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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어린시절 초기

뉴징검다리 2010. 2. 10. 08:59

제 123 편

예수의 어린 시절 초기

베들레헴에서 머무른 동안에 생긴 불안정한 상태와 불안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에 안전히 도착하기까지 마리아는 아기에게 젖을 떼지 않았고, 거기서 이 집안은 정상 생활을 하려고 정착할 수 있었다. 그들은 친척들과 함께 살았고, 도착한 뒤에 얼마 안 되어 요셉이 일자리를 잡아놓자 그는 가족을 넉넉히 부양할 수 있었다. 그는 몇 달 동안 목수로서 고용되었고, 그 때 공사 중이던 한 공공 건물에 고용된 큰 무리의 노동자들의 우두머리 자리로 승진되었다. 이 새로운 경험은 그들이 나사렛으로 돌아온 뒤에, 그에게 계약 공인(工人)과 건축자가 되는 생각을 품게 했다.

예수가 어쩔 수 없던 유아기에 이 처음 몇 해 동안 내내, 마리아는 아이의 복지를 위태롭게 하거나 어떤 면에서도 땅에서 그의 사명을 방해할까 싶은 무슨 일이 닥칠까 두려워 오랫동안 늘 지켰다. 그 여자보다 제 아이에게 더 헌신한 어머니는 없었다. 예수가 어쩌다 있게 된 집에는 그의 나이 또래에 다른 두 아이가 있었고, 가까운 이웃에는 그 자신과 나이가 충분히 가까운 다른 여섯 아이가 있어서 그들은 괜찮은 놀이 동무가 되었다. 처음에 마리아예수를 곁에 가까이 두고 싶어했다. 그 여자는 그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뜰에서 놀라고 버려 두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했지만, 요셉은 친척들의 도움을 얻어서, 그러한 과정은 예수가 그 나이 또래 아이들에게 적응하는 법을 배우는 유익한 체험을 빼앗으리라고 설득했다. 부당하게 감싸고 특별히 보호하는 그러한 계획이 그에게 자기를 의식하고 얼마큼 자기 중심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서, 마침내 마리아는 약속의 아이를 어떤 다른 아이하고도 똑같이 자라도록 버려 두는 계획에 찬성했다. 비록 이 결정(決定)에 승복했어도, 그 여자는 작은 꼬마들이 집 근처나 뜰에서 놀고 있는 동안에 언제나 경계하는 것을 일로 삼았다. 그가 아기였던 이 때와 어린 시절에 아들의 안전을 위해서 마리아가 가슴 속에 지녔던 짐은 오로지 사랑 많은 어머니가 알 수 있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들이 머무르던 두 해 동안 내내, 예수는 튼튼했고, 줄곧 정상으로 자랐다. 몇 동무와 친척들을 빼고, 아무도 예수가 “약속의 아이”인 것에 관하여 귀띔을 받지 않았다. 요셉의 친척들 가운데 하나가 멤피스에 있는, 아득한 이크나톤의 후손인 몇 친구들에게 이것을 떠벌렸다. 이들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조그만 무리의 지지자들과 함께 요셉의 친척인 후원자의 궁전 저택에서 모였고, 이것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기 얼마 전에 나사렛 가족에게 작별을 알리고 아이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기회에, 모여든 친구들은 히브리 성서(聖書)의 그리스어 번역판의 완전한 사본(寫本) 하나를 예수에게 드렸다. 그러나 요셉마리아에집트에 남아 있으라고 멤피스알렉산드리아의 친구들이 청하는 것을 마침내 물리칠 때까지, 유대인의 이 성스러운 기록의 사본은 요셉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지지자들은 운명의 아이가 팔레스타인에 있는 어떤 지정된 곳보다도,

알렉산드리아의 주민으로서 훨씬 더 크게 세계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설득은 헤롯이 죽었다는 소식을 받은 뒤에, 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떠나는 것을 얼마 동안 늦추었다.

요셉마리아는 그들의 친구 에즈레욘에 속하는, 요파로 가는 배를 타고 마침내 알렉산드리아를 떠났고, 기원전 4년 8월말에 요파에 도착했다. 그들은 바로 베들레헴으로 갔고, 그들이 거기에 남아야 하는가 아니면 나사렛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친구와 친척들과 의논하느라고 거기서 9월 한 달을 꼬박 보냈다.

마리아다윗의 도시,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자라야 한다는 생각을 결코 통째로 버린 적이 없었다. 요셉은 아들이 이스라엘의 임금 같은 구원자가 되리라는 것을 정말로 믿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이 정말로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 그가 다윗의 자손으로 간주되는 것은 선조(先祖)들 가운데 하나가 다윗 혈통의 후손에 입양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리아는 물론, 다윗의 도시다윗 왕좌를 이어받을 새 후보자가 자랄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장소라고 생각했지만, 요셉아켈라우스보다 그의 형제, 헤롯 안티파스에게 운을 맡기는 것을 더 좋게 여겼다. 그는 유대 땅의 베들레헴이나 어느 다른 도시에서 아이가 안전할까 크게 두려워했고, 갈릴리에 있는 안티파스보다, 아켈라우스가 아버지 헤롯의 위협적인 정책을 추구할 가능성이 더 많으리라고 추측했다. 이 모든 이유 외에도, 요셉은 아이를 기르고 교육하기에 더 좋은 장소로서 갈릴리를 더 좋아한다고 거리낌없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마리아의 반대를 물리치는 데는 3주가 걸렸다.

