 공평 정신에 지배된 응보를 네가 내리는 것 같이, 네가 언젠가 온 땅의 재판관 앞에 설 때, 자비로 부드러워진 응보를 기대할 권리가 있으리라.”

그리스 여인숙의 안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최고자의 아이들을 대접하는 자로서 친절을 베풀라.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살려고 내려온 그의 영의 수단으로 깃드는 사람들 속에 계신 하나님께 네가 봉사함을 더욱 깨닫고서, 날마다 하는 너의 고된 일을 예술의 높은 경지까지 올리라. 이로서 저희의 정신을 변화시키고 혼을 인도하여, 신성한 영이 주신 이 모든 선물의 파라다이스 아버지를 알게 하라.”

예수는 어느 중국인 상인(商人)과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별 인사를 하면서, 예수는 훈계하였다: “오직 하나님을 예배할지니, 그는 참된 영 조상이라. 아버지의 영이 네 안에 늘 살고, 언제나 네 혼을 하늘 방향으로 가리킨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 불멸하는 영은 의식하지 못하게 인도하시며, 이를 따르면, 하나님을 발견하는 높은 길을 네가 분명히 계속 가느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다다를 때, 그것은 그를 추구함으로써 네가 점점 더 그와 같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자 씨여, 잘 있거라. 하지만 오직 한 계절 동안이니, 영혼의 아버지파라다이스를 향하는 자를 위하여 즐거운 정거장을 많이 마련해 놓은 빛의 세계들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것임이라.”

브리튼에서 온 나그네에게 말했다: “형제여, 네가 진리를 찾고 있음을 깨닫고, 모든 진리의 아버지 영이 어쩌면 네 안에 거할까 싶다고 제시하노라. 자기 혼의 영과 이야기하려고 너는 언제라도 진지하게 애쓰느냐? 그러한 일은 정말로 어렵고, 성공했다는 느낌을 주는 일이 드무니라. 모든 그러한 멋진 인간 체험의 대다수가 하나님을 아는 그러한 필사자의 혼 속에, 상의식(上意識)에 등록된 채로 오래 남아 있어야 하느니라. 그런데도 물질 지성이 그 깃드는 영과 교통하려고 하는 모든 정직한 시도는 분명히 성공하느니라.”

집을 뛰쳐나온 소년에게 예수는 일렀다: “네가 달아날 수 없는 것―하나님과 네 자신―이 두 가지가 있음을 기억하라. 어디로 가든지, 너는 네 몸, 네 마음 속에서 사는 하늘 아버지의 영, 이 둘을 가지고 가느니라. 아이야, 자신 속이는 일을 그만 두어라. 인생의 사실에 부딪치는 용감한 습관을 차분히 가져라. 내가 가르친 대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영생이 분명하다는 확신을 굳게 가져라. 오늘부터 계속, 진정한 대장부, 삶을 용감하고 총명하게 부딪칠 각오를 가진 대장부가 될 뜻을 가져라.”

선고받은 죄수에게 마지막 시간에 말했다: “형제여, 너는 불운을 당하였구나. 길을 잃어버렸고, 범죄의 그물 속에 걸려들었구나. 너와 말한 것으로 보아, 현세의 목숨을 바야흐로 잃게 할 일을 계획하지 않은 줄 내가 잘 아노라. 그러나 너는 이 해악을 저질렀고, 친구들은 네가 죄 있다고 판결하였고 죽어야 하리라고 판결하였구나. 너나 나는 국가(國家)가 선택하는 방법에 따라서, 이 자기 방어 권리를 부인해서는 안 되느니라. 네 잘못에 대한 벌을 인간적으로 피할 길이 전혀 없는 듯하구나. 동료들은 네가 저지른 죄에 따라서 너를 판단해야 하지만, 용서를 얻으려고 상소해도 좋은 재판관이 있으니, 그는 너의 진정한 동기와 더 좋은 의도(意圖)에 따라서 너를 판단하리라. 너의 뉘우침이 진정하고 믿음이 성실하면, 너는 하나님

심판 받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느니라. 너의 실수에 사람이 지워 주는 사형(死刑)의 벌이 따른다는 사실은, 하늘 법정 앞에서 네 혼이 응보를 받고 자비를 얻을 기회를 해치지 않느니라.”

