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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로 가는길

뉴징검다리 2010. 2. 10. 08:25

제 130 편

로마로 가는 길

로마 세계의 여행은 예수가 땅에서 사신 일생에서 스물 여덟 살 되던 해의 대부분과 스물 아홉 되던 해 전부를 써 버렸다. 예수와 인도(印度)에서 온 두 원주민―고노드와 아들 가니드―는 서기 22년 4월 26일, 일요일 아침에 예루살렘을 떠났다. 그들은 일정대로 여행했고, 예수페르시아 만에서 이듬해, 서기 23년, 12월 10일, 카락스 시(市)에서 그 아버지와 아들과 작별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요파의 길을 따라 케자리아로 갔다. 케자리아에서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는 배를 탔다. 알렉산드리아로부터 크레테라시아를 향하여 돛을 달았다. 크레테에서부터 키레네를 스쳐서, 카르타고를 향해서 항해하였다. 카르타고에서 나폴리로 가는 배를 탔고, 말타·시라큐스·메시나에서 멈추었다. 나폴리에서부터 카푸아로 갔고, 거기서부터 아피아 길을 따라서 로마로 여행하였다.

로마에서 머무른 뒤에, 육로(陸路)로 타렌툼까지 갔고, 거기서 그리스아테네를 향하여 돛을 달았으며, 니코폴리스고린도에서 멈추었다. 아테네에서부터 트로아 길을 따라서 에베소로 갔다. 에베소에서부터 키프러스로 항해했고, 가는 길에 로드에 들렸다. 키프러스에서 방문하고 쉬느라고 상당한 시간을 보냈고, 다음에 시리아안티옥을 향해 돛을 달았다. 안티옥에서부터 남쪽으로 시돈으로 갔고, 다음에 다마스커스로 건너갔다. 거기서부터 카라반을 이용하여 메소포타미아로 여행했으며, 탑사쿠스라리사를 지나쳤다. 바빌론에서 얼마 동안 지내고, 우르와 다른 곳들을 찾아보았고, 다음에 수사로 갔다. 수사에서부터 카락스로 여행했고, 그 장소로부터 고노드가니드는 인도를 향해서 출발했다.

다마스커스에서 넉 달 일하는 동안, 예수고노드가니드가 사용하는 언어의 기본을 깨우쳤다. 거기서 그는 그리스어를 어느 인도 언어로 번역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고노드의 고향(故鄕) 지역에서 온 본토인의 도움을 받았다.

이 지중해 여행에서, 예수가니드를 가르치고 고노드의 사업(事業) 회의와 사교 접촉에서 통역자로 활동하면서 하루의 반을 보냈다. 날마다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써도 되었고, 동료 인간들과 몸소 가깝게 접촉하는 데 썼다. 이 땅의 필사자들과 가졌던 이 친밀한 관계가 대중(大衆)에게 봉사하기 바로 전에 있었던 이 시절에 그의 활동의 특징을 나타냈다.

눈으로 직접 관찰하고 실제로 접촉함으로 예수는 서양과 레반트의 상급 물질적·지적 문명을 알게 되었다. 고노드와 똑똑한 그의 아들로부터 인도·중국의 문명과 문화에 대해서 많이 배웠는데, 고노드 자신이 인도의 시민이요, 황인종의 제국(帝國)을 세 번 널리 여행했기 때문이다.

젊은이 가니드는 가까이 접촉하는 이 오랜 기간에 예수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들은 서로에게 깊이 정이 들었고, 소년의 아버지는 함께 인도로 돌아가자고

여러 번 예수를 설득하려 애썼지만, 예수는 언제나 팔레스타인에 있는 가족에게 돌아가야 하는 필요성을 이유로 들어 사양하였다.

1. 요파에서―요나에 대한 강연

요파에서 머무르는 동안, 예수가디아를 만났는데, 이 사람은 어느 시몬이라는 무두장이를 위해서 일하는 필리스티아인 통역이었다.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고노드의 대리인들은 이 시몬과 거래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고노드와 아들은 케자리아로 가는 길에 그를 방문하고 싶어했다. 요파에서 묵는 동안, 예수가디아는 따듯한 친구가 되었다. 이 젊은 필리스티아인은 진리(眞理)를 찾는 사람이었다. 예수는 진리를 주는 사람이었고, 유란시아에서 그 세대에게 진리였다. 위대한 진리 탐구자와 위대한 진리 수여자가 만날 때, 그 결과로 새 진리를 체험함으로부터 사람을 해방하는 큰 깨우침이 생겨난다.

어느 날 저녁을 먹고 난 뒤에, 예수와 젊은 필리스티아인은 바닷가를 걸었는데, 가디아는 이 “다마스커스 서기관”이 히브리 전통에 무척 조예(造詣)가 깊은 줄 모르고, 예수에게 요나타르쉬시까지 불운의 항해를 떠났다고 소문난 부두(埠頭)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논평을 마치고 나서, 예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당신은 큰 물고기가 정말로 요나를 삼켰다고 생각하시나이까?” 예수는 이 젊은이의 생애가 이 전통에 엄청나게 영향을 받았고, 그것을 깊이 생각해 본 결과로 의무를 회피하려고 애쓰는 어리석음을 통감(痛感)했다는 것을 파악했다. 따라서 예수는 실용적으로 살려 하는 가디아가 현재 가진 동기의 기초를 갑자기 무너뜨릴 만한 것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는 말했다. “친구여,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인생을 살아야 할 요나이라. 멀리서 유혹하는 것들이 있는 곳으로 달아남으로 생활의 현재 의무를 피하려고 할 때 항상, 그렇게 함으로써 진리의 힘과 올바름의 세력이 지휘하지 않는 영향이 직접 통제하는 곳으로 우리를 밀어 넣느니라. 의무(義務)를 회피하는 것은 진리를 희생하는 것이라. 빛과 생명의 봉사를 회피하는 것은, 오로지 다루기 힘든 고래 같은 이기심과 괴로운 갈등이 생기게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을 저버리는 그런 요나들이, 절망의 아주 깊은 곳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과 그의 선하심을 찾으려고 마음을 돌이키지 않으면, 궁극에는 이 이기심이 어두움과 죽음으로 이끄느니라. 그러한 낙심한 혼들이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을 때―진리를 갈망하고 올바름을 목마르게 찾을 때―아무 것도 저희를 계속 포로로 붙잡아 둘 수 없느니라. 아무리 깊이 저희가 빠졌을지라도, 마음을 다하여 저희가 빛을 구하면,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의 영이 포로 생활로부터 저희를 구제하리라. 생활의 나쁜 형편은 새롭게 된 봉사와 더 지혜롭게 살 새 기회가 있는 마른 땅으로 저희를 뱉어내리라.”

가디아예수의 가르침에 힘차게 마음이 움직였다. 그들은 바닷가에서 밤늦게 이야기했고, 숙박소로 가기 전에, 함께 서로를 위하여 기도했다. 이 사람은 나중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 나사렛 예수를 깊이 믿었고, 도르가의 집에서 어느 날 저녁에 베드로와 잊을 수 없는 논쟁을 했던, 바로 그 가디아였다. 가디아는 부유한 가죽 상인(商人) 시몬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려고 마지막으로 결심한 것과 많은 상관이 있었다.