10월 1일이 되어서, 그들이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요셉마리아와 모든 친구를 설득했다. 따라서, 기원전 4년 10월초에 베들레헴을 떠나서 나사렛을 향했고, 리다스키토폴리스의 길을 거쳐 갔다. 그들은 어느 일요일 아침 일찍 떠났고, 마리아와 아이는 새로 산, 짐 싣는 짐승에 올라탔으며, 한편 요셉과 따라오는 친척 남자 다섯은 걸어갔다. 요셉의 친척들은 그들끼리만 나사렛까지 여행하도록 버려 두지 않았다. 그들은 예루살렘요단 강 유역을 지나서 갈릴리로 가기가 두려웠고, 서쪽 통로도 외로운 두 나그네와 나이 어린 아이에게 아주 안전하지는 않았다.

1. 나사렛으로 돌아와서

길 떠난 지 나흘째에, 일행은 목적지에 안전히 이르렀다. 그들은 나사렛 집에 아무런 통지 없이 다다랐다. 그 집은 3년이 넘도록, 요셉의 결혼한 형제들 가운데 하나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는 정말로 그들을 보고 놀랐다. 아주 조용히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요셉의 가족도 마리아의 가족도, 그들이 알렉산드리아를 전에 떠났다는 것조차 몰랐다. 이튿날 요셉의 형제는 가족을 옮겼고, 마리아예수가 태어난 뒤에 처음으로, 자기 집에서 생활을 즐기려고 작은 가족과 함께 정착했다. 한 주도 채 안 되어서, 요셉은 목수(木手)로서 일자리를 얻었고,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나사렛으로 돌아왔을 때 예수는 3살, 2개월쯤 되었다. 그는 이 여행을 모두 매우 잘 견디었고, 건강이 아주 좋았으며, 뛰어다니고 즐길 수 있는 자기 터를 가진 것에 아이다운 기쁨과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놀이 친구들과 가졌던 관계를 몹시 서운해하였다.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길에, 갈릴리 친구와 친척들 사이에서 예수가 약속(約束)의 아이라는 말을 퍼뜨리는 것이 현명하지 않으리라고 요셉마리아를 설득했다. 그들은 이 문제를 아무에게도 입밖에 내지 않도록 삼가기로 찬성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이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예수가 네 살 되던 해 전부가, 몸이 정상으로 자라고 특별한 정신 활동이 있는 기간이었다. 그 동안 그는 야곱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또래의 이웃 소년에게 아주 가깝게 정이 들었다. 예수야곱은 언제나 같이 노는 데 행복했고, 자라서 훌륭한 친구요 충실한 동반자가 되었다.

나사렛 가족의 생활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사건은, 기원전 3년 4월 2일 이른 아침에, 둘째 아이 야고보가 태어난 것이다. 예수는 아기 동생을 하나 가진다는 생각에 기뻤고, 아기의 초기 활동을 그냥 지켜보려고 몇 시간이나 둘레에서 서성거리곤 했다.

바로 이 해 한여름에, 요셉은 마을 샘물에서 가깝고 카라반이 머무르는 마당 가까운 곳에 작은 작업장을 지었다. 이 뒤에 그는 일당(日當)으로 하는 목수 일이 거의 없었다. 그는 형제들 가운데 둘과 다른 몇 직공을 동료로서 두었는데, 이들을 일하러 밖으로 내보내고, 한편 그는 멍에와 쟁기를 만들고 다른 목공 일을 하면서 작업장에 남아 있었다. 그는 또한 가죽을 가지고, 또 밧줄과 캔바스를 가지고 얼마큼 일했다. 예수는 자라면서, 학교에 가지 않을 때, 어머니의 집안 일을 돕고, 카라반 인도자들과 지구의 사방(四方)에서 온 승객들의 대화와 잡담을 들으면서, 아버지가 작업장에서 일하시는 것을 구경하는 데 시간을 약 반반씩 보냈다.

이 해 7월, 예수가 네 살 되기 한 달 전, 카라반 여행자들과 접촉해서 생긴 악성 장(腸) 질환이 온 나사렛에 번졌다. 이 유행병에 예수가 노출되는 위험 때문에 너무 놀라서, 마리아는 두 아이를 싸들고 나사렛에서 몇 킬로미터 남쪽에, 사리드 가까이 메기도 길에 있는 동생의 시골 집으로 달아났다. 두 달이 넘도록 그들은 나사렛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예수는 농가(農家)에서 사는 이 첫 경험을 크게 즐겼다.

2. 다섯 살 되던 해 (기원전 2년)

나사렛으로 돌아온 뒤 1년이 얼마큼 넘는 동안에, 소년 예수는 개인적이고 진심으로 도덕적인 첫 결정을 내릴 나이에 이르렀다.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신성한 선물, 생각 조절자가 함께 거하려고 왔다. 이 조절자는 전에 마키벤타 멜기세덱과 함께 봉사한 적이 있고, 따라서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살던 초인간 존재의 육신화(肉身化)와 관련하여, 활동하는 체험을 얻었다. 이 사건은 기원전 2년 2월 11일에 일어났다. 예수는 수많은 다른 아이들보다 신다운 감시자가 오신 것을 더 의식하지 않았으며, 아이들은 그 날 이전과 이후에 그들의 지성에 깃들고, 이 지성을 궁극에 영답게 변화시키고 진화하는 불멸의 혼(魂)이 영구히 살아남게 하기 위하여 일하는 이 생각 조절자를 마찬가지로 받았다.