예수는 진리에 갈급한 큰 무리의 사람들과 친밀한 이야기를 많이 가졌고, 이 기록에서 자리를 할애하기에는 너무나 많다. 세 나그네는 고린도에서 체류를 즐겁게 지냈다. 교육의 중심으로 더 이름난 아테네를 제쳐 놓고, 고린도는 이 로마 시대에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번성하는 이 상업 중심에서 두 달 동안 머무른 것은 세 사람에게 값진 체험을 많이 얻을 기회를 주었다. 이 도시에서 체류는 로마로부터 돌아가는 길에 멈춘 중에서 가장 흥미 있는 체재(滯在) 중에 하나였다.

고노드고린도에서 많은 관심거리가 있었지만, 마침내 사업을 마쳤고 아테네를 향하여 출범하려고 준비했다. 작은 배를 타고 여행했는데, 그 배는 고린도의 항구들 중 하나에서 다른 데로, 16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육지의 길로 내륙으로 운반될 수 있었다.

5. 아테네에서―과학에 대한 말씀

그들은 그리스의 과학과 배움의 옛 중심에 곧 다다랐고, 가니드아테네에, 한때 알렉산더 제국(帝國) 문화의 중심이었던 그리스에 있다는 생각으로 기쁨에 떨었는데, 그 제국의 경계는 자기 나라 인도에까지도 뻗었다. 거래할 일이 거의 없어서, 고노드는 대부분의 시간을 예수가니드와 함께 보냈고, 흥미 있는 여러 장소를 찾아보고, 젊은이와 다능한 선생의 흥미 있는 토론에 귀를 기울였다.

한 큰 대학(大學)이 아직도 아테네에서 번성하였고, 세 사람은 거기 있는 배움의 학당을 자주 방문했다. 알렉산드리아의 박물관(博物館)에서 열렸던 여러 강의에 참석했을 때, 예수가니드플라톤의 가르침을 샅샅이 토론한 적이 있었다. 모두 그리스의 예술을 즐겼고, 그 본보기는 아직도 여기저기 도시 근방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가 어느 날 저녁에 여인숙에서 예수가 어느 그리스 철학자와 과학에 대하여 가졌던 토론을 즐겁게 들었다. 이 학자가 거의 세 시간 동안 이야기한 뒤에, 강연을 마쳤을 때, 예수는, 현대의 생각으로 보면, 이렇게 말했다:

과학자는 언젠가 인력(引力)·빛·전기(電氣)의 에너지 명시, 즉 물력의 명시를 측량할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이 과학자들은 결코 (과학적으로) 이 우주 현상이 무엇인가 말해 줄 수 없다. 과학은 물리적 에너지 활동을 다루고, 종교는 영원한 가치를 다룬다. 참된 철학은 지혜로부터 생기며, 이 양적·질적 관찰 대상을 서로 관련지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순전한 자연 과학자는, 영적으로 눈먼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수학적 자만(自慢)과 통계적 자기 본위의 병을 앓을 위험이 언제나 존재한다.

논리는 물질 세계에서 타당하고, 수학(數學)은 물리적 사물에 적용하는 데 국한될 때 믿을 만하다. 하지만 생명의 문제들에 적용되었을 때, 둘 중에 어느 것도 완전히 믿을 만하거나 오류가 없다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생명은 온전히 물질이 아닌 현상을 포함한다. 한 사람이 10분에 양 한 마리의 털을 깎는다면, 수학은 10 사람이 그 양을 1분에 깎을 수 있다고 한다. 건전한 수학이지만, 참말이 아니니, 왜냐하면 10사람이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로 아주 끔찍하게 방해가 되어서 일은 크게 지연될 것이다.