(이 지중해 여행에서 예수가 동료 필사자들과 함께 개인적으로 하신 일에 관한 이 이야기에서, 받은 허락에 따라서, 이 발표 당시에 유란시아에서 쓰이는 현대의 표현으로 우리는 그의 말씀을 자유롭게 번역할 것이다.)

예수가디아와 마지막으로 가졌던 담화는 선과 악에 대한 토론이었다. 이 젊은 필리스티아인은 세상에 선과 악이 나란히 존재하기 때문에 부당하다는 느낌으로 마음이 많이 산란하였고,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무한히 선하시면, 어찌하여 우리가 악의 슬픔을 당하도록 버려 둘 수 있나이까, 결국 누가 악을 창조하나이까?” 그 시절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선과 악을 다 창조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는 결코 그런 잘못을 가르치지 않았다. 이 물음에 대답하여 예수는 말했다. “아우여, 하나님은 사랑이라. 그런즉 선하심이 틀림없도다. 그의 선하심이 너무나 크고 현실이기 때문에, 작고 비현실적인 악한 것들을 품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은 아주 분명히 선하시므로, 부정적인 악이 절대로 그분 속에 들어설 자리가 없느니라. 선에 저항하고 아름다움을 물리치고 진리에 불충한 자들이, 미숙하게 선택하고 생각 없이 발을 헛디디는 것이 악이라. 악(惡)은 다만 미숙하게 적응하지 못하는 것, 또는 무지가 낳는 뒤집고 왜곡하는 영향이라. 악은 현명하지 못하게 빛을 물리치는 발꿈치를 따르는 불가피한 어두움이라. 악은 어둡고 참이 아닌 어떤 것이요, 알면서 품에 안고 의지(意志)하여 지지했을 때, 그 악이 죄가 되느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진리와 잘못 사이에 선택하는 힘을 너에게 부여하심으로, 빛과 생명의 긍정적 길에서 부정(不正)의 잠재성을 창조하셨느니라. 그러나 총명한 생물이 생명의 길을 잘못 택하여 그러한 악한 잘못의 존재를 의지할 때까지, 잘못은 정말로 존재하지 않느니라. 그러한 악은 나중에 그러한 고의적이고 반항하는 생물이 알면서 계획하여 선택함으로 죄로 올라가느니라. 이것이, 수확할 때까지 자연이 밀과 독보리가 나란히 자라도록 버려 두는 것 같이, 생명이 끝날 때까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선과 악이 함께 가도록 버려 두는 까닭이라.” 그들이 나중에 가진 토론이 머리 속에서 이 중대한 말씀의 참 의미를 뚜렷하게 설명해 준 뒤에, 가디아는 그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에 충분히 만족해 하였다.

2. 케자리아에서

그들이 타려고 생각했던 배에 방향을 잡는 거대한 노 하나가 갈라질 위험이 있는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예수와 그의 친구들은 기대했던 시간을 지나서 케자리아에 머물렀다. 선장(船長)은 새 노가 만들어지고 있는 동안, 항구에서 남아 있기로 결정했다. 이 일에 숙련된 나무 세공인(細工人)들이 부족했고, 그래서 예수는 돕겠다고 자청하였다. 저녁에 예수와 친구들은 항구 둘레에서 산책하는 길로 쓰이는 아름다운 담 위에서 걸었다. 도시의 수도(水道) 체계, 도시의 길거리와 하수도를 씻어내는 데 파도를 이용하는 기법을 예수가 설명하는 것을 가니드는 크게 좋아했다. 인도에서 온 이 젊은이는 아우구스투스의 성전에 크게 감명을 받았는데, 이것은 고지에 자리를 잡았고, 그 위에는 로마 황제의 거대한 조각(彫刻)이 세워져 있었다. 그들이 묵던 둘째 날 오후에, 세 사람은 2만 명을 앉힐 수 있는 거대한 원형(圓形) 극장에서 벌어지는 공연에 참석했고, 그 날 밤 극장으로 그리스 연극을 보러 갔다. 이것은 가니드가 일찍이 구경한 바 이런 종류의 첫 전시였고, 그는 예수에게 그 연극에 대하여 많이 물었다. 셋째 날 아침에, 총독의 궁전을 공식으로 방문했는데, 케자리아팔레스타인의 서울이었고, 로마의 행정 장관의 거처였기 때문이다.

여인숙에는 몽골리아에서 온 한 상인이 또한 묵고 있었다. 극동에서 온 이 사람이 그리스어를 썩 잘 했기 때문에, 예수는 몇 차례나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사람은 예수의 생활 철학에 많이 감명을 받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날마다 복종하는 수단으로, 땅에 있는 동안 하늘의 삶을 사는 것”에 관한 지혜로운 말씀을

결코 잊지 않았다. 이 상인은 도교(道敎) 신자였는데, 이 가르침 때문에 우주의 이 있다는 교리를 굳게 믿는 사람이 되었다. 몽골리아로 돌아갔을 때, 이 상급 진리를 이웃과 사업 친구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고, 그러한 활동이 낳은 직접 결과로서, 맏아들은 도교의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 젊은이는 일생을 통해서, 상급의 진리를 위하여 큰 영향력을 미쳤고, 그의 아들과 손자는 그를 이어받아, 마찬가지로 하나의 신하늘의 최고 통치자―의 교리에 뜨겁게 충성하였다.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의 동부 지파는 필라델피아에 본부가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형제들보다 예수의 가르침을 더 충실하게 지켰다. 한편,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아무도 중국(中國)에 가거나, 바울과 같은 사람이 아무도 인도(印度)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은 유감이었다. 거기에는 그 때 하늘나라의 새 복음의 씨를 심기에 영적 토양이 아주 유리했다. 필라델피아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던 바와 같이, 바로 이 예수의 가르침은, 베드로바울의 설교가 서양(西洋)에서 했던 것처럼, 영적으로 갈급한 아시아 민족들의 지성에 바로, 즉시, 효과 있게 호소했을 것이다.

어느 날 방향 젓는 노에서 예수와 같이 일하던 젊은이들 가운데 하나가, 조선소에서 수고하는 동안 예수가 시간마다 들려 준 말씀에 무척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땅에 있는 아이들의 복지에 관심을 가진다고 예수가 넌지시 비쳤을 때, 이 젊은 그리스아낙산드는 말했다. “만약에 하나님들이 내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어째서 이 작업장에 있는 모질고 부당한 반장(班長)을 없애 버리지 않나이까?” 그는 예수의 대답에 놀랐다. “네가 친절의 길을 알고 정의(正義)를 존중하니까, 잘못하는 이 사람을 더 좋은 이 길로 이끌도록 아마도 하나님들이 가까이 데리고 오신 듯하구나. 아마 너는 이 형제를 모든 다른 사람에게 더 싹싹하게 만들 소금인가 하니라. 다시 말해서, 네가 맛을 잃지 않았다면 그렇도다. 현재 상태로, 그의 악한 길이 너에게 불리하게 영향을 미치므로, 그는 네 주인이라. 선의 힘을 입어 악을 다스리기를 주장하고, 그래서 너희 두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에서 주인이 되는 것이 어떻겠느냐? 네가 이 일에 공평하고 자연스러운 기회를 준다면, 내가 예측하건대, 네 안에 있는 선이 그 사람 안에 있는 악을 이길 수 있느니라. 필사자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잘못과 악을 이기는 투쟁에서, 영적 에너지와 신성한 진리로 물질 생활의 파트너가 되는 흥분을 즐기는 것보다 더 황홀한 모험이 없느니라. 영적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영적 빛의 길, 생명(生命)의 길이 되는 것은 놀랍고도 변화를 일으키는 체험이라. 네가 이 사람보다 진리를 더 축복받았으면, 그의 곤궁이 너에게 도전해야 하느니라. 분명컨대 너는 바닷가에서 기다리면서 헤엄칠 수 없는 동료 인간이 죽는 것을 구경할 겁쟁이는 아니라! 물 속에 빠져 죽는 몸과 비교해서, 어둠 속에서 발버둥치는 이 사람의 혼은 얼마나 더 가치 있느냐!”