2월의 이 날, 미가엘이 아이처럼 육신화한 인격에 관련되는 바, 우주 통치자들이 직접 친히 감독하는 일은 끝났다. 그 때부터 육신화가 인간답게 펼쳐지는 동안 내내, 예수의 보호는 깃드는 이 조절자, 그리고 관련된 수호 천사들의 책임 밑에 맡겨지도록 정해졌고, 이것은 혹성 상관들의 지시에 따라서 어떤 분명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배치된 중도인(中道人)들의 보살핌으로 때때로 보충되었다.

이 해 8월에, 예수는 다섯 살이 되었고,1 따라서, 우리는 이 해를 그의 생애에서 (달력으로) 다섯 살 되는 해라 부르겠다. 이 해, 기원전 2년, 다섯째 생일이 되기 달포 전에, 예수는 여동생 미리암이 태어나서 몹시 즐거워했고, 여동생은 7월

11일 밤에 태어났다. 이튿날 저녁에, 예수는 여러 집단의 살아 있는 것들이 따로 된 개체로서 세상에 태어나는 방법에 관하여, 아버지와 함께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예수의 초기 교육에서 가장 값진 부분은 생각 깊고 탐구하는 물음에 대답하는 부모로부터 얻었다. 요셉은 소년의 수많은 물음에 대답하는 데 애쓰고 시간을 들임으로 어김없이 임무를 충실히 하였다. 다섯 살 때부터 열 살이 될 때까지, 예수는 줄곧 쏘아 대는 하나의 물음표였다. 요셉마리아는 물음에 반드시 대답할 수 있지는 않았지만, 그의 질문(質問)을 충분히 검토하고, 또한 그의 재빠른 머리가 내놓는 문제에 대하여 그가 만족스러운 해결에 도달하게 하려는 노력으로, 모든 다른 가능한 방법으로 그를 돕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사렛으로 돌아온 뒤에, 이들의 집은 바쁜 집이었고, 요셉은 새 작업장을 짓고, 사업을 다시 시작하는 데 특별히 골똘해 있었다. 그가 너무 바빠서, 야고보를 위해서 요람을 만들 시간을 낼 수 없었지만, 이것은 미리암이 태어나기 오래 전에 시정되었다. 그래서 가족이 아기를 보고 감탄하는 동안에, 미리암은 푹 싸여서 잠잘 침대, 아주 푹신한 아기 침대가 있었다. 아이 예수는 이 모든 자연스러운 정상 가정의 체험을 실컷 겪었다. 그는 꼬마 동생과 아기 여동생을 몹시 좋아했고, 동생들을 돌보는 데 마리아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시절의 이방 세계에는, 갈릴리유대인 가정(家庭)보다 더 낫게 지적·도덕적·종교적 훈련을 시킬 수 있는 집이 거의 없었다. 이 유대인들은 아이들을 기르고 교육하는 체계 있는 프로그람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어린아이의 생애를 일곱 단계로 나누었다:

1. 갓난아이, 첫날부터 여드렛날까지.

2. 젖 먹는 아이.

3. 젖뗀 아이.

4. 어머니에게 기대는 기간, 첫해 끝까지 지속된다.

5. 아이의 독립의 시작. 아들의 경우, 아버지가 그 교육을 책임진다.

6. 청년기의 소년과 소녀.

7. 젊은 남녀.

어머니가 다섯 살 되는 생일까지 아이를 훈련하는 책임을 지고, 다음에 그 아이가 소년이면, 그 때부터 계속 그 소년의 교육을 아버지가 책임지게 하는 것이 갈릴리 유대인들의 관습이었다. 그러므로 이 해에, 예수갈릴리 유대인 아이의 생애에서 다섯째 단계에 들어갔고, 따라서 기원전 2년 8월 21일에, 마리아는 그가 더 교육을 받도록 정식으로 요셉에게 넘겼다.

요셉이 이제 예수의 지성 및 종교 교육에 직접 책임을 지고 있지만, 어머니는 아직도 가정 훈련에 관심을 가졌다. 어머니는 집터를 완전히 둘러싸는 뜰의 벽 근처에서 자라는 덩굴과 꽃들을 알아보고 돌보는 일을 그에게 가르쳤다. 어머니는 또한 집의 지붕 위에 (여름 침실) 얕은 모래 상자들을 마련해 주었고, 예수는 그 안에서 지도를 그리고, 아람어, 그리스어, 나중에는 히브리어를 쓰는 초기의 연습을 많이 했는데,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자 그가 세 나라 말을 모두 술술 읽고, 쓰고, 말하기를 배웠기 때문이다.

예수는 신체적으로 거의 완전한 아이인 듯했고, 정신과 감정 면에서 줄곧 정상으로 진보했다. (달력으로) 다섯 살 되던 이 해의 후반에, 약한 배탈이 났는데, 이것은 처음으로 앓은 작은 병이었다.

요셉마리아는 가끔 맏아들의 앞날에 관하여 이야기했지만, 너희가 거기 있었더라면, 그 때 그 자리에서 오직 정상이고 튼튼하고, 구김 없지만 지나치게 따져 묻는 아이가 자람을 보았을 것이다.