한 사람이 어떤 지적·도덕적 가치의 한 단위를 대표한다면, 10 사람이 이 가치의 10배를 대표할 것이라고 수학은 주장한다. 그러나 인격을 다룰 때, 그러한 성격의 결합은 단순한 산술 합계보다는, 관계된 등식(等式)에서 사람들의 수를 제곱한 것과 같은 양이라 말하는 것이 진실에 더 가깝겠다. 조정되어 일하는 조화 속에서 한 사회 집단의 인간들은 그 부분의 단순(單純) 합계보다 훨씬 더 큰 세력을 대표한다.

수량은 한 사실로서 확인될 수 있고, 이로서 과학적 일관성이 된다. 질(質)은 지성이 풀이하는 문제이니까, 가치의 어림 값을 대표하며, 따라서 개인의 체험으로 남아야 한다. 과학과 종교 모두가 독단이 줄고 비평을 더 잘 견딜 때, 철학은 우주를 지적으로 이해하는 면에서 비로소 통일을 이룩할 것이다.

네가 우주의 실제 작용을 헤아려 볼 수만 있다면, 우주에는 통일성이 있다. 실재하는 우주는 영원한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친절하다. 진정한 문제는, 사람의 유한한 지성이 어떻게 논리적이고 참되고 일치하는 사고(思考)의 통일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지성이 우주를 아는 이 상태는 오로지, 양적(量的) 사실과 질적(質的) 가치가 파라다이스 아버지 안에서 공통의 원인을 가진다는 것을 깨달음으로 얻을 수 있다. 그러한 실체의 개념은 우주 현상에서 목적 있는 통일성을 보는 좀더 넓은 통찰력을 낳고, 성격이 진취적으로 성취하는 영적 목표까지도 드러낸다. 이것은 계속 변하는 비성격 관계와 진화하는 성격 관계가 있는 살아 있는 우주의 변치 않는 배경을 감지할 수 있는 통일성 개념이다.

물질과 영(靈), 그리고 이 둘 사이에 개재하는 상태는, 실재하는 우주가 참으로 통일되는 수준, 서로 관계되고 서로 결합된 세 수준이다. 사실과 가치가 담긴 우주 현상이 얼마나 분산되어 보이는가에 상관 없이, 이것들은 결국 최상위 안에서 하나가 된다.

물질 존재의 실체는 눈에 보이는 물질뿐 아니라 인식되지 않는 에너지에도 달라붙는다. 우주의 에너지가 아주 늦추어져서 필요한 정도의 운동을 얻을 때, 그 때 적당한 조건 밑에서 바로 이 에너지는 질량이 된다. 명백한 실체들이 있음을 혼자 파악할 수 있는 지성, 그 자체가 또한 실체임을 잊지 말라. 이 에너지와 질량, 지성, 영으로 이루어진 이 우주의 근본 원인(原因)은 영원하다―우주의 아버지와 그의 절대 동등자들의 성품 및 반응 안에서 존재하고, 또 그들 안에 있다.

예수의 말씀에 그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도 남았다. 그리스인이 그들을 떠나면서 말했다: “민족 우수성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고 종교 외에 무언가 이야기하는 유대인을 마침내 만나게 되었소이다.” 그들은 잠자려고 물러갔다.

아테네에서 체류한 것은 즐겁고 유익했지만, 인간과 접촉하는 데서는 특별히 성과(成果)가 좋지는 않았다. 그 시절에는 허다한 아테네 사람이, 지난 시절의 명성에 관하여 지적으로 자만심을 가졌든지, 아니면 정신적으로 어리석고 무지했으며, 그들은 그리스에 영화(榮華)가 있고 그 민족의 지성에 지혜가 있던 초기 시절의 열등한 노예들의 자손이었다. 당시에도 아테네 시민들 가운데 아직도 날카로운 지성이 많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