아낙산드예수의 말씀에 힘차게 마음이 움직였다. 당장에 그는 예수가 무슨 말씀을 했는가 상관에게 이야기했고, 그 날 밤, 둘이 혼의 행복에 관하여 예수의 조언을 구하였다. 나중에, 그리스도교의 소식이 케자리아에 선포된 뒤에, 이 두 사람은, 하나는 그리스인이요 다른 하나는 로마인이었는데, 빌립이 전파한 것을 믿었고, 그가 세운 교회에서 뛰어난 신자들이 되었다. 나중에 이 젊은 그리스인은 로마인 백부장 코넬리우스의 집사로 임명되었고, 코넬리우스베드로의 봉사를 통해서 신자가 되었다. 바울케자리아에서 감옥에 갇히는 그 날까지, 아낙산드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계속 빛을 비쳐 주었고, 그 때 고통받고 죽어 가는 자들을 돌보는 동안, 아낙산드는 2만 유대인의 대학살이 있을 때 사고로 죽었다.

가니드는 이 무렵에 가정 교사가 동료 인간들에게 이렇게 특별히 친히 봉사하는 데 여가를 어떻게 쓰는가 비로소 알게 되었고, 이 젊은 인도인은 그침 없이 이렇게 활동하는 동기가 무엇인가 찾아내기로 결심하고, 물었다. “어째서 당신은 이 낯선 사람들과 그렇게 계속 이야기하는 데 몰두하시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가니드야, 하나님을 아는 사람에게는 아무도 낯선 자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내는 체험에서, 너는 모든 사람이 형제임을 발견하느니라. 새로 발견한 형제를 만나는 유쾌함을 즐거워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느냐? 사람의 형제·자매와 알게 되고, 저희의 문제를 알고, 저희를 사랑하기를 배우는 것이 인생에서 최고의 체험이라.”

이것은 밤늦게 이어진 회담이었고, 이 과정에서 젊은이는 하나님의 뜻과, 또한 의지라고 부르는, 인간 지성의 선택하는 행위, 이 둘의 차이점을 일러 달라고 예수에게 부탁했다. 예수는 다음의 내용으로 말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길이요, 어떤 잠재하는 대안(代案)에 부닥쳐서도, 하나님의 선택과 협동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더욱 하나님처럼 되는 진취적 체험이요, 하나님은 선하고 아름답고 참된 모든 것의 근원이요 운명이다. 사람의 뜻은 사람의 길이며, 필사자가 무엇이 되고 무엇을 행하려고 하는 그 목표의 총합이요 알맹이이다. 의지(意志)는 스스로 의식하는 존재가 알면서 선택하는 것이요, 총명한 반성에 근거를 두고, 결정과 행위로 이끈다.

그 날 오후에, 예수가니드는 아주 영리한 양 치는 개와 즐겁게 놀았는데, 가니드는 개가 혼(魂)이 있는지, 개가 의지를 가졌는지, 알고 싶어했고, 그 물음에 응답하여, 예수는 말했다. “개는 물질 인간, 주인을 알 수 있는 머리가 있으나,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개는 영적 성품을 소유하지 않고, 영적 체험을 누릴 수 없느니라. 성품으로부터 유래하고 훈련으로 커진 의지를 개가 가졌을까 싶지만, 그러한 지성의 힘은 영적 세력이 아니요, 돌이켜보지 않는 한, 인간의 의지와 비교할 수도 없느니라―그것은 상급의 도덕적 의미를 구별하거나, 영적이며 영원한 가치를 선택함으로 생기는 결과가 아니라. 영적으로 분별하고 진리를 택하는 그러한 능력의 소유가 필사 인간을 도덕적 존재, 즉 영적 책임의 속성과 영원히 살아남는 잠재성(潛在性)을 부여받은 생물로 만드느니라.” 예수는 이어서, 동물 세계가 시간이 되어 언어를 개발하거나, 영원 속에서 성격이 살아남는 것에 해당하는 무엇이라도 체험하기를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동물에 그러한 정신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날 가르침을 받은 결과로서, 가니드는 사람의 혼이 동물의 몸 속으로 건너간다는 관념에 다시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다음 날 가니드는 이 모두를 아버지와 함께 이야기했고, 고노드의 물음에 대답하여 예수는 설명했다. “동물로 존재하는 물질적 문제들과 상관 있는 현세의 결정을 내리는 데 완전히 몰두한 인간 의지는, 때가 되면 멸망할 운명을 가졌소. 진심으로 도덕적인 결정을 내리고 영적인 것을 무조건 선택하는 자들은, 이처럼 깃드는 신다운 영과 점진적으로 동일시하고, 이로서 영원히 살아남는 가치로 점점 더 변하는 것이오―신성한 봉사로 끝없이 진보하는 것이오.”

바로 이 날 우리는 그 중대한 진리를 처음으로 들었는데, 현대의 말투로 말한다면, 다음을 의미할 것이다: “의지는 주관적 의식으로 하여금 그 자체를 객관적으로 표현하고 하나님처럼 되기를 열망하는 현상을 체험하게 만드는 인간의 지성이 명백히 나타나는 것이다.” 바로 이 의미에서, 돌이켜보고 영적인 생각을 가진 모든 인

간이 창조성을 가지게 될 수 있다.

3. 알렉산드리아에서

케자리아 방문에서는 파란이 많았고, 배가 준비되었을 때, 예수와 두 친구는 어느 날 한낮에 에집트알렉산드리아를 향하여 떠났다.

세 사람은 알렉산드리아까지 아주 유쾌한 여행을 즐겼다. 가니드는 그 항해를 기뻐했고, 예수는 질문에 대답하느라고 바빴다. 그 도시의 항구에 다가가자, 젊은이는 파로스의 큰 등대를 보고 기쁨에 떨었다. 이 등대는 알렉산더가 터널 굴착기로 육지까지 연결했던 섬에 자리잡고 있는데, 알렉산더는 이렇게 훌륭한 두 항구를 지었고, 이로서 알렉산드리아아프리카·아시아·유럽의 해상(海上) 무역의 십자로로 만들었다. 이 큰 등대는 세계의 7대 경이(驚異)의 하나였고, 그 뒤의 모든 등대의 효시(嚆矢)가 되었다. 이들은 사람이 만든 이 눈부신 생명 구조 장치를 구경하려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가니드가 탄성을 지르는 가운데, 예수는 말했다: “자, 아이야, 인도로 돌아갈 때, 아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너는 이 등대처럼 되리라. 어둠 속에서 주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생명의 빛처럼 되리니, 그렇게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안전히 구원의 항구로 이르는 길을 보여 주리라.” 예수의 손을 꽉 잡으면서, 가니드는 말했다, “그렇게 하겠나이다.”