3. 여섯 살 되던 해의 사건들 (기원전 1년)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서, 예수는 이미 아람어의 갈릴리 방언을 통달했고, 이제 아버지는 그에게 그리스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마리아그리스어를 거의 하지 못했지만, 요셉아람어와 그리스어를 모두 거침없이 썼다. 그리스어를 공부하는 교과서는 히브리 성서(聖書)의 사본―시편을 포함하여, 율법과 선지자가 들어 있는 완역판―이었고, 이것은 에집트를 떠날 때 그들에게 선사되었다. 온 나사렛그리스어로 된 성서의 완전한 사본(寫本)이 꼭 두 권 있었다. 목수의 가족이 이 중에 하나를 소유한 것은 요셉의 집을 사람들이 많이 찾는 장소로 만들었고, 예수가 성장함에 따라서, 그로 하여금 거의 끊임없이 줄선 열심 있는 학생들과 진지하게 진리를 찾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이 해가 가기 전에, 예수는 그 신성한 책을 알렉산드리아의 친구와 친척들이 그에게 주었다는 이야기를 여섯 살 되는 생일에 듣고 나서, 이 귀중한 사본의 관리를 맡았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그는 쉽사리 그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예수가 어릴 때 처음으로 받은 큰 충격은 아직 여섯 살이 채 안 되었을 때 일어났다. 그 소년에게, 아버지는―적어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함께―모든 것을 아는 듯 보였다. 그러니까 막 일어난 가벼운 지진(地震)의 원인을 아버지에게 물었을 때, “아이야, 나는 정말 모른다”하고 요셉이 말하는 것을 듣고 탐구심 있는 이 아이가 놀란 것을 상상해 보아라. 이렇게, 길고도 갈팡질팡하게 하는 그 각성이 시작되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예수는 땅에 있는 부모가 온통 지혜롭고 전지(全知)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요셉의 처음 생각은, 하나님이 지진을 일으킨다고 예수에게 일러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동안의 숙고는 그러한 대답이 더 많고 더욱 난처한 질문을 하도록 자극할 것이라고 그에게 훈계하였다. 어린 나이에도, 자연이나 사회의 현상에 관하여 예수가 묻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나 악마가 책임이 있다고 생각 없이 이야기해서 대답하기가 대단히 힘들었다. 유대 민족의 유행하는 믿음과 조화되게, 예수는 선한 영(靈)과 악한 영의 교리가 정신·영의 현상에 대한 가능한 설명이라는 신조를 오랫동안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보이지 않는 그러한 영향이 자연 세계의 물리적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아주 일찍부터 의심하게 되었다.

예수가 여섯 살이 되기 전, 기원전 1년 이른 여름에, 사가리아엘리자벳과 그 아들 요한나사렛 가족을 찾아보러 왔다. 그들의 기억으로는 첫 번인 바로 이번 방문에, 예수요한은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비록 방문객(訪問客)들이 며칠만 머무를 수 있었지만, 부모들은 아들들의 장래 계획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일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이렇게 그들이 정신이 쏙 빠져 있는 동안, 아이들은 집 꼭대기에서, 토막들을 가지고 모래 속에서 놀았고,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참으로 사내다운 방식으로 즐겁게 지냈다.

예루살렘 근처에서 온 요한을 만났기 때문에, 예수이스라엘의 역사에 비상한 관심을 비로소 나타냈고, 안식일 의식(儀式)과 회당의 설교, 되풀이해서 돌아오는 기념 축제의 의미에 관하여 아주 샅샅이 물었다. 아버지는 이 모든 시절의 뜻에 관하여 설명해 주었다. 첫째는 한겨울에 경축하여 불 켜는 것이었고, 첫날 밤에 촛불

하나로부터 비롯하여, 뒤이은 밤마다 하나씩 더해서, 여드레 동안 이어진다. 이것은 유다 마카비모세의 예배를 회복한 뒤에 성전을 봉헌한 것을 기념하였다. 다음에는 푸림의 이른 봄 축제, 즉 에스터와 그 여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축제가 다가왔다. 그리고 나서 엄숙한 유월절이 따랐고, 어른들은 될 수 있으면 이것을 예루살렘에서 지내고, 집에서는 한 주일 내내 아무런 누룩 넣은 빵도 먹지 않을 것을 아이들이 기억하곤 했다. 그 뒤에 첫 열매의 축제, 즉 추수가 다가왔고, 마지막으로, 가장 엄숙한 것은, 새해의 축제, 속죄(贖罪)의 날이었다. 이 가운데 어떤 경축일과 관습은 예수의 어린 머리에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그는 이것들을 깊이 생각하고, 그리고 나서 초막절의 기쁨에 흠뻑 빠졌는데, 이 때는 온 유대 민족이 해마다 있는 휴가 철, 그들이 바깥에서 나뭇잎에 덮인 초막에서 텐트를 치고 즐거움과 쾌락에 빠지는 때였다.

이 해 동안, 요셉마리아예수가 드리는 기도에 관하여 곤란을 겪었다. 땅에서 아버지인 요셉에게 이야기하는 것과 아주 비슷하게 예수는 하늘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고집했다. 과 더 엄숙하고 경건한 형태로 교통하는 것으로부터 이렇게 벗어나는 것은 부모에게, 특히 어머니에게, 조금 마음 상하는 일이었지만, 그의 태도를 바꾸도록 설득할 수 없었다. 그는 가르침받은 대로 기도를 드리곤 했지만, 다음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와 그냥 잠깐 이야기”하기를 고집했다.

이 해 6월에 요셉나사렛에 있는 작업장을 동생들에게 넘기고, 정식으로 건축자로서 일에 들어갔다.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가족의 소득은 3배가 넘게 늘어났다. 요셉이 죽기까지, 나사렛 가족은 결코 다시 가난의 뼈저림을 느끼지 않았다. 가족은 점점 더 불어났고, 그들은 과외 교육과 여행에 많은 돈을 썼지만, 언제나 요셉의 늘어나는 소득이 커지는 경비와 발걸음을 맞추었다.

다음 몇 해 동안, 요셉나사렛과 그 근처에서 많은 건축 일 뿐 아니라, 가나, (갈릴리의) 베들레헴, 막달라, 나인, 세포리스, 가버나움, 엔도르에서 상당히 일을 했다. 야고보가 어머니의 집안 일을 돕고 어린아이들을 돌볼 만큼 자랐을 때, 예수는 아버지와 함께, 둘러싼 이 여러 도시와 마을까지, 집을 떠나서 자주 여행했다. 예수는 날카롭게 관찰하는 눈이 있었고, 집을 떠난 이 여행(旅行)으로부터 실용적 지식을 많이 얻었다. 사람, 그리고 사람이 땅에서 사는 방법에 관하여, 부지런히 지식을 쌓고 있었다.

이 해에 예수는 가족의 협동과 가정 훈련(訓練)의 요구에 대하여 격한 감정과 힘찬 충동을 조절하는 데 크게 나아졌다. 마리아는 사랑이 많은 어머니였지만, 꽤 엄한 훈육자였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요셉예수를 더 크게 통제했는데, 이는 소년과 함께 앉아서, 가족(家族) 전부의 복지와 평안을 고려하여, 징계로서 개인의 욕구를 줄이는, 진정한 근본적 이유를 넉넉히 설명하는 것이 버릇이었기 때문이다. 예수에게 형편을 설명했을 때, 그는 언제나 부모의 소망과 가족의 규칙에 총명하게, 기꺼이 협조했다.

남는 시간의 상당한 부분은―집 근처에서 어머니가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을 때―낮에는 꽃과 식물(植物), 밤에는 별을 공부하는 데 쓰였다. 잘 정돈된 이 나사렛 가정에서 보통 잠잘 시간이 훨씬 지난 뒤에, 그는 드러누워서 놀라워하며 별이 보이는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성가신 습성을 나타냈다.

4. 일곱 살 되던 해 (서기 1년)

이 해는 정말로 예수의 일생에서 사건이 많은 해였다. 1월 초에 갈릴리에서 큰 눈보라가 닥쳤다. 60센티미터나 깊이 눈이 내렸는데, 예수가 일생 동안 본 가운데 가장 큰 눈이었고, 1백 년 동안에 나사렛에서 가장 많이 쌓인 것 중의 하나였다.

예수의 시절에 유대인 어린이의 놀이 생활은 제한된 편이었다. 아이들이 나이 먹은 사람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고 심각한 짓을 하면서 노는 때가 너무 흔했다. 아이들은 결혼식과 장례식에서 놀았고, 이런 의식을 매우 자주 보았으며, 그것들은 아주 볼 만했다. 아이들은 춤추고 노래를 불렀지만, 후일의 아이들이 그렇게 많이 즐기는 것과 같은, 조직된 경기(競技)가 거의 없었다.

예수는 한 이웃 소년과, 나중에는 동생 야고보를 데리고, 가족의 목수 작업장 먼 구석에서 놀기를 좋아했고, 거기서 대패 밥과 나무토막을 가지고 신나게 놀았다. 안식일에 금지된 어떤 종류의 놀이가 무슨 해악이 있는가 언제나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예수는 반드시 부모가 바라는 것에 순응하였다. 그는 유머와 놀이를 즐길 능력이 있었고, 그의 시절과 세대의 환경에서 그 능력은 표현할 기회가 거의 마련되지 않았지만, 열네 살까지 거의 항상 명랑하고 밝았다.

마리아는 집에 인접해 있는 동물 우리 꼭대기에 비둘기장을 두었고, 비둘기를 팔아서 나오는 이익을 특별한 자선 기금으로 썼다. 예수는 십일조(十一租)를 떼어 낸 뒤에 그 기금을 관리했고 그것을 회당의 책임자에게 넘겼다.

이 때까지 예수에게 생긴 유일한 정말 사고(事故)는 캔바스 지붕이 있는 침실로 이끄는 뒤뜰의 돌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것이다. 이것은 생각지 않게 동쪽으로부터 7월의 모래 폭풍이 부는 동안에 일어났다. 휘몰아치는 가는 모래를 실은 뜨거운 바람이 보통 비오는 철에, 특히 3월과 4월에 불었다. 그러한 폭풍을 7월에 만나는 것은 드물었다. 그 폭풍이 닥쳤을 때, 예수는 하던 버릇대로 집 꼭대기에서 놀고 있었는데, 이는 건조한 철의 대부분 동안 여기가 익숙한 놀이 방이었기 때문이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굴러 떨어졌을 때, 모래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았다. 이 사고가 있은 뒤에, 요셉은 계단 양쪽에 난간을 만들었다.