그리스도교의 초기 선생들이 아주 순전히 로마 세계의 서양 문명에만 눈을 돌렸을 때,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지적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1세기에 메소포타미아의 신자들이 간주한 바와 같이, 여러 집단의 아시아 종교가들이 쉽사리 받아들였을 것이다.

상륙한 지 세 시간이 지나서, 그들은 길고도 넓은 시가의 동쪽 끝 가까이에 정착했는데, 이 거리는 넓이가 30미터요 길이가 8킬로미터였으며, 1백만 인구를 가진 이 도시의 서쪽 경계까지 뻗어 있었다. 그 도시의 주요한 인기물―대학 (박물관), 도서관, 알렉산더의 왕립 대무덤, 궁전, 넵튠 신전, 극장, 체육관―을 처음 살펴본 뒤에, 고노드는 사업을 돌보았고, 한편 예수가니드는 도서관으로 갔는데,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컸다. 여기에 모든 문명화된 세계, 그리스·로마·팔레스타인·파샤·인도·중국, 그리고 일본(日本)으로부터도, 거의 1백만의 원고가 수집되어 있었다. 이 도서관에서 가니드는 온 세계에서 인도 문학의 가장 큰 수집을 보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머무르는 동안 내내, 그들은 날마다 여기서 얼마큼 시간을 보냈다. 예수는 이 장소에서 히브리 성서(聖書)가 그리스어로 번역된 것에 관하여 가니드에게 일러 주었다. 세계의 모든 종교에 관해서 이야기를 거듭했고, 예수는 각 종교에 담긴 진리를 이 젊은 지성에게 지적하려고 애쓰면서, 늘 덧붙여 말했다. “그러나 야웨멜기세덱의 계시와 아브라함의 약속(約束)으로부터 발전된 하나님이라.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멜기세덱이 살고 가르치던 바로 그 땅을 나중에 차지했고, 거기서부터 멜기세덱은 온 세계에 선생들을 보냈느니라. 다른 어느 세계 종교보다, 저희의 종교는 궁극에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주의 아버지로서 더 뚜렷이 인식했음을 보여 주었느니라.”

예수의 지도를 받으며 가니드는, 비록 하위의 신들을 다소 인정하더라도 우주의 신을 인정하는, 세상의 모든 종교의 가르침을 수집하였다. 많은 토론이 있은 뒤에 예수가니드로마인들이 종교 안에 참된 하나님을 가지지 않았다고, 그 종교는 도저히 황제 숭배를 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그리스인들은 철학은 가졌어도, 성격

을 가진 하나님이 있는 종교가 도저히 있다 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신비 종파들은 버렸는데, 중복되는 혼란 때문이었고, 그 다양한 개념들이 다른 더 오래 된 종교들로부터 유래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이 여러 번역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들어졌지만, 로마에서 체류가 끝날 때가 가까워서야, 가니드는 선택한 것들을 마침내 정리하고 자신의 개인적 결론을 덧붙였다. 세계의 신성한 문헌의 가장 훌륭한 저자(著者)들이 모두 영원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얼마큼 뚜렷이 인정했고, 하나님의 특성 및 필사 인간과 가지는 관계에 대하여 상당히 일치하는 것을 발견하고 가니드는 많이 놀랐다.

예수가니드알렉산드리아에서 머무르는 동안에 박물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박물관은 보기 드문 물건들의 수집이 아니라, 오히려 미술·과학·문학의 대학(大學)이었다. 학식 있는 교수들이 여기서 날마다 강의했고, 그 시절에 여기는 서양 세계의 지적 중심이었다. 하루하루 예수는 여러 강의를 가니드에게 통역해 주었다. 둘째 주의 어느 날, 젊은이는 소리를 질렀다. “요수아 선생이여, 당신은 이 교수(敎授)들보다 더 아시나이다. 당신은 일어서서, 내게 말해 준 큰 일을 저희에게 일러 주어야 하나이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저희는 안개에 쌓여 있나이다. 아버지께 말씀드려 그렇게 주선하도록 하리이다.” 예수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너는 선생을 칭찬하는 생도로구나. 하지만 이 선생들은 너와 내가 저희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지 않느니라. 영적으로 변화되지 않은 배움에서 생기는 자만(自慢)은 인간의 체험에서 믿을 수 없는 것이라. 참된 선생은 늘 배우는 자로 남아 있음으로 지적 성실성을 유지하느니라.”

알렉산드리아는 서양의 뒤섞인 문화를 가진 도시였고, 로마 다음으로 세계에서 제일 크고 웅장했다. 여기에 세계에서 제일 큰 유대인 회당이 자리를 잡았는데, 알렉산드리아 산헤드린, 즉 다스리는 70 장로의 행정부였다.

고노드가 사업에서 거래하는 숱한 사람 가운데 어떤 유대인 은행가 알렉산더가 있었는데, 그의 형제 필로는 당시에 이름난 종교 철학가였다. 필로는, 칭찬할 만하지만 지나치게 어려운 일,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神學)을 조화시키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가니드예수필로의 가르침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하였고, 그의 강의를 더러 참석하기를 기대했지만 알렉산드리아에서 머무르는 동안 내내, 헬라화된 이 이름난 유대인은 아파서 드러누워 있었다.

예수가니드에게 그리스의 철학과 금욕주의 학파(學派)의 많은 것을 칭찬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민족에서 어떤 사람들의 분명치 않은 가르침처럼,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영원자를 아는 가운데 생생한 체험을 즐기도록 이끈다는 의미에서만, 이 신앙 체계들이 종교라는 진실을 젊은이에게 인식시켰다.

4. 실체에 대한 강론

알렉산드리아를 떠나기 전날 밤, 가니드예수플라톤의 가르침에 관하여 대학에서 강의하던, 정부(政府) 교수들 가운데 한 사람과 오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수는 학식 있는 그리스인 선생을 위하여 통역해 주었지만, 그리스 철학을 반박하느라고 자신의 가르침을 주입하지 않았다. 고노드는 그 날 저녁에 볼일이 있어 떠나 있었다. 그래서 그 교수가 떠난 뒤에, 선생과 생도는 플라톤의 신조에 관하여, 오랫동안 가슴을 털어놓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상의 물질인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더 실질적인 영적 실체들의 그림자 같은 반영(反映)이라는 이론과 상관 있는 그리스인의 어떤 가르침을 조건을 달아서 인정하였지만, 젊은이가 생각하도록

더 믿을 만한 기초를 놓으려고 애썼다. 그래서 우주에 있는 실체(實體)의 성질에 관하여 긴 논설을 시작하였다. 내용으로 보아서, 현대의 표현법을 빌리면, 예수가니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주 실체의 근원은 무한자이다. 유한한 창조에서 물질적 사물은 파라다이스 원형(原形), 영원한 하나님우주 지성, 이 두 가지가 시간과 공간에서 일으키는 반향이다. 물리적 세계에서 원인, 지적 세계에서 자의식, 영 세계에서 진보하는 자아는―우주의 규모로 투영되고, 영원한 관계를 가진 가운데 통합되고, 완전한 품질과 신다운 가치를 겪은 이 실체들은―최상위의 실체를 구성한다. 그러나 늘 변하는 우주에서 원인, 지능, 영 체험인 최초의 성격자는 변함이 없고 절대적이다. 절대자들, 그리고 절대적인 물리적 상태, 지적 인정(認定), 또는 영적 신분에 이른 것을 제쳐 놓고, 만물은 한없는 가치와 신성한 품질을 지닌 영원한 우주에서도 변할 수 있으며, 가끔 변하기도 한다.