이 사건을 방지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현세에 보호하는 중도자들, 즉 1차 중도자 하나와 2차 중도자 하나가 그 아이를 지키는 데 배치되었는데, 이들이 소홀한 탓으로 돌릴 수 없고, 수호 세라핌의 책임이라 할 수도 없었다. 다만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요셉엔도르에 가서 없는 동안에 일어난 이 하찮은 사고는 마리아의 머리 속에 아주 큰 걱정을 일으켰고, 그래서 그 여자는 지혜롭지 못하게, 몇 달 동안 예수를 아주 가까이 곁에 두려고 했다.

하늘 성격자(性格者)들은 물질적으로 일어나는 일, 물리적 성질을 가진 보통 일에 멋대로 간섭하지 않는다. 보통 상황에는 오로지 중도인(中道人)이 운명의 남녀의 몸을 지키기 위하여 물질 조건에 간섭할 수 있고, 특별한 상황에서도 이 존재들은 오직 상관(上官)의 특정한 명령에 복종해서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

이것은 캐묻기 좋아하고 모험을 좋아하는 이 소년에게 나중에 생긴 그런 하찮은 사건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적극적인 소년의 보통 아동기와 소년기를 그려본다면, 너희는 예수의 소년(少年) 시절에 관해서 제법 정확한 생각을 가질 수 있을 터이고, 그가 부모, 특히 어머니에게 얼마나 많이 걱정을 끼쳤는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사렛 가족의 넷째 식구 요셉이 서기 1년 3월 16일, 수요일 아침에 태어났다.

5. 나사렛에서 보낸 학교 시절

이제 예수는 일곱 살이었고, 회당(會堂) 학교에서 유대인 아이들이 공식 교육을 시작하기로 된 나이였다. 따라서, 이 해 8월에 나사렛에서 파란 많은 학교 생활에 들어갔다. 이미 이 소년은 두 나라 말, 아람어와 그리스어를 거침없이 읽고 쓰고 말했다. 이제 히브리어를 읽고, 쓰고, 말하는 과제를 익혀야 했다. 앞에 닥친 새로운 학교 생활에 그는 참으로 열심이었다.

3년 동안―열 살이 될 때까지―그는 나사렛 회당의 초등 학교를 다녔다. 이 3년 동안 그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대로, 율법서2의 기초를 공부했다. 다음 3년 동안, 상급 학교에서 공부했고, 신성한 율법의 더 깊은 가르침을 큰 소리로 되풀이하는 방법으로 외웠다. 열 세 살 되던 해에 이 회당 학교를 졸업했고, 교육받은 “계명의 아들”로서 회당장들은 그를 부모에게 넘겼다―그 때부터 이스라엘 공동체의 책임 있는 시민(市民)이다. 이 모든 것에는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에 참석하는 것이 뒤따랐다. 따라서 그는 아버지·어머니를 동반하여 그 해에 처음으로 유월절에 참석했다.

나사렛에서 생도들은 반원(半圓)을 지어 마루에 앉았고, 한편 선생, 즉 하잔, 그 회당의 교직자는 그들을 마주 보고 앉았다. 레위기에서 시작하여 다른 율법서들의 공부로 넘어갔고, 선지자와 시편(詩篇)의 공부가 뒤따랐다. 나사렛 회당은 히브리어로 된 성서의 완본 하나를 소유했다. 열두 살이 되기 전에는 성서밖에 아무 것도 공부하지 않았다. 여름 몇 달 동안에는, 수업 시간이 크게 짧아졌다.

예수는 일찍 히브리어를 통달했고, 아무런 탁월한 방문자가 나사렛에 어쩌다 머무르고 있지 않을 때, 젊은이로서, 정식 안식일 예배에 회당에서 모인 충실한 사람들에게 히브리 성서를 읽어 달라고 자주 부탁을 받곤 하였다.

물론, 이 회당 학교들은 교과서가 하나도 없었다. 가르칠 때, 하잔은 한 마디 말하고, 한편 생도들은 한 목소리로 따라서 되풀이하곤 했다. 기록된 율법서를 가까이할 수 있을 때, 학생은 큰 소리로 읽고, 항상 되풀이하여 자기의 과목을 공부하였다.

다음에, 공식 학교 공부에 덧붙여,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아버지의 수선(修繕) 작업장을 드나드는 동안에, 예수는 지구의 사방(四方)으로부터 온 인간 성품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는 더 나이 들었을 때, 카라반들이 쉬고 음식을 먹으려고 샘물 가까이 머무르는 동안, 그들과 자유로이 섞였다. 그리스어를 거침없이 말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카라반 여행자와 안내자들과 이야기하는 데 거의 어려움이 없었다.

나사렛은 카라반이 경유하는 지점이요 여행의 십자로(十字路)였고, 인구는 대체로 이방인이었다. 동시에 그 도시는 유대인의 전통 율법을 자유롭게 풀이하는 중심지로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갈릴리에서는 유대 땅에서 관습이었던 것보다 더 자유롭게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섞였다. 갈릴리에 있는 모든 도시 가운데, 이방인들과 접촉한 결과로서 더러워지는 두려움에 근거를 둔 사회적 제한을 나사렛유대인들

은 가장 자유롭게 풀이했다. 이러한 조건이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속담이 예루살렘에서 생기게 하였다.