유한한 생물이 진보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은 우주의 아버지를 인식하는 것이요, 최상위를 아는 것이다. 그 때에도 최종 운명을 가진 그런 존재들은 물리적 세계의 운동 속에서, 그 물질 현상 속에서, 줄곧 변화를 겪는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영적 우주를 계속 올라가면서 자아가 진보함을 알고 있으며, 지적 우주에 대하여 이해가 깊어지는 가운데, 그에 반응하여, 성장하는 의식을 계속해서 알고 있다. 오로지 의지(意志)의 완전·조화·일치 속에서, 피조물은 창조자와 하나가 될 수 있다. 피조물이 오로지 유한한 개인 의지를 창조자의 신성한 뜻에 한결같이 맞추어서 시간과 영원 속에서 계속 살아감으로, 그러한 신성(神性)의 상태에 도달하고 그를 유지한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욕구가 하늘 가는 하나님 아들의 혼 속에서 언제나 가장 높아야 하며, 그 지성을 지배해야 한다.

눈이 하나인 사람은 결코 원근(遠近)의 깊이를 선하게 보기를 희망할 수 없다. 한 눈으로 보는 물질 과학자나, 한 눈으로 보는 영적 신비주의자와 우화(寓話) 작가들은 우주 실체의 참 깊이를 정확하게, 눈에 선하게 보고 적절히 이해할 수 없다. 생물의 체험에서 모든 참다운 가치는 인식의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다.

지성이 없는 원인은, 투박하고 간단한 것으로부터 세련되고 복잡한 것을 진화시킬 수 없고, 영이 없는 체험은 시간 속에 사는 필사자들의 물질 지성으로부터 영원히 살아남는 신다운 인품(人品)을 진화시킬 수 없다. 무한한 의 특징을 순전히 나타내는, 우주의 한 가지 속성은 점진적으로 에 도달하여 살아남을 수 있는 성격을 이처럼 끝없이 창조적으로 수여하는 것이다.

성격(性格)은 우주 재산이요, 우주 실체의 한 단계이니, 이것은 한없는 변화와 공존할 수 있고 동시에 모든 그러한 변화가 있는 바로 그 와중(渦中)에서, 그 뒤에 언제까지나, 신분을 지닌다.

생명(生命)은 우주 상황에서 생기는 요구와 가능성에 최초의 우주 원인이 적응하는 것이며, 우주 지성의 행위로 말미암아, 영이신 하나님의 영(靈) 불꽃을 당김으로써 생명이 존재하게 된다. 생명의 의미는 그 적응 능력에 있고, 생명의 가치는―하나님을 의식하는 높이까지도 이르는―그 진보 능력에 있다.

자의식(自意識)을 가진 생명이 우주에 잘못 적응하면 우주의 불화(不和)를 일으킨다. 우주의 경향으로부터 성격 의지가 마침내 벗어나는 것은 지적 고립, 성격의

분리로 끝난다. 깃드는 영 안내자를 잃어버리면 존재가 영적으로 중지되는 일이 따른다. 그러면 총명하고 진보하는 생명은, 그 자체로서 저절로, 신성한 창조자의 뜻을 표현하는 우주, 목적 있는 우주가 존재한다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명이다. 이 생명은, 전체로서, 더 높은 가치를 향하여 투쟁하며, 그 마지막 목표는 우주의 아버지이다.

지능의 상급 보살핌, 준(準)영적 보살핌을 제쳐 놓고, 사람은 기껏해야 정도 면에서 동물 수준을 넘는 지성을 소유한다. 따라서 (예배하는 정신과 지혜가 없는) 동물은 상의식(上意識), 가장 높은 의식을 체험할 수 없다. 동물의 지성은 기껏해야 객관적 우주를 의식한다.

지식은 물질적 지성, 즉 사실을 분별하는 지성의 분야이다. 진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의식하는, 영적으로 부여된 지능의 영토이다. 지식은 보여 줄 수 있는 것이요, 진리는 체험하는 것이다. 지식은 지성의 소유물이요, 진리는 혼, 진보하는 자아의 체험이다. 지식은 비영(非靈) 수준의 작용이며, 진리는 우주들의 지성 영 수준의 한 단계이다. 물질 지성의 눈은 사실적 지식의 세계를 파악하지만, 영적으로 변화된 지능의 눈은 참다운 가치가 있는 세계를 헤아린다. 이 두 견해는, 동시화되고 조화되어서, 실체의 세계를 드러내며, 그 안에서 지혜는 우주의 현상을 진보하는 개인 체험을 통해서 풀이한다.

잘못(악)은 불완전에 대한 벌이다. 불완전한 질이나 잘못 적응하는 사실은 물질 수준에서 비평적 관찰과 과학적 분석에 따라서, 도덕 수준에서는 인간의 체험에 따라서, 드러난다. 악이 존재함은 지성이 정확하지 않고 진화하는 자아가 미숙하다는 증명이다. 따라서, 악은 또한 우주 해석이 불완전함을 재는 척도이다. 잘못할 가능성은 지혜를 얻는 과정에서, 즉 부분적이며 현세적인 것으로부터 온전하고 영원한 것으로, 상대적이며 불완전한 것으로부터 최종이며 완전한 것으로, 나아가는 계획에 본래부터 생긴다. 잘못은 사람이 파라다이스의 완전함까지 올라가는 우주의 길에서 반드시 마주쳐야 하는 상대적 불완전의 그림자이다. 잘못(악)은 실제로 우주의 품질은 아니다. 단지 불완전한 유한자(有限者)의 불완전성이 최상위궁극위의 올라가는 수준과 가지는 관계에서 상대성이 관찰되는 것이다.

예수가 비록 이 모두를 가니드가 알아듣기에 가장 적당한 말로 소년에게 이야기했지만, 이야기 끝에 가니드는 눈꺼풀이 무거워졌고, 곧 잠에 빠졌다. 이튿날 아침 크레테 섬의 라시아를 향하는 배를 타려고 일찍 일어났다. 그러나 출발하기 전에, 소년은 악에 대하여 아직도 질문이 더 있었고, 이에 대하여 예수는 대답했다:

악은 상대성 개념이다. 사물과 존재들로 이루어진 유한한 우주가 무한한 하나의 영원한 실체들이 우주에 표현하는 생명의 빛을 가림에 따라서, 그러한 우주가 던지는 그림자에서 나타나는 결점을 관찰함으로부터 악이 생겨난다.