예수는 주로 집에서 도덕 훈련과 영적 교양을 받았다. 지적 교육과 신학(神學) 교육의 대강은 하잔으로부터 확보하였다. 그러나 참 교육―생활의 어려운 문제들과 씨름하는 실제 시험을 위한 머리와 가슴의 장비―는 동료 인간들과 섞임으로 얻었다. 동료 인간들, 젊은이와 늙은이, 유대인과 이방인과 이렇게 가까이 지낸 관계가 그에게 인류(人類)를 알 기회를 주었다. 예수는 사람들을 샅샅이 이해했고, 헌신하는 마음으로 사랑했다는 뜻에서 그는 많이 교육받은 것이다.

회당에서 보낸 시절 동안 내내, 그는 명석한 학생이었고, 세 나라 말에 정통했기 때문에 크게 유리했다. 예수가 학교에서 과정을 마치는 계제에, 나사렛 하잔은 그가 “소년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보다 “예수의 파고드는 물음으로부터 더 배웠다” 생각한다고 요셉에게 소견을 말했다.

공부 과정 전체를 통해서, 예수는 회당에서 정식 안식일(安息日) 설교로부터 많이 배우고 큰 영감을 얻었다. 안식일 동안 나사렛에서 멈추는 저명한 방문자들에게 회당에서 연설하라고 요청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자라면서 그는 유대인 세계 전체에서 많은 위대한 사상가, 또한 정통 유대인이라고 하기 어려운 숱한 사람이 견해를 펼치는 것을 들었는데, 이것은 나사렛 회당이 히브리 사상(思想) 및 문화의 진보된 자유로운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일곱 살에 학교에 들어갔을 때 (이 때 유대인들은 의무 교육법을 막 시행했다) 생도들이 자기의 “생일 구절,” 즉 공부하는 기간을 통해서 계속 그들을 안내할 일종의 황금률을 고르는 것이 관례였고, 이에 대하여 그들은 열세 살 때 졸업식에서 흔히 연설했다. 예수가 고른 구절은 선지자(先知者) 이사야에 있었다: “주 하나님의 영이 내게 다가오시니, 주가 내게 기름을 부으셨음이라. 그는 온유한 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싸매고, 포로가 된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영적으로 갇힌 자를 풀어 놓으라고 나를 보내셨도다.”

나사렛히브리 국가의 24 사제 중심의 하나였다. 그러나 갈릴리 사제들은 유대의 서기관·랍비들보다 전통적 율법을 해석하는 데 더 자유로웠다. 나사렛에서 그들은 또한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관하여 더 자유로웠다. 따라서 요셉이 안식일 오후에 걸으려고 예수를 데리고 나가는 것이 관습이었고, 집 가까이 있는 높은 언덕에 오르는 것이 가장 좋아하는 산보(散步)였는데, 거기서 그들은 온 갈릴리를 둘러볼 수 있었다. 북서쪽으로, 맑은 날에, 바다까지 이어지는 갈멜 산의 긴 줄기를 볼 수 있었고, 여러 번 예수는 아버지가 엘리야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는 길게 줄지은 첫 히브리 선지자들 가운데 하나이며, 이 선지자들은 아합을 꾸짖고 바알의 사제들을 폭로했다. 북쪽으로 헤르몬 산이 웅장한 광채 속에서 눈 덮인 꼭대기를 보이며 지평선을 혼자 차지했고, 위쪽 비탈의 거의 900미터는 만년설로 하얗게 빛났다. 동쪽으로 멀리, 요단 강 유역을 알아볼 수 있었고, 그 너머 멀리 모압의 험한 산이 놓여 있었다. 남쪽과 동쪽에도, 해가 대리석 벽을 비추었을 때, 원형(圓形) 극장과 허세부리는 성전들과 함께, 데카폴리스그리스·로마 도시들을 볼 수 있었다. 태양이 지는 것을 향하여 머뭇거릴 때, 서쪽으로 먼 지중해에서 항해하는 선박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방으로부터 예수는 카라반들이 나사렛을 들락날락하며 길을 가는 동안에 그들의 행렬을 지켜볼 수 있었고, 남쪽으로 길보아 산과 사마리아를 향해 뻗는, 넓고 기름진 에스드랠론 평야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먼 경치를 보려고 고지까지 오르지 않을 때, 그들은 시골 길을 통해서 거닐었고, 철 따라 다채로운 기분에 젖은 자연을 공부했다. 가정에서 받은 훈련은 별도로 하고, 예수가 아주 어릴 때 받은 훈련은 자연(自然)과 함께 경외하고 공감하는 접촉을 가진 것과 상관이 있었다.

여덟 살이 되기 전에, 그는 나사렛의 어머니와 젊은 여자들 모두에게 알려졌고, 이들은 샘물 가에서 그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샘물은 집에서 멀지 않았고, 마을 전체에서 접촉하고 잡담(雜談)하는 사회 중심의 하나였다. 이 해에, 예수는 가족 송아지의 젖을 짜고 다른 동물을 돌보는 일을 배웠다. 이 해와 이듬해에, 또한 치즈 만드는 것과 직물 짜기를 배웠다. 열 살이 되었을 때, 그는 베틀 다루기에 솜씨가 있었다. 예수와 이웃 소년 야곱이, 흐르는 샘물 가까이에서 일하던 도공(陶工)과 좋은 친구가 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나단의 솜씨 좋은 손가락이 도공의 바퀴 위에서 진흙으로 모양 짓는 것을 구경했을 때, 여러 번 그들 둘은 자라서 도공이 되기로 결심했다. 나단은 소년들을 무척 좋아했고, 장난칠 진흙을 주어서, 여러 가지 물건과 동물의 모양을 만드는 데 경쟁하라고 제안해서 그들의 창조하는 상상력을 자극하려고 했다.