잠재 악은 무한과 영원이 시간과 공간에 제한되어 표현된 것으로서, 하나님의 계시(啓示)의 필요한 불완전성에 본래부터 있다. 완벽한 것이 있는 가운데 부분적인 것이 있다는 사실은 실체의 상대성이며, 총명하게 선택할 필요를 만들어 내고, 영이 인식하고 반응하는 여러 가치 수준을 세운다. 현세의 제한된 피조물 지성이 지니는 개념, 무한한 자에 대한 불완전하고 유한한 개념은 그 자체로서 저절로 잠재 악이다. 하지만 최초에 본래부터 있던 이 지적 부조화(不調和)와 영적 부족함을

이치에 맞게 영적으로 수정하면서 정당화되지 않은 결함을 확대하는 잘못은 실제 악을 실현하는 것에 해당한다.

정적(靜的)인 죽은 개념은 다 잠재 악이다. 상대적이고 살아 있는 진리의 유한한 그림자는 계속 움직인다. 정적 개념은 변함없이 과학·정치·사회·종교를 늦추게 한다. 정적 개념은 어떤 지식을 대표할지 모르지만, 지혜가 모자라고 진리가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우주 지성의 인도 밑에서 우주가 조정되고, 최상위의 영과 에너지로 말미암아 우주가 안정되게 통제되는 것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상대성의 개념이 너를 잘못 인도하지 못하게 하라.

5. 크레테 섬에서

그 여행자들은 크레테에 가는 목적이 꼭 하나 있었는데, 놀고, 섬에서 주위를 걸어 다니고, 산에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 시절의 크레테인들은 둘러싼 민족들 사이에서 부러워할 만한 명성을 누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예수가니드는 많은 사람을 상급 수준의 생각과 생활로 이끌었고, 예루살렘으로부터 첫 전도자(傳道者)들이 도착했을 때, 후일에 복음의 가르침을 빨리 받아들이도록 기초를 닦았다. 예수는 이 크레테인들을 사랑했다. 하지만 나중에 그 섬에 교회를 다시 조직하려고 타이투스를 보냈을 때 바울은 이들에 관하여 지나친 말을 하였다.

크레테의 산허리에서, 예수는 종교에 관하여 고노드와 처음으로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크게 감명을 받고서 말했다, “당신이 일러 주는 모든 것을 소년이 믿다니 놀라운 일이 아니요, 하지만 다마스커스는커녕, 예루살렘에도 사람들이 그런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도무지 몰랐소.” 바로 이 섬에서 머무르는 동안에 고노드는 처음으로 예수에게 함께 인도로 돌아가자고 제안하였고, 가니드예수가 그러한 주선에 아마 찬성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기뻐하였다.

어느 날 가니드예수가 어째서 대중 교육자의 일에 헌신하지 않았는가 물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아이야, 모든 일은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느니라. 너는 세상에 태어났지만, 아무리 걱정하고, 아무리 급한 성미를 나타내도, 네가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 모든 그러한 문제에서, 때를 기다려야 하느니라. 오직 시간이 나무에 달린 푸른 과일을 익게 하리라. 시간이 지나야 계절이 바뀌고, 해가 뜬 뒤에 해가 지느니라. 나는 지금 너와 네 아버지와 함께 로마로 가는 길이고, 오늘은 그것으로 충분하니라. 내 앞날은 송두리째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느니라.” 그리고 나서, 모세에 관하여, 경계하면서 기다리고 계속 준비하던 40년의 이야기를 가니드에게 일러 주었다.

좋은 항구를 방문하던 길에 가니드가 결코 잊지 못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에피소드의 기억은 그가 태어난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바꾸려고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언제나 바라게 만들었다. 어느 술 취한 타락한 사람이 공공(公共) 도로에서 한 여자 노예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 소녀의 곤경을 보았을 때, 예수는 앞으로 달려가서, 미친 사람의 공격을 받던 소녀를 구출하였다. 놀란 아이가 그에게 달라붙어 있는 동안에, 딱한 그 사람이 화가 나서 주먹으로 허공을 치느라고 지칠 때까지, 그는 힘차게 내민 바른 팔로 성난 사람을 안전한 거리에 붙들어 두었다. 가니드예수가 그 일을 처리하는 것을 돕고 싶은 충동을 울컥 느꼈지만, 아버지가 제지하였다. 그들이 그 소녀의 언어로 말하지 못했어도, 그 여자는 자비로운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고, 모두 세 사람이 집까지 바래다주었을 때, 그 여자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이것은 예수가 육체로 있던 일생을 통해서 동포들과 가진 가운데 아마도 가장 개인적인 충돌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날 저녁에 가니드에게 어

째서 술 취한 사람을 세게 주먹으로 치지 않았는가 설명하는 데 곤란을 겪었다. 가니드는 적어도 이 사람이 그 소녀를 때린 것만큼이나 두들겨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6. 두려움을 가진 젊은이

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예수는 두려움이 많고 풀이 죽은 한 젊은 남자와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료들과 사귐으로 위로와 용기를 얻지 못하고, 이 젊은이는 산에서 고독을 찾고 있었는데, 그는 무력하고 열등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자랐다. 이 타고난 경향은 자라면서 그 소년이 부딪쳤던 수많은 어려운 상황 때문에 커졌는데, 주목할 것은 열두 살이었을 때 아버지를 잃은 것이다. 그들이 만났을 때, 예수는 말했다: “여보게, 친구여! 이렇게 좋은 날에 어찌하여 그리 풀이 죽어 있는가? 무언가 너를 슬프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면, 아마 내가 어떤 방법으로 도울 수 있느니라. 어쨌든, 도움을 제공하면 참으로 마음이 기쁘니라.”

젊은이는 입을 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는 그 사람에게 다시 접근하며 말했다. “네가 사람들을 피하려고 이 산에 올라온 줄 내가 아노라. 그래서 물론, 나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지만, 네가 이 산에 익숙한지 알고 싶노라. 산길의 방향을 아느냐? 혹시, 피닉스로 가려면 어느 길이 제일 좋은가 내게 일러 줄 수 있느냐?” 자, 이 소년은 이 산에 아주 익숙했고, 정말로 예수에게 피닉스로 가는 길을 일러 주는 데 무척 흥미가 생겼다. 너무 흥미를 느껴서, 땅에 모든 산길을 표시하고 모든 세부를 넉넉히 설명하였다. 그러나 잘 가라 하고 예수가 마치 떠나려는 것처럼 하다가 갑자기 돌아서서 말했을 때, 그는 깜짝 놀랐고, 호기심이 생겼다. “네가 쓸쓸한 가운데 혼자 있고 싶어하는 것을 내가 잘 아노라. 하지만 피닉스로 가는 길을 어떻게 최선으로 찾는가 너에게 그렇게 관대하게 도움받고 나서, 산허리에서 네가 여기 머무르는 동안, 마음 속에서 찾는 운명의 목표까지 가는 최선의 길에 관하여 도움과 안내를 네가 호소하는데, 그에 응답하려고 조금도 애쓰지 않고, 생각 없이 떠나는 것은 친절하지도 공평하지도 않으니라. 여러 번 거쳐 가서 네가 피닉스로 가는 산길을 잘 아는 것처럼, 소망이 실망으로 변하고 포부가 좌절된 도시로 가는 길을 내가 잘 아노라. 게다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니, 실망을 주지 아니하리라.” 소년은 거의 압도되었지만, 그럭저럭 더듬거렸다. “하지만―당신께 아무 것도 부탁하지 아니하였나이다―” 그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으면서 예수는 말했다. “아니라, 아이야, 말로는 아니라도, 몹시 바라는 눈으로 내 마음에 호소하였느니라. 아이야, 동료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낙심과 절망에 가득 찬 네 얼굴에, 도움을 하소연하는 웅변이 있느니라. 여기 앉아라. 그러면 자아의 슬픔으로부터, 사람의 형제 정신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봉사하는 가운데, 사랑의 활동을 하는 기쁨으로 이끄는 길, 봉사의 산길과 행복의 큰길에 관하여 너에게 이르리라.”

이 때가 되어서, 젊은이는 예수와 몹시 말하고 싶어했다. 무릎을 꿇고서, 도와 달라고, 개인적 슬픔과 패배의 세계로부터 달아날 길을 보여 달라고, 예수에게 간청했다. 예수가 말했다. “친구여, 일어나라! 대장부처럼 서라! 조그만 적들에게 둘러싸이고, 숱한 장애물 때문에 처졌는지 모르지만, 이 세상과 우주의 큰 일과 진정한 일이 네 편을 드느니라. 땅에서 가장 권세 있고 번영하는 사람에게 하는 것과 똑같이, 태양은 아침마다 너에게 인사하느니라. 보아라―너는 튼튼한 몸과 힘센 근육을 가졌고, 육체적 장비는 보통을 넘는구나. 물론, 여기 산허리에 앉아서, 진정한 불운과 상상하는 불운(不運)을 슬퍼하는 동안에 네 몸은 거의 쓸모가 없느니라. 하지만 큰 일이 처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서둘러 간다면, 몸을 가지고 큰

일을 할 수 있느니라. 불행한 자아로부터 달아나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느니라. 너와 너의 생활 문제들은 현실이요, 사는 동안 문제들을 피할 수 없느니라. 하지만 다시 볼지니, 네 머리는 맑고 능력이 있느니라. 튼튼한 몸은 지휘할 총명한 머리를 가졌느니라. 가진 문제를 풀도록 머리를 일하는 데 쏟고, 지능이 너를 위하여 일하도록 가르치고, 이제는 그만 생각이 모자라는 동물처럼 겁에 눌리지 말라.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두려움에 비천한 노예가 되고 우울과 패배의 종이 되기보다, 머리는 일생의 문제들을 푸는 데 용감한 연합군이 되어야 하느니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귀중하게, 진정한 업적을 이룰 잠재성(潛在性)은 네 안에 살고 있는 영이라. 두려움의 사슬로부터 몸을 해방하고, 이처럼 영적 성품으로 하여금 살아 있는 믿음의 힘찬 존재로 말미암아 비로소 너를 무위(無爲)의 악으로부터 구원하게 만든다면, 그 영은 머리가 스스로 통제하도록 자극하고 영감을 주며, 몸을 움직이게 하리라. 다음에, 당장에, 새롭고 모든 것을 지배하는, 동료를 사랑하는 마음이 꽉 붙들고 있으므로, 이 믿음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리라. 이 사랑은 곧 너의 혼을 넘치게 채우리니, 네가 하나님의 아이라는 의식이 네 가슴 속에 태어났음이라.

“오늘, 아이야, 하나님을 위하여,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사람에게 몸 바쳐 봉사하는 사람으로서 다시 태어나고 다시 세움받아야 하느니라. 네 몸 안에서 인생에 다시 적응되었을 때, 마찬가지로 너는 우주에 다시 적응되느니라. 다시 태어났으니―영에게서 태어났으니―이제부터 전 생애가 승리하여 성취하는 일생이 되리라. 어려움은 활력을 주고, 실망은 너를 솟구치게 하리라. 어려움이 도전(挑戰)하고 장애물이 너를 자극하리라. 일어나라, 젊은이여! 사람을 졸아들게 하는 두려움과 도망치는 비겁에 싸인 생활에 작별을 알리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땅에서 사람에게 고귀하게 봉사(奉仕)하는 데 헌신하고, 영원 속에서 하나님께 훌륭하고 영원한 봉사를 하도록 예정된 필사자로서, 서둘러 임무로 돌아가서 육체를 입은 인생을 살라.”

이 젊은이 포춘은 나중에 크레테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지도자가 되었고, 타이투스크레테 신자들을 향상시키려고 수고할 때 가까운 동료가 되었다.

참으로 푹 쉬고 기분이 상쾌해진 어느 날 한낮 무렵에, 나그네들은 북 아프리카카르타고로 돛을 달려고 준비했고, 키레네에서 이틀 동안 멈추었다. 여기서 예수가니드루푸스라는 한 소년을 응급 치료했는데, 그는 짐을 싫은 송아지 수레가 무너져서 다쳤다. 집으로 그를 어머니한테로 데려갔는데, 아버지 시몬은 나중에 한 로마 군인의 명령을 받아서 어느 사람의 십자가를 지었고, 그 사람이 한때 아들을 보살핀 낯선 사람이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7. 카르타고에서―시간과 공간에 대한 강론

카르타고로 가는 길의 대부분에, 예수는 사회·정치·상업에 관하여 동료 여행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의 한 마디도 종교에 대하여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처음으로 고노드가니드예수가 훌륭한 이야기꾼임을 발견했고, 갈릴리에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도록 그를 바쁘게 만들었다. 그들은 또한 그가 예루살렘이나 다마스커스가 아니라, 갈릴리에서 자랐음을 알게 되었다.

어쩌다 만난 사람들의 대다수가 예수에게 이끌리는 것을 눈여겨보았기 때문에, 가니드는 사람이 친구를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물었다. 그 때 선생은

말했다. “동료들에게 관심을 가지라. 어떻게 사랑하는가 배우고, 저희가 바란다고 네가 확신하는 무슨 일을 저희에게 할 기회를 살펴보라.” 그리고 나서 유대인의 옛 속담을 인용하였다―“친구를 가지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친절을 보여야 한다.”

카르타고에서 예수는 한 미트라교 사제와 함께 불멸에 대하여, 시간과 영원에 대하여, 길고 기억에 남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페르시아인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을 받았고, 정말로 예수한테서 배우고 싶어했다. 그가 던진 여러 질문에 답하여, 오늘날의 말로 표현하면, 예수는 다음 내용으로 이야기했다:

시간은 생물의 의식이 파악하는, 현세의 사건들이 흐르는 시냇물이다. 시간은 연속된 배열에 주어지는 이름이고, 이 배열에 따라서 사건들이 인식되고 분리된다. 공간의 우주는 고정된 파라다이스 거처의 바깥에서, 어떤 내부 위치에서도 보이는, 시간에 관계된 현상이다. 시간의 움직임은 오직, 시간 현상으로서 공간에서 움직이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한 관계에서만 나타난다. 온 우주에서 파라다이스와 그 들은 시간과 공간, 이 둘을 초월한다. 사람이 사는 세계들에서,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영이 깃들고 인도하는) 인격은 현세의 사건들의 물질적 순서를 뛰어넘을 수 있는 실체, 물리적으로 연결된 유일한 실체이다.

동물은 사람처럼 시간을 느끼지 않는다. 사람에게도, 구분되고 제한된 관점 때문에, 시간은 사건들의 연속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람이 올라감에 따라서, 사람이 안으로 진보함에 따라서, 이 사건 행렬의 커지는 시야(視野)는, 전체의 모습이 점점 더 식별되는 그러한 것이다. 예전에 사건의 연속으로 보이던 것이, 전체로서, 완전하게 관계된 주기(週期)로 보일 것이다. 이 방법으로 둥그런 동시성은 직선으로 연속된 사건들로 보던 옛날의 의식(意識)을 점점 더 갈아치울 것이다.