6. 그가 여덟 살 되던 해 (서기 2년)

이 해는 학교에서 흥미 있는 해였다. 예수는 비범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부지런한 생도였고, 반에서 상급 3분의 1에 속했다. 공부를 아주 잘 했기 때문에, 달마다 한 주는 출석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 주간을 그는 보통 어부인 삼촌과 함께 막달라 가까이 갈릴리 바다의 해안가나, 또는 나사렛에서 8킬로미터 남쪽에 있는 다른 삼촌(어머니의 형제)의 농장(農場)에서,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는 그의 건강과 안전에 대해서 지나치게 불안해했어도, 집을 떠나는 이 여행에 차츰 마음을 놓게 되었다. 예수의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은 모두 그를 몹시 좋아했고, 이 해와 바로 뒤 몇 해 동안, 달마다 있는 이 방문 기간에 그와 사귐을 맡아놓으려고 그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경쟁이 따랐다. 삼촌의 농장에서 (아기였던 때 뒤로) 처음 한 주 동안의 체류는 이 해, 1월에 있었다. 갈릴리 바다에서 첫 한 주간의 고기잡이 경험은 5월에 있었다.

이 무렵에, 예수다마스커스에서 온 한 수학 선생을 만났는데, 새로운 수(數) 기술을 배우면서, 몇 해 동안 수학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수·거리·비율에 대하여 날카로운 감각을 개발했다.

예수는 동생 야고보를 아주 좋아하기 시작했고, 이 해 끝이 되어서는 그에게 알파벳을 비로소 가르쳤다.

이 해에 예수는 낙농품을 하프 수업과 바꾸도록 주선했다. 그는 음악적인 것은 무엇이나 특별히 좋아했다. 나중에는 어린 동료들 사이에서 노래하는 데 관심을 불러일으키려고 무척 애썼다. 열한 살이 되었을 때 솜씨 좋은 하프 연주자였고, 특별한 해석과 유능한 즉흥 연주로 가족과 친구들 접대하기를 아주 즐거워했다.

예수는 학교에서 부러울 만한 진보를 계속했어도, 부모나 선생들에게는 만사가 순조롭지는 않았다. 그는 과학과 종교, 특히 지리학·천문학에 관해서, 사람을 쩔쩔매게 하는 질문을 줄곧 많이 퍼부었다. 팔레스타인에 어째서 건조한 기간과 비오는 기간이 있는가 찾아내겠다고 특별히 고집하였다. 여러 번, 그는 나사렛요단 강 유역 사이의 큰 기온 차이에 대한 설명을 추구했다. 그는 다만, 총명하지만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그런 질문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셋째 동생 시몬이 이 해, 서기 2년 4월 14일, 금요일 저녁에 태어났다.

2월에, 예루살렘의 랍비 학원에서 선생 나호르예수를 지켜보려고 나사렛으로 왔는데, 그는 비슷한 임무를 띠고 예루살렘 가까이, 사가리아의 집에 들린 적이 있었다. 그는 요한의 아버지가 부추겨서 나사렛으로 왔다. 처음에는, 예수의 솔직함, 전통 아닌 방법으로 종교적인 것을 말하는 데 얼마큼 충격을 받았지만, 그것을 히브리인의 배움과 문화의 중심으로부터 갈릴리가 떨어져 있는 탓으로 돌리고, 그는 유대인 문화의 중심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는 장점을 누릴 수 있는 예루살렘으로 예수를 데려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셉마리아에게 조언했다. 마리아는 찬성하려고 반은 설득이 되었다. 맏아들이 유대인의 구원자, 메시아가 되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요셉은 망설였다. 예수가 자라서 운명의 사람이 되리라고 똑같이 확신했지만, 그 운명(運命)이 무엇이 될 것인가 깊이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이 어떤 위대한 사명을 땅에서 이루리라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나호르의 조언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는 예루살렘에서 머무르라는 제의가 지혜로운가 더욱 묻게 되었다.

요셉마리아 사이에 이 의견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나호르는 그 문제 전체를 예수 앞에 펼쳐 놓자고 요청했다. 예수는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고, 요셉마리아, 그리고 이웃인 석공(石工) 야곱과 의논했는데, 그의 아들은 가장 좋아하는 놀이 친구였다. 그리고 나서 이틀 뒤에, 부모와 조언자들 사이에 그러한 의견 차이가 있으며, 자기가 그러한 결정에 책임질 능력이 있다고 느끼지 않고, 이쪽이든 저쪽이든 자기가 꼭 해야 한다고 느끼지 않으니까, 전체 상황을 보아서, 그는 마침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와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그 대답에 대해서 완전히 확실하지는 않지만, 집에서 “내 아버지·어머니와 함께” 집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차라리 느낀다, “다만 내 몸을 보고 내 머리 쓰는 것을 지켜볼 수 있어도 나를 도저히 참으로 알 수 없는 낯선 사람들보다, 나를 극진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들은 모두 놀랐고, 나호르예루살렘으로 갈 길을 재촉하였다. 예수가 집을 떠나는 주제를 다시 고려하기까지는, 여러 해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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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여기서 나이는 서양식으로 따진다. 2. 구약을 토라 (모세 5경), 네빔 (선지자), 케투빔으로 (기타) 나누어 율법은 첫 부분을 언급한다.