시간에 제약을 받는 대로, 일곱 가지 다른 공간 개념이 있다. 공간은 시간으로 측정되며, 시간을 공간으로 측정하지는 않는다. 과학자의 혼동은 공간의 실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다. 공간(空間)은 겨우 우주 물체들의 관계가 변동하는 것에 대한 지적 개념이 아니다. 공간은 비어 있지 않으며, 사람이 알건대 어느 정도라도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지성이다. 지성(知性)은 물체들의 공간 관계의 개념과 따로 활동할 수 있다. 공간은 생물의 지위를 가진 모든 존재에게 상대적으로, 비교적 유한하다. 의식이 일곱 가지 우주 차원을 자각함에 가까이 갈수록, 잠재 공간의 개념은 궁극성에 더욱 가까이 간다. 하지만 공간 잠재성은 오직 절대 수준에서만 참으로 궁극적이다.

우주의 승천하고 완전하게 되는 수준에서 우주 실체는, 커지고 언제나 상대적인 의미를 가졌음이 명백하다. 궁극에는, 살아남는 필사자들이 일곱 차원의 우주에서 신분을 얻는다.

물질 기원을 가진 지성의 시공(時空) 개념은, 의식하고 상상하는 성격자가 우주들의 여러 수준으로 올라감에 따라서, 연달아 확대되도록 정해져 있다. 사람이 존재의 물질 평면과 영적 평면 사이에 개재하는 지성에 이를 때, 시공 관념은 파악하는 질과 체험의 양에서 엄청나게 확대될 것이다. 진보하는 영(靈) 성격자의 커지는 우주 개념은 통찰력의 깊이와 의식의 규모, 이 두 가지가 확대되기 때문이다. 성격이 위로, 안으로 계속, 을 닮는 초월 수준까지 지나감에 따라서, 시공 개념은 절대자들의 개념, 시간이 없고 공간이 없는 개념에 점점 더 가까워질 것이다. 상대적

으로, 초월적 달성에 따라서, 궁극의 운명을 가진 아이들이 이 절대 수준의 개념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8. 나폴리와 로마로 가는 길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길에 처음으로 멈춘 곳은 말타 섬이었다. 여기서 예수클라우두스라 이름하는, 풀이 죽고 낙심한 젊은이와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친구는 자살(自殺)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마스커스 서기관과 이야기를 마치자, 말했다. “나는 대장부처럼 인생에 부딪치리이다. 겁쟁이 노릇은 끝났나이다. 내 친족에게 돌아가서 모두 다시 시작하리이다.” 얼마 안 되어 그는 견유학파의 열심 있는 전도자가 되었고, 다음에는 로마나폴리에서 그리스도교를 선포하는 일에 베드로와 함께 손을 잡았다. 베드로가 죽은 뒤에, 그는 계속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도했다. 그러나 말타에서 그를 북돋아 준 사람이, 그가 나중에 세상의 구원자라고 선포한 예수였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했다.

시라큐스에서 한 주를 꼬박 보냈다. 여기에 멈춘 동안에 주목할 사건은, 타락한 유대에즈라를 돌이킨 것이었다. 그는 예수와 그 동반자들이 묵은 여인숙을 경영했다. 에즈라예수의 접근에 마음이 끌렸고, 이스라엘의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도와 달라고 예수에게 부탁했다. “나는 아브라함의 참된 아들이 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을 찾아낼 수 없나이다”하고 말하면서 절망을 하소연했다. 예수는 대답했다. “참으로 하나님을 찾아내고 싶다면, 그 소망 자체가, 네가 이미 그를 찾아냈다는 증거이라. 너의 어려움은 하나님을 찾아내지 못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니, 아버지가 이미 너를 찾아냈음이라. 너의 어려움은 단지 하나님을 모르는 데 있느니라. 예레미야기에서 이렇게 말함을 읽지 못하였느냐? ‘너희는 나를 찾겠고, 마음을 다하여 나를 찾을 때, 나를 발견하리라’ 또 한편, 바로 이 선지자가 이렇게 말하지 않느냐? ‘나는 내가 주인 것을, 나를 아는 마음을 너희에게 주리라. 너희는 내 백성에 속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너는 성서(聖書)1에서 또한 이런 말씀을 읽지 못하였느냐?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었으되, ‘그는 사람을 내려다보며, 누구라도, 나는 죄를 범하고 옳은 것을 곡해하였고, 그것이 내게 유익하지 못했도다 하면, 그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의 혼을 어두움에서 구하시겠고, 그는 빛을 보리라.’” 에즈라하나님을 혼에 넘치도록 발견했다. 나중에 이 유대인은 부유하고 개종한 어느 그리스인과 제휴하여, 시라큐스에서 첫 그리스도 교회를 세웠다.

메시나에서 하루만 멈췄지만 과일 행상을 하는 어린 소년의 일생을 바꾸기에는 길고도 남았다. 예수는 과일을 샀고, 한편 그에게 생명의 빵을 먹였다. 소년은 예수의 말씀과 친절한 눈빛을 결코 잊지 않았다. 소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예수는 말했다. “부디 잘 가라, 아이야, 어른으로 자라기까지 용기를 가져라, 몸을 키운 다음에, 또한 어떻게 혼을 키우는가 배우라. 하늘의 내 아버지가 함께 계시고, 네 앞에 가리라.” 이 소년은 미트라교의 신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그리스도교로 바꾸었다.

마침내 그들은 나폴리에 이르렀고, 목적지 로마로부터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고 느꼈다. 고노드나폴리에서 사업 거래가 많이 있었고, 예수가 통역자로서 요구되는 시간을 제외하고, 그와 가니드는 여가를 도시를 찾아보고 뒤지는 데 보냈다. 가니드는 곤경에 빠진 듯한 사람들을 찾아내는 데 재빨라졌다. 이 도시에서 많은 빈곤을 보았고, 자선금을 많이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거리의 거지에게 동전을 주고 나서, 예수가 멈춰 그 사람에게 위로하는 말을 하려 하지 않았을 때, 예수가 하신 말씀의 뜻을 그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는 말했다. “네 말의 뜻을 파악할 수

없는 자에게 어찌하여 말을 낭비하느냐? 아버지의 영은 아들 될 능력을 가지지 않은 자를 가르치고 구할 수 없느니라.” 예수가 말한 것은 그 사람이 정상의 정신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 영적 인도에 반응할 능력이 모자란다는 뜻이었다.

나폴리에서는 아무런 뚜렷한 경험이 없었다. 예수와 그 젊은이는 도시를 샅샅이 뒤지면서 수백 명의 어른과 아이들에게 많이 빙그레 웃어서 명랑한 기분을 퍼뜨렸다.

여기서부터 카푸아를 거쳐서 로마로 갔고, 카푸아에서 사흘 동안 머물렀다. 아피아 길을 따라서, 짐을 실은 짐승들 곁에서, 로마를 향하여 계속 여행했고, 세 사람 모두가 제국의 애인(愛人), 전 세계에서 최대의 도시를 구경하려고 조바심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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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여기서 성서는 구